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보병여단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 제7보병사단 예하 '''제8보병여단'''. 별칭은 '''상승불사조부대'''. (다만 너무 길어서 상승 혹은 불사조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1946년 4월 1일 강원도 춘천에서 창설되었으며, 제6보병사단의 전신인 4여단 창설 때 근간연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변경되고, 이후 6.25전쟁이 발발, 수경사가 수도사단으로 재창설되고부턴 그 예하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 후 한강 방어선에 투입돼 공방전을 치루는데, 이 와중에 전선 시찰중인 맥아더 원수 앞에 8연대 일등중사가 군인정신을 이유로 진지를 고수하는 모습이 비춰졌고, 이에 파병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청주 전투에서는 민가에서 빌린 삽과 곡괭이, 그리고 대검으로 진지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이후 낙동강 전선 영천 전투 즈음 7사단으로 예속된 뒤 전쟁 중후반부터는 사단의 주력으로 취급되어 피의 능선 전투를 간접적으로 지원하기도 했고, 백석산 전투에서는 주공을 맡기도 했다.
전후 7사단을 따라 강원도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다 현재는 화천군 우측 전방을 담당하고 있다.
참고로 국방개혁 2.0 기본계획에 의거, 상비사단과 지역방위사단이 개편돼 8보병연대 역시 2020년부로 8보병여단으로 격상되었다.
2. 근무환경
[image]
출처: #
'''신이 버린 땅.''' 이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휴전전 155마일 중 북한강 자락과 그 인근(평화의 댐 포함) 지역을 담당하는데, 최고로 험준하고 가파른 지형이기도 하다. 이 험준함은 7사단에서도 최고로 알아줄 뿐더러, 옆 동네 양구 21사단의 섹터 길이 난이도와 자웅을 겨룰 정도이기에 7사단 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전생에 7가지 죄를 지으면 7사단으로 오고, 여기에 엄청나게 악질적인 죄 하나를 더 저지르면 8여단으로 끌려간다는 얘기가 돌 정도다. 게다가 5여단에서 8여단 사이의 접경 지역을 '신조차도 버릴 것 같은 땅'이라고 하는데, 이는 8여단은 이미 버린 땅이고 접경 지역은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GOP를 포함, 민통선 이북은 3,40도의 가파른 산비탈이나 계곡들로 이루어져 있어 이곳에 조성된 예하부대 부지들와 보급로 일대가 상당히 가파르다. 그래서인지 일대 소초 근무자들도 저마다 자질구레한 무릎 질환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배우 원빈 역시 이 여단 GOP로 배치된지 몇달만에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의병 제대를 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복무가 싫어 엄살부려 제대했다고 까기 쉬운데, 원빈이 배치된 곳은 인근의 M, W자 섹터들 중 악명높은 '''마의 네발 계단'''[1] 이 있는 소초였다. 심지어 초소별 순환을 제 시간에 완수하려면 이런 곳도 속보로 다녀야 하기에 다리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2]
하여간 이 때문에 근래 들어 네발계단 같은 급경사 계단 옆에 지그재그형 길이나 철계단과 족장 등을 설치해 오르내리기 편하게 만들어 놓기도 했으며, 여기에 유사시 보급을 위한 간이 케이블카 등을 추가로 설치해 장병들의 피로와 비전투 손실을 줄이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지형이 원체 그 모양이다 보니 지금도 의병전역은 알게 모르게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OP로 가는 도로도 정신나간 급경사와 회전각을 자랑해서 안전상의 이유로 병력 탑승 상태로 주행을 금하는 승하차 구간이 꽤 있으며, 이 구간 펫말이 보이면 일단 하차해서 먼저 가서 기다리는 차량까지 걸어가야 한다. 게다가 특히 일곱굽이로 굽어져 있는 칠성로는 사고 주의와 안전을 기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인근 장병 및 운전병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으며, 이 구간에서 전방부식차량은 2단 기어에 차동 기어(데후)를 쳐야 간신히 올라간다. 이 때문에 8여단 수송대에선 전방운행 가능자를 따로 분류해 자체 운전교육 및 시험을 따로 거친다.[3][4] 또한 장마를 전후해 계곡 쪽 저지대는 범람해 침수되도 이상할 게 없고, 그게 아니더라도 크고 작든 뭔가가 깎여나가기에 보수할 일도 잦다. 특히 깎여나간 곳이 부대 뒤편 산자락이나 보급로, 연병장, 작계지와 그곳으로 향하는 길일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5] 그물이나 비닐을 임시방편으로 덮고 나중에 토사나 공구리로 수차례 메운다. '''물론 인력으로'''.[6]
게다가 제설작전도 급경사와의 전쟁인데, 가파른 보급로에 쌓인 눈을 '''길 밖으로 적당히 수준이 아니라 아주 깨끗하게 제설하지 못하면''' 차량이 그 잔여 눈들로 생긴 얼음 때문에 오르내리지 못해 그 길로 보급받는 해당 소초는 말 그대로 외부와 단절된 고립생활을 해야 한다.[7] 그래서 이 경우를 대비해 소초 창고엔 전투식량과 인스턴트 부식, 꼬리곰탕, 카레, 짜장 통조림이 며칠치 이상 있고, 쌀도 1~2개월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가득 비축해 놓는다. 다만 보급, 관리의 편의를 위해서인지 그 종류는 제한되어 있기에 고립일이 길어질수록 똑같은 식단에 질린 장병들이 불만을 가지기 쉽다. 물론 이는 대대/여단 본부에서도 인지하고 있어 주변 모든 부대의 인력들을 차출시켜서라도 가능한 빨리 해결하려고 하기에 이런 고립사태는 일주일 이상 가지 않는다.
