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생애

 




1. 성장기
2. 1970년대
3. 1980년대
4. 1990년대
5. 2000년대


1.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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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의 트럼프'''
'''1964년 군사학교 졸업사진'''
독일계 미국인과 영국 스코틀랜드계 혈통이고, 1946년 6월 14일 뉴욕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는 백만장자 프레드 트럼프와 자선가 메리 앤 매클라우드 트럼프 사이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프레드 트럼프 주니어, 누나 메리앤 트럼프 배리, 엘리자베스 트럼프 그라우, 남동생 로버트 트럼프가 있다.
트럼프의 가족은 뉴욕 퀸즈 지역의 자메이카 이스테이츠라는 부촌에 위치한 대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트럼프 가족은 그 저택을 '타라'라고 불렀으며, 침실이 9개고 기둥도 으리으리했다. 트럼프 가족은 무려 50년 동안 이 저택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집이기도 하다. 사실 도널드 트럼프가 쓴 책들에 의해서도 매우 파격적인 인물[1]로 어린 시절부터 그 싹수가 보였다. 좋게 말해서 패기있는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선생님한테도 주먹질을 할 정도로 진짜 배드가이였고 심지어 후에 군사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했지만 막상 베트남 전쟁 징집은 계속 미루다 결과적으로 회피하는 등 정말 자기주도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사는 사람이란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도널드와 형제들은 매우 유복하게 자랐지만, 부잣집 도련님처럼 자라진 않았다고 한다.[2] 비가 오면 트럼프는 자가용(!!)을 타고 신문 배달을 했다고 한다.
부친 프레드는 매우 엄했다. 자식들에게 가업을 철저히 배우도록 강요했다. 프레드는 일주일 중 하루도 휴일 없이 일할 정도로 일 중독이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공사현장에 갔고 아이들은 공사현장 바닥의 못들을 주워서 모으게 했다. 작은 못 하나라도 아낄 정도로 구두쇠였다.
도널드 트럼프는 아버지의 세계관을 배우며 자랐고 아버지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널드는 몇 가지에 특히 공감했다. 프레드 트럼프는 경주용 말과 인간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유전자를 받은 인간은 따로 있고 유전자가 뛰어난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우월한 자손들이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경쟁'이라는 것도 부친 프레드의 지론이었다. 그는 세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레드는 승자를 킬러라고 불렀고 패배는 괴멸을 의미했으며 중요하지 않은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트럼프는 부친의 지론대로 항상 승자가 되려고 했다.

그의 남동생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는 어린 시절 엄청난 악동이었다고 한다. 생일 케이크를 제일 먼저 집어던지는 아이, 누가 장난감 블럭을 쌓으면 어떻게든 무너트리는 아이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음악선생에게 주먹질을 해서 근신 처분을 받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13세가 되자 부친 프레드도 더이상 참지 못했다. 그의 부친은 트럼프를 엄격하기로 유명한 기숙 학교로 보냈다.[3]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뉴욕 육군 군사학교[4]였다. 13세 먹은 금수저 출신 아이가 갑자기 군대 비슷한 학교로 오게 된 거다. 오남매중 자기 혼자 기숙학교로 쫓겨 나게 된 것. 안락했던 생활, 부모님과 헤어저서 교관을 만나게 됐다.
그런데 의외로 도널드 트럼프는 군사학교 생활을 매우 좋아하며 우등생도 됐다. 그 중에서도 분명한 책임 소재, 명확한 규칙을 좋아했다. 무슨 일이건 잘하면 메달과 상을 받는다는 점이 좋았다고 한다. 특히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졌던 트럼프는 학교 야구부의 에이스 투수였고 트럼프의 활약으로 팀은 지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신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급우들은 트럼프가 가장 뿌듯해했던 순간이 따로 있었다고 말했다. 바로 남학교 최고의 인기남으로 졸업앨범에 기록된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의 학창시절 급우들은 또 어찌보면 트럼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64년 기숙학교 시절에서 했던 이야기들하고 요즘에 하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비슷하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성장기 시절을 애기할 때 '''마블 협동 교회'''도 빼놓을 수 없다.[5] 트럼프는 이 곳에서 '''성공의 복음'''(이른바 '번영신학')을 들으며 성장했다. 이 교회는 노먼 빈센트 필 목사[6]의 교회였다. 필 목사는 트럼프에게 성공의 복음을 가르첬다. 성공은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엄청나게 좋은 것, 꼭 이뤄야 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이 목사의 교회에는 정치인, 사업가가 모여들었다. 필 목사는 자본주의부자를 칭송했으며 트럼프의 성향과 목표, 부친 프레드의 야망과도 잘 맞았다.
1964년 군사 학교를 졸업 후 포덤 대학교로 진학하여 2년 동안 다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경제학과로 편입하였고 1968년 와튼 스쿨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2. 1970년대


