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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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
百濟 金銅大香爐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
'''분류'''
유물 / 불교공예 / 공양구 / 공양구
'''수량/면적'''
1점
'''지정연도'''
1996년 5월 30일
'''제작시기'''
백제시대(6~7세기)
1. 개요
2. 상세
2.1. 발견
2.2. 특징
3. 여담
3.1. 루머
4. 대중 매체에서
5. 바깥고리
6. 국보 제2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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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든 것 연구소 올랩
1993년 12월 12일(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향로이다.
향로가 제작된 시기는 520~534년 사이라고 추정한다.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래 내정의 혼란을 거듭하던 백제가 다시 안정을 되찾고 꽃피운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연꽃은 물론 물론 도교에서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혹은 신선이 조각되어 도교불교적 요소가 모두 있다. 무엇보다도 그 조형 솜씨가 워낙 놀라운 수준이라 '''백제 문화의 정수'''라고 손 꼽을 수 있는, 능히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 조상들의 걸작품이다. 신라라고 하면 떠오르는 금관처럼 일반 대중들이 백제라고 하면 딱 떠올리는 멋진 상징적 유물이 없던 차에 그 자리를 차지했다.
충청남도의 새로운 마스코트 '충청이'의 모티브이다.

2. 상세



2.1.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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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 12일, 능산리 고분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 공사가 임박한 때 물웅덩이 진흙 속에서 발견되었다. ###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금동향로가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채로 있었기 때문에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와 더불어 바닥에서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도 발굴되었는데, 백제금동대향로를 감싼 천이 세월이 지나 삭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발굴 결과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곳이 원래 사찰 내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였음을 알았다.[1]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보아, 해당 사찰은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고자 왕실에서 세운 원찰인 듯하다.
위덕왕은 왕자 시절 대신들의 반대에도 신라 공격을 감행했고 성왕은 그런 아들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554년 관산성 전투 당시 성왕은 아들과 백제군을 위문하고자 현장을 방문하다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이에 위덕왕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왕이 되기를 거부하고 승려가 되려고 하는 등 정신적으로 크게 방황했다. 그런 위덕왕이 자신 때문에 죽은 아버지 성왕을 기리며 만든 사찰에서 출토된 향로라는 것. 최상의 예술성과 미적 감각뿐만 아니라 6세기 백제 성왕과 위덕왕 부자의 가슴 아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긴 최고의 문화재.
처음 발견되고 11일이 지난 1993년 12월 23일, 여러 주요 일간지에서 일제히 국보급 백제 유물이 발견되었음을 대서특필하였다.

2.2.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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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의 디지털복원도 (by 문화유산기술연구소) 홈페이지

'''충격적인 세련미를 자랑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4 cm이고 크게 4개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모양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진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오른 향로 뚜껑, 뚜껑 위 봉황 장식이다.
향로에 뚫린 구멍들은 직경 0.6 cm 정도지만, 개중 몇 개는 1 cm 정도로 조금 더 넓게 확장되어 뚫렸다. 처음 제작할 때 생각보다 향이 잘 타지 않아서 구멍 몇 개를 더 크게 만든 듯하다. 구멍은 향로 꼭대기 봉황의 가슴에 2개, 향로 뚜껑 상부에 5개, 그리고 중부에는 5개로 총 12개가 있다. 이중 중부에 있는 구멍은 향의 연기를 배출하는 용도가 아니라 바깥에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는 용도이다. 이렇게 바깥 공기가 들어옴으로써 향로 안에서 대류가 일어나 향의 연소시간이 길어지게 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3개 있는 여러 산이 있다. 이 산에는 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악어,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있고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다. 이 새가 봉황이 아니라 이라는 학문적 소견도 일부 있다. 물론 보통 닭은 아니며, 백제 왕실을 상징하는 천계(天鷄)라는 것이 그 의견이다. 불교도교의 영향을 다수 받은 것이 백제 후기 유물들인데 여타 신수와 영물에 비해 이러한 조류 조각이 많다는 점과 더불어 그중 다수의 조류 조각에서 며느리 발톱으로 추정되는 묘사가 보인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다.
그 아래에는 다섯 악사가 있어 소, 피리, 비파, 북, 현금 등 악기를 연주한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각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갖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5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표현에 대한 묘사는 객관적인 것이고 따라서 원전에서 따온 후 출처를 명시. 출처 : 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 도서출판 학고재)
또, 당시 한반도에는 없었던 원숭이나 코끼리 등등을 조각하고 연꽃을 묘사하는 등 불교적 요소와 더불어 봉황이나 신선 같은 도교적 요소가 조각으로서 공존하여 당시 국제교류가 활발했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이러한 다양함은 여러 사상이 공존했던 백제의 문화적 면모를 증빙한다. 보통은 중국 북위 쪽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서정록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3. 여담


