펩 과르디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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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6년부터 맨체스터 시티 FC 감독직을 맡고 있다.
현역 선수 시절 외국인 용병 4인방과 바스크 4인방 등 외인들로 구성된 드림팀 FC 바르셀로나에서 팀 내 유일한 카탈루냐 토종 순혈 성골 출신 주전으로 활약하며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선수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른 노쇠화와 잦은 부상으로 30세의 이른 나이에 바르셀로나를 떠난 이후 세리에 A와 중동의 여러 클럽을 전전했으나 부진과 부상, 약물복용 징계가 겹치며 상당히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선수 은퇴 후 FC 바르셀로나의 몇안되는 성골 출신 스타로서 별다른 지도자 경력 없이 바로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을 맡아서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차비 에르난데스, 세르지오 부스케츠, 카를레스 푸욜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함께 하며 여러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후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겨 리그에서는 우승을 연속으로 달성했으나, 챔피언스 리그에선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3] 이후 맨체스터 시티 FC로 자리를 옮겨 70%가 넘는 승률을 보였지만 역시나 챔피언스 리그에선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4]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FC 바르셀로나 (1991~2001)
주요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비록 원 클럽 맨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이자 바르셀로나 성골 중의 성골이다. 카탈루냐 출생으로, 외국인과 바스크 선수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팀에서 주전 중에서 사실상 유일한 카탈루냐 출신 선수였다.
바르셀로나의 유스 팀에서 성장했고, 바르셀로나 B팀에서 활동했다.
당시 바르셀로나 A팀의 감독은 팀의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였다. 크루이프는 주젭 유이스 누녜스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바로셀로나에 부임한지 1년 만에 베스트 11을 모두 물갈이할 정도로 완전히 갈아엎었지만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초기 2년여 동안 기대에 못미치는 성과를 내고 있었다. 크루이프가 기존 멤버들을 전부 내보내면서 카탈루냐 출신의 레전드를 포함한 기존 선수들은 전부 팀을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성적이 나오지 않자 크루이프를 향한 바르사 팬들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팀의 주전 전원이 외국인과 바스크인으로 채워지자 카탈루냐 팬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이런 불만을 가라앉히고 바르셀로나 팀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전 중에 한 명이라도 카탈루냐 순혈 출신의 선수를 기용해야만 했고 이때 크루이프에게 간택된 이가 바로 과르디올라였다.
기예르모 아모르가 장기 부상을 당하자 크루이프는 B팀에 있던 과르디올라를 1군에 콜업되어 1990년 12월 16일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요한 크루이프는 조교처럼 활용하던 로날트 쿠만에게 펩한테 '''네덜란드식 축구'''를 가르치라고 지시하였고, 펩은 쿠만을 통해 오늘날 티키타카라고 알려진 네덜란드식 축구를 익혔다. (크루이프는 자신이 추구하던 축구를 항상 네덜란드식 축구라고 불렀고, 바르셀로나 축구라 부른 적이 없었다. 미헬스 감독 시절을 제외하면 바르셀로나가 그런 축구를 구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 1군 데뷔 이후 곧바로 1군에서 자리잡진 못했고, 해당시즌 1군에서 총 4경기 출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본격적으로 1군에서 기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1-92시즌부터였는데, 91-92시즌에도 바르셀로나 B에서 9경기를 출장하는 등 한동안 1,2군을 왔다갔다했다. 1군에 승격했던 그 시즌에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을 경험했다.
1994 ~ 1995년 크루이프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불화로 라우드럽, 호마리우, 쿠만, 스토이치코프 등 드림팀 바르셀로나의 주요 멤버들이 전부 자의반 타의반으로 타팀으로 이적했다. 바스크 4인방 역시 전성기가 지나 차례로 팀을 떠났다. 이렇게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과르디올라를 제외하고 모두 떠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고, 1996년에는 크루이프 감독마저 경질되었다.
바르셀로나는 2시즌간 암흑기를 거친 후 1996년 크루이프를 경질하고 바비 롭슨 감독을 새로 부임하면서 다시 호나우두, 루이스 엔리케, 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클루이베르트 등을 차례로 영입하며 팀을 재편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물갈이 되었고, 1기 드림팀 시절부터 남아있던 선수는 펩이 거의 유일했던 덕분에 주장을 맡기도 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라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포지션이기도 했고, 90년대 바르셀로나에 워낙 기라성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많았기에 해외의 많은 문서를 찾아봐도 과르디올라의 현역 시절의 활약에 대한 문서는 의외로 없으며, 대부분 라우드럽,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호나우두, 피구 등 팀내 스타들의 활약상을 이야기할 때 그 팀메이트 중 한 사람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팀내 주전 중 유일한 카탈루냐 토종 순혈 성골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바르셀로나에서의 그의 인기는 엄청났다. 사실 당시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에는 라우드루프,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 등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고,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스페인 국대에서 주장을 역임할 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호세 마리 바케로,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 바스크 4인방이 있었지만 이들 역시 카탈루냐 순혈 성골이 아니었다. 과르디올라는 이런 숱한 스타플레이들에 비하면 그라운드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선수였지만,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언제나 펩이었다. 크루이프의 드림팀이 1994년 불화로 완전히 와해된 후 잠시 암흑기를 거쳐 90년대 후반 다시 재정비하고 부활했지만, 그때도 팀을 이끌었던 선수는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클루이베르트 등 외인들이었다.
10시즌간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한 후 2001년 세리에A 브레시아로 이적한다. 펩이 활동하는 동안 바르셀로나는 여섯 번 리그 우승, 두 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 한 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두었다.
2.1.2. 세리에 A (2001~2003)
바르셀로나 이후 펩의 선수 시절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외지의 클럽 저니맨 생활을 하면서 카타르 시절을 제외하면 몸 담은 팀마다 벤치를 달구며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었고, 이탈리아에서 도핑에 적발되어 약물 복용으로 출장금지를 당하고 이에 대한 소송전을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갔다.