여단 명물(?)로는 수리봉[8] 과 당거리 삼거리[9] 에서 분기되는 함묵령, 북진령, 칠성로 및 백암소초 등이 있지만, 신이 버린 땅답게 저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난이도 및 순위는 해당 부대 전역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3. 예하부대
3.1. 여단 직할대
3.1.1. 본부중대
한때나마 민통선 이북 산비탈을 까 만든 5여단 본부와 달리 신교대보다도 후방에 있는 '비교적' 평탄한 부지에 있다. 험준한 민통선 이북 상황 때문에 유지관리가 용이한 부지를 택한 듯.
3.1.2. 수색중대(GP)
수상령 일대를 담당하는 독립중대. 비상설 간이 PX가 있다.
게다가 하루 두번 화천 버스 13가 회차하는 지점이라 여러모로 5여단의 주파리 사거리와 유사하다.
3.1.3. 포병대 (구: 전투지원중대)
GOP 후방 소초로 명중포가 있다.
3.1.4. 통신중대
3.1.5. 의무중대
3.2. 예하 대대
3.2.1. 군수지원대대 (구: 연대 수송대)
본부보다 약간 전방에 있는 독립중대로, 상술했듯 운전에 애로사항이 많다.
3.2.2. 제1대대 진북
계곡을 깎아만든 신읍리에 주둔중.
3.2.3. 제2대대 멸공
GOP 담당중.
3.2.4. 제3대대 통일
여단 본부보다 약간 후방에 지어진 신막사에 주둔중.
4. 출신인물
4.1. 여단장
4.2. 장교/부사관
중령 시절 8연대 2대대장을 맡았었다.
춘천에 주둔하던 초창기 때 소대장~중대장을 지냈다.
4.3. 병
5. 기타
5.1. 부대영상
[11]
5.2. 여단가
6. 사건사고
7. 여담
여담으로 화천 버스 10번은 신읍리, 13번은 안동포-수상령까지 운행하며, 안보관광 활성화를 원하는 화천군이 '''5여단의 칠성전망대로는 부족하다 하여''' 백암산 일대를 조망하는 전망대를 공사 중이다.[12] 이 과정에서 2015년도에 공사 차량이 전복돼 1명이 숨지기도 했다.# 2019년 8월 지역신문에서는 공정이 75%정도 진행되어 구조물 공사가 마무리 단계라고 밝혔고 내년 상반기에 개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이후 소식이 끊겼다.# 그밖에도 대전차 방호벽 있는 고개는 한묵령인데, 발음이 비슷해 함묵령으로도 불린다.#
또한 1946년 4월 1일 창설 당시 및 이후 9월 5일 송요찬 소위를 포함한 5연대 일부 병력들이 강릉으로 이동해 8연대의 창설 멤버로 합류했으며,[13] 이후 6여단(현 제6보병사단)으로 예속되었는데, 1947년 7월 강릉에 주둔중인 3대대에서 간부들의 일본식 똥군기를 참다못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대장이 구타당하고 총격전까지 벌어지자 미군이 진압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게다가 한국 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에도 해당 연대의 두 대대장인 표무원과 강태무가 군 내 남로당 숙청을 피해 훈련 명분으로 휘하 대대원들을 이끌고 나란히 월북한 흑역사가 있다.[14]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등장 인물인 이진석의 최종 소속 부대이기도 하다.[15] 공교롭게도 말이 씨가 되었는지, 배역인 원빈은 훗날 여기로 자대배치돼 네발계단에서 똑같이 다리(무릎) 문제로 의병제대하고 말았다.
