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1. 개요
2. 김대중의 체포와 신군부의 사건 조작
3. 언론의 왜곡보도
4. 국제적인 김대중 구명(救命) 운동과 미국 망명
5. 귀국과 가택연금, 그리고 사면
6. 사건이후
7. 관련 항목
8. 참고 자료
9. 반대세력의 왜곡


1. 개요


1980년에 있었던 신군부내란음모 조작 사건.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는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북한의 사주를 받고 내란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1] 당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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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신군부는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플랜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당시 학생 운동권과 재야에서 비상계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국회에서도 비상계엄령 해제를 논의하는 본회의 개최를 시도하자 당시 전두환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비상계엄령의 확대를 획책했다. 비상계엄령이 해제되면 군인이던 전두환이 정치에 개입할 명분조차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계획은 전두환의 지시로 보안사에서 만든 소위 시국수습방안에 따른 것이었다. 시국수습방안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초헌법적 기관인 국보위 설치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고 신군부 집권에 방해가 될수 있는 학생 운동권과 재야 민주화 인사등에 대한 체포계획도 이미 수립되어 있었다. 전두환은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인 이학봉에게 지시하여 체포계획을 수립하게 했고 이학봉은 5.17 쿠데타 하루 전인 5월 15일 보고해 전두환의 최종 재가를 얻어냈다. 이때 체포대상자는 크게 두 부류로, 국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학생 운동권 인사들과 재야민주화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었고 이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김대중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서 공화당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었고 김종필이 핵심적인 인물로 꼽혔다.
김대중 본인도 위험을 감지했는지 5월 13일 기자회견에서 "북한 공산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 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하야 한다"라고 발표하여, 학생 운동권의 질서 유지를 당부했다. 5월15일 서울역 회군은 이런 김대중의 당부가 영향을 미쳤다는게 대체적인 견해다.
재야 민주화 운동단체인 국민연합은 5월 16일 성명을 발표하고 비상계엄령 해제와 전두환의 공직 사퇴, 명확한 정치일정 공개등을 요구했다. 당초 국민연합은 5월 18일까지 정부가 응답할 것을 촉구했으나 선언문 초안을 받아본 김대중은 국회에서 5월 20일에 계엄령 해제를 논의하는 본회의가 열리는 만큼 이를 5월 22일로 연기하도록 주문했고 계엄군에게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말라는 내용에 대해서는 내란음모로 몰아갈 우려가 있으니 삭제할 것을 권고했다. 이처럼 김대중은 신군부가 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명분을 주지않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었다.

2. 김대중의 체포와 신군부의 사건 조작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공식 발표되었고 신군부는 병력을 동원해 이미 작성된 검거대상자들을 체포하려 나섰다. 김대중은 학생, 노조의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수경사 헌병단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초 신군부는 김대중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소요를 사주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5월 18일, 광주가 신군부에 항거하자 이를 이용해 김대중을 내란음모를 획책했다고 몰아붙였다. 더 나아가 광주항쟁이 고조되자 전두환은 위기에 봉착했고,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3명이 "호랑이 꼬리를 잡다가 놓치면 다 잡아먹힌다"며 상황극복론을 펼쳤다. 이에 따라 광주항쟁을 김대중과 연계시키려는 작전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수사총책 이학봉 대령을 비롯해 김근수 중앙정보부 안정국장, 이종남 및 정경식 검사 등이 움직였고, 같은 날 정동년이 광주 보안부대 지하실로 끌려가 4월 13일에 김대중 자택을 방문했다는 방명록 내용 때문에 고문을 받고 진술서를 써야 했다.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한 죄책감으로 철제 숟가락으로 동맥을 절단하고 배를 찔러 자살하려다 감시원에게 발각됐고, 수사관들은 6월 3일에 진술서를 들고 김상현을 고문해 진술서에 서명토록 했다. 실제 5.18 민주화운동에서 광주의 학생운동권의 중심세력인 전남대 학생 지도부는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어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김대중이 배후에서 시위를 사주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신군부는 오직 자백만을 증거로해서 내란음모로 기소했다. 실제 신군부는 김대중을 비롯한 체포자들을 두 달 동안 육체적/정신적으로 혹독하게 고문해서 결국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자백을 얻어냈으며, 조사 광경도 전두환이 직접 TV모니터로 전부 지켜봤다. 그리고 구체적 증거없이 재판부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오늘날 같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얻은 것이 인정될 수 없지만 80-90년대만 해도 자백이 가장 중요한 증거로 여겨지던 풍토도 이에 한몫을 했다. 후술할 <남산의 부장들> 내용에 따르면, 김대중은 보안사에서 하루 18시간 동안 온갖 협박과 모욕을 당하며 수사를 받아야 했고, 예춘호는 고문으로 목소리가 변했고, 이문영은 군 침대 각목으로 수없이 맞아 1심 때까지 팔을 못 드는 등 온갖 잔혹한 사례가 많았다.
당사자들 증언증언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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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변호인의 변론변론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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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김대중에게 신군부로 협조해달라고 회유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 이후 보통군법을 거쳐 1981년 1월, 김대중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2]