아버지의 부동산 개발 회사의 견습사원으로 들어간다. 그의 형 프레드 주니어[7] 가 도전했다 실패한 자리기도 했다. 형 프레드 주니어는 아버지의 일에 도전했으나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사업에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노력은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죽기살기로 경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기의 꿈이었던 비행사에 도전한다. 도널드는 본인이 형에게 너무 모질었다고 애기 한적이 있다. 조종사가 된 형한테 비행기 조종사는 결국 버스 운전수와 같은 일[8]을 하는 게 아니냐고 몇번이나 형에게 말했다고 한다. 프레드 주니어는 알코올 중독으로 40대에 사망한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는 충격에 빠진다.
도널드는 형의 죽음으로 자기의 신념을 재확인한다. 살아남으려면 킬러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때부터 아버지 앞에서 형과 정반대로 행동한다. 도널드 트럼프 본인은 아버지가 늘 윽박질러서 형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인관계에서 주눅들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도널드는 아버지의 브루클린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해서 1971년 회사 전권을 물려받는다. 이때가 25세다.
1970년대 중반 트럼프는 고향 퀸스를 떠나 맨해튼으로 진출한다. 1970년대에 도널드가 아버지의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할 때 그의 목표는 서쪽. 노동자 계급의 외부 자치구 너머의 맨해튼 스카이라인이었다.
트럼프 본인도 그걸 인식했고 예전부터 화려한 곳, 헐리우드 같은 곳을 동경했다. 뉴욕에서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맨해튼이었다.
아버지가 뉴욕의 외주 자치구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어도 맨해튼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도널드 트럼프에겐 의미가 없었던 것.
트럼프는 부친도 못했던 맨해튼 부동산 사업을 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 계약을 따낼지 어떻게 맨해튼 부동산 사업에서 입지를 다질지 고민을 많이 했고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트럼프에겐 멘토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멘토가 하필이면 매카시즘으로 악명 높았던 매카시 상원의원의 보좌관 로이 콘 변호사로 훗날 트럼프의 어그로 성향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9]
부친 프레드 트럼프는 도널드에게 맨해튼 투자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화려함 아래 있는 뉴욕시의 내면은 부패했다는 것이었다. 실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뉴욕의 치안은 나날히 악화되었으며, 1976년에 뉴욕시 자체가 파산에 이를 정도로 사정이 안 좋았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이를 기회로 봤다. 그는 아버지 프레드의 반대에 맞서 손상된 자치구에 부가 있다고 설득한다. 맨해튼 부동산에 뛰어들기 좋은 시점이었고 70년대에 맨해튼에 투자한 사람은 대부분 성공했다. 그냥 사두기만 하면 됐으니깐. 그래도 업계의 거물인 아버지의 분석이 당시에는 일리가 있었음에도, 아버지도 예측하지 못했던 기회를 찾아내 성공시켰으니 도널드의 안목은 분명히 있었다.
1977년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녀의 이름은 이바나 젤닉코바. 체코슬로바키아의 스키 선수였다.
1978년 철도 용지에 컨벤션센터를 지으려고 로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시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 도널드는 허풍쟁이 에드 코치 시장의 자문을 받지 않고 거래가 성사됐다고 밝혀서 몇 년 동안 에드 코치 뉴욕 시장과의 불화가 지속된다. 그가 처음으로 이목을 끈 정치적 불화다.

