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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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발레리 콘스탄티노비치 사리체프(Вале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арычев)는 대한민국 K리그에서 맹활약했던 타지키스탄의 前 축구 선수로, 지금은 한국에 귀화하여 신의손(申宜孫)으로 개명했다고 하는데, 실제 주민등록증 상의 이름은 '사리체프'로 되어 있으며 '신의손'은 선수등록명으로 된 듯 하다. 별명으로 '神의 손'이라고 불리었던 걸 아예 그쪽으로 (한자는 바꿔서) 개명한 것. 구리 신(申)씨의 시조다.[3]
2. 클럽 경력
선수 데뷔는 SKA-파미르 두샨베에서 했지만 소련에서 주로 활약했던 팀은 FC 토르페도 모스크바 시절이며 161게임 출장에 153실점을 기록했다. 10년의 커리어 통산으로 1게임 1실점 이하를 기록한 것. 토르페도 모스크바는 지금은 비록 러시아의 2부 리그지만 사리체프가 뛰던 1981-1991년 때는 구 소련 1부 리그에서 3위와 6위 사이 성적을 꾸준히 유지했고 소련 FA컵에서 1회 우승, 4회 준우승을 기록한 상위권 팀이었기에 그 또한 UEFA 컵위너스컵, UEFA컵 등의 유럽대항전 출전 경험도 있었다.[4]
사실 사리체프는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리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고 소속팀에서 주전과 후보를 오갔다. 28세가 되던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전 자리를 꿰찼고 1990년 소련 올스타 33인의 골키퍼 부문 3위, 1991년 소련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며 30대가 되어서야 소련의 최고 수준 골키퍼로 인정받았다.[5]
그런데 공교롭게도 전성기를 맞이한 이 시기에 소련이 해체되었고 그 다음 해인 1992년 일화 천마에 입단하며 한국과 연을 맺게 된다. 일화 천마에서 뛸 당시부터 경기당 실점율이 소수점 이하라는 괴물 같은 성적[6] 을 내면서 전년도 리그 최다 실점 팀이, 골키퍼가 바뀌더니 리그 최소 실점 팀으로 변모되었다. 이 때 뒷날 그의 이름이 되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대미문의 K리그 3년 연속 우승 신화는 덤이다.
사리체프에 이어 부천 유공에서 영입한 샤샤(알렉산드르 포드쉬발로프, Александр Подшивалов) 또한 무지막지한 실력을 보이면서 프로축구의 모든 팀들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는 붐이 일었다. 결국 대한민국 축구 팀들이 토종 골키퍼들을 외면하면서 그의 등장이 1997년 이후 K리그에서는 외국인 골키퍼를 불허[7][8] 하는 규정을 만들었을 정도.(이 때 김병지가 군계일학의 실력을 보인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지만, 2000년에 귀화 자격을 갖춰서 귀화 시험을 통과, 이름을 자신의 별명인 '''신의손'''으로 짓고[9]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양 LG로 복귀했는데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동계훈련에는 10일밖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하면서 안양 LG에 우승을 안겨 주고 2005년 5월에 정식으로 은퇴했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뛴 일화 시절에는 157경기에 출장하여 179실점을 기록했고,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뛴 안양 LG 시절에는 95경기 출장 99실점을 기록했다. 현재까지도 K리그에서 이 기록에 비견될 선수는 오직 김병지뿐이다.
3. 지도자 경력
이후 WK리그의 고양 대교의 코치를 지내다가 홍명보의 스카웃으로 대한민국 U-20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코치를 역임했고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를 맡았다. 그와 동시에 2011년부터 올림픽 국가대표팀 주전 골키퍼인 이범영이 소속된 부산 아이파크의 골키퍼 코치를 맡고 있다. AFC U-19 챔피언십 우승의 주역 중 하나인 이창근 또한 신의손 코치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이천대교로 복귀하였고, 2018년부터 FC 안양의 골키퍼 코치를 맡게 되었으며, 2019년 김해시청 축구단의 골키퍼 코치로 부임하였다.
