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신궁

 


<colbgcolor=#504c4b> '''明治神宮'''
메이지 신궁 | Meiji Shrine


'''소재지'''
<colbgcolor=#ffffff> 도쿄도 시부야구 요요기카미조노초 1-1
(東京都渋谷区代々木神園町1-1)
'''제신(祭神)'''
메이지 덴노
쇼켄 황태후
'''사격(社格)'''
구 관폐대사(官幣大社)
칙제사(勅祭社)
별표신사(別表神社)
'''창건'''
1920년(다이쇼 9년) 11월 1일
'''예대제'''
11월 3일[1]
'''홈페이지'''
http://www.meijijingu.or.jp/
[image]
토리이
1. 개요
2. 내부 시설
2.1. 건축물
2.2. 인공림, 토리이
2.3. 술통
3. 일본 종교계 우파의 상징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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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요요기 구역에 위치한 신궁. 메이지 덴노쇼켄 황후 부부를 제신(祭神)으로 받든다.[2]
메이지 덴노는 1912년(메이지 45년)[3] 7월 30일, 쇼켄 황후는 1914년(다이쇼 3년) 4월 9일에 각각 사망했다.[4] 이후 지금 자리에 메이지 신궁을 지어, 1920년(다이쇼 9년) 11월 1일 낙성식을 겸하여 진좌제를 거행함으로써 메이지 덴노 부부의 신위를 봉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일본의 패전이 거의 눈앞으로 다가온 1945년 4월 14일에 미군 공습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됐다. 패전 이후인 1946년 5월에 부지에 가건물을 짓고 축제를 열었다. 그 뒤 본격적으로 재건을 시작하여 1958년 11월에 다시 낙성하였다.
경내 부지만 약 20헥타르, 전체 부지는 약 73헥타르(22만 평 남짓) 정도로, 일본 내 허다한 신사 중에서도 가장 큰 편에 든다. 가는 방법은 JR 히가시니혼 하라주쿠역이나 도쿄메트로 후쿠토신선 또는 치요다선 메이지진구마에<하라주쿠>역에서 도보로 1분 정도.[5]
신궁에서 동쪽으로 가면 메이지 신궁 야구장 옆에 메이지 신궁 외원(明治神宮外苑)이란 시설이 나온다. 메이지 천황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군대의 연병장이었는데, 여기에 천황의 시신을 운구하여 장례식을 치른 이후로 메이지 천황을 기념하는 공원처럼 되었고, 메이지 신궁 창건 이후로는 신궁의 부속시설이 되었다.

2. 내부 시설



2.1. 건축물


메이지 신궁 앞의 다리는 진구마에라 하여 옛날 코스프레[6]의 명소로 유명한 곳이지만, 현재는 코미케나 다른 행사에 밀려 많이 죽은 상태. 그외 길거리 밴드들이 가끔 거리 공연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평일에도 로리타메이드 복장을 한 코스플레이어를 항상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새해 첫 참배 스팟으로 유명한 곳으로, 하츠모데 풍경 등이 뉴스에 나올 때는 항상 이곳이나 가마쿠라의 모습이 나온다. 새해 첫날 하루에만 '''3백만 명''' 정도가 찾아온다고 한다.
신궁 내 본당 건물의 기둥 따위를 보면 온통 패인 자국으로 가득하다. 새해에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리자, 참배하고 싶지만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안쪽으로 동전을 던져 생긴 자국이다. 거의 천장 부근에도 패인 자국들이 가득한 것을 보면 정말 참배하기 힘든 듯.
건축물 자체는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지만, 지붕에 있는 푸른 기와는 구리로 만든 것이다.[7] 붉은 빛이던 새 구리 기와가 공기 중에서 물과 이산화탄소에 의해 산화되어 푸른빛으로 변한 것인데, 녹청 피막이 형성되면 더 이상 녹슬지 않아 반영구적이다. 참고로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의 푸른 돔도 구리로 만들었다.