펩은 FC 바르셀로나에서 10시즌(1991~2001)만을 뛰고 이적한다. 이때 펩의 나이는 고작 30세의 한참 젊은 나이였지만 일찍 노쇠했다는 평을 받고 있었고, 게다가 잔부상도 있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2000-01시즌이 끝나고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알렸고 이에 펩과 그의 에이전트는 이적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후의 행보는 의혹 투성이다. 펩이 FC 바르셀로나에서 이적하려 하자 뉴캐슬, 맨유, 웨스트햄, 토트넘, 리버풀, AC 밀란, 인테르 등 빅클럽과 링크가 떴다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는 과르디올라 측의 언플에 불과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위에 적혀 있는 어느 구단에서도 과르디올라를 영입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2000-01시즌이 끝나고 바르셀로나 수뇌부에서 더 이상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알렸고, 과르디올라는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적하겠다고 발표하여 자신을 공개적으로 세일즈했다. 하지만 당시 기사에 따르면 그에게 접근한 빅클럽은 없었고, 오히려 과르디올라 본인이 여러 구단에 자신의 영입을 타진하며 영업을 했다. 그 중에는 뉴캐슬도 있었는데, 기사에 따르면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에서 감독을 역임했던 바비 롭슨 감독과의 인연을 이용하여 뉴캐슬에 입단을 적극적으로 타진했지만, 뉴캐슬 측은 현재 미드필더 자리에 펩의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단칼에 정중히 거절했다. #
결국 빅클럽과 연결되고 있다는 언플과 달리 실제로 이적한 팀은 전년도에 세리에 B에서 A로 승격한 만년 2~3부 리그 팀인 브레시아 칼초였다. 브레시아 칼초는 팀 역사의 대부분을 세리에 B 혹은 C에 머물던 팀이었으나, 펩을 영입하기 직전 시즌에 세리에 A로 승격하며 노장 로베르토 바조를 깜짝 영입해서 화제를 모은 팀이었다. 당시 바조는 해외 몇몇 빅클럽의 이적 제안을 받았지만 한일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세리에A에서 뛰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브레시아 칼초에 입단했었다. 바조의 원맨쇼로 브레시아 칼초는 1군에 승격하자마자 중위권으로 도약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바조 영입 효과를 톡톡히 본 브레시아는 이듬해 펩을 영입하여 후방을 보강하려 했다.
하지만 펩은 브레시아에서 실질적으로 3개월 밖에 뛰지 못하고 먹튀로 전락했다. 그는 2001년 11월 소변에서 금지약물인 난드롤론(스테로이드)가 검출되며 '''약물 복용으로 기소되어 4개월간 출전 금지'''를 당했다. 11월 21일 피아첸차전을 마치고 도핑 테스트에서 처음으로 약물이 적발되었는데, 직후 과르디올라는 "영양제를 섭취하긴했지만,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없다"며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29일 라치오전을 마치고 다시 도핑에서 같은 약물이 검출되면서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 출전 금지 처분으로 2002년 상반기에 출장하지 못하며 이적할 때까지 반시즌을 통으로 쉬게 되었다.
이후 펩은 바르셀로나 B팀 감독이 된 후 항소했지만, 항소에서도 그의 약물 복용 혐의가 인정되었다. 그러다가 펩이 바르셀로나 A팀 감독이 된 후에야 무죄 처리되었다. 법원이 뒤늦게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과르디올라의 결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니라, 과르디올라가 결백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선수 시절의 약물 복용 문제가, 상식적으로 너무나 긴 시간인 무려 7년 6개월이 지나 바르셀로나 감독이 되어서야 무혐의 처리되었기 때문에 많은 의혹이 있다. 반도핑기구의 디렉터는 샘플자체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즉 약물을 하지 않았지만 오진이 나올 가능성)은 1/1000~1/10000 사이에 불과하며, 펩은 네번의 검사에서 모두 양성이 나왔으므로 확정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은 도핑 테스트에서 오진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을 완전무결하게 확신할 수 없으며, 때문에 펩의 약물 복용을 완전무결하게 입증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즉 과르디올라가 실제로는 결백하지만 오진으로 양성이 나왔을 가능성이 0.00000001% 정도 되며, 그때문에 유죄임를 100% 입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로 판결된 것이다.... #
2002년 여름 펩은 다시 세리에 내에서 AS 로마로 이적하여 또 한 시즌만 뛰고 이적했다. 로마는 2000-01 우승, 2001-02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펩이 온 2002-03 시즌에 8위로 추락하게 된다. 그는 로마에서 2002-03 한 시즌을 뛰었는데, 사실 로마에서 펩은 완전히 벤치 멤버였다. 리그는 펩은 단 4회 출장만 하게 된다. 로마 올드팬들은 최악의 영입에 펩을 꼽기도 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 그의 로마 생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로마는 아예 펩을 포기했고, 결국 몇 달을 다시 브레시아에서 뛰게 된다. 브레시아도 10위로 리그를 마감한다.
펩과 AS 로마에 관한 재미 있는 인터뷰가 있다. 2014/15 챔피언스리그에서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바이에른 뮌헨이 AS 로마와 조별 리그에서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AS 로마와의 조별 예선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과르디올라는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를 언급하며, "나와 현역 시절을 함께 했던 토티가 여전히 경기를 뛴다는 것은 엄청난 사실이다. 내일 경기에서 그는 그라운드에, 나는 벤치에 있을 것이다. 내가 AS 로마의 선수였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지."라는 나름의 자학성 멘트를 남겼다.
2.1.3. 중동, 멕시코 (2003~2006)
세리에A 팬들의 비난을 뒤로 하고 펩이 이적한 곳은 축구 선수들의 은퇴지인 중동 리그이다. 펩이 중동으로 이적했을 때의 나이는 의외로 '''32세'''에 불과했다.