4. 대한민국 축구계에서의 위치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골키퍼의 중요성을 일깨운 주인공이다. 신의손 등장 이전까지는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골키퍼는 단지 필드 플레이어에서 밀려난 키 큰 선수들이 보는 포지션이었고, 골키퍼 전담 코치 따위는 사치였다.
하지만 소련에서 정규 골키퍼 코치에게 배워 온 신의손이 차원이 다른 선방을 선보이면서 일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자, 1994년에 일어난 대한민국 골키퍼의 양대 비극 중 하나인 미국 월드컵 독일전 최인영의 실수[10] ,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주전 골키퍼 차상광의 알까기[11][12] 가 맞물려서 골키퍼의 중요성과 체계적인 양성이 대한민국 축구의 과제로 떠올랐다. 게다가 신의손 등장 이후 너도나도 다른 팀에서도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니까 연맹에서 외국인 골키퍼의 영입 금지까지 만들 정도니... 이 때부터 최소한 프로 팀들은 전담 골키퍼 코치를 두기 시작했고, 학원 팀에도 필드 플레이어와는 전혀 다른 골키퍼 양성이 과제로 주어졌다.
특히 월드컵 독일전 때문에 최인영에 대한 실망감이 극에 달했을 때는 "한국인 골키퍼로는 희망이 없으니 사리체프를 귀화시켜서 대표팀에 발탁하자"는 여론도 있었다. 이후 김병지, 이운재가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면서 그런 이야기는 쏙 들어갔지만, 대표팀과는 관계 없더라도 결과적으로 귀화를 하기는 한 셈이다.
그리고 신의손이 은퇴하고 다시 귀화하면서 선수복귀하고 한 뒤에 재은퇴하고 잠시 프로팀 코칭스탭이나 여자 축구 골키퍼 코치 등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코치가 아닐 때가 있었다. 이 때 부천 유공의 니폼니시 감독 통역이었던 강창석 통역과 함께 거의 무보수로 전국의 중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골키퍼 클리닉을 열기도 했다. 지금 꽤 큰 선수들 중 여럿이 신의손의 지도를 어렸을 때 한 번이라도 받아본 사람이 태반이 넘는다고. 기량 부분에선 언젠가 신의손을 능가하는 선수가 나올수도 있겠지만, 그 골키퍼들의 선수 은퇴 뒤의 밥벌이를 만들어 주고 자기가 은퇴 뒤에도 그러한 지도자로서의 롤 모델을 저렇게 세운 선수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몇 없을 것이다.
김병지와 이운재의 시대를 거쳐 꾸준히 좋은 골키퍼들이 나오고 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 누가 주전이고 서브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마지막까지 경쟁이 치열했다. 2010년대에는 가까운 일본으로 진출하는 선수들도 많아졌는데, 정작 한국보다 축구를 체계적으로 도입했다고 하는 일본은 현재 골키퍼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의손 코치는 대한민국이 아시아 골키퍼 강국으로 서게 만든 기초공사에 참여한 중요한 인물임은 확실하다.
5. 기타
- '야신 클럽'의 멤버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호칭은 비공식이기 때문에 선수 경력에 중요하진 않으나, 가입 요건으로는 소련 및 러시아 국적으로 러시아 리그, 컵대회, 유럽컵 대항전, 국가대표 4개 항목에서 100경기 이상의 클린시트를 기록해야 인정해 준다. 신의손의 경우는 아예 국가대표 경기가 소련 붕괴 후 1997년 타지키스탄에서 1경기 나온게 전부[13] 라서 야신 클럽의 대상자가 아니다.
- 발레리 사리체프로는 1981~1991년까지 소비에트 톱 리그[14] 에서 도합 165경기를 뛰었다. CSKA 모스크바와 토르페도 모스크바 두 팀에서 활동했으며. 1981년 CSKA에서 한 해 뛴 것을 제외하곤 줄곧 토르페도에서 뛰었다.