  • 정말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유물이라 어느 박물관이 소장할지 신경전이 거셌다. 심지어 연구단계에서 사진 한 장도 유출되지 않도록 기를 쓰고 막았다고 한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다가 출토지에서 가장 가까운 국립부여박물관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은 모조품,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 것이 진품이다. 부여군과 국립부여박물관의 상징과도 같기에 외부 전시품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극히 드문 예외 중 하나가 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였던 '세밀가귀'전.#
  • 현 보험가액 추산으론 최소 300억#, 복제품 가격도 약 500만 원이나 될 정도로 고고학적, 문화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국내에서 발견된 금속 공예품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가장 빼어난 기술로 만들었다 [2] 유물이 파손된 경우 고고학적 가치는 높으나 예술적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금동대향로는 거의 온전한 형태로 발굴되었기 때문.
  •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일부 중국 사학자들은 '이것은 중국의 유물이다!' 하고 주장했다. 유물의 조형성이 수준 높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초기 연구단계 때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유물으로 추측했다고 한다[3]. 백제는 철저한 불교 왕국이었는데, 대향로에서는 오히려 중국스러운 도교의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난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원형이 중국에서 유행하던 박산로(博山爐)라는 향로임은 분명하다. 중국에서는 박산로가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에 나온 초기형태로부터 훗날 중세시기 완성형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른 박산로의 기술적 진화 모습이 모두 남아 전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과거에 박산로 계열 향로를 제작했던 흔적이 전혀 없었는데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완성품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최소한 중국인이 중국의 기술을 토대로 한국에서 만들었거나 아예 중국에서 수입했다고 본 것이다. 이후 연구에서 이를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대장간 터가 발굴된 덕에 백제가 제작한 유물이라고 판명되었다. 지금은 중국 학자 대다수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면 모를까, 대향로가 중국의 유물이라는 소리는 어불성설이라고 이전의 중국 유물설을 일축한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세련미와 조형요소의 다양성은 지금까지 출토된 중국의 모든 박산로를 압도하고, 일단 60 cm을 넘는 크기부터가 넘사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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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발굴 때부터 일본에서도 매우 관심을 드러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백제 금동대향로 전시를 요구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은 교환전시될 일본의 유물과 격이 맞지 않는다[4]는 이유로 거절한 적이 있다. 또 다른 반출거부 유물은 영조 어진. 일본에서도 천황 관련 유물이나 문화재는 전시 및 반출이 금지되는데 조선시대 어진 역시 같은 점을 들어 거절. 일본에선 적반하장으로 반발했다.
  • 대전/충남을 연고로 하는 대전 하나 시티즌의 엠블럼에도 있다.[5]
  •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20주년을 맞아 문화유산기술연구소에서 향로를 정밀 3D 레이저 스캔하여 15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벗겨진 도금을 복원하여 만든 결과물을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하였다. 그 결과물 중 일부가 위에 있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향로를 찍은 사진이다. 전체 사진, 클릭 시 확대.
  • 왕실에서 제사용으로 사용되던 물건이 천에 곱게 싸인 채 땅에 묻힌 이유는 사비성이 함락되어 약탈과 방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어느 백제인이 급히 숨겼기 때문이리란 견해가 있다.
  • 발견된 이후 한동안 향로의 윗부분이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세계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보아, 도교사상의 영향을 강조하여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 혹은 '금동용봉봉래산향로'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불교미술사학계는 절터에서 발견된 데다 3단으로 장식된 연꽃 등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이니 수미산(須彌山)[6]을 연상시킨다며 '수미산향로'라고 부르자고 주장하였고, 중국 학계는 향로 윗 부분의 새가 봉황이 아닌 천계(天鷄)이고 금마산(金馬山)에서 건국한 백제의 것이라는 의미로 '금동천계금마산향로'란 명칭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문화재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란 이름으로 결정했다.
  • 이토록 조형적으로 뛰어난 유물이지만,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다리 부분과 향로 구멍이다. 다리 부분은 용이 승천하는 조형으로 주조했으나 균형이 맞지 않아 팔메트 문양을 따로 주조하여 붙인 것 같다. 향로 뚜껑의 연기구멍이 하단 4개 상단 4개 총 8개가 있는데, 연기가 잘 안 나왔는지 정으로 내려찍어(...) 구멍 4개를 확장했다. 일단 다리 부분에 덧붙인 팔메트 문양 덕분에 제작지가 백제라고 밝혀지긴 했다. 왜냐면 능산리 사지 출토 금동광배편과 팔메트 문양 구성이 같기 때문.

