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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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오랫동안 그를 보좌했다. 그래서 동교동계의 좌장 또는 맏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오랫동안 민주당 쪽에 몸담아 왔지만, 당의 진로 문제를 놓고 문재인 당시 당대표와 갈등을 빚던 끝에 20대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을 떠나 국민의당으로 넘어가 국민의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민주평화당 창당에 참여해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가 2019년 민주평화당 분당이후 당 고문단과 집단탈당했다.
1930년,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송천리에서 태어났으나 곧, 가족들과 함께 전라남도 목포부로 이주했다.[5]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홀어머니가 곧바로 재혼을 해 이부형제(아버지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자랐다고 한다.
목포상업고등학교, 동국대학교 경제학과(49학번)를 졸업하였다. 이후 목포여자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6][7]
김대중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자 김대중의 개인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김대중의 계파인 동교동계에서 한화갑과 양갑으로 불리며 정치 활동을 했다.[8]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 때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조작 때 고문을 포함하여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서 민주정의당 최영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패배 후 김대중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치러진 1993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같은 해 지역구를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에게 물려주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경북 안동을지구당위원장과 경상북도지부장을 맡았다. 정권교체 이후 안동을지역구 현역의원이던 권정달의 영입에 나섰고 권정달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로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9] 그러나 1997년 한보그룹 비리로 기소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이 되었지만 2001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를 하게 되면서 정동영을 필두로 일어난 정풍운동에 밀려서 결국 사퇴해야 했다.
권노갑은 DJ의 모든 조직과 자금을 관리할 정도로 DJ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대선 과정 중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김대중 정부에서 어떤 직함도 없었지만 당정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특히 DJ의 자금까지도 모두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파워는 실로 막강했고, 자연스럽게 동교동계 전체에서 김대중 대통령 다음가는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이런 위세를 보여주는 일화로 1월 1일에 권노갑 집 앞에는 1000명이 넘는 인파가 새해 인사를 하러 몰려가 권노갑의 집으로 향하는 일대의 도로가 모두 마비될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으며. 권노갑의 아들과 큰딸 결혼식에는 수천여명의 하객이 몰려 발을 디딜 틈이 없었고, 화환이나 축의금을 일절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어떻게든 그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려는 하객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이러한 막강한 실세인 그도 결국 2002년 진승현 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정치적 몰락을 하고 만다. 당시 내용을 요약하면 권노갑 의원이 국가정보원 차장인 김은성을 통하여 불법자금을 받은 것으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진승현 게이트는 2004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구속은 되었지만 정치적 배려로 2004년 말부터 일시적 형집행정지 2005년 9월에는 형집행정지로 두달간 형집행 정지로 일시 석방 되었고, 2006년 열린우리당의 적극적 건의로 특별감형, 2007년 2월 특별 사면으로 출소하였다.
이 후 2선으로 물러나 민주당과 그 후신 새정치민주연합의 상임고문[10] 으로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후계자인 문재인 전 대표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동교동계와 달리 문재인 대표 시절 재보선 지원유세에도 다녔으나 결국 2016년 1월 민주당을 탈당, 안철수 지지를 선언했다. 2017년에는 국민의당 상임고문으로 있었다.
2018년 야권발 정계개편에서 안철수 대표의 통합에 반발하여 이훈평, 정대철과 같은 동교동계 원로들과 함께 민주평화당의 창당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줄 알았으나 이해찬 대표가 유시민의 알릴레오에 출연해 총선 전에는 입당을 불허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권노갑 의원이 국가정보원 차장인 김은성을 통하여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하지만 2003년 열린 항소심에서 무죄를 판결받고 석방되었다. 2004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에게서 금강산 카지노, 면세점 허가를 비롯한 대북 사업 전반에 대한 지원을 요청받고 현대상선에서 비정상적으로 나온 200억원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2003년 대검 중수부에 구속되어 재판을 받다가 2004년 10월 8일 징역 5년에 추징금 200억원의 기소 확정 판결을 받았다.
200억은 대체로 1인이 뇌물로 받기엔 너무 큰 돈이라 (그것도 현금으로) 정치자금이 양성화되어 있지 않던 당시 여당의 정치자금으로 썼다는 평이었고, 여권에선 개인적인 비리로 보지 않아서 그다지 비판 받지 않았으나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사용용처에 대해서 수사하라며 크게 반발했었다. 여담으로 당시 수사했던 대검 중수부장은 안대희.
구속은 되었지만 정치적 배려로 2004년 말부터 일시적 형집행정지 2005년 9월에는 형집행정지로 두달간 형집행 정지로 일시 석방 되었고, 2006년 열린우리당의 적극적 건의로 특별감형, 2007년 2월 특별 사면으로 출소했다.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오랫동안 그를 보좌했다. 그래서 동교동계의 좌장 또는 맏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오랫동안 민주당 쪽에 몸담아 왔지만, 당의 진로 문제를 놓고 문재인 당시 당대표와 갈등을 빚던 끝에 20대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을 떠나 국민의당으로 넘어가 국민의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민주평화당 창당에 참여해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가 2019년 민주평화당 분당이후 당 고문단과 집단탈당했다.
2. 생애
1930년,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송천리에서 태어났으나 곧, 가족들과 함께 전라남도 목포부로 이주했다.[5]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홀어머니가 곧바로 재혼을 해 이부형제(아버지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자랐다고 한다.
