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1990년)

 

통일민주당

민주당

민주당
한겨레민주당
(개별 합류)
신정치개혁당
[image]
민주당
공식명칭
민주당 (民主黨 / Democratic Party)
창당일
1990년 6월 15일 (통일민주당에서 분당)
해산일
1991년 9월 16일 (민주당으로 신설합당)
선행조직
(3당 합당에 반대해서 분당)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 ~ 중도우파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대방로69길 7 (여의도동 44-73, 충무빌딩)
당 색
붉은색 (#DA2C43)
1. 개요
2. 역사
3. 역대 총재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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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옛 정당으로, 1년도 안 되는 독자 정당 시기와 활동 당시 약한 당세 등으로 인해 꼬마민주당으로 불렸다.

2. 역사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김광일, 장석화 의원 등 민주자유당으로의 3당 합당을 반대한 통일민주당 정치인들이 탈당하여 1990년 6월 15일 창당되었다.
이철, 박찬종무소속 의원들[1]이 합류하고 1990년 4월 진천군-음성군 보궐선거에서[2] 꼬마 민주당의 내천으로 당선된 허탁 의원까지 합류하면서 국회 의석 수는 8석이었다.
통일민주당의 직계를 자처하며 민주당으로 불러달라고 강조했다. 1990년 여론조사를 보면 개헌선을 차지한 민주자유당이나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과 지지율이 비슷한 수준이었고, 반년 후인 1991년 지방선거에서 14.3%를 득표해, 양당의 세가 강했던 호남, 대구직할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광역의원 21명을 당선시키며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3] 이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통일민주당 지지도(23.8%)의 절반 이상이었다.[4]
당시 유명 야구선수 출신인 최동원이 해당 선거에서 이 당의 당적으로[5] 부산직할시의원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훗날 보수정당으로 이적하는 김을동도 서울특별시의원으로 출마해서 당선돼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또 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에서 당직 생활을 해왔던 김원웅도 3당 합당 후 민자당을 탈당하여 여기에 합류했다. 공화당과 민정당에서만 쭉 당직 생활을 해왔던 김원웅이 민자당을 탈당한 것은 자신의 지역구였던 대전 동구 을에서 전현직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송천영윤성한이 3당 합당으로 동시에 민자당에 입당하게 되면서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기 때문이다. 3당 합당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창당한 꼬마 민주당이 김원웅을 받아들인 것에서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의 씁쓸한 단면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 특정 지역의 득표율에서 선전했다고 해도, 수도권과 대전 등에서 신민당과 민주당간의 단일화가 이루워지지 않아 표 분산이 대대적으로 이루워지면서 선전을 기대한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서 패배를 면치못했고, PK에서도 선전하기는 했지만 민자당의 조직력을 뛰어넘지 못했다. 결국 민자당이 11개 시도의회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야권분열에 따른 한계를 여실히 절감해야 했다. 결국 DJ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 민주당(1991년)으로 등장했다.
민주당계 정당을 대략적으로 DJ의 동교동계(신민주연합당계)와 꼬마민주계의 두 계파로 분류하기도 하며, 이 민주당을 열린우리당-친노-친문으로 이어지는 더불어민주당 주류계파의 역사적 뿌리로 보는 일도 있다. 물론 30년이 넘는 동안 이합집산을 거듭했기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분류는 아니지만[6], 노무현이라는 중심인물과 PK라는 공통된 지역적 기반으로 인해 기원으로 여겨지는 일이 많다.

3. 역대 총재




4. 관련 문서



[1]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평화민주당이 분열될 당시 야권의 통합을 주장하며 무소속을 택한 이들이었다. 흔히 꼬마민주당 의원 8명을 가리킬 때 허탁 의원 대신 홍사덕 의원을 끼워 넣는 경우가 있는데, 홍사덕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에서 낙선해 현역 의원이 아니었다. [2] 이 재보궐선거는 대구 서구갑과 진천-음성에서 치러졌는데 대구 서구갑에서 민자당 문희갑이 당선되었지만 과반에 못미치는 득표를 거두면서 3당 합당의 시너지 효과조차 못누렸고, 진천-음성은 기존 민정당에 우호적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지역임에도 허탁 후보가 당선되는데 성공했다.[3] 이 때 당선된 광역의원 중에 훗날 한나라당 창당에 합류해 장장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권오을이 있다.[4] 무소속이 22.4%를 득표했고,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이 불과 21.9%(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19.3%)를 득표한 것을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득표가 아니다. 여당인 민자당은 40.6%로 34.6%에서 불과 6% 증가했다. (이는 전체 정당 득표의 52.3%에 달한다.)[5] 이 당시 민주당 의원이던 김정길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에서는 인지도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동원이었기에 정치 입문을 고려하자 부산지역 내 지지 기반이 탄탄했던 민주자유당이 당연하게도 영입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최동원 스스로 3당 합당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내비치면서 민자당 입당을 거부했다고 한다.[6] 당장 이 당의 직계 후신은 국민의힘이다. 실제로 한나라당에 합류한 꼬마민주계 정치인들도 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