- 1992년부터 25년 넘게 대한민국 생활을 하고 있는데, 본인만 한국에 귀화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부인은 러시아 국적, 딸은 러시아 국적을 가진 채 캐나다 사람과 결혼하여 캐나다 영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아들은 미국 국적을 얻고 귀화한 뒤 미군에 복무중이며 독일 여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한 집안에 관련된 나라가 5개국이나 된다.
- 전설의 골키퍼 레프 야신과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토르페토 모스크바에서 뛰던 시절, 디나모 모스크바의 원 클럽 맨인 야신은 여러 행정직을 전전하며 은퇴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고 두 팀이 같은 리그(Soviet Supreme League) 소속이었기 때문에 자주 마주쳤을 것이다.
- 2018년 10월 2일 이웃집 찰스에 출연했다.
- LP판 모으는 게 취미라고 한다.
- 귀화한 것 치고 한국어가 좀 서툴러서 어떻게 그 어려운 귀화시험을 통과했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다. 신의손 자기 말로는 그때 시험은 어찌 커트라인 간신히 넘겨 통과했고, 귀화 면접도 잘봤다고 생각은 안 했는데 면접 현장에 기자들이 몰려있어 면접관들이 많이 긴장했는지 평가를 후하게 줬다고 생각한다고.
-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신의손이 아닌 사리체프로 되어있다. 따로 개명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사례인 데니스 또한 이성남이라는 한국 이름이 있지만,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라티노프데니스이다.
6. 관련 문서
[1]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사리체프이다.[2] 2000년 귀화[3] 다만 본인만 귀화하고 가족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리 신씨는 1대로 끝나게 생겼다.[4] 역사적으로는 소련 시절 5번째로 많은 우승을 한 팀이기도 하다.[5] 사실 골키퍼 포지션 특성상 필드플레이어에 비해 전성기가 늦게 찾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의손이 30대에 접어들어 최고수준 골리가 된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6] 한 경기당 실점이 한 골 이하[7] 1997년 전체 경기 2/3 출전, 1998년 전체 경기 1/3 출전, 1999년 완전 출전금지로 바뀌어 갔다.[8] 단, 필드 플레이어가 경기 중에 골키퍼의 퇴장, 부상 등으로 포지션을 대신 맡아야 하는 경우에는 허용된다. 사실상 영입 금지.[9] '사리첩', '구체포' 등 생소한 한자어도 후보에 올랐었다.[10] 결국 후반전에 이운재로 교체된다.[11] 이 때문에 대한민국 아시안게임 대표팀은 '''우즈베키스탄과 맞붙은 4강전에서 0:1로 패해 3,4위전으로 밀리고 만다. 그리고 쿠웨이트에 패해 4위에 그쳤다.''' 그것도 그 알까기가 우즈베키스탄의 유일한 슈팅. 오죽하면 구글 검색어에도 '차상광 알까기'가 거의 20년이 가까이 된 지난 지금도 있으며, 최인영은 한때 국대 No.1 골리라 이름이라도 남았지 차상광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수준의 흑역사 취급이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중국을 결승전에서 만나 꺾고 축구 금메달을 차지했다.'''[12] 여담으로 당시 우즈베키스탄 국가대표팀에서 뛴 선수이자 간판 선수였던 미르잘랄 카시모프는 우즈베키스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2015 아시안컵 8강전에서 대한민국과 맞붙었다. 방콕 대회까지 아시안 게임 축구가 A매치로 취급되기 때문에, 히로시마의 패전은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현재까지도 유일한 A매치 1패(역대성적 9승 3무 1패)다.[13] 이 경기도 평가전 상대가 대한민국이었다. 당시 그는 무려 4골이나 허용하며 팀은 4:1로 졌다.[14] 지금의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