3. 언론의 왜곡보도


신군부가 장악한 국내 언론들은 해당 사건을 '용공사건'으로 모는 한편,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형성에 열을 올렸다. 방송 쪽에선 KBS는 8월 2일 <한민통의 정체>, MBC는 9월 11일 <한민통과 김대중>이란 보도특집 프로그램을 각각 방영했고, 심지어 <경향신문>도 9월 11일자에 특집기사를 내보내 김대중을 '선동과 권모술수로 얼룩진 마키아밸리즘의 화신'으로 폄하했다. 이외 나머지 신문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약속 잘 뒤집는 거짓말쟁이'나 '계략, 선동의 명수', '대통령병 환자' 등으로 같이 폄하했고, 이는 호남을 제외한 전 국민에게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만 뇌리에 새기는 후폭풍을 낳았다.

4. 국제적인 김대중 구명(救命) 운동과 미국 망명


전두환은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할 기세였지만 국제사회는 김대중에 대한 구명을 촉구하면서 전두환을 압박했다. 그 당시 김대중은 이미 '''동아시아의 만델라''', '''동아시아의 민주화 운동의 거부'''로 알려져 있던 터였고, 최종판결시 남긴 최후 진술에서 "나는 먼저 죽지만 먼저 죽은 나를 생각해서 이 땅에서 다시는 정치보복이 없도록 해달라"라고 한 것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으로 김대중에 대한 동정여론이 확산되었다. 게다가 재판 과정에서 미국 국무부 법률담당 특보가 직접 참관하는가 하면, CIA 한국지부 관계자가 '''"우리는 김대중 씨에 대한 당신들의 고발이 매우 억지스럽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사실상 전두환 정권에 대한 경고를 했다.
이 와중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역시[3] 김대중의 사형을 막기 위해 와인버거 국방장관과 그레그 전 CIA 한국지부장[4]을 파견해 김대중을 구명할 것을 전두환에게 요구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도 김대중의 구명운동에 앞장섰으며 후에 미국 부통령이 된 앨 고어 하원의원도 김대중의 석방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두환에게 발송했다. 독일에서는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두 차례 서한을 보내 김대중을 선처해달라고 촉구했다.
이런 국제적인 압력에 전두환은 결국 김대중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시 20년형으로 감형.
레이건 대통령이 우회적으로 압력을 가하고[5] 심지어는 일본[6]까지도 북한과의 수교를 주장하면서 전두환을 압박하자 결국 1982년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김대중을 석방해 미국, 일본과의 외교관계 마찰을 막아야 한다는 건의를 하기에 이른다.[7] 평소 노신영의 혜안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던 전두환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1982년 광복절 특사에 김대중을 포함시킬 것을 검토했지만 군부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미국의 계속된 압력에 전두환은 노신영과 상의하여 김대중을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고, 노신영은 김대중의 아내 이희호를 안기부 안가로 불러서 설명했다.[8] 이를 전해들은 김대중은 미국에 갈 이유가 없다면서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으로 가기만 한다면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을 탄압하지 않겠다'''는 노신영의 제안을 듣고 나서야 마음을 돌리게 된다. 그리하여 1982년 12월 김대중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자유의 몸이 된다.
참고로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에 일본에서 벌어진 김대중 구명 운동이 잠깐 등장한다. 김대중 납치 사건도 같이 언급된다.

