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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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松鶴
1903년 7월 23일 ~ 1974년 6월 22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2. 생애
1903년 7월 23일 한성부 서서 마포계(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1] 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교외생으로 졸업했다.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용산구지부장·중앙상무위원·서울시지부 재정부장, 민족대표자대회 용산구선출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총선거대책위원회 중앙본부 재정부장을 맡았으며 그 해 12월 대한청년단이 발족되자 용산구단 단장이 되었다.
한편 남양인쇄소(南洋印刷所)[2] 를 경영하면서 1945년 9월 조선인쇄문화건설협회를 발족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48년 8월 사단법인 대한인쇄협회를 창립하고서도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또 인쇄문화시보사(印刷文化時報社)를 설립하여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김동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김동원 후보에 설욕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중앙본부 훈련부장에 임명되었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반대파 국회의원들의 출입문 감시를 맡았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엄상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3월 3.15 부정선거 등의 혐의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건 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제3번)으로 입후보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1965년 서민호가 한일기본조약 반발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독립당 김두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