그가 이적한 곳은 카타르의 알 아흘리였다. 이번에도 세리에를 떠났을 때 맨유의 오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카타르 리그에 있을 때 맨유, 맨시티, 첼시의 오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카타르 리그에 머무른다[5][6] 는 물론 펩 팬들의 언플이다. 실제로 정식으로 오퍼한 팀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펩이 위의 오퍼를 거절하고 카타르로 간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카타르 알 아흘리로 이적하고 나서 그 곳에서 2003-04, 2004-05 두 시즌을 뛰었다. 카타르에서 그는 세리에에서와는 달리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알 아흘리에서 첫 시즌인 2003-04 시즌, 팀은 리그 10팀 중 4위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4-05 시즌 10팀 중 8위로 추락했다. 성적
알 아흘리에 있을 때, 펩은 약물 복용 혐의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징역 7개월을 선고받는다. 2005년 약물 복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지만 보류되었고, 2007년 B팀 감독으로서 항소한 후에는 혐의만 남은 채 징역형은 말소된다. 그리고 2009년에서야 그의 약물 복용이 무혐의로 처리된다. 기욤 발라그가 쓴 펩 과르디올라 전기에 따르면 인간은 9나노그램 이하의 약물을 체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펩에게서 검출된 난드롤론은 2나노그램 이하였기 때문에 이 연구 결과에 따라 무죄가 확정되었다.
카타르 알 아흘리에서 두번째 시즌에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 펩은 멕시코로 이적했다. 멕시코로 이적했을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가 이적한 팀은 멕시코에서 지금은 2부 리그 팀인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였다. 2006시즌, 팀은 6팀 중 4위라는 꾸준한 성적을 거둔다. 하지만 과르디올라는 부상 때문에 많이 출장하지 못했다. 리그 6팀 중 4위가 왜 꾸준한 성적이라고 서술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진실은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 팀은 2006시즌이 끝나고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과르디올라는 이적을 모색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결국 은퇴하였다. 멕시코에 있는 동안 Axocopan의 학교에 다니며 지도자 공부를 하기도 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바르셀로나 레전드라는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 경력은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국가대표로 47경기에 나섰으니 아주 적게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나선 경기의 대부분은 전력 테스트 성격의 친선전 혹은 지역 예선 경기였다. 막상 메이저 대회 때는 대부분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주전으로 메이저 대회에 출전한 것은 유로 2000이 유일했고 그외에 1994 월드컵에서 교체 멤버로 활약한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대회 때는 대표팀에 전혀 선발되지 못했다. 월드컵에는 통산 2경기(144분) 출장하였으며, 유로에서는 통산 4경기에 출장했다.
1992년 유로 때는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지 않았고 U-23 대표에 머물렀다.
유로가 끝난 직후인 1992년 10월 북아일랜드전에서 처음 국가대표로 데뷔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당시 94 월드컵에서 과르디올라는 교체 멤버였다. 스페인은 조별예선에서 디펜딩 챔피언 독일, 볼리비아, 한국과 같은 조가 되었다. 조별 예선 중 독일전과 볼리비아전 2경기에 출장하였으며, 모두 교체 아웃되었다. 볼리비아전에서는 선취골을 넣기도 했으나 후반 23분 조기 교체되었다. 토너먼트로 올라가고 나서는 한번도 투입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월드컵 무대가 되었다.
1996년 유로에서는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았다.
2000년 유로는 펩 과르디올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풀타임 주전으로 뛴 메이저 대회였다. 조별리그 2경기, 8강전을 풀타임으로 뛰었다. 스페인은 8강전에서 프랑스한테 1:2로 패했다.[7]
2001년에도 친선전에서 대표팀에 자주 승선했으나, 31세에 맞이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대표팀을 은퇴하게 되었다.
일부 국내 문서에는 과르디올라가 스페인 국가대표팀 주장을 역임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애초에 과르디올라가 메이저 대회에 주전으로 나선 적이 유로 2000 밖에 없었거니와 유로 2000에서도 주장은 페르난도 이에로였다. 위키피디아의 역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리스트에도 과르디올라의 이름은 없다. 과르디올라가 현역이던 시절 스페인 국대 주장은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레알 마드리드), 호세 마리 바케로(바르셀로나), 안도니 수비사레타(바르셀로나), 페르난도 이에로(레알 마드리드), 라울(레알 마드리드)로 이어진다. 이중에서 바케로와 수비사레타는 크루이프의 바로셀로나 드림팀 멤버였다. 이들이 오랫동안 스페인 국대에서 주장을 맡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르셀로나에서도 과르디올라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바스크 출신이었고, 카탈루냐 순혈 성골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는 과르디올라보다 레전드 대접을 못받고 있다. 같은 시대 외국인 용병으로 대활약했던 라우드루프,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도 마찬가지.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활동했는데, 1995년에 처음 데뷔하여 2005년까지 통산 7경기에 출장했다.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 전에는 U-23 대표팀 시절 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자국에서 개최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스페인 올림픽 대표팀은 전승으로 결승에 올라 결승전에서 폴란드를 이기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2.3. 플레이 스타일
선수 시절엔 수비형 미드필더, 더 정확히는 지금은 거의 명맥이 끊어진 볼란치 중에서도 세계적인 선수이다. 한국 선수로는 조광래가 대표적이고 당대 선수들로는 독일의 로타어 마테우스, 네덜란드와 AC 밀란의 프랑크 레이카르트, 브라질의 둥가, 아르헨티나와 옆동네 레알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레돈도, 그리고 스페인과 바르셀로나의 펩 과르디올라가 손꼽힌다. 수비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지만 공을 잡으면 정확한 패스를 통해 경기를 정교하게 전개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바르셀로나식 볼란치의 계보를 시작한 인물로, 세르지오 부스케츠가 포지션이나 플레이스타일로 보면 그 적통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샤비 알론소와 안드레아 피를로 같은 후방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와는 조금 다른 볼 배급형 홀딩 미드필더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기량은 요한 크루이프 감독의 지도하의 바르셀로나 드림팀 1기에서 빛을 발했는데, 이때는 호마리우,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치키 베히리스타인 등의 공격진에게 정확한 패스를 연결해주고 로날트 쿠만이 지휘하는 포백 라인의 앞을 보호하는 등 그야말로 현재의 차비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다.
