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방경비대
남조선국방경비대
Korean (National) Constabulary [2]
조선경비대(朝鮮警備隊)란 건군기에 창설된 군사조직으로,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이다. 정확히 말하면 육공군의 통합군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대도 예하에 뒀다. 조선경비대의 경비대란 말은 경찰예비대의 준말이다.
건군기 항목의 조선경비대 문서가 해당 항목보다 더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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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준비대처럼 독립 직후 한반도에는 훗날 정규 국군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던 무장집단이 많았다. 그 구성도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 팔로군, 국부군, 광복군, 만주군 등 출신 성분이 다양했다. 1945년 11월경에는 군사단체가 60개를 넘을 정도였다. 미군정은 이들이 상황을 어지럽힌다 판단하여, 조선해안경비대로 정식 편입된 해방병단을 제외한 모든 사설 군사 조직을 해체시키고 1945년 12월 5일에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를 열었다. 이 학교는 지휘관이나 참모가 될 수 있는 장교들을 교육하기 위한 곳으로 당시 입학자 상당수는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3] [4] 오랜 통치로 인하여 조선인 일본군으로 복무한 사람이 20만명에 달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일정한 교육을 거친 뒤에 소위로 임관되었고 영관이나 장관급 장교가 없는 당시 한국군의 특성상 빠르게 진급했다. 영관급은 특례로 몇몇만 임관했다. 일본의 경찰예비대가 미 육군 고문관을 지휘관으로 두고 모든 최초 입대자가 이등경사 계급을 받은 것과는 차이 나는 점이다. 물론 패전국에서 창설 된 경찰예비대와의 동일 비교는 무리가 있다.
미군정기 1946년 1월 15일에 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같은 날 태릉에 제1연대가 창설된 걸 시작으로 1월 29일 부산에 5연대, 2월10일 충북에 7연대, 2월 15일 전남에 4연대, 2월 18일 대구에 6연대, 2월 26일 전북 익산에 3연대, 2월 28일 대전에 2연대, 4월 1일 강원 춘천에 8연대, 11월 16일 제주도에 9연대가 연이어 창설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연대급 병력으로 창설된 건 아니었고, 각 도별로 중대 규모로 시작해 현지모병과 타 부대에서 병력들을 규합해 대대, 연대로 확장시킬 계획이었다. 예컨데 1연대 A중대(現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비호여단) 중대장은 채병덕 정위로 총 인원은 187명이었고 경비대 사령관은 미 육군 중령인 존 마샬이었다. 창설 인원은 태릉에 있던 일본군 지원병훈련소에 주둔했다.
1946년 6월 15일엔 조선경비대로 개칭된 뒤 9월에 첫 한국인 지휘관인 이형근이 사령관 대리로 임명된 뒤 이듬해인 1947년 2월 1일 한반도 남쪽을 각각 담당할 1,2,3 여단이 동시에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9월 1일에 국방부 산하로 들어가고 9월 5일에 대한민국 육군이 되었다. 11월 3일부턴 국방부 산하에 육군본부가 탄생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 뒷자리 여단들도 창설되었고, 기존 여단의 연대들이 차출되어 기간(基幹) 부대가 되기도 했다.
처음엔 대한제국군의 정부참을 따랐으나 계급이 어렵다고 1946년 12월 1일 대중소로 바꾸었다. 처음엔 장성급 호칭이 없었으나 1947년 2월에 송호성과 손원일이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생겼다. 관련글
1946년 1월 15일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땐 187명 규모였고 한국인 가운데 최고계급자가 정위(대위)였다. 다만 곧 이응준이 대령(정령)으로 임관한다.
1948년 12월 7일에 보병 5개 사단(15개 연대) 규모였으며 장교 1,403명, 부사관/병이 49,087명으로 50,490명 규모였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육군의 상한선은 65,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장비 규모는 장갑차 27대, 57mm 무반동총 140정, 2.36인치 로켓포 1,900문, M3 105mm 야포 91문이며 전차는 한 대도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엔 규모를 계속 키워 94,974명에 8개 사단(22연대) 수준이었다.
Korean (National) Constabulary [2]
1. 개요
조선경비대(朝鮮警備隊)란 건군기에 창설된 군사조직으로,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이다. 정확히 말하면 육공군의 통합군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대도 예하에 뒀다. 조선경비대의 경비대란 말은 경찰예비대의 준말이다.
건군기 항목의 조선경비대 문서가 해당 항목보다 더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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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준비대처럼 독립 직후 한반도에는 훗날 정규 국군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던 무장집단이 많았다. 그 구성도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 팔로군, 국부군, 광복군, 만주군 등 출신 성분이 다양했다. 1945년 11월경에는 군사단체가 60개를 넘을 정도였다. 미군정은 이들이 상황을 어지럽힌다 판단하여, 조선해안경비대로 정식 편입된 해방병단을 제외한 모든 사설 군사 조직을 해체시키고 1945년 12월 5일에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를 열었다. 이 학교는 지휘관이나 참모가 될 수 있는 장교들을 교육하기 위한 곳으로 당시 입학자 상당수는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3] [4] 오랜 통치로 인하여 조선인 일본군으로 복무한 사람이 20만명에 달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일정한 교육을 거친 뒤에 소위로 임관되었고 영관이나 장관급 장교가 없는 당시 한국군의 특성상 빠르게 진급했다. 영관급은 특례로 몇몇만 임관했다. 일본의 경찰예비대가 미 육군 고문관을 지휘관으로 두고 모든 최초 입대자가 이등경사 계급을 받은 것과는 차이 나는 점이다. 물론 패전국에서 창설 된 경찰예비대와의 동일 비교는 무리가 있다.
