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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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2. 생애
1939년, 전라남도 무안군 흑산면 우이도리(현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에서 태어났다. 목포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권노갑과 함께 양갑으로 불리며[3] 김대중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신안군 선거구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피선거권이 없어 출마하지 못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신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전라남도 목포시-신안군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를,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신안군-무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참여경선에 출마했는데, 이인제와 함께 초반에 유력한 후보로 꼽혔었다. 정치적 기반을 민주당의 메인 지지층인 호남에 두고 있었던만큼 호남의 맏아들, 일명 '장자론'으로 이인제보다 한화갑 조직이 크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라운드인 제주에서 1위를 거두었으며 울산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런데 누구나 한화갑의 압승을 예상했던 광주에서 노풍에 휘말려 3위에 그치면서 경선을 포기했다.
그 후 당권을 잡는 쪽으로 선회, 새천년민주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대선 과정에서 노무현과 반목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건이 최후의 오찬. #. 결국 노무현과 갈라서고, 이후 노무현 탄핵에도 찬성표를 던진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안군-무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4선 고지에 올랐다. 그러나 당은 망했어요. 탄핵 열풍으로 인해 '''9석'''으로 쪼그라든 새천년민주당에서 비대위원장, 당 대표 등을 맡았으나, 2006년 12월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의 혐의로 집행유예 형이 확정되면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2008년 1월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되어 사면 복권되었다. 복권 후 새천년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에 합류했고,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한편 그의 지역구였던 신안군-무안군에는 김홍업이 국회의원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지역구를 광주광역시 북구 갑 지역구로 옮겨 출마를 희망했으나, 통합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통합민주당 강기정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한편 김홍업도 이윤석에게 밀려 낙선했다.
2010년 평화민주당을 재건한다며 동명의 정당을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나 제5회 지방선거에서 지방의원 하나도 당선시키지 못하면서 쫄딱 망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때 자신이 의정 활동을 했던 신안군-무안군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이윤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경재, 한광옥 등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다만 앞의 2명과 달리 새누리당 입당까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자유총연맹 총재가 된 김경재,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 한광옥과 달리 특별히 보상이 돌아온 건 없었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땐 앞의 2명과 달리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기 이후에는 주로 종편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시사평론을 하고 있는데, 2016년 1월엔 동교동계 탈당은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원폭투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오히려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2020년 4월 동교동계가 복당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해찬 대표는 이들의 총선 전 입당을 거부하였다.
2003년 이후로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과, 콘트라 번스 전 상원의원 등과의 교류를 위한 국제 의원교류 모임을 바탕으로 설립한 동서문화재단(2014년 이후 현재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로 있다.
3. 여담
- DJ와 더불어 당내에서 언변이 매우 뛰어난 정치인으로 인정받았다. 당에 괜찮게 써진 연설문이 있으면, 대개 김대중이나 한화갑 둘 중 한 사람이 썼다고 여긴 시절도 있었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도, 후에도 치밀하게 준비된 논변으로 지지자 및 주요 후원인들을 확보하는데 공이 많았다고 한다.
- 미국 방문 후 현지 관료 및 의원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리나라보다 중국이나 일본, 중동이 대화 소재로 더 많이 나오는 걸 들으면서, 미국의 외교정책 주안점이 일본, 중동문제, 그리고 나토에 쏠려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고 한다.
- 박근혜 정권 창출과정에서 한광옥과 함께 영입되어 호남(출신) 유권자 확보에 공을 세웠지만, 한광옥과 달리 신정부에 중용되지 않고, 종편에 출연해 시국을 논하고 조언하는 일이 자주 비춰졌다. 특히 정권 관련 고위관계자가 범법 사실로 구설수에 오를 때는 "죄를 지은 사람은 감옥에 가면 된다"며 원리원칙대로 정리할 것을 조언하기도 했다.
- 동교동계 시절의 동지이자 같은 전라도 사람이자 같은 청주 한씨였던 한광옥과는 사이가 그닥 좋지 않다. 종편 초창기 패널로 나와 김대중의 가신들을 언급할때, 박지원, 김경재, 권노갑 등에 대해는 한마디씩을 해도 한광옥에 대해 묻자 정색을 하면서 사실 같은 한씨에 동교동계로 서로 친하다고 생각들 하시지만 한광옥 의원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래서 할 말이 별로 없다.라고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새정치국민회의 시절부터 국회의원을 하며 알고지낸 기간이 얼마인데 저렇게 말한다는건 서로간에 불편한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2012년 대선 때 둘 다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것도 아이러니.
- 김대중과 고향도 지역기반도 사투리 섞인 말투도 비슷해서 리틀DJ라는 별명이 있었다.
4. 소속 정당
5. 선거이력
6. 둘러보기
7. 관련 문서
[1] 족보에는 문정공파 33세 재(在)자 항렬을 써서 갑재(甲在)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화갑(和甲)은 일명(一名)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2] 1638년(인조 16) 청주 한씨 한두식이 입도해온 후에 청주 한씨들이 세거하기 시작했다.#[3] 어느 정치 계파나 다 그렇겠지만, 동교동계라고 또 다 같은 동교동계는 아니다. 권노갑의 경우 김대중의 정치 초기부터 가신에 속했던 사람으로, 보통 동교동계 좌장이자 구파의 대표격으로 불렸고, 한화갑은 신파로 분류된다. 후에 새천년민주당 소장파들(이른바 천신정)의 정풍 운동 당시 이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신구파간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는 이후 16대 대선 과정까지 이어진다. 다만, 권노갑과 한화갑 개인 간 괴리는 이보다 뿌리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신한당과 신설 합당[5] 민주당과 신설 합당[6] 신당(새정치국민회의) 합류[7]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8]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9]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10] 피선거권 상실[11] 2006.12.22 의원직 상실 (불법 정치자금 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