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원(정치인)

 


'''대한민국 초대 국회부의장
김동원[1]
金東元 | Kim Dong-won
'''
<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출생'''
1884년 2월 1일
평안남도 평양부 창전리 48#
(現 평양직할시 중구역 만수동)
'''사망'''
1951년 3월 20일 (향년 67세)
불명
'''묘소'''
재북인사들의 묘
'''본관'''
전주 김씨
'''재임기간'''
초대 국회부의장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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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부모''' 아버지 김대윤
'''형제자매'''
이복동생 김동인
'''학력'''
평양외국어학교 (일어학과 / 졸업)
도쿄 이쿠분칸 중학교 (졸업)
메이지대학 전문부 (중퇴)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
'''약력'''
제헌 국회의원 (용산구)
초대 국회부의장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선거 이력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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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었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전 정치인이다.

2. 생애


1884년, 평안도 평양부 창전리(현 북한 평양직할시 중구역 만수동)에서 평양 대부호 김대윤(金大潤)[2] 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했고, 1900년 평양외국어학교 일본어학과에 들어가 1903년 졸업했다. 졸업 후, 평양외국어학교 일본어학과 조교수로 있었다. 1905년 일본에 유학해 도쿄 이쿠분칸(郁文館) 중학교를 졸업하고, 1906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으나 1907년 중퇴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13년 석방되었다. 그후 평양의 숭실학교·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이때 안창호와 교유하며 민족문제를 협의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만식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실업계에 투신하여 목재상·평양고무공장 등을 경영하면서 숭인학교(崇仁學校)·숭의여학교·숭실학교 및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사 또는 이사장으로 민족교육육성에 진력하였다.
이후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투옥, 기소되어 이듬해 7월 출소하였다. 투옥 직후부터 친일파로 전향하였고 1937년 7월 31일 평양에서 열린 애국단체시국간담회(愛國團體時局懇談會)[3][4] 조직 발기에 중심인물로 참석하였다#. 출옥 후에는 태평양 전쟁을 위한 항공기 헌납 운동 및 학병 권유 논설 작성 등의 친일 활동을 하였으며, 평양상공회의소 회두(會頭)로 재임하면서 평양 지방의 유력자로서 특히 친일 협력적 활동을 전개했다#.
1948년 민족정경연구소(民族政經硏究所)에서 펴낸 《친일파군상(親日派群像)》에서는 그의 일제 말 친일 행적의 유형을 윤치호를 함께 거론하며 '자진적으로 나서서 성심으로 활동한 자'면서 '친일과 전쟁협력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기의 재산, 또는 지위의 보전, 신변의 안전 등을 위하여 행한 자'로 분류하였다#. 또한 그를 "平壤 유수한 자산가로서 (중략) 전시에는 그 자산, 지위, 신변안전 등을 위하여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며 친일의 동기를 해석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조만식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에 입성하자 월남하였다. 이후 미군정 장관의 행정고문에,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 한국민주당 상임위원을 및 기획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남송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납북되었다.

3. 사후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절한 행적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제 부문과 지역유력자 부문에 포함되었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서울 제9선거구(용산구))
한국민주당
'''19,183표 (31.43%)'''
'''당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제14선거구(용산구 을))
민주국민당
·
낙선 (5위)


5. 둘러보기




[1]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명은 가네오카 히가시모토 (金岡東元(がねおかひがしもと)[2] 1899년 4월 운산전보사 주사에 임명되었고#, 동년 8월 사직하였다#. 동년 9월 6일 삼화전보사 주사에 임명되었다#. 동년 12월 3일 운산전보사 주사에 다시 임명되었고#, 12월 8일 평양전보사 주사에 임명되는 등# 구한말 관료로 재직했다. 그후 1915년 2월, 지방비 토목비에 금 30원을 기부한 것에 대한 포상으로 조선총독으로부터 목배(木杯) 한 개를 하사받은 바 있다#.[3] 이 간담회에는 주요한·주요섭 형제의 아버지 주공삼(朱孔三) 목사도 참석하였다.[4] 이 간담회에서 결정한 주요사업이 ① 민중의 시국인식 보급과 국방에 관한 국민적 의무완수에 노력할 것. ② 실행방법으로 강연회 기타 개최와 호별방문, 물질적·정신적으로 보국케 하도록 노력함 등등. 이라고 한다. 친일 간담회 빼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