목포상업고등학교, 동국대학교 경제학과(49학번)를 졸업하였다. 이후 목포여자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6][7]
김대중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자 김대중의 개인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김대중의 계파인 동교동계에서 한화갑과 양갑으로 불리며 정치 활동을 했다.[8]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 때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조작 때 고문을 포함하여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서 민주정의당 최영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패배 후 김대중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치러진 1993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같은 해 지역구를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에게 물려주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경북 안동을지구당위원장과 경상북도지부장을 맡았다. 정권교체 이후 안동을지역구 현역의원이던 권정달의 영입에 나섰고 권정달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로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9] 그러나 1997년 한보그룹 비리로 기소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이 되었지만 2001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를 하게 되면서 정동영을 필두로 일어난 정풍운동에 밀려서 결국 사퇴해야 했다.
권노갑은 DJ의 모든 조직과 자금을 관리할 정도로 DJ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대선 과정 중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김대중 정부에서 어떤 직함도 없었지만 당정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특히 DJ의 자금까지도 모두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파워는 실로 막강했고, 자연스럽게 동교동계 전체에서 김대중 대통령 다음가는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이런 위세를 보여주는 일화로 1월 1일에 권노갑 집 앞에는 1000명이 넘는 인파가 새해 인사를 하러 몰려가 권노갑의 집으로 향하는 일대의 도로가 모두 마비될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으며. 권노갑의 아들과 큰딸 결혼식에는 수천여명의 하객이 몰려 발을 디딜 틈이 없었고, 화환이나 축의금을 일절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어떻게든 그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려는 하객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이러한 막강한 실세인 그도 결국 2002년 진승현 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정치적 몰락을 하고 만다. 당시 내용을 요약하면 권노갑 의원이 국가정보원 차장인 김은성을 통하여 불법자금을 받은 것으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진승현 게이트는 2004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구속은 되었지만 정치적 배려로 2004년 말부터 일시적 형집행정지 2005년 9월에는 형집행정지로 두달간 형집행 정지로 일시 석방 되었고, 2006년 열린우리당의 적극적 건의로 특별감형, 2007년 2월 특별 사면으로 출소하였다.
이 후 2선으로 물러나 민주당과 그 후신 새정치민주연합의 상임고문[10] 으로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후계자인 문재인 전 대표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동교동계와 달리 문재인 대표 시절 재보선 지원유세에도 다녔으나 결국 2016년 1월 민주당을 탈당, 안철수 지지를 선언했다. 2017년에는 국민의당 상임고문으로 있었다.
2018년 야권발 정계개편에서 안철수 대표의 통합에 반발하여 이훈평, 정대철과 같은 동교동계 원로들과 함께 민주평화당의 창당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한...줄 알았으나 이해찬 대표가 유시민의 알릴레오에 출연해 총선 전에는 입당을 불허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3. 논란
3.1. 진승현 게이트
권노갑 의원이 국가정보원 차장인 김은성을 통하여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하지만 2003년 열린 항소심에서 무죄를 판결받고 석방되었다. 2004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3.2. 현대그룹 관련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에게서 금강산 카지노, 면세점 허가를 비롯한 대북 사업 전반에 대한 지원을 요청받고 현대상선에서 비정상적으로 나온 200억원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2003년 대검 중수부에 구속되어 재판을 받다가 2004년 10월 8일 징역 5년에 추징금 200억원의 기소 확정 판결을 받았다.
200억은 대체로 1인이 뇌물로 받기엔 너무 큰 돈이라 (그것도 현금으로) 정치자금이 양성화되어 있지 않던 당시 여당의 정치자금으로 썼다는 평이었고, 여권에선 개인적인 비리로 보지 않아서 그다지 비판 받지 않았으나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사용용처에 대해서 수사하라며 크게 반발했었다. 여담으로 당시 수사했던 대검 중수부장은 안대희.
구속은 되었지만 정치적 배려로 2004년 말부터 일시적 형집행정지 2005년 9월에는 형집행정지로 두달간 형집행 정지로 일시 석방 되었고, 2006년 열린우리당의 적극적 건의로 특별감형, 2007년 2월 특별 사면으로 출소했다.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둘러보기
[1] 태어난 직후에 가족이 당시 막 개항했던 목포로 이주하여 거기서 자랐기 때문에 사실상 목포 출신으로 구분된다.[2] 원적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감문리.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40621/64490008/1[3] 급사중공파 33세손이며,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4] 여담으로 1969년, 그의 나이 40세에 결혼했으며(이 결혼이 재혼인지는 알 수 없음), 부인인 박현숙과의 나이차이는 14살이다.[5] #. 그래서인지 김홍일에게 지역구를 물려주고 비례대표로 이적한 1996년에 잠시 국민회의 안동 을 지구당위원장을 맡기도 했다.[6] 그래서인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최근에는 동시통역사에 도전한다든가, 동시통역대학원 과정에 갔다든가 하는 소식들이 있었다.[7] 동교동에서 외신들과의 인터뷰에서는 통역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여느 정치 계파나 다 그렇겠지만, 동교동계라고 해서 또 다 같은 동교동계는 또 아니다. 권노갑의 경우에는 김대중의 정치 초기부터 가신에 속했던 사람으로, 보통 동교동계의 좌장이자 구파의 대표자로 불렸고, 한화갑은 신파로 분류된다. 후에 새천년민주당 정풍 운동 당시 이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신구파간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는 16대 대선 정국까지도 이어진다. 다만, 권노갑과 한화갑 개인의 사이는 좀 더 이전부터 벌어졌다고 알려져 있다.[9] 권노갑 회고록 중 [10] 다만,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일종의 명예직으로, 사실상 정계 일선에서는 물러난 상황이며, 언론에서도 보통 은퇴했다고 표현한다.[11] 1997년 한보사태로 인한 의원직 상실[12] 민정당과 신설 합당[13] 민주당과 신설 합당[14]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5]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16]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17]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8]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