3. 1980년대



1980년 34살때, 로나 배럿과의 인터뷰.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트럼프에게도 저런 젊은 시절이 있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현재와 달리 오히려 젊었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차분한 모습.[10]
로나의 회상에 따르면 트럼프의 첫 지상파 인터뷰였고, 트럼프가 먼저 하고 싶다고 요청한 것이었으며, 인터뷰 중에는 스스로는 '야망'이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야망이 넘치는게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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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이던 시절-1
(1988년)'''
'''40대 초반이던 시절-2
(1988년)'''

'''40대 초반 TV 출연 동영상 (00:39)'''
1976년 부동산 프로젝트를 시작한 트럼프는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 옆 허름한 코모도 호텔을 뉴욕의 명소로 변화시킨다. 부친 프레드는 운이라고 치부하며 미심쩍어하며 타이타닉호 표를 사는 것에 비유했다. 하지만 도널드는 그랜드 센트럴 역 주변으로 관광객이 몰린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실현하려면 아버지의 정치척 영향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트럼프는 한 지역 의원이 칭한 '세기의 세금 거래'를 한다. 시의 부동산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뉴욕 부동산으로는 처음으로 40년간 세금 감면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1980년 전면 유리로 된 호화로운 '그랜드 하얏트'가 공개된다. 이것으로 트럼프에게 모든 공이 돌아간다. 도시에서 처음으로 리모델링된 건물이었다.
1980년 트럼프는 낡은 '본위트 텔러' 백화점을 첫번째 고층 건물이자 핵심 자산이 될 '트럼프 타워'로 전환한다.[11] 처음으로 트럼프 이름이 건물에 눈에 띄게 새겨젔다. 훗날 트럼프 브랜드의 초석이 될 표시였다.[12]
더불어 트럼프 타워 건설에도 여러가지로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줬는데, 건설하는 인부들 독려책(?)으로 건설현장 내부에 비키니를 입은 미녀를 7미터 거대 패널로 걸었는데, 저 비키니는 사진이 아니라 수성 물감을 칠한 거라서 비가 오면 이 비키니가 지워졌다고 한다(...). 특히 건설 총감독을 당시 업계에서는 거의 없던 여성 엔지니어[13]인 바버라 레스에게 맡긴 것이다. 바버라의 회고에 따르면 트럼프는 그녀가 가진 야망과 공격성을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서 과감하게 트럼프 타워 건설 총감독을 맡겼다고 한다. 덕분에 바버라 레스는 업계의 홍일점으로서 잡지 인터뷰를 하거나 지상파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오기도 하는 등 명성을 얻기도 했다. 다만 이후 언론 회고 등에 따르면 트럼프가 그녀를 기용한 것이 '좋은 여자가 10명의 좋은 남자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지만 근본적으론 성차별적 발상으로 기용했다는 모양.
당시 트럼프 타워 건물 자체는 디자인과 가격, 발상도 여러모로 역대급이라서, 건물 자체는 최고급이었지만, 아파트 자체는 당시 가격으로 방 둘짜리 아파트가 백만 달러라는 뉴욕 최고가 아파트였음에도 바닥은 제일 싼 자재를 썼고, 자재 계획서 상에는 조각 나무 세공이나 상감 나무 장식도 있었다지만, 실제로는 싼 타일을 써서 풀로 붙였다던가, 싱크대 상판에 포마이카[14]를 칠했다던가 하는 결정을 내렸고 바버라는 이에 반대하며 매번 언쟁을 벌였지만 꺾을 순 없었다고 한다. 트럼프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썼는데, 하나는 약한 사람의 약점을 찾아서 약점을 이용하거나, 더 심하게 공격하거나 하는 식이었는데, 바버라에겐 완벽한 후자였다고. 스스로도 인정했다고 한다.
이때 트럼프는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 부동산 외의 것으로 크게 눈을 돌린다. 신흥 미국 풋볼 리그 USFL의 뉴저지 제너럴스를 매입한다. 3년이 지나고 트럼프는 리그에 위험한 제안을 한다.

