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군

 

'''조선 인조의 손자'''
'''경안군
慶安君'''

'''군호'''
경안군(慶安君)
'''본관'''
전주(全州)
'''이름'''
회(檜)
'''초명'''
석견(石堅)
'''생부'''
소현세자
'''생모'''
민회빈 강씨
'''자녀'''
2남
'''생몰
기간
'''
'''음력'''
1644년 10월 5일 ~ 1665년 9월 22일
'''양력'''
1644년 11월 3일 ~ 1665년 10월 22일
1. 개요
2. 생애
3. 후손
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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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3남이다.

2. 생애


아버지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어머니 민회빈 강씨마저 1646년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별궁에 안치되었다가 인조의 미움을 받아 반역죄 누명을 쓰고[1] 사약을 받아 죽는다.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은 셈.
이후 큰형 이석철(당시 12세), 작은형 이석린(당시 8세)과 함께 4세의 어린 나이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다. 그러나 석철은 결국 1648년 음력 9월 18일 제주도에서 장독으로 죽었고, 석린도 같은 해 음력 12월 23일, 병으로 사망했다. 다행히도 석견은 형들과는 달리 살아남아 1650년 효종 즉위 때 강화도로 옮겨갔다가, 1656년에 귀양에서 풀려났다.[2]
이석철과 이석린의 죽음에는 상당히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소현세자가 죽자 청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용골대가 소식을 듣곤 "소현의 아들들은 어떻게 됐습니까?"라고 묻자, 김자점이 기겁하여 "앓다가 어린 놈 둘이나 죽었는뎁쇼?"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용골대는 "저런, 그럼 '''살아남은 큰 아이는 우리가 청나라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습니다'''만?"이라고 요청하였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인조는 "석철을 청나라에 보냈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아?"라고 벌벌 떨고, 김자점은 "그냥 셋 다 죽었다고 할 것을, 내가 미쳤다고 이런 말 실수를 해서…"라고 후회한다. 결국 청의 추궁을 무릅쓰고 괜히 셋 다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여 용골대는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되었는지 이석철과 이석린이 잇달아 죽은 것이다. 인조는 이 사실을 알고는 "어떻게 둘이나 연달아 죽냐? 수상한데?"라고 나인들을 국문하여 법석을 떨었지만, 잠깐 뿐이었고 이석견의 유배를 절대 풀어주지 않았다.
인조 사후에도 이석견의 귀양살이는 계속되었다. 그래도 기존의 삼촌 효종, 사촌형 현종은 석견의 어머니 강빈에 대한 단호한 입장과 별개로, 조카 석견에겐 꽤나 우호적이어서 유배생활은 나아지기 시작했다.[3] 소현세자를 치료했던 당시 어의#s-2 이형익을 귀양보내며 이석견의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659년 윤 3월 4일, 이석견은 복권되어 경안군에 봉해졌다. 이젠 왕실의 중요 종친으로 나름 행색을 차릴 수 있었다. 특히 승헌대부라는 관직도 얻게 된다. 이때 허씨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허씨와 결혼한 경안군은 아들 2명을 두었다.
하지만 경안군은 오랜 유배 생활로 인해 겪은 고초와 스트레스 때문인지[4], 6년 후인 1665년에 온천으로 목욕을 가다가 병이 나서 실려온지 얼마 안 되어 22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병상 생활이 길었던 탓인지, 전라남도 순천시송광사에 경안군의 쾌유를 비는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했을 정도. #

3. 후손


지금까지 이어지는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는 '''모두 경안군의 자손이다.''' 소현세자의 장남(경선군), 차남(경완군)이 모두 유배 중 어린 나이에 죽었고 경안군만이 유일하게 성인까지 살아남아 후사를 이었기 때문이다.
부인 허씨와의 사이에서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 임성군 이엽(臨城君 李熀)을 두었다. 차남인 임성군은 큰형인 이석철의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후사를 보지 못하여, 형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密南君) 감(堪)을 '''또''' 양자로 들여서 소현세자파 - 장자공파의 대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소현세자파는 모두 3남인 경안군의 후손인 셈이다.
이 둘은 숙종의 치세 초반인 1679년에 "왕실의 종통(宗統)인 임창군과 임성군을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는 흉서(凶書)가 세간에 나도는 바람에 제주도에 유배당한다. 그러나 대접은 좋았다고 하며, 1684년에 풀려났고, 왕족으로서의 지위도 회복했다. 그러나 차남 임성군은 6년후 26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인좌의 난으로 유명해진 밀풍군은 임창군의 장남이다.[5]
당대에 통용되던 유교적인 가치로 보자면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집안이라서 그런지 실제로 그의 후손은 반란만 일어났다 하면 추대받는 바람에 여럿 죽어나갔다. 심지어 철종 대에도 그의 후손을 추대하려는 중인, 천민 중심의 역모가 있었다. 그럼에도 자손을 보전해 끝까지 살아남은 잡초같은 집안의 조상이라 하겠다. 그들을 대신해 왕위에 오른 효종의 직계들이 점점 손이 귀해지다 결국 단절되어 버린 것과 비교된다.[6] 아무튼 그렇게 살아남은 덕분에 고종 대에 이르러 이 집안은 완전히 복권되었다.
여담으로 그의 묘 근처엔 조선 왕족들의 묘가 많다. 근처에 태종원경왕후의 4남 성녕대군의 묘, 경혜공주와 그 남편 정종의 묘 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4. 창작물에서



[1] 조정 대신들은 반대했으나 인조가 크게 화를 내고 서슬을 보이자 이에 눌려서, 은혜를 베풀 것을 청하며 정작 중요한 점인 누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못했다. 기껏해야 이시백 정도가 "홍금적의를 입은 것은 부인의 성품으로 비단을 탐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모죄란 게 지극히 엄한 일인데, 추정으로 사람 죽이면 씁니까?"라고 변호한 정도다. 그러나 김자점은 "예, 강빈은 역적 맞습니다. 하는 꼴을 보니까 싹수가 노랗습디다."라고 인조의 궤변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2] 이때 넷째누이인 경녕군주와 다섯째 누이인 경순군주를 10년만에 다시 만난다.[3] 사실 효종이나 현종의 입장에선 강빈을 싫어하지 않아도 왕위 정통성 등의 이유 때문에 단호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강빈의 아들인 이석견을 우호적으로 대한 걸 보면 표면상의 갈등과는 별개로 내적으론 강빈 가족을 나쁘게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4] 석방되었을 때가 1656년이라서 10년만에 유배에서 벗어났다.[5]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족보가 꼬인 것이다. 형식적으로나마 장자공파(장남 이석철의 가계)가 있으므로 이쪽이 정통성을 가져야 하겠지만, 양자에 양자로 계승한 것에 불과하므로 실제로는 소현세자의 3남의 장남의 장남이 더 직계에 가까웠던것.[6] 임창군의 경우 아들이 밀풍군을 포함해 6남 5녀, 밀풍군은 5남 4녀를 두었는데, 이 때문인지 살아남은 듯하다. 반면 효종의 직계 후손들을 보면 대부분 아들이 1명 ~ 2명, 3명 이상 있다 해도 거의 요절하거나 역모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으니 점점 손이 귀해질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