  • 국립부여박물관은 백제금동대향로에 향을 사른 모습을 담은 영상을 2020년 4월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물론 진품이 아니라 복제품에서 향을 피웠는데, 하얀 향 연기가 포르르 뿜어 올라가는 모습이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다. 실제로 향을 사르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던 사람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영상.
  • 인근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의 '무늬 벽돌' 과 같이 보면, 바람이나 구름, 그리고 산 등의 묘사물들을 묘사한 감각이 부드럽게, 유기적으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반도의 국가들에서는,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는 조류를 애호하여 많은 예술품들에 조류의 형태를 표현하여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백제금동대향로와 백제의 무늬 벽돌에서 같은 형태의 조류(현대에서 어떤 호칭으로 부르든지 간에) 가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

3.1. 루머


이름 그대로 향로는 향을 피우기 위한 물건으로, 뚜껑을 열고 안에 향을 재어 넣은 뒤 불을 붙여 뚜껑에 있는 12개 구멍에서 향이 피어나게 만든 물건이다. 이 물건은 그냥 전시하기보다는 향 연기가 구멍에서 피어 오르도록 할 때 가장 향로답고 아름다운 물건이다. 그래서 부여박물관에서는 복제품에 향을 피워놓고 전시하는 기획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박물관 측에 종교적인 이유로 항의가 들어와서 중단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
넷상에서는 이를 그리스도교의 소행이라고 단정짓고 서술하는 루머 자료가 계속 퍼지지만, '''해당 종교가 그리스도교라 단정지을 근거는 전혀 없다.''' 기사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박물관에 항의가 들어왔다.'고 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느 종교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굳이 어느 종교인지 추측해보자면 '''도교나 불교단체 중 한쪽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도교와 불교의 사상이 모두 반영된 유물이기 때문에 발굴 당시부터 발굴단에서는 신선사상을 따라 '용봉봉래산향로'라고 이름 붙이자고 하고, 불교계에서는 새겨진 연꽃무늬나 산봉우리가 수미산을 연상케 한다면서 '수미산향로'라고 부르자고 주장하는 등 의견대립을 해왔기 때문이다 # 특히나 불교계는 국립박물관이 백제금동대향로를 굳이 '도교의 유물'이라고 하면서 불교의 영향력을 애써 부인하려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후에도 백제금동대향로가 도교 유물로 전시되거나 소개되는 것에 불교계 일각에서 불쾌감을 표시하는 등# 대향로 관련으로 도교와 불교 관련단체나 인물들이 꾸준히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박물관에 종교적인 이유로 항의가 들어왔다면, 도교나 불교 둘 중 한측에서 왜 상대편의 방식으로 향을 피우고 전시를 하려 하냐고 이의를 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그리스도교 관련단체가 관련 성명이나 의견을 냈다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스도교계가 백제금동대향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관심''' 그 자체나 다름없다.[7]