다만 안습한 건 몇 번이고 언급하듯 부상 때문에 내구력은 약했고, 그 때문에 선수 말년에 이곳저곳으로부터 시련에 빠지고, 본인도 슬럼프에 빠졌으며 그의 스타일 자체가 자기 혼자 잘한다고 팀의 기량이 한순간에 올라가는 게 아닌, 그와 함께 패스를 잘 받아먹을 공격수가 있어야 사는 스타일이라 바르셀로나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커리어가 모자람은 아쉬움이 있다. 펩 자신은 시대가 자신과 같은 유형의 선수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펩의 선수 생활이 저물어가던 시기는 클로드 마켈렐레 유형의 선수가 빛을 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3. 감독으로서
3.1. 감독 경력
3.2. 전술 스타일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흔히 알려진 티키타카라는 이상하고 말도 안 되고 본인도 치를 떨 만큼 싫어하는 단어로 대표되는 전술이다. 정확한 전술계에서의 해석으로는 '포지셔닝 플레이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안전한 짧은 패스를 이용해서 후방에서부터 빌드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수비형 미드필더 한 명이 중앙 수비수 라인으로 내려와서 라볼피아나를 형성해서 후방에서의 숫적우위를 베이스로 빌드업을 수월하게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축구의 의미는 팀 전체가 공을 갖고 여행하는 것이다 . '''
다른 특징은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션을 통한 사이드 체인지. 농구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이름을 보면 단번에 알겠지만 농구의 전술에서 따온 게 맞다.[8] 과르디올라의 축구는 점유율 유지를 위해서 중앙을 자주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윙어 2명(또는 윙백이나 오버래핑한 풀백 2명)은 넓게 포진한다. 이는 중앙에서 점유율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시 측면으로 공을 돌려서 점유를 계속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과르디올라의 전술의 핵심 중 하나인 사이드 체인지를 이용해 상대 진영을 허물기 위함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윙어들이 넓게 포진하기 때문에 과르디올라의 팀이 측면을 이용하게 되면 그 사이드로 상대 팀을 포함해서 선수들이 쏠릴 수 밖에 없다. 이때 반대쪽으로 넓게 포진한 윙어는 방대한 공간을 얻게 되고 크로스 혹은 사비 같은 시야가 넓고 패스가 뛰어난 미드필더가 반대편 윙어가 침투하는 공간으로 쓰루 패스를 이용한 순간적인 사이드 체인지로 상대 진영을 허문다.[9]
또한 과르디올라는 수비 시 강렬한 전방 압박을 애용한다. 과르디올라의 압박 전술은 약 3가지 단계로 나뉘는데, 전방에서의 압박을 통해 상대의 공격 진행 방향을 제어하고 한 쪽 측면으로 몰아 넣고, 경기장 중앙에서의 격렬한 압박을 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주어서 상대 선수가 공은 소유할 수 있게 만들되 전방을 향한 위협적인 공격으로의 진행을 막고 백패스 또는 횡패스를 하게 만들고, 백패스나 횡패스를 받은 수비수들은 과르디올라의 팀의 공격수들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 더욱 라인을 내리게 되는데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과르디올라의 팀의 라인이 높아지면서 상대 팀 선수들을 상대 진영에 가두게 된다. 과르디올라의 압박 수비는 이 3가지를 무한히 반복하면서 상대 선수들의 실수를 기다리고 상대가 실수를 했을 때 높은 위치에서 공을 빼앗으면서 빠르게 역습을 가져간다. 이는 과르디올라의 경기장의 높은 곳에서 빼앗은 공이 낮은 곳에서 빼앗은 공보다 골로 연결될 확률이 크다는 지론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과르디올라 하면 티키타카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실상 티키타카가 팀의 아이덴티티로 정착된 팀은 과르디올라가 거쳐간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에 불과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도리어 과르디올라가 2010년대 축구 트렌드에 미친 영향은 다른 데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첫 번째 영향은 후방 빌드업의 정착이다. 물론 후방 빌드업의 개념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과르디올라가 정착시킨 후방 빌드업은 변형 백3를 활용한 것이다. 이를 창안한 아르헨티나 감독 리카르도 라 볼페의 이름을 딴 라볼피아나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한 것인데, 빌드업 리더를 센터백 사이로 내려[10] 일시적으로 백3 라인을 형성하고 골키퍼까지 포함한 4인의 후방 선수가 공을 돌리며 전방 압박 라인을 끌어당겨 상대 압박 라인의 간격을 벌리거나, 혹은 대형을 무너트린다. 이렇게 상대의 대형을 흔들고 나면 아군 미드필더들이 공격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한층 수월해진다. 현재 웬만한 팀들은 이런 아이디어를 수용해서 빌드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이에 대한 대책들도 발전해서 위르겐 클롭처럼 1~2선의 기동력을 활용해 매우 집요하게 상대 후방 빌드업을 방해하는 대책이 나오는가 하면, 디에고 시메오네처럼 아예 전방 압박은 적당히 시간을 늦추는 수준으로만 하고 아군의 타이트한 대형 유지를 중시하는 대책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과르디올라는 한 가지 전술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다. 대표적인 예시가 프리미어 리그 2016-17 시즌 30라운드 아스날 FC와의 경기인데, 이 경기에서는 드디어 롱패스도 꺼내들었다. 특히 이날 맨체스터 시티의 골키퍼 윌리 카바예로는 아스날 진영을 향한 긴 골킥으로 후방 빌드업을 생략하기도 했다. 과르디올라가 전술적으로 한층 더 유연해진 것이다. 기사 거기다가 토트넘 전에서는 패스를 줄이고 후방 빌드업을 줄이며 활동량을 늘리는 축구를 구사하면서 패스 플레이를 방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토트넘을 농락했다.
