김옥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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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玉斗
1938년 8월 18일 (86세)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경주(慶州)#.
1938년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에서 태어났다. 목포상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과를 중퇴했다.[1] 이후 박정희 정권 때 김대중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활동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고문, 투옥을 경험하였다. 1980년 신군부의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때에도 연루되어 고문당하고 투옥되었다. 그러면서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하려 하였으나 한화갑과 같이 검찰로부터 피선거권이 없다는 통보를 받아 출마가 좌절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3년 김대중의 사조직 민주연합청년동지회(약칭 연청)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영권, 유인학 등과의 공천 경쟁에서 승리하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라남도 장흥군-영암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내에서 노무현 후보를 따르는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권노갑, 한화갑 등과 함께 동교동계 1세대로 꼽힌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동교동계 가신인 권노갑 · 한화갑 · 남궁진 · 최재승 · 설훈 · 윤철상과 함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면 집권기간내내 청와대와 행정부 임명직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여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실제 이들 7명은 이 원칙을 지켜서 청와대, 행정부, 산하 공공기관, 공기업 등 대통령 임명직으로는 가지 않았다. 대신 선출직인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는 계속 출마하였다.
김대중이 야당 시절 선거에 출마할때마다 경호업무를 담당하였다. 오랜기간 경호 업무를 담당하면서 나름 노하우가 쌓였는지 1997년 대선 때는 경호업무 지원차 나온 일선경찰들에게 경호요령을 전수할 정도였다고. 이때문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한때 대통령경호실장으로도 거론되기도 했다.[2]
2012년에는 오랜 동지였던 한화갑에게 ‘나의 동지이자 친구인 화갑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라는 제하에 “한때 ‘리틀 DJ(김대중 전 대통령)’로까지 불린 자네가 이제와서 이럴 수가 있는가” # 라는 편지를 남기며 새누리당 행을 비판하기도 했다.[3]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을 지내다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당시 국민의당으로 넘어갔었는데, 2018년 현재는 국민의당의 후신인 바른미래당 (안철수계 중심)이나 민주평화당 (호남계 중심), 어느 쪽에도 몸담고 있지 않고서 김대중평화센터 이사를 맡고 있다.
이후 2020년 12월 28일에 더불어민주당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이석현, 이종걸, 원혜영 등 여러 다선 의원들과 함께 고문으로 위촉되었으나 동교동계 출신 인물이다 보니 여러 부분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다. 단 김옥두 전 의원의 경우 이미 이해찬 당대표 시절이던 2020년 2월에 복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金玉斗
1938년 8월 18일 (86세)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경주(慶州)#.
2. 생애
1938년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에서 태어났다. 목포상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과를 중퇴했다.[1] 이후 박정희 정권 때 김대중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활동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고문, 투옥을 경험하였다. 1980년 신군부의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때에도 연루되어 고문당하고 투옥되었다. 그러면서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하려 하였으나 한화갑과 같이 검찰로부터 피선거권이 없다는 통보를 받아 출마가 좌절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3년 김대중의 사조직 민주연합청년동지회(약칭 연청)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영권, 유인학 등과의 공천 경쟁에서 승리하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라남도 장흥군-영암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내에서 노무현 후보를 따르는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권노갑, 한화갑 등과 함께 동교동계 1세대로 꼽힌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동교동계 가신인 권노갑 · 한화갑 · 남궁진 · 최재승 · 설훈 · 윤철상과 함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면 집권기간내내 청와대와 행정부 임명직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여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실제 이들 7명은 이 원칙을 지켜서 청와대, 행정부, 산하 공공기관, 공기업 등 대통령 임명직으로는 가지 않았다. 대신 선출직인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는 계속 출마하였다.
김대중이 야당 시절 선거에 출마할때마다 경호업무를 담당하였다. 오랜기간 경호 업무를 담당하면서 나름 노하우가 쌓였는지 1997년 대선 때는 경호업무 지원차 나온 일선경찰들에게 경호요령을 전수할 정도였다고. 이때문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한때 대통령경호실장으로도 거론되기도 했다.[2]
2012년에는 오랜 동지였던 한화갑에게 ‘나의 동지이자 친구인 화갑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라는 제하에 “한때 ‘리틀 DJ(김대중 전 대통령)’로까지 불린 자네가 이제와서 이럴 수가 있는가” # 라는 편지를 남기며 새누리당 행을 비판하기도 했다.[3]
2.1. 정계 은퇴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을 지내다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당시 국민의당으로 넘어갔었는데, 2018년 현재는 국민의당의 후신인 바른미래당 (안철수계 중심)이나 민주평화당 (호남계 중심), 어느 쪽에도 몸담고 있지 않고서 김대중평화센터 이사를 맡고 있다.
이후 2020년 12월 28일에 더불어민주당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이석현, 이종걸, 원혜영 등 여러 다선 의원들과 함께 고문으로 위촉되었으나 동교동계 출신 인물이다 보니 여러 부분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다. 단 김옥두 전 의원의 경우 이미 이해찬 당대표 시절이던 2020년 2월에 복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4. 소속 정당
5. 둘러보기
[1] 이후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2] 또한 사적으로 김대중의 심부름을 도맡았고 김대중이 영국으로 잠시 떠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재밌는 에피소드로 홍어를 좋아하는 김대중을 위해 목포로 직접 내려간 적이 있었다. 큼지막한 홍어를 들고 흡족스레 선생님이 참 좋아하시겠네 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그 얘기를 들은 주인이 화들짝 놀라 김대중 총재를 일컫느냐 물었고 맞다고 하자 사실 칠레산이고 흑산도 홍어는 따로 있다며 돈도 안받고 바꿔주었다고 한다. 이 얘기는 참국민정부 시절 전 청와대 요리사 안유성도 증언한 바 있다.[3] 다만 실제 입당까지는 하지 않았다.[4] 신한당과 신설 합당[5] 민주당과 신설 합당[6]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7]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8]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9]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0]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