'''모두 이해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항상 봄은 황무지라는 거였죠. 이 리그를 가을로 이전할 겁니다. 처음에 봄으로 정한 유일한 이유는 가을은 NFL에 독점권이 있기 때문이죠. NFL과 맞붙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USFL은 가을과 겨울에 열리는 NFL이 경기를 하지 않는 봄과 여름에 경기를 하는 틈새시장 공략 리그였다. 재정 상태가 NFL보다 좋지는 않았으나 그럭저럭 굴러갔는데, 트럼프는 NFL을 완전히 대체하고 싶어 17억 달러짜리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NFL이 방송국의 중계권을 독점해 USFL이 가을에 경기하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아주 큰 재판으로 이어져 USFL이 독점 금지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런데 배상금이 1달러. 한마디로 아무 이득 없는 승리다. 2심에서는 3배 손해 배상 결과가 나왔다. 즉 3달러(...) 의미없는 승소 후 NFL은 USFL에서 특급 선수들을 빼갔고 USFL은 재정에 어려움을 겪으며 무너진다. 트럼프에게 처음으로 큰 공개적 실패다.
1986년 트럼프의 재산은 7억 달러에 다다르고 유명한 곳에 이름을 걸 기회가 생긴다. 그 곳은 센트럴 파크였다. 뉴욕은 6년동안 1.200만 달러를 들여 울먼 링크 스케이트장을 복원하려고 했는데 아직 진행중이었다. 시의 재정 부족을 이유로 트럼프가 그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시의 낡은 공공 기반 시설을 복원하려면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식이었다. 스케이트장은 6개월만에 완공되었고 예산보다 75만 달러 적게 들었다. 하지만 끝내 뉴욕 시는 스케이트장에 트럼프 이름을 거는 것을 거부했다.
86년 울먼 링크 복원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트럼프는 고스트 라이터[15]를 고용해 책을 쓰게 된다. 그것은 바로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16] 기업가로서 성공 하는 법을 다룬가이드 책이다. 이 책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51주동안 1위를 했다.
이 책으로 트럼프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새로운 명성도 얻었고. 이때 기준으로 트럼프의 호감도는 꽤 좋았다. 뭐든 가능한 뉴욕 사업가라는 찬양도 만들어졌다. 이 당시 포브스 선정 400대 부자 순위 26위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이때의 트럼프는 억만장자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위치하였고 게다가 나이마저도 30대의 시기라 어떻게보면 사업가로서의 이미지[17]라던가 재산순위로만 봤을때는 이때가 트럼프의 최전성기 시기라고도 볼 수 있는데, 알다시피 이후에 사업실패의 난항을 겪으며 재기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많이 날려먹었기 때문에 나이를 먹어가면서 억만장자 순위도 몇백 위로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트럼프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냐면 1980년대 당시의 빌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재산도 트럼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때쯤 부터 트럼프는 점점 그저 돈많은 갑부 이상의 존재를 꿈꾸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87년 9월에 그는 유력 일간지에 공개 광고를 게재하는데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나 일본과 같은 부유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중동에 지나치게 많은 돈과 군사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88년, 트럼프는 뉴욕 남쪽 210km 떨어진 곳에 가장 큰 모험을 준비했다. 애틀랜틱 시티의 휴양지에서 초점을 맞춘다. 당시 그곳은 죽어가는 휴양지였으며 전반적으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애틀랜틱시티에 거는 첫 도박은 트럼프 플라자였다. 주차장도 있고 카지노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년 후 트럼프는 '트럼프 캐슬'이라고 이름짓는다. 동쪽 라스베이거스에서도 성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트럼프는 22개 은행에서 3억 8천만 달러의 융자를 받아 이스턴 항공사를 매입한다.
'''이렇게 계속 부동산 목록을 확장할수록 트럼프의 도를 넘은 태도는 이사회부터 파산법원까지 위협했다.'''