두 번째 영향은 볼 점유의 중요성을 재확인시켰다는 것이다. 과르디올라 이전에도 볼 점유는 중요했지만 이는 점유에 이어 간결하고 신속하게 공격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사키이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즉 신속한 공수의 전환이 더 중요했으며, 점유는 단지 더 많은 공격 기회를 잡기 위한 방법에 가까웠다. 아예 전환의 신속성이라는 아이디어만 뽑아 먹는 선수비 마인드의 축구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르디올라가 느린 템포와 점유를 접목하면서 점유란 상대에게 있어 기회의 박탈과도 같은 말이 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자리를 고수할 수 있게 되면서 설령 공을 빼앗기더라도 신속하게 질서 있는 압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과르디올라의 훈련에서 수비 훈련이 전체 훈련의 80%를 차지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거쳐온 팀들이 강한 압박을 통한 수비가 가능했던 이유이다.[11][12] 물론 이후 모든 팀들이 과르디올라의 팀처럼 높은 점유율을 찍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쉽게 상대에게 점유를 내주려 하지 않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으며 점유를 내주더라도 곧장 질서정연한 압박으로 전환하여 치열하게 점유 대 압박 간 경쟁을 펼치는 경기 양상이 펼쳐지게 되었다. 때문에 위험 지역에서 걷어내는 것 외에는 롱킥을 볼 기회가 없고 골킥마저도 패스로 처리한다. 다만 뮌헨에서부터는 롱볼도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과르디올라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삼각 대형 유지이다. 즉,선수들은 상대팀의 압박과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격을 수월히 하고 빌드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 공을 주고 받으며 세 명의 선수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삼각 대형을 만들어야 한다. 이 삼각 대형은 11명의 선수들이 모두 끊임없이 허물었다가 다시 만들기도 하면서 곳곳에서 공격 전개와 탈압박을 위한 기본 포지션이 된다. 간격을 유지하며 상대팀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 왕성한 오프 더 볼 활동을 보여야만 하며, 상대 선수들을 혼란시키기 위한 가짜 움직임도 무척이나 중요해진다. 상대팀의 골대 근처나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는 공격수들에게 자유도를 주지만, 빌드업 과정이나 공격 전개 과정에서 이 삼각 대형을 통해 탈압박 하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기본적으로 발기술이 좋은 골키퍼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골키퍼의 킥으로 바로 자기 진영에서부터 빌드업이 시작될 수도 있고, 상대방이 빌드업 지점을 압박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이 내려오면 정확한 킥을 통해 바로 멀리 있는 동료에게 패스를 해서 역습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르디올라가 스위퍼 키퍼만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렇듯 키퍼 역시 빌드업의 한 축이 되는 역할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거쳐가는 팀마다 세부 전술에서 계속 변화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전술은 중앙에서 짧은 패스를 돌리다가 틈을 발견하면 침투에 이은 쓰루패스로 상대를 허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에 부임했을 때는 선수들의 특성상 이같은 플레이가 잘 먹히지 않았고, 이때 아르연 로번과 프랑크 리베리라는 월드 클래스 윙어들에게 초점을 맞춘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션을 이용한 활발한 측면 공격과 기존의 종방향 움직임을 가져가는 윙백 대신 중앙으로 들어와 빌드업을 돕는 인버티드 윙백을 전술에 접목시킨다.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한 뒤에는 윙 포워드들에게 대각선 침투 뿐만이 아닌 윙어로서의 움직임도 부여하면서 활발한 낮은 크로스를 전술에 추가하였고, 이는 맨체스터 시티가 2017-18 시즌 리그에서 32승 4무 2패 승점 100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표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과거의 전술들을 재해석해서 자신의 전술에 더하기도 한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WM 전술의 재해석으로, 맨체스터 시티 첫 시즌 때에는 하프백을 센터백 라인으로 내리고 풀백 두 명을 중앙 미드필더 자리로 들어오게 하는 형식으로 3-2-4-1 포메이션을 형성해서 WM 형태가 나오게 만들었다. 두 번째 시즌에도 경기중 가끔씩 나오는 형태로 수비형 미드필더가 어디에 서있냐에 따라 3-2-4-1과 2-3-4-1이 혼용된다. WM 전술은 공격진과 수비진을 철저히 분리해서 운용함으로써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를 맞추는 형식인데, 과르디올라는 이걸 자신의 팀에 적용하면서 2017-18 시즌에는 폭발적인 공격과 안정감 있는 수비를 동시에 선보이며 우승을 차지했다. 2020-21 시즌에는 공격 시에는 3-2-4-1 전술을 쓰지만,[13] 수비 시에는 4-4-2 대형을 사용한다.
