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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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별궁 터. 신세계조선호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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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별궁'의 위치와 규모에 관련 도면
남별궁의 구성공관 도면
1. 개요
2. 여담


1. 개요


南別宮
한성부 남부 회현방,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06[1]일대에 있던 조선의 별궁.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결혼 해 살던 저택[2]으로 '소공주댁(小公主宅)'으로 불렀으며[3]
1583년(선조 16년)에 선조는 이 집을 크게 수리한 뒤 셋째 아들 의안군에게 주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서울을 점령하자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처음에는 종묘에 주둔하였다가 안좋은 일들이 연달아 생겨 다음 해 4월 서울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 곳으로 진을 옮겨 머물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 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10월 선조가 피란갔다 돌아온 이후 자주 이곳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관원들을 접견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에서 남쪽에 있는 별궁(왕이 때때로 머무는 장소), 즉 남별궁이란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 뒤에도 남별궁은 계속 역대 들이 중국 사신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되었기에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정조 때에는 빈객 접대와 연회 일을 맡아보는 관서인 예빈시(禮賓寺)를 이 남별궁 안으로 옮겨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 청나라 사신 덕패(德沛)가 현판을 쓴 명설루(明雪樓)가 있었고, 이 현판에는 칙사들이 지은 도 많이 새겨져 있었다. 뒤뜰에는 작은 정자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게 했고 영험이 있다고 전하는 거북을 세워 사신단의 무사함을 빌었다. 또한 동네 어귀에는 아름드리 통나무의 두 기둥을 세운 큰 홍살문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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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별궁 자리에 자리잡았던 원구단.
이후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선포가 계획되면서 기존의 사대를 상징하는 남별궁 자리에, 자주적으로 하늘제사를 지내는 원구단(圜丘壇)이 세워졌다. 중국과의 기존 관계를 청산한다는 의미였다. 원구단 완공 후 고종은 이 곳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1913년에 일본은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했다. 8.15 광복 이후에도 남아 웨스틴조선호텔 - 신세계조선호텔이 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2. 여담


  • 미국인 의사로 훗날 공사까지 지내는 호러스 뉴턴 알렌은 재동 제중원[4]의 2차 확장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86년(고종 23년) 8월에 외아문 독판서리 서상우를 통해 제중원을 남별궁으로 이전할 것을 요청했다. 병원이 너무 좁고, 인구 중심지와 너무 멀며, 그리고 전혀 위생적이지 못해 중요한 수술들을 안전하게 못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 요구만큼은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구리개[5] 쪽에 제중원 부지를 마련해 최대한 지원해주고 편의를 봐주었다.

[1] 구 지번주소로는 중구 소공동 87-1.[2] 경정공주의 남편은 개국공신 조준 의 아들 평양부원군 조대림이다.[3] 애초 현재 소공동이름이 이 '소공주댁'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소공주동'에서 유래한 것이다.[4] 현재 헌법재판소 부근 자리.[5] 현재 을지로 KEB외환은행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