더군다나 기사의 신뢰성에도 의문이 있다. 기사를 보면 기자가 만나 전시에 관련해 토론을 한 사람을 두고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와 2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차선미 선생님"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내에서 국가 공인 박물관, 미술관(국립, 공립, 사립, 대학)에서 학예사로 근무하려면 석사 학위 이상이 필요하다. (학사도 할 순 있지만 자격증을 받기 위해 소요하는 기간보다 석사과정 들어가서 학위 받는 쪽이 더 빠르다.) 그런데 학위, 학술논문 검색 사이트인 Riss에서 '차선미'라는 이름으로 검색해보면, 학위논문은커녕 학술논문에도 '역사학', '미술사학', '고고학' 하다못해 '예술관련 전공'으로도 저 이름으로 저술한 논문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즉, 기자가 신뢰하는 저 '차 선생'이란 사람은 국립박물관에서의 전시, 연구와 관련해 논의조차 들어갈 수 없는 인물이다. 지금은 규모 큰 국립박물관에는 전시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가진 예술관련 전공자가 전시를 시각적으로 꾸미는 일을 맡는데, 이 직업으로 채용을 시작한 지 (2020년 기준) 채 5년도 안 지났다. 따라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고, 전시를 시작하는 기간에 전시코디네이터도 없었기에 저 사람이 외부 전문가로도 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박물관 고고학팀, 발굴단, 문화재연구소 발굴팀 등등에서 유물을 발견하면 보수 작업을 완료한 후 바로 전시에 들어가지 못한다. 적어도 2년 이상 연구기간이 소요되고, 이 유물에 대한 연구가 고고학계, 미술사학계, 역사학계에서 다각도로 연구를 한 후 전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사를 쓴 기자가 '차 선생'에게 들었다는, '발견 직후 금동대향로 모조품을 전시하면서 연기를 피워오르게 하자'란 건의를 했다는, '차 선생'이 한 얘기는 허풍+구라+개소리 라고 할 수 있다.
향로모조품에 향을 태워 연기가 피어오르게 하는 전시를 건의하자고 기자가 기사에 썼지먀 절대! 네버! 그럴 수 없다. 박물관 및 미술관은 관 내에서 '화기 절대 엄금' 지역이다. 연기도 불을 붙여야 생기는데 연기를 결국 어떻게 건물 내에서 없앨 것인가? 저 사람들이 한 논의는 같은 공간 내에 있는, 다른 소장품들이 피해를 보는 방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위시한 주변 박물관, 미술관에서는 공통적으로 전시실에 창문이 없거나, 빛의 침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암막을 설치한다. 햇빛으로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창문도 없앴고, 지진이나 화재, 수재에도 소장품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방재 훈련과 설계에 돈을 쓴다. 그런데 그런 박물관, 미술관 건물 내부에서 대향로의 아름다움을 보자고 향을 태워보자는 것은 그저 전시를 보기만 하는 비전문가들의 발상일 뿐이다. 차라리 본관 건물 앞에 원본을 모방한 대형 금동향로를 제작해서 향을 직접 사를 수 있도록 설치한다면 방문객도,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아무 지식도 없는 비전공자들의 수다를 기자는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기사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2000년대 중반에 KBS에서 방송했던 '서바이벌 역사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복제품에 향을 피우는 모습을 시연한 적이 있다.