5. 귀국과 가택연금, 그리고 사면


그러나 1985년 1월 8일 김대중은 성명서를 통해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 의사를 밝힌다. 김대중의 주변 인물들은 2년 전인 1983년에 김대중과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필리핀의 민주 투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귀국하자마자 피살된 점을 상기하며 귀국을 말렸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비록 민주정의당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선거였지만 이 선거는 당시 민주 세력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9] 김대중은 귀국을 준비한다.
이에 대한 전두환의 반응은 당연히 극대노. 이를 반영하듯 1월 23일에는 최창윤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뉴욕 타임즈와의 회견에서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교도소에 재수감하여 잔여 형기를 집행하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문제는 이 당시 노신영 안기부장과 리처드 워커 주한 미국 대사가 김대중의 귀국 연기 + 한국 정부의 사면 조치를 놓고 조율중이었으나 전두환이 워커 대사와의 면담에서 일방적으로 김대중을 재수감시켜 버리겠다는 강경 발언을 해버린 것.[10] 한마디로 전두환이 대놓고 미국을 향해 도발을 한 셈인데, 이에 백악관이 청와대를 향해 내놓은 답은 '''"김대중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면 4월로 예정된 전두환의 방미 정상회담 일정을 취소할 수 있다." (!)'''는 경고. 결국 청와대쪽에서는 최창윤 비서관의 인터뷰가 개인 발언일 뿐이라면서 꼬리 자르기를 시전함과 동시에,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가택연금만 시키겠다고 물러섰으나 미국 국무부에서는 '''한국 내 민주주의 위기를 주제로 한 강연에 김대중을 초청하는 등''' 계속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마침내 1985년 2월 8일 김대중은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약 2년 만에 귀국했으며, 서울로 향하는 김대중의 곁을 수많은 미국인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미국인이 아니라 미국 양대 정당 소속 연방 하원의원인 토머스 폴리에타, 에드워드 페이언과 전 엘살바도르 주재 대사인 로버트 화이트, 전투적 무신론자로 유명한 언론인이자 평론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의 여러 미국 저명인사들이 '''미국 현지에서부터 김포국제공항 입국장까지 김대중을 에워싸고 이동'''한 것. 뿐만 아니라 주한 미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 김포공항에서 김대중의 신병을 확보하여 직접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가도록 백악관이 사전에 지시한 상태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이 혹시나 김대중을 암살하는 공작을 펼거라는 우려를 미국 인사들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내비친 것이며, 제 아무리 전두환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감히 미국의 저명 인사들을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안기부의 방해로 주한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김포공항에 제 때 도착하지 못했고, 김대중이 맞이한건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 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김대중을 미국이 보호하리라고 예상치 못한 안기부 요원과 경찰들이 '''미국 인사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면서까지''' 김대중 부부를 강제로 버스에 태워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갔고'[11] 이에 분노한 미국 인사들이 외신 기자들을 향해 '''"한국 경찰이 김대중을 때리면서 데려가는 걸 목격했다."'''(토머스 폴리에타), "우리한테까지 폭력을 휘두르는데 '''과연 3년 후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올 수 있겠나'''?"(로버트 화이트) 등의 인터뷰를 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특히 로버트 화이트는 '''전직 외교관'''으로 미국 내에서도 꽤 저명한 인사였는데, 바로 그 사람의 입에서 당시 한국이 사활을 걸다시피하며 준비 중이던 올림픽까지 엮은 비난이 나온 것에 대해 전두환 정권의 속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한편, 김대중이 미국으로 쫓겨난 사이 국내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고 있던 김영삼은 측근들과 함께 김대중을 마중나가려 했다. 그러나 김대중을 에워싸고 있는 미국의 저명 인사들을 상대로 막 나갔다시피, 당연히 상도동 김영삼 자택 앞에 경찰들을 배치하여 봉쇄한 탓에 결국 김영삼은 나갈 수가 없었다. 물론 분노한 김영삼이 경찰들을 향해 전두환 정권을 비난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단지 윗선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하수인이라는 점을 이해해주는 등의 여러 명언도 나왔다. 그래서인지 경찰들을 지휘하고 있던 간부들까지도 김영삼이 울분을 토로하는 내내 차마 고개를 못 들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당시 영상
참고로 이 때,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인 Newsweek가 1985년 2월 18일자 발행판의 표지 특집기사에서 김대중의 귀국을 다루며 붙인 제목이 그 유명한 'A Stormy Homecoming'(폭풍의 귀국)이었다. 뉴스위크가 기사에서 설명한 당시 귀국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한국 정부 당국은 김대중 씨와 부인, 그리고 미국인 고관들을 비행장의 출입 제한 구역으로 몰고 갔다. 거기서 50여명이 넘는 사복 요원들이 야당 지도자를 수행원들과 분리시켜 끌고 갔다. 그들은 미국인 몇 사람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김대중 씨를 엘리베이터에 처박았다. 김대중씨와 부인은 흰색 마이크로버스에 실려 공항 뒷길을 통해 자택으로 압송됐고 자택에 도착한 즉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