3.2.1. 전술에 대한 비판
과르디올라는 리그에서의 압도적인 성적과 전술적인 시야는 높게 평가받지만, 선수빨이라는 비판 또한 같이 받는 감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과르디올라가 여태까지 감독으로서 거친 팀들이 '''FC 바르셀로나, FC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시티 FC'''라는, 각 리그에서 우승 후보로 항상 꼽히는 강팀이기 때문이다.[14] 그리고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선수의 능력을 많이 요구하는데, 맨체스터 시티 1년 차 때 노쇠화로 인해 기량이 떨어졌던 양 풀백 때문에 무관에 그친 걸 보면 알 수 있다. 웬만큼 재능있는 선수들로는 본인의 전술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선수들의 뛰어난 축구 실력을 반드시 요구하는 전술을 구사하는 것인데, 애초에 과르디올라의 전술을 소화할 선수단이라면 다른 전술이었어도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유프 하인케스의 트레블 당시 뮌헨의 성적과 과르디올라 시절의 뮌헨의 성적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15] 그리고 다른 감독들의 전술은 능력치가 상대적으로 평범한 선수들도 소화할 수 있고, 선수들의 클래스가 올라갈수록 효율이 올라간다. 그러나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애초에 월드 클래스 수준의 기량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기준에 미달하는 선수들이 전술을 수행하면 답답해지는 경기력을 가져오게 된다. 이는 바이에른 부임 초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내로라하는 선수단을 가진 바이에른 뮌헨조차 과르디올라가 전술을 수정하기 전까지는 U자 형태로 공을 돌리기만 하는 축구를 보여줬다. 현재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선수의 전술 이해에 따른 퍼포먼스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다. 맨체스터 시티 부임 동안 과르디올라가 영입한 선수들 대부분은 두 번째 시즌에 첫 시즌보다 훨씬 더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과르디올라의 전술 특성상 상대 피치(경기장의 1/3 지점)에 올라온 때부터는 선수의 자율적인 움직임에 공격을 맡기는데, 이는 전술 지침만 따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가장 효율적인 공격 방법을 알아서 찾아내는 지능적인 선수들로 스쿼드가 이뤄져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16] 결론적으로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그 자체가 선수빨을 타야 한다. 월드 클래스의 선수들이라면 굳이 펩의 전술이 아니더라도 뛰어난 성적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선수단에 더 맞는 전술을 지닌 감독을 만난다면 훨씬 뛰어난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것.[17]
또한 과르디올라는 2008년부터 2018년 4월 5일까지 UEFA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16강~)에서 '''골 득실 -5[18] & 원정 승률 20%[19] ''' 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전에 맡았거나 맡고 있는 팀이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시티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꽤 심각한 기록인데, '''과르디올라는 토너먼트의 달인이 절대 아니며 챔피언스 리그보다 리그에 적합한 감독이라는 것이다.''' 왜 바르셀로나[20] 를 떠난 뒤부터 챔스 결승에 못 가봤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 선수를 보는 안목과 이를 가지고 선수를 발굴하고 키우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과연 전술적으로 승리를 가져오는 감독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21][22][23] 과르디올라는 뛰어난 선수단을 만드는 데에는 능하지만, 그 선수들 덕분에 본인의 전술이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과르디올라는 2014년 2월부터 2018년 2월 전까지, 4년 동안 챔스 토너먼트(16강~)에서 FC 샤흐타르 도네츠크, FC 포르투, SL 벤피카 같은 팀을 상대로도 원정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과르디올라의 축구는 본인 전술의 기초인 후방 빌드업이 방해를 받게 되면 뿌리부터 팀이 흔들리는 단점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오면서 전방 압박을 시도하는 팀에게는 약세를 보인다. 그런데 보통 원정에 가면 상대 팀들은 홈이기 때문에 더 공격적으로 나오기 마련이고, 챔스 16강에 오른 팀들은 각 리그에서 우승권 팀인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 클래스가 있는 팀들이 좀 더 공격적으로 나오고 상대 홈 팬들이 펩의 선수들을 압박하면 그 선수들은 실수를 평소보다 더 잦게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과르디올라의 전술에서는 수비수들이 공을 만지는 시간이 길고, 수비수들이 공을 잘 찬다고 해봐야 미드필더 급으로 공을 키핑하고 패스를 뿌려주는 선수는 정말 드물다. 그러므로 상대 선수의 압박이 들어오면 미드필더나 공격수보다 실수가 나오기 쉬운 구조다. 그리고 그 실수는 고스란히 실점이나 실점에 준하는 위기 상황으로 이어지고, 실수한 선수는 책임감과 상대 홈 팬들의 신랄한 조롱으로 인해 정신적 부담을 더 받고 또 다시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이건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지만 과르디올라의 전술 특성상 수비수들의 실수는 팀의 근간을 흔들어 버리기 때문에 더욱 치명적이다. 리그에서는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는 에므리크 라포르트가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만 가면 심각한 실수들을 연발해서 팀 패배의 원흉이 되고 있는 것이 그 예시로, 과르디올라의 전술에는 심각한 허점이 존재하고 원정만 가면 이 허점은 더 공략당하기 쉬워진다. 그리고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수비수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중앙 수비수들에게 보통의 패스 능력을 넘어 미드필더 급의 패스를 요구하는 건 수비수들이 조율 능력와 개인기를 장착해 가고 있는 현대 축구에서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즉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선수빨을 반드시 필요로 하며, 현재로서는 그 전술을 완벽하게 구현하기는 어렵다. 또한 앞으로도 어려울 확률이 높다.
이 점은 상대 전술에 맞춘 플랜 B를 짜면 해결할 수도 있지만, 과르디올라는 뻥축구를 할 바에는 지는 걸 선택할 정도로 다른 스타일로 전술에 변화를 주는 것을 혐오한다. 플랜 B를 어떻게 짜든 간에 짧은 패스를 이용한 후방 빌드업은 반드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플랜 A처럼 플랜 B도 전방 압박을 하는 상대에게 취약해진다. 2017-18 시즌에 들어서 과르디올라의 플랜 B라고 그나마 볼 수 있는 전술은 3-5-2인데, 이 전술은 수비진에 숫자를 늘려서 후방 빌드업을 더 안전하게 할 수 있게 만든 전술이어서 전방 압박에 취약한 건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팀에서 8명이 빌드업에 참여하기 때문에 웬만한 압박은 쪽수로 밀어붙이면서 뚫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과르디올라는 전술의 유연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본인의 천적인 감독의 팀들을 만나면 심각하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천적은 전통의 하드 카운터로 유명한 위르겐 클롭이다. 클롭의 전술은 보통의 전방 압박을 뛰어넘는 강도의 압박을 자랑하는데, 게겐 프레싱이라 불리는 이 전술은 과르디올라의 후방 빌드업을 파훼하면서 과르디올라는 클롭에게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 상대 전적은 2019년 11월 11일 기준으로 펩이 6승 2무 9패로 밀리고 있다. 아주 큰 차이는 아니지만 클롭이 과르디올라가 맡은 뮌헨, 맨체스터 시티보다 대등하거나 강력한 스쿼드를 꾸리게 된 건 리버풀 4년차에 가서였다는 점을 감안하자.