4. 대중 매체에서


  • 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주가 현대 대한민국으로 넘어온 타임슬립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 SBS 드라마 '천년지애'에서는 부여주(성유리)가 현재 시간대에서 이 향로를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고 '이딴 향로가 남부여(백제)를 상징한다니'라며 씁쓸함을 내보인다. 현대의 우리 입장에서는 다른 왕실 보물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아서 대향로가 귀한 유물이 틀림없지만, 백제 당대의 왕족에게는 그래봤자 여러 왕실 보물 중 하나에 불과했고, 나라를 대표할 정도는 아니었으리라는 것이지만, 이러한 생각은 무지의 소산이다. 백제는 은제관식조차 6관등 나솔(奈率) 이상만, 금제관식과 금으로 만든 공예품은 오로지 왕과 왕족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향로에 정섯껏 가미된 화려한 기교는 당대인들에게도 이 금동항로가 평범한 향로가 아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왕실 사찰에 있었고, 긴박한 순간에도 비단으로 싸서 수조 안에 숨길 정도면 당대인들 기준으로도 가히 보물급이었을 것이다.
  • 드라마 서동요의 마지막 화 마지막 장면에 잠시 등장한다. 선화공주가 가공 인물로 기술자이며 서동의 스승이었던 목라수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것으로, 극중에서 박산향로가 서동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내리는 신물인 것에 대비하여 이제 무왕에게 안식이 내렸으면 한다는 의미. 그리고 무왕이 자신이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자 선화공주가 숨을 거둔 곳에서 향로를 피워 놓고 선화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드라마가 끝난다.
  • 황산벌 전투를 다룬 영화 황산벌에서 배경소품으로 잠깐 등장한다. 초반부 의자왕이 계백과 만나서 술을 마실 때 이 향로에 향을 피워 놓았다.

5. 바깥고리



6. 국보 제287호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아래의 몸체는 하나하나의 연잎의 표면마다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며 세부의 동물과 인물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백제시대의 창의성과 뛰어난 조형성을 바탕으로 당시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 공예기술 및 미술 문화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백제 금속공예 최고의 걸작품이다.


[1] 이는 금동대향로가 중국제가 아닌 백제 자체 제작품이라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이 대장간에서 만들었다는 것. 실제 중국 학자들 중에 박산향로 양식이 아예 없던 백제에서 갑자기 금동대향로가 제작된 것은 말도 안된다면서 금동대향로가 중국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남조 국가들의 무덤 벽화에서 이 대향로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그림이 발견되기도 했다는 점을 본 향로가 중국제라는 주장의 근거로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향로가 하필 금속제품을 만드는 대장간 자리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은, 이 사찰 내에서 자체 제작된 향로라는 것을 드러내고 물리적 근거는 정황 근거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에 중국 측의 억지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사실 중국에서 박산향로 전통은 완전히 사라진 지 수백 년이 지난 후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백제의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수백 년 의 향로 전통을 되살려서, 심지어 중국 본토에 있던 향로를 능가하는 명품을 만들어 백제에 선물했다는 주장은 개연성이 너무 떨어진다.[2] 이한상(대전대 역사문화학과)[3] 유물을 직접 출토한 역사가들이나 출토 직후 편성된 연구팀들이 연구하거나 추측한 바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도 없이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연구가들이) 추측하였다' 고 남겨놓는 것은 아닌듯 하다. 백제금동대향로 외에도, 금동으로 제작한 정밀하고 아름다운 백제시대의 공예품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존재한 다른 국가들의 유물 중에도 금동이나, 순도 높은 금으로 제작한 정말 세밀하고 아름다운 유물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는 지역 박물관만 관람해봐도 알 수 있다.) 이는 금동이나 금처럼 값비싸고 철과는 물리적 특성이 다른 재료를 다루고 세공할 줄 아는 기술이 한반도에 존재하였음을 자명하게 증명하므로, 발굴 초기에, 발굴단과 유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본 금동대향로가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거란 추측부터 했다는 뉘앙스의 말은 믿기 힘들다. [4] 무슨 유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5] 과거 시민구단 시절의 엠블럼에도 그려져 있었다. 다만 과거에는 금동대향로를 자세히 그렸지만, 기업구단이 된 이후에는 위의 봉황만 간략하게 살리고 방패 모양이 금동대향로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꾸었다.[6] 불교 세계관에서 우주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7] 애당초 그리스도교의 눈에선 불교나 도교나 그게 그거다.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