4. 1990년대


트럼프는 모험으로 가장 큰 돈을 벌길 원했다. 그리고 1990년 '타지마할'이라는 카지노 호텔을 오픈했다.
'''하지만''' 타지마할이 생긴 시점에서 부동산 시장은 급격히 쇠퇴한다. 1987년 주식 시장 붕괴로 경기 침체기로 접어들었고 1990년까지 완전한 불경기였다. 경기가 무너지자 트럼프의 '타지마할'은 빚더미로 무너진다. 이 건물을 지을 때 많은 전문가들은 유지되지 않을 거라 예측. 결국 그 예측이 맞았다. 경기 침체로 10억 달러의 슈퍼 카지노를 짓느라 빌린 돈의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더구나 타지마할의 운영진들이 탑승한 헬기가 추락, 다수가 사망하는 불행까지 겹친다. 손익 평형을 보려면 타지마할에 매일 100만 달러가 들어와야 할정도 였다. 돈을 소화전처럼 뿌리는 카지노 시장에서 최고가 된다는 사업적 관점으로는 이익을 낼 수 없었고 장기적으로 자본화가 불가능했다.
이 사업으로 트럼프의 쌓인 빚이 어마어마했다. 재정난은 최종 결과 이상으로 영향을 미처 90년 승승장구하기만 하던 트럼프의 자존심에 강타를 날린다. 1982년 시작 이후 처음으로 포브스 선정 400대 부자 순위 선정에서 밀려나게 된다. 트럼프 기업은 엄청난 빚으로 구조조정이 필요했고 트럼프는 은행가와 협상에 성공해서 수백만 달러를 깎게 된다. 트럼프는 타지마할을 계속 영업하면서 빚을 재조정했고 그 대신 카지노의 개인 지분 절반을 포기한다.
하지만 또 트럼프에게 위기가 찾아오는데 트럼프가 80년대 후반 인수했던 플라자 호텔이었다. 88년 3억 9천 달러에 매입했는데 92년도에 빚이 5억 5천이었다. 이로 인해 트럼프는 자신의 지분 49%를 포기하지만 무급 대표이사로 남는다.
90년대는 트럼프의 사업 흑역사 시대다. 사업이 불안정하고 빚이 수억 달러에 평판도 추락했다. 엎친대 덮친격으로 부인과의 불화설까지 터지며 이혼 소송까지 하게 된다. 그 이유는 트럼프가 26세 여배우 말라 메이플스와 바람이 났기 때문. 28일 동안 신문 1면을 차지했고 부부의 충돌이 대서특필됐다. 하지만 이게 좋든 나쁘든 트럼프는 결국 본인에게는 홍보 수단이었다. 미디어를 이용했던 것. 결국 이바나와 트럼프는 이혼했고 93년 바람난 말라 메이플스와 결혼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일이, 자신의 야심이 중요했다. 이러면서 말라와 트럼프 사이는 멀어지게 됐으며 결혼 4년 만인 1997년에 말라와 이혼해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의 결혼 실패가 1면을 장식하면서 인지도는 더 높아진다. 부유한 사업가에서 팝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모든 언론 덕분에 트럼프는 더 유명해젔다. 이때부터 인기 시트콤 '내니', '플레이보이 프린스', 그리고 영화 '나 홀로 집에 2'에 카메오로 출연한다. 10년 동안 트럼프는 방송을 즐기고 경기와 부동산 시장이 살아나 부를 다시 쌓는다. 1996년 포브스 400대 부자 명단에도 다시 오른다.
다른 명사들이나 언론은 트럼프가 재산을 1990년대에 S&P 인덱스 펀드ETF에다 넣었다면 지금의 재산보다도 2, 3배 이상은 됐을 것이라고 하는데[18], 애초에 트럼프 성격상 이렇게 안전하고 착실하게 재산을 불리는 스타일의 투자를 좋아하지도 않았겠지만(…), 일단 그 자체로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맨해튼에 거주하면서 부지를 매입하고 빌딩을 짓고 매입, 매도하고 임대하는 식으로 안전하게 사업을 했다면 굴곡을 겪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적극적으로 부동산과 관련 없는 여러 사업에 도전했고, 사업 실패로 크게 망했던 때도 있지만 성공적으로 재기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몇 번이나 사업 실패를 겪고 다시 재기한 경영자들은 보는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업을 평탄하게 수십년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는것도 보통이 아니겠지만 처절하게 실패후에 재기하는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므로 이를 오히려 더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시기 트럼프가 암흑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부동산 개발 사업을 재개하는데에는 한국과의 인연이 적지않게 작용했다. 1997년 지금은 해체된 대우그룹의 미국 법인은 트럼프 기업과 합작해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유나이티드 엔지니어링 건물을 매입하고 재건축해서 트럼프 월드 타워라는 80층짜리 주상복합건물을 짓는 계획에 착수한다. 당시 대우그룹은 프로젝트 자금 대부분의 조달과 시공, 건축을 담당하고 트럼프 기업은 현지 홍보와 마켓팅 등 세일즈 업무를 맡게 되는데 트럼프는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던 초고층 초호화 주거 시설로 지어지길 원했고 이것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한 최초의 주거용 건물이 된다. 이때의 대우그룹과의 인연으로 트럼프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 한국을 방문해 함께 초고층 주상복합 건축 사업을 벌였다. 1999년에는 여의도 대우 트럼프월드 모델하우스 개장 당시 다시 한국을 찾아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이후 국제적으로 부동산 개발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 이것이 서울과 부산, 대구 등지에 트럼프 월드가 생기게 된 사연이다. 당시 트럼프 월드 타워는 너무 높고 거대해서 길 건너편의 유엔 본부를 가린다는 점 때문에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 덕분인지 어쨌든 분양에서 대박을 친다.
1999년 트럼프는 본인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로스 페로가 설립한 개혁당에 들어가 대통령 출마를 고려한다. 트럼프는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하고 내년 1월까지 출마를 결정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개혁당은 내분과 무체계로 혼란 상태에 빠진다. 2000년 2월까지 개혁당엔 진전이 없었고 트럼프는 개혁당에서 결국 손을 뗀다.