2.2. 인공림, 토리이


참고로 울창한 숲이 주변을 감싸는데, '''인공림'''이다. 아무것도 없는 평지에 당시 일본 식민지 등지에서 나무를 공수하여 심은 것. 대략 '''10만 그루'''가 넘는다. 최초구성 때는 장기적으로 100년이면 숲을 이루리라 예상하였으나 50년 만에 지금과 같은 숲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맨 처음 사진의 거대한 토리이는 저것과 또 하나, 2개가 있는데 둘 다 통나무로 만들었다. 대만에서 헌납(그들 말로는 그렇지만)을 받아서 만든 것. 그것도 하나는 벼락을 맞아 쓰러져서 또 대만에서 헌납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8]
여하튼 위의 인공림과 더불어 당시 일본의 국력이 강성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 인공림 덕분에 종교시설이라는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공원 기능(?)도 하기 때문에 외국인도 적지 않다.

2.3. 술통


신사 내에는 와인과 청주가 가득 담긴 통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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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는 신사 내 행사 때 쓰려고 각 양조업체에서 기증한 것들[9]이고, 와인은 생전에 와인을 좋아한 메이지 덴노를 추모하기 위해 부르고뉴에서 기증받은 것들이다. 100년이 넘은 물건들이므로 뚜껑 따면 굉장하겠지만 아쉽게도 안은 텅 비었다. 언제 누가 마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신사에서 일하던 누군가가 마시지 않았겠냐는 도시괴담 같은 말이 정설로 굳어진 듯하다. 현실적으로는 보관미비로 인한 증발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100년간 전쟁에 대지진태풍홍수 등등 온갖 자연재해는 다 있었고 그와중에 실외보관을 하다보니 관리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 술 전문가도 아닌 신사 직원들이 관리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보니 통이 상해서 내용물이 증발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신궁 배전 내에서는 앉으면 안 된다. 신관이나 무녀가 와서 혼낸다.
참배로 옆에 여러 사진과 함께 일본어영어중국어한국어 순서로 메이지 덴노의 일생에 대해 쓴 기다란 설명문이 있는데, 천황 찬양 일색인 데다가 이토 히로부미도 훌륭한 대신으로만 묘사한다.
전통 결혼식 혼례장으로도 꽤 쓰인다. 일요일 오전 10시 혹은 11시에 가면 전통혼례식의 시작 혹은 끝을 볼 수 있다. 2018년에는 아키히토 덴노의 5촌 조카 아야코 공주도 여기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여간 도쿄도일본인의 정신적인 집결지로 유명한 신궁. 관광지로도 유명한 곳. 하라주쿠에 올 기회가 있다면 오모테산도 힐스에만 가지 말고 한 번 들러보도록 하자.

3. 일본 종교계 우파의 상징


메이지 신궁은 시작부터 천황을 정점으로 따르는 일본 우익집단의 상징 역할을 해왔다. 막부체계에 기반을 두었던 시대를 완전히 종식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완성한 메이지 덴노는 일본 우익집단들에게는 정신적인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다. 메이지 덴노를 모시는 메이지 신궁은 창건 이래로 수많은 우익집단과 고위인사들이 모이는 장소로 애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메이지 신궁의 신직은 일본 우익집단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망 있고 영향력 있는 직책이었고, 신궁의 신직들이 은퇴한 후 우익집단의 지도자나 실무자 역할을 겸하여 메이지 신궁의 영향력은 더욱 더 커졌다. 또한 메이지 신궁은 전후 종교법인으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한 뒤에 다양한 수익사업을 벌여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였고,[10] 종교법이라 감사가 느슨하므로 자금을 마구 우익집단들에 뿌려 많은 우익집단들이 메이지 신궁의 말을 따르게 만들었다.
일본 신사의 총본부이자 종교계 우익의 핵심단체로 지목받는 신사본청도 실질적으로는 메이지 신궁 관련 인사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오늘날 종교계 우익단체들 중에서는 또다른 큰손인 생장의 집과 함께 양대 거두라 할 만하다.[11]