2017-18 시즌 클롭은 맨체스터 시티에게 유이한 리그 패배를 안겨줬고, 챔스 8강에서도 1차전 3:0, 2차전 2:1로 승리하며 본인이 하드 카운터라는 걸 입증했다. 시즌 초반 때 홈에서 5:0으로 이기기는 했지만 이때는 맨체스터 시티가 4-3-3 대신 3-5-2를 썼고, 사디오 마네가 전반전에 퇴장을 당하면서 리버풀의 압박이 약해졌기 때문에 이에 힘입어 맨체스터 시티가 이겼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르디올라 또한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이후로는 클롭을 상대할 때마다 자신의 철학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방식으로 경기에 임하고 있는데, 에데르송 모라에스의 골킥과 라포르트의 롱패스를 이용해서 후방 빌드업을 생략하고 윙어를 높게 전진시켜서 클롭의 높은 수비라인으로 생긴 뒷공간을 노리는 소위 뻥축구를 어느 정도 도입한 것이다. 2018-19 시즌 초반까지만 해도 과르디올라는 클롭의 전방 압박을 수비 숫자를 늘려서 후방 빌드업 참가 인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맞받아치려 했으나 결국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맨체스터 시티의 연승 행진에 사람들이 과르디올라의 전술이 수비적으로도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2017-18 시즌의 맨체스터 시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점이 적기는 하지만 이건 수비 전술이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공격 전술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 전술은 확실한 기회가 나오지 않는 이상 무리한 패스를 하지 않고 안전하게 공을 돌리는 전술이고, 그로 인해 상대가 공을 만질 기회가 많지 않다. 하지만 상대가 공을 소유하고 맨체스터 시티의 진영으로 넘어오면 거기서부터 상대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에는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인다. 다시 말해서 점유율 축구의 양면을 보여주는 전술로, 과르디올라의 팀이 실점이 적은 건 상대에게 공이 안 넘어가게 유지하는 걸 잘하기 때문이지 수비를 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과르디올라가 클롭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로, 클롭이 팀을 완성한 리버풀 4년차 이전까지는 쭉 한 수 위의 스쿼드로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술했듯이 상대 전적이 2019년 기준 6승 2무 9패로 열세다. 클롭의 전술 특유의 활발한 전방 압박으로 공을 자주 되찾아 오니 자연스럽게 공격 기회를 많이 가져오고 그걸 잘 저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점이 많아지는 것이다.
게다가 2019-20 시즌이 끝난 현재는 '''8시즌째''' 본인이 이끄는 팀이 챔스 4강에서 원정 골을 넣지 못했다. 2010-11 시즌 챔스 4강 1차전 엘 클라시코 경기에서 터진 리오넬 메시의 원더골[24] 이 과르디올라의 마지막 챔스 4강 원정 골이다. 그 뒤로는 4강에 총 4번 진출해서 첼시 FC,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했으나 4번 모두 원정에서 골을 넣지 못했다. 그 뒤로 맨체스터 시티에서의 4시즌은 16강(vs AS 모나코 FC) - 8강(vs 리버풀 FC) - 8강(vs 토트넘 홋스퍼 FC) - 8강(vs 올랭피크 리옹)으로 아예 4강에 진출하지도 못했는데, 저렇게 탈락하는 와중에도 원정에서 넣은 골은 모나코, 리옹을 상대로 넣은 단 2골 뿐이다.[25] 과르디올라의 전술이 과연 토너먼트에 적합한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과르디올라가 토너먼트에 약한 이유 중의 하나는 토너먼트의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뜬금포로 변칙 전술을 실험하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26] 다만 전술 철학 자체를 바꾸는 것은 아니고 선수 역할과 위치를 변경하는 전술 변경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전술 실험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다. 2015-16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전 아틀레티코 전에서도 프랑크 리베리를 중심으로 아르투로 비달을 수비형 미드필더[27] 에 배치하여 티아고 알칸타라의 공격성, 토마스 뮐러의 공간 창출 능력을 살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와의 합작을 일궈냈던 4-1-4-1 전술[28] 을 느닷없이 더글라스 코스타-킹슬리 코망을 내세운 4-3-3 전술로 바꿔 들고 나와 아틀레티코의 역습과 두줄 수비에 막혀 0:1로 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2차전 홈 경기에서는 다시 4-1-4-1을 들고 나와 2:1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뮌헨은 또 다시 4강에서 탈락했다. 2017-18 시즌 챔스 8강 리버풀 전에서도 3백과 4백을 경기 중에 수시로 전환하는 전술을 운용했는데, 라포르트를 레프트백이자 쓰리백 전환 시 왼쪽 센터백으로, 귄도안을 오른쪽 윙어 자리에 선발 출전시키는 실험을 강행했으나 클롭에게 탈탈 털리고 말았다. 그리고 1년 뒤 2018-19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 토트넘 원정에서는 귄도안과 페르난지뉴의 더블 볼란테 전술로 나왔으나 이 전술 변화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경기 감각이 부족했던 페이비언 델프를 풀백으로 선발시킨 탓에 델프 쪽에서 실점이 발생하며 또 자멸하고 말았다.[29] 2019-20 시즌 챔스 8강에서도 리옹과의 단판 승부에서 다음 상대팀이었던 뮌헨을 의식한 변칙 전술을 도입했다가 1:3으로 패배하여 또 4강 문턱에 오르지 못한 채 탈락해 버렸다.[30]
그나마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는 당대 최강의 클럽이었던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를 만났다는 변명의 여지라도 있고 2015-16 시즌에 패배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시 앞서 언급한 두 최강팀의 대항마로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만,[31] 맨체스터 시티 시절에는 리그 성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리버풀 FC, 토트넘 홋스퍼 FC,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리그 1의 AS 모나코 FC, 올랭피크 리옹에게 덜미를 잡혔다.[32]
전력상 현저히 앞서고도 연달아 비슷한 문제를 노출하며 탈락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특히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4시즌 연속으로 챔스 토너먼트에서 언더독 팀에게 덜미를 잡히는 초라한 결과물을 내고 말았다. 특히 리그 1 7위에 불과한 올랭피크 리옹에게 당한 패배는 그야말로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는 과르디올라의 전술적 참패로, 팬들조차 리옹은 이긴 걸로 치고 4강의 뮌헨을 어떻게 이길지를 논하고 있었을 정도로 아예 전력상으로 상대가 안 되는 승점자판기 팀이었다.