2. 역사
미군정기 1946년 1월 15일에 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같은 날 태릉에 제1연대가 창설된 걸 시작으로 1월 29일 부산에 5연대, 2월10일 충북에 7연대, 2월 15일 전남에 4연대, 2월 18일 대구에 6연대, 2월 26일 전북 익산에 3연대, 2월 28일 대전에 2연대, 4월 1일 강원 춘천에 8연대, 11월 16일 제주도에 9연대가 연이어 창설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연대급 병력으로 창설된 건 아니었고, 각 도별로 중대 규모로 시작해 현지모병과 타 부대에서 병력들을 규합해 대대, 연대로 확장시킬 계획이었다. 예컨데 1연대 A중대(現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비호여단) 중대장은 채병덕 정위로 총 인원은 187명이었고 경비대 사령관은 미 육군 중령인 존 마샬이었다. 창설 인원은 태릉에 있던 일본군 지원병훈련소에 주둔했다.
1946년 6월 15일엔 조선경비대로 개칭된 뒤 9월에 첫 한국인 지휘관인 이형근이 사령관 대리로 임명된 뒤 이듬해인 1947년 2월 1일 한반도 남쪽을 각각 담당할 1,2,3 여단이 동시에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9월 1일에 국방부 산하로 들어가고 9월 5일에 대한민국 육군이 되었다. 11월 3일부턴 국방부 산하에 육군본부가 탄생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 뒷자리 여단들도 창설되었고, 기존 여단의 연대들이 차출되어 기간(基幹) 부대가 되기도 했다.
3. 계급
처음엔 대한제국군의 정부참을 따랐으나 계급이 어렵다고 1946년 12월 1일 대중소로 바꾸었다. 처음엔 장성급 호칭이 없었으나 1947년 2월에 송호성과 손원일이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생겼다. 관련글
4. 역대 사령관
5. 규모
1946년 1월 15일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땐 187명 규모였고 한국인 가운데 최고계급자가 정위(대위)였다. 다만 곧 이응준이 대령(정령)으로 임관한다.
1948년 12월 7일에 보병 5개 사단(15개 연대) 규모였으며 장교 1,403명, 부사관/병이 49,087명으로 50,490명 규모였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육군의 상한선은 65,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장비 규모는 장갑차 27대, 57mm 무반동총 140정, 2.36인치 로켓포 1,900문, M3 105mm 야포 91문이며 전차는 한 대도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엔 규모를 계속 키워 94,974명에 8개 사단(22연대) 수준이었다.
6. 관련 문서
- 건군기
- 국방경비대 재현사칭 사건
- 대한민국 육군
- 대한민국 해군 - 직접적인 관련 없음.
- 대한민국 공군
- 조선해안경비대 - 별개의 조직. 한국 해군의 전신이다. 미 해안경비대의 교육 지원이 있었다.
- 일본군
- 조선군(일본제국)
- 만주군
- 국부군
- 한국광복군
- 미군
[1] Regiment, 즉 연대의 약칭이다.[2] 경비대원이 패용했던 흉장에 소속이 한자와 영문 'Korean Constabulary'로 기재되어 있다.[3] 당시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에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 광복군 출신들이 균등하게 참여하기를 바랬으나 상당수의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에 부정적이라 소규모만 참여하였다.[4]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공과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사회주의권과 인력풀이 있는 지역과 가까웠기에 충원과 지원이 쉬웠다. 그런 그들도 군 경력자가 절실하여 일본군 출신들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특히 공군 조직은 일본군 출신들이 대다수였다.[5] 1948~49년 사이 대구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반란군 외는 제3보병사단 22연대로 합병시켰다. 참고로 대구 10.1 사건 수년 후에 일어나서 별개의 사건이다.[6] 정확히는 10연대를 기간연대로 8사단이 창설되었고, 이후에도 8사단 예하에 있었지만 2017년 11월 30일에 해체됐다.[7] 다만 (구)수도사단으로 승격될 때 현 수도사단의 전신인 수경사로 보냈기에 좀처럼 언급되지는 않는다.[8]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현재의 합참의장이나 국방참모총장이라 볼 수 있다. 아니면 중국이나 북한의 총참모장과 비교할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보다는 통합군사령관에 더 가깝다.[9] 1920-2002. 일본군 대위 출신으로 한국군 군번 1번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번을 받은 걸로 채병덕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유는 채병덕도 1번을 노리고 있어서. 5대 총사령관을 지낸 이응준의 사위이다. 최종 계급은 한국군 육군 대장이다.[10] 1889-1959. 김구의 측근으로 육군 창설 후 사단장 등을 지내다가 김구의 암살 이후 납북된 뒤에 조선인민군 여단장 등을 지내다가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유배됐다.[11] 1891-1985.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군 대령(대좌)으로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최종계급은 한국군 육군 중장이다.[12] 현재의 육군참모총장에 상당한다.[13] 1908-1968. 만주군 중령(중교)이었다. 만주군에선 군의관이었다. 최종계급 한국군 육군 중장.[14] 현재의 해군참모총장에 상당한다.[15] 현재의 공군참모총장에 상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