4. 기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홈구장이 직선거리로 약 1.5 km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 신궁과 약 2 km 떨어진 메이지 신궁 외원과 붙어있어서 메이지진구 야구장이다. 낚이지 말자.
메이지 덴노는 재위기간이 너무 짧았던 다이쇼 덴노, 제2차 세계 대전에 책임이 있는 쇼와 덴노와는 달리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을 근대화하고 부국강병을 이끈 천황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일본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 때문에 일본 정부는 메이지 사후에 거대한 신궁을 세울 계획을 세웠고, 국민들도 여기에 호응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메이지 신궁에 방문(참배?)하는 한국인 관광객은 많고, 대부분은 관광지로서 방문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곳을 한국인이 참배하거나 소원을 비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다. 관련 기사 한국이나 외국의 성당, 절 같은 순수한 종교시설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야스쿠니 신사급의 악질적인 장소는 아니고 메이지 덴노 본인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보다는 아랫사람들에게 맡기는 경향이 강했지만 결국 그 아랫사람들이 조선 식민지배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나마 한국과의 악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한국어, 중국어로 쓰인 에마는 정말 많은 편이다. 한국인보다는 대만인들이 더 많이들 쓴다.

[1] 메이지 덴노 탄생일[2] 메이지 신궁에는 쇼켄 황후가 '쇼켄 황태후'란 이름으로 봉안됐다. 다이쇼 덴노가 즉위한 뒤 쇼켄 황후가 사망했으므로, 당시 기준으로 (생모는 아니지만) 천황의 어머니, 즉 황태후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덴노의 아내로서 신궁에 봉안할 경우에는 황태후보다는 황후라고 칭함이 합당하지 않느냐.' 하는 의견이 많다. 일본어 위키페디아 항목에 따르면, 본디 '쇼켄 황후'라는 명칭으로 봉안해야 마땅했지만, 궁내대신이 실수로 '황태후'라고 적어 다이쇼 덴노로부터 재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후 칭호를 정정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한번 정한 이상 바꾸는 것도 황공하단 이유로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고...[3] 메이지 덴노가 사망한 당일에 다이쇼(大正)란 연호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1912년 7월 30일은 메이지 45년이자 다이쇼 1년이다.[4] 일본어 위키페디아나 한국어 위키피디아는 쇼켄 황후의 사망일이 1914년 4월 9일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메이지 신궁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사망일이 4월 11일이라고 설명하며, 일본의 당시 신문들도 1914년 4월 11일에 쇼켄 황후가 사망했다고 급전으로 보도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실제 사망일은 4월 9일이 맞으나, 당시 궁내성 대신이던 와타나베 치아키의 궁내성 내장두(內蔵頭) 시절 받았던 뇌물로 인해, 와타나베를 경질하기 위해 여러 절차가 겹쳐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지금도 메이지 신궁과 천황가는 4월 11일을 쇼켄 황후 제사일로 지낸다.[5] 입구까지만 도보로 1분 정도 본 신궁까지는 꽤 긴 참배로를 걸어들어 가야 한다. 한 5~6분 정도[6] 그중에서도 고스로리 계통[7] 나라현 텐리시에 있는 천리교 본부의 교조전(敎祖殿)도 기와를 구리로 만들어 색이 푸르다.[8] 당시 대만은 조선에 비해 삼림 황폐화가 덜 이루어져 원시림이 비교적 많았다.[9] 광고효과가 상당하다.[10] 참배객들의 시주, 결혼식장과 조리시설의 운영, 운동시설의 대여 등으로 수익을 연간 60억 엔 이상 벌어들인다. 이외에도 종교법인 특성상 감사가 느슨하므로 이를 이용하여 비공식적으로 전달하는 고위인사들의 기부금 등까지 포함하면, 메이지 신궁은 막대한 자금을 움직이는 큰 손이다.[11] 생장의 집이 주로 사이비종교단체 특유의 비정상적인 수준의 자금 및 인력동원에 특화되었다면, 메이지신궁은 주로 막강한 자금동원능력과 함께 메이지 덴노를 모시는 신사라는 강력한 정치적 명분에 특화되었다. 이 때문에 두 단체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협력하여 일본 종교계 우익의 힘이 우익단체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성장했다. 다만 생장의 집은 2009년 타니구치 마사노부(谷口雅宣)가 3대 교주로 취임한 뒤로는 색을 바꾸어 우파보다는 좌파에 가까운 경향을 띄는데, 3대 교주 취임 이전까지 생장의 집 차원에서 양성한 우익 계열 인사들이 워낙에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