5. 2000년대


트럼프는 정치적 열망을 접고 건축일로 다시 돌아간다. 2001년에도 계속 뉴욕 스카이라인을 형성해 국제연합 건너편에 세운 트럼프월드 타워를 공개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부동산에 브랜드를 접목시킨다. 먼저 브랜드를 만들고 부동산 사업에 적용시킨 것이다. 일이 술술 잘풀리니 부동산 구매에서 새로운 분야로 눈을 돌려 자신의 브랜드를 판매하기 시작. 보드 게임, 가구 사업, 트럼프 향수, 트럼프 보드카도 나온다.
2001년 코메디 영화 '쥬랜더'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이때부터 방송 일이 금전적으로 가치가 있다는걸 알고 TV 프로듀서 마크 버넷의 도움으로 방송인으로 거듭난다. 인기 프로 '서바이버'에서 누가 주역을 맡을지 아이디어를 내는데 바로 트럼프였다. 경쟁 프로인 '어프렌티스'는 젊은 기업 수습생들이 트럼프의 회사에서 1년간 경쟁한 뒤 차례차례 탈락한 끝에 최종 우승자가 직원으로 발탁되는 내용이었다. 방송은 초대박나서 매 주 2070만명이 시청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때 유행어 'You're Fired'가 생긴다. 이 예능 프로 덕분에 90년대 실패한 사업가라는 이미지에서 이미지 세탁을 하게 된다. 2007년에는 WWE 레슬매니아 23에서 빈스 맥마흔의 머리를 밀고는 스톤 콜드 스터너를 피폭당하기도...[19]
도널드 트럼프는 뭐든지 일을 만들고 진행시키는 추진력 만큼은 대단히 강력한 인물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각종 논란과 마찰이 생겨도 그는 상처 받거나 지친 기색이 없었는데,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의 게임으로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저돌적이고 호전적인 성향은 저서 '거래의 기술'에서도 드러난다.
"진정한 재미는 게임을 한다는 사실이다.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 (중략) 비난도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가 있다. 좋은 평판은 나쁜 평판보다 낫고, 나쁜 평판은 평판이 아예 없는 것보다 낫다."

'''"You're Fired."'''

트럼프는 어프렌티스를 2004년부터 2015년 7월까지 무려 14 시즌이나 진행했는데 여기서 '''You're Fired'''(넌 해고야)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 유행어는 영화 트랜스포터 라스트 미션에도 등장한다. 대선 레이스를 달리던 시절에는 본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면, 버락 오바마에게 이 말을 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로 실행에 옮기진 않았지만.
그리고 2005년, 세번째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와 결혼한다. 결혼 1년 후 60세의 나이로 트럼프는 다섯번째 아이를 얻게 되는데 아이 이름은 배런 윌리엄 트럼프.
2013년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만큼 탁월한 진행 능력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20], 기업인으로서도 방송인으로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진행하는 셀러브리티 어프렌티즈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트럼프의 천재적인 방송 감각을 볼 수 있다.