앞서 말했듯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 연방 의원이 신체적인 공격을 받은데다가, 안기부 요원들이 미국 대사관의 일정까지 방해한 것을 알게 되면서 엄청나게 열받았고, 이후 미국 대사관이 이원경 외무장관에게 항의하고 나중에는 미국 국무부까지도 직접 항의를 하면서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한미 관계가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그러나 이런 압력에도 김대중과 신한민주당은 4일 후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67석을 얻어 제1 야당으로 급부상, 이후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가 김대중의 사면 복권을 강력히 요구하고 전두환 정권 역시 지난 4년간의 통치 방식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감지하면서 김대중을 전격적으로 연금에서 풀어준다. 단, 형 집행정지 기간까지 면제하고 동시에 '''공민권을 회복하는 사면복권 조치'''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버티고 신한민주당이 한 달만에 결국 물러나면서 정치 활동은 여전히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이 국내에서 완전한 자유를 되찾은 건 1987년 6.29 선언 때나 되어서였다.

6. 사건이후


1995년,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당시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인사들이 재심을 받을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중에는 여러 이유로 재심을 미루다가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에 재심을 청구해 2004년 무죄선고를 받았다.무죄선고 뉴스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국 대사관은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금되고 가족들이 가택 연금돼 있던 1980년 12월 1일께 이희호 여사에게 생활비를 전달하고 면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외무부에 요청했으며, 전두환이 이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 연루된 인물들 중 대부분의 미필은 수감으로 제2국민역에 편입되었다.

7. 관련 항목



8. 참고 자료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현대사. 2003.