[1] 두 발로는 오르기 힘들어 네발로 기어 올라간다는 계단. 내려갈때는 등에 계단이 닿을 정도라고 한다.[2] 다만 원빈은 신교대 때부터 무릎 안좋다고 활동화신고 다녔고, 자대에서도 의무대 들락거리다가 일병 달자마자 의병제대해 꾀병이라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원빈이 왼쪽 십자인대 파열로 제대한걸 생각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의병제대하겠다고 십자인대를 일부러 파열시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잃는게 더 많다.[3] 덕분에 이곳에서 스릴 넘치는 운전병 생활을 했다면, 웬만한 산자락 도로는 다 쉬워 보일 것이다.[4] 참고로 옆동네 5여단과 마찬가지로 열약한 도로와 배차 사정 때문에 GOP에서 휴가를 가려면 FEBA보다 하루 먼저 출발해 수송대에서 따로 보내줬거나 부식 보급차 온 K-311(5/4TON), K-511(2.5TON)를 타고 가되, (이는 03년도부터 시행되었으며, 그 전에는 온종일 걸어다녀야 했다.) 승하차구간에선 필히 하차해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저녁 즈음 여단본부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고 (이는 5여단도 사정이 비슷하며, 연본 측에서 세면 도구를 기본적으로 제공하지 않기에 챙겨가거나 본부중대에 동기가 있다면 빌려달라 하기도 한다. ) 다음 날 아침 생활관 앞에서 대기하거나 연병장에 주차된 트럭, 레토나, 혹은 버스를 타고 면이나 읍내에 내려 가기도 했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땀내가 베이는 건 덤.[5] 추가 붕괴 위험뿐만 아니라 상술했듯 경사도 가파르다.[6] 게다가 우천시 생활관, 강당, 병사식당 등에서 교육 혹은 점호로 대체하는 후방 부대들과 달리 여긴 비가 거세지면 우비를 입고 보급로를 돌아봐야 하는데, 특히 8여단 보급로는 '''거의 죄다 그 모양인지라 더더욱 신경써줘야 한다.''' 일단 비포장도로의 경우 빗물이 길을 패이게 만들고, (설령 포장도로라 할지라도) 위에서 흘러내린 흙탕물이 산사태를 일으켜 길을 덮치기도 하는데, 이보다 더 심각한 건 흙탕물과 토사가 보급로 위나 배수로에 점점 쌓여가다 보급로 지반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거나 액상화되는 그 순간 저 밑으로 몽땅 쓸려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심각성을 목도하거나 후술할 방법으로 뒷수습까지 하고 나면 차라리 폭설이 낫다 생각될 지경이다.[7] 물론 항상 깨끗이 제설을 해야하는 길이 또 있어 완전 고립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같은 철책선[8] (모 게임의 마르카스 마냥) 험준한 계곡에 조성된 신읍리 대대 인근의 봉우리로, 5여단에 장고봉이 있다면 8여단엔 수리봉이 있다.[9] 참고로 이 일대에 '''신읍리처럼 계곡을 까서 만든''' 통칭 당거리 대대가 있었는데, 부지 자체도 협소하고 장마철이면 '''당연하다는 듯 연병장과 뒤편 산비탈이 깎여나가는''' 괴랄한 곳이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부지다 보니 후방 신막사가 완공되자마자 버려졌다.[10] 참고로 홍보 차원인지 아니면 악감정 때문인지 하필이면 사단 섹터 중 최고로 가파른 네발계단 소초에 배속되어 국방일보에도 실릴 정도였지만 그로부터 몇개월만에 다리절며 의병 된걸 보면 3교대 밀어내기와 급경사 속보 속에서 심신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악화된 모양.[11] 해당 영상은 94년도 당시 '''여전히 혹독했던 8연대의 근무환경과 험준한 길''', 그리고 사단 수색대대를 다룬 몇 안되는 다큐멘터리로 96년 열린 7회 로마 군사영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2] 다만 정작 진입로는 5여단 수색중대를 경유하는 구조라 5여단의 부담이 더 클수도 있다.[13] 이 당시 남조선국방경비대 연대들은 완편 상태가 아닌 중대급으로 일단 창설한 뒤 주둔지에서 현지 모병이나 타 부대의 병력들을 규합해 연대급으로 군세를 불려나갔다.[14] 다만 사전에 모의된 게 아니었기에 월북해 북한군에게 투항하기 전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챈 중대장을 포함한 몇몇이 저항하다 3개 중대가 포위망을 뚫고 가까스로 탈출한 사례가 있었다.[15] 작중 마지막에 형을 찾아 피의 능선 전투가 벌어지는 두밀령까지 가게 되는데, 이 때 소속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