트럼프 브랜드 중 하나였던 트럼프 스테이크 광고.[21]
[1] 본인 스스로는 그 상식 이상의 가치관과 행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하다.[2] 특히 도널드 트럼프는 매우 독립적이었다.[3] 어느 날 친구와 잭나이프를 산 것을 부친에게 들킨 게 큰 동기였다고 한다.(출처: 다큐 "트럼프 삼대") [4] 2015년 이 학교는 문을 닫았다.[5] PCUSA가 아니고 화란개혁교회에 뿌리를 둔 RCA에 속한 교단이다. 다만 둘 다 주류 교파에 속하며 중도 및 자유주의 성향이란 점은 동일하다.[6] 베스트셀러 『적극적 사고방식』(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의 저자[7] 유리벽장 속 동성애자였다는 설이 있다.[8] 당연히 조종사는 손꼽히는 엘리트 직종이고 개인으로선 대단한 성과지만, 트럼프 일가의 가풍을 생각해보면 아버지 프레드 시니어나, 아버지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도널드에게는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기에 그리 대단치 않아보였을 것이다.[9]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으며 엄청나게 냉혹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트럼프에게 악명도 이득이라는 조언을 하였고 로이 콘을 신봉한 트럼프는 유명해진다면 그것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결국에는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 숱한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다 상대방이 반론하면 적반하장으로 끝까지 공격하며 물고 늘었다. 누가 봐도 트럼프의 논리가 잘못되었다고 여겨도 트럼프는 끝끝내 사과하지 않을 뿐더러 결국엔 내가 이겼다고 정신승리의 표상을 보여주었다. 악명도 이득인 이유도 들어보면 설득력이 있는데 아무리 악명을 떨쳐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엔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잊어버리고 이름만 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름만 남으면 이미지 세탁은 누워서 떡 먹기로 실제 트럼프는 TV를 이용해서 이미지 세탁에 성공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로이 콘 변호사가 트럼프에게 남긴 충고중의 하나는 결혼할때는 반드시 재산분할에 대한 혼전계약서를 써라! 라는 것이었는데 그 말을 충실히 따른 트럼프는 반복된 이혼에도 재산을 아낄 수 있었다고... 다큐멘터리 '트럼프: 미국인의 꿈'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로이 콘은 마피아 보스들의 변호사이기도 했다고 한다.[10] 사실 트럼프는 과거나 지금이나 차분한 성격이다. 단지 선거유세때 표심을 얻기위해 대중들에게 과격한 모습을 보여준것 뿐이다.[11] 트럼프는 자신의 아내 이바나에게 디자인을 맡긴다.[12] 이때 본위트 텔러 백화점에는 가고일 석조 조각이 있어서 지역 보존 협회가 떼어내 보존하려고 했는데, 트럼프는 걸림돌인 것마냥 싹 폭파시켜버렸다고 한다.[13] 본인 회고에 따르면 당시 업계 내 1~2%의 극소수.[14] 즉, 합성수지 도료(...). 최고급 아파트로 팔거라면 훨씬 좋은 재료를 쓰는게 상식적이지만, 트럼프가 돈 쓰는데에 인색했다고 한다.[15] 토니 슈워츠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거의 다 썼다. 엄밀히 말하면 트럼프는 책에 손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현재 이 작가는 트럼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16] 손자병법의 영문 제목 the art of war를 패러디해 이름 붙였다.[17] 맨해튼 코모도 호텔을 그랜드하얏트 호텔로 재건축하기 위해 뉴욕시를 상대로 협상하거나 당대로서는 최신식, 초호화 트럼프타워를 건설하는 등 당대때도 야심차고 추진력있는 젊은이로 인식되었으나 이후에 어느순간 갑자기 호전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했기때문. 실제로 30대의 트럼프는 당시에도 겸손하지는 않지만 차분하고 꽤 점잖다.[18] 1990년대는 미국 경제가 역대급으로 호황이었고, 중국, 러시아, 동유럽 각국, 동남아 각국 등 이머징 마켓이 속속 개방되었으며, 특히 금융시장은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발전을 거듭했다.[19] 그 덕분에 오스틴은 '''대통령에게 스터너를 먹인 사나이'''가 되었다.[20] WWE에서 트럼프는 진행을 담당했다.[21] 2007년에 나왔으나, 지나치게 높은 가격과(무려 20~100만원 사이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다)그에 어울리지 않은 품질덕에 2달만에 망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