9. 반대세력의 왜곡


5.18 왜곡을 시도하는 이들은 이 사건도 같이 왜곡하고 있다.
  • "김대중이 실제 내란음모를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정부 권력의 힘으로 이를 은폐했다."
→ 우선 정부 권력의 힘으로 그걸 숨겼다는 논리 자체가 허술하다.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독재자들조차 과거 자신이 명령한 학살, 고문 등의 인권 유린을 완벽히 은폐하지 못하는데,[12] 그들보다 권력이 약한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과거 자신이 했던 만행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봐도 불가능하다. 법적으로 반대 세력을 악으로 몰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은 그저 행정부의 수장에 불과한데? 이는 전두환은 커녕 세계에서 내로라는 그 강철의 독재자 스탈린도 그 시대에 사진 및 영상 조작까지 해가며 덮었는데도 결국 못한 일이다.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 행정부의 수장이 아니라 국가기관 위에 군림하는 빅 브라더다.
또한, 대통령이 된 다음 권력의 힘으로 은폐했다고 하는데, 그럼 대통령 되기 전에는 은폐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진짜 김대중이 내란음모를 꾸몄다면, 대통령 선거 때 상대 후보 입장에서 이것만큼 김대중을 공격할 좋은 건수도 없다. 내란음모 건으로 '보세요, 이런 사람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합니다' 이렇게 물고 늘어지면서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당시 상대 후보 측에서는 내란음모의 ㄴ 자도 꺼내지 않았다. 즉, 김대중 내란음모 어쩌고는 김대중 반대파들도 정쟁의 건수로 안 쓸 정도로 허황된 소리란 뜻이다.
  • "1980년의 법원은 실제로 김대중이 내란음모를 했다고 판결했으며 상고심에서도 원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판결문을 보면 내란음모죄는 세부 계획이 없더라도 인정될 수 있고, 모든 자백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고 있으며, 원심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2번의 법적 판단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1980년의 판결은 정당하다."
→ 그 근거가 고문으로 만든 자백이니 판결의 근거부터가 틀렸다.
  • "고문받았다는 증언 자체를 신뢰할 수가 없다. 내란음모 사건의 김대중과 일당들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상황에서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증인들이 그 당시 고문이 있었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신뢰 있는 증언이라고 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내란음모 사건에서 다루는 증언은 1980년 당시에 했던 자백으로, 그 이후의 증언만으로는 1980년의 자백을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 애초에 내란음모 판결이 그 '고문받았다고 증언한 사람'의 자백을 근거로 판결한 것이다. 고문에 의한 자백이 이루어졌음을 부정한다면 마찬가지로 김대중의 내란음모 자체도 부정되게 된다.
또한 고문 여부와는 별개로 전두환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살벌한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아직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 기반이 무지할 때 군부 쿠데타로 순식간에 권력을 잡은 뒤 유신 이전까지는 선거를 통하여 당선되면서 정권을 유지했지만, 전두환은 애초에 군부조차도 하나회를 제외하면 정권 도둑질한 대머리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날을 세우고 있었고, 지식과 생활의 수준이 성숙한 국민들에게조차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하며 정권이 정통성과 기반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 이를 억누르기 위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망명하고 미국의 레이건를 만나고 오기 전까지 굉장히 살벌하게 탄압했다. 이 분위기라면 고문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라도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다.
  • "사형 판결을 받은 뒤 김대중은 해외로 도피하기 위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에게 반성문을 썼다. 이는 곧 자신의 모든 범행을 인정하며, 자신이 반대하던 그 독재자에게 자비를 구하는 행위인 것이다."
→ 위의 잘못된 판결에 의해 수형 생활 중이었던 피고인의 사정상 해당 반성문은 강요로 쓰여졌다고 보아야 하고, 강요로 쓰여진 반성문은 인정될 수가 없다. 오히려 정부 측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체면치레를 위해 석방되기 전에 반성문 한 장만 작성해달라. 언론에는 비공개로 할 테니 제발 좀 써달라."라고 구걸했었던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비공개 조건을 걸고 구걸하여 받아낸 반성문을 바로 언론에 공개하는 치졸한 짓까지 벌인 것이다.
  • "김대중은 실제로 예비 내각을 만들었다. 이 예비 내각 명단을 보면 교육, 경제, 통일, 노동 등 각 정부 부처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만일 김대중의 내란이 실현되었다면 이들은 각 부처의 장관이 되었을 것이다."
→ 민주제도연구소 명단은 있어도 예비내각 명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문화', '언론사회', '종교교육', '민족재생', '민주정치', '도의정치'와 같은 정부 부처는 존재할 수가 없고, 내각을 구성한다고 하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국방부'나 '법무부', '외무부'와 같은 부서는 보이질 않는다. 이 세 부서는 권력 장악을 위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부서인데도 말이다.
또한 참여인사 면면을 보자. 문익환 목사, 장을병 성균관대 교수, 송건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백낙청 서울대 교수, 서남동 목사, 탁희준 성대 교수 등등[13]... 명단을 훑어보면 80년대 재야세력 어벤져스라고 할만큼 삐까뻔쩍한 사람들이 많다. 제도권에 드러난 수준을 넘어서 제도권의 중심에 서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을 가진 것도, 군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내란이나 정부전복은 그냥 말로만 하는 게 아니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동이 누구였는지 생각해보자. 아니, 불과 6개월 전에 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잡은 게 누구였는지 생각해보자. 한마디로 주동세력으로 지목된 인물들은 학문적, 도덕적인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무력으로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를 몰아낼 힘은 전혀 없었던 사람들인 동시에, 사회의 기득권층으로서 급격한 무력봉기나 혁명이 일어나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내란을 기도했다고?
  • "그 당시 미국이나 일본 모두 김대중에 대한 사형 판결이 부당했다고는 하지 않았었다. 김대중에 대한 사형 판결은 정당한 법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것에는 양국 모두 동의하였다. 다만 김대중에 대한 사형은 너무 과하다는 것이 두 나라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김대중을 석방한 것이다."
→ 사실 관계를 오도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김대중에 대한 사형 판결의 정당성을 인정한 적이 없다.
  • "그 당시 북한은 김대중의 석방을 주장했다. 만일 김대중이 정말 결백하다면 왜 북한에서 김대중의 석방을 주장하였겠는가? 실제로 김대중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민통, 조총련과 같은 친북 단체를 동원하면서까지 김대중의 석방을 주장했던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북한의 선전선동 전술에 넘어가는 일이다. 북한에서 구명 운동을 해 봐야 역효과만 난다는 것은 북한 자신이 더 잘 아는 일일 것이다. 오히려 북한에서 이를 역이용하여 김대중을 사형시키려고 하는 것이었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의 뜻대로 움직일 뻔했던 위기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김대중의 자택이 있는 동교동과 김영삼의 자택이 있는 상도동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구역이라고 불릴만큼 경찰 병력이 몇 겹을 포위하고 둘러싸서 감시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그 당시의 만평 중에서도 강도에게 쫓기던 사람이 동교동 상도동으로 도망가자 강도가 쫄아서(...) 포기하고 갔다는 만화가 나올 정도. 거기서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면, 당시 대한민국 방첩은 물론 치안 경찰력이 모두 집중된 곳에서조차 북한의 지령이 들어갈 정도로 뚫린 형편없는 정권이라는 제 얼굴 침뱉기 주장밖에 안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내란음모를 획책하였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1] 그런데 정작 웃긴 건 전두환은 불과 1년 전에 12.12 군사반란이라는 내란을 잘만 일으켰다. 즉 자아비판인 셈.[2] 이때 김대중이 말한 최후 진술문은 문익환 목사의 아들 의근, 성근 형제가 재판 방청객들과 함께 기억해둔 내용을 취합해 복원했다고 한다.[3] 다만 김대중은 옥중에서 인권대통령 카터의 당선을 바랬지만, 레이건 당선 소식을 듣자 "신은 나를 버렸다"고 한탄했다. 사실 카터는 레이건에게 인수인계를 하면서, 김대중을 꼭 챙겨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사실을 김대중이 알 리가 없으니.. 훗날 김대중은 레이건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4]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의 직책. 이 때 김대중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그 결과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게 된다. 이후 1989년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5] 1981년 초 전두환이 백악관을 방문해서 한미정상회담을 했는데, 이 때는 물론이고 정상회담 개최 조건으로 레이건 대통령이 김대중의 석방을 언급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당시 미국 언론에서 전두환의 방미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안 보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 외에도 레이건은 전두환을 아예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모습 조차도 안 보였는데, 1985년 4월 한미정상회담 때 레이건에게 '''호헌 지지를 요청했다가 단박에 까였다고 한다(...)'''[6] 이때 일본의 보수 작가인 시바 료타로까지 스즈키 젠코 수상에게 "김대중 씨를 구해주시기 바랍니다."는 서한을 보내 김대중 구명운동에 동참했다.[7] 이 때 노신영은 외교를 줄다리기에 비유하며 전두환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힘들다고 줄을 놓아버리면 아예 줄다리기조차 못한다. '''즉 당장의 감정으로 김대중을 사형시켜버리면 한미관계는 그 날로 끝장나고,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임을 논한 것.'''[8] 제5공화국 드라마에 의하면, 노신영은 김대중이 더 이상 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냐면서 결심만 해준다면 김대중을 석방해서 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이희호를 설득했다. 또한 굳이 안기부 안가에 부른 것에 대해서도 '''보는 눈이 많다'''는 이유를 댔는데, 또 다시 군부가 반대하는걸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듯.[9]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로 치러지기 때문에 100% 군부가 장악하고, 당시에는 지방선거도 없는 상황이라 민주 세력이 유일하게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은 국회의원 선거뿐이었다.[10] 2016년 공개된 당시 외교 문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전두환과 워커 대사 사이에 정확히 어떤 발언이 오갔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주한 미국 대사관 측과 외무부 간에 주고 받은 대화 내용을 보면 최창윤 비서관의 발언 내용이 곧 전두환의 의중이라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 #[11] 전두환 정권 자체가 사실상 미국의 묵인으로 광주에서의 유혈 진압에도 불구하고 존립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함부로 미국에 개기는 행동은 절대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아마도 정부 관계자들은 이미 가택연금 외에 아무런 조치를 않기로 했으니 김대중이 귀국하는 즉시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하필 미국인들이 에워싸고 있으니 당황해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버린 듯.[12]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이 사건을 일으킨 전두환 역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진실을 숨기지 못했다.[13] 직책은 사건 당시 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