그래도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는 챔스 4강에 곧잘 갔었고,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2년 연속 8강에 진출하는 등 최소한의 성과는 거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따지고 보면 2020년 기준으로 과르디올라는 챔스에서 '''전임 감독들보다 좋은 성적을 단 한 시즌도 거두지 못했다.''' 뮌헨을 2년 연속으로 챔스 결승에 올려놓은 유프 하인케스는 말할 것도 없고, 과르디올라의 부임 직전에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을 맡았던 마누엘 페예그리니도 맨체스터 시티를 4강에 올려놓고 당해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2경기 합산 1점차 승부를 펼쳤었다. 하인케스도, 페예그리니도 과르디올라가 팀을 이어받기 바로 직전 시즌에 이런 성과를 냈다. 리그에서야 저 두 감독보다 나은 성적을 거뒀으나 결국 리그에서나 좋은 성적을 거두는 감독이라는 평가밖에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좋은 선수를 사와 더 좋은 선수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능력과 이를 바탕으로 약팀을 흥미진진하면서도 확실하게 잡아내는 능력은 좋게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챔스 진검승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수준의 팀만 골라 다니면서 챔스 결과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기전에서 운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야구와 비교하면 경우가 좀 다르다고 봐야 할 듯.
또한 본인의 전략 전술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확신, 그리고 이를 선수단에 확실히 이식하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자신의 전술에 필요없는 선수들과의 소통 문제, 그리고 이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 등이 과르디올라에게서 내쳐진 선수들의 문제가 기사를 통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이는 정반대로 자신의 전술을 소화 가능한 선수들과의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점, 그리고 지휘한 구단이 항상 최고 수준의 성적을 낸다는 좋은 결과물들에 의해 크게 이슈화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3.3. 선수단 운영
펩이 2010년대 축구에 미친 영향력 외에 개인의 코칭 스타일을 보면 대개 '''극도로 편집증적'''이라거나, '''진성 축덕'''이라는 평이 중론이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 축구 생각만 하는 기계 수준. 하루에 열몇 시간씩 일을 하는 워커홀릭인데, 훈련이 끝나면 어두컴컴한 감독실에 틀어박혀서 경기에 쓸 전술에 대한 답이 나올 때까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메모해서 경기를 준비한다. 팀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스타일인데, 바르셀로나 시절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든 것은 유명하며[33] 훈련을 할 때도 공격 훈련을 하는 경우 선수들의 동선을 일일이 정해 두고 선수들의 동선이 엉키지 않도록 미친 듯이 패턴 플레이를 반복한다고 한다. 과르디올라 뮌헨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1
3.3.1. 비판점
과르디올라가 팀 운영에 있어서 비판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유독 자기 스타일과 플랜에 안 맞는 선수를 대놓고 투명인간 취급한다는 것과 그와 동시에 해당 선수와 불화를 일으키며 좋지 못하게 이별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르디올라가 첫 감독으로 부임했던 바르셀로나 시절에서도 잘 드러났는데, 부임 당시 데쿠와 호나우지뉴 등을 팀에서 내쳐버렸고 이후 야야 투레 역시 자신의 전술과 맞지 않는 점을 이유로 자신의 전력에서 제외시켜 버렸고, 사무엘 에투를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맞교환을 했지만 이후 즐라탄과는 원수 사이가 되고 말았다. 특히 즐라탄의 경우는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관련 내용이 많이 나와 있고,# 투레 역시 바르셀로나에서 과르디올라가 자신을 무시했다며 섭섭한 감정을 인터뷰로 내비쳤다. 또한 거의 반 년 동안 말도 걸지 않고, 말을 걸어도 쌩 하고 지나갔다는 듯.# 에투 역시 과르디올라와의 불화로 인해 바르셀로나에서 떠나게 된 과정을 방송에서 털어놓았는데, 마찬가지로 무시와 존중에 대한 문제였다.# 에투의 등번호 9번을 상의 없이 티에리 앙리한테 줘버린다던지, 우즈베키스탄 클럽의 제안이 아주 좋던데 받아들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한다던지 등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 과르디올라는 선수단 관리자로서는 심하게 대인관계가 사무적이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게 문제점인 것이다.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부임 당시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마리오 만주키치를 2013-14 시즌 이후 역시 자신의 전술에 맞지 않는다고 판명한 후 조금씩 배제하기 시작했고, 만주키치가 2013-14 시즌 윈터브레이크 기간에 뮌헨이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와 계약하고 자신의 9번을 줬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과르디올라에게 항명하자 시즌 후 그를 방출했다.# 잦은 출장 배제에도 분데스리가 득점 순위 2위인 선수를 포칼 결승 명단에서 제외하며 '''"다음 구단에서 행운을 빈다"''' 라고 멘트를 날린 것은 레전드. 만주키치에 따르면 과르디올라는 자신을 왜 쓰지 않는지 조차 설명하지 않았다며 "설령 그가 커피를 권한다 해도 나는 그와 마주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또한 팀의 레전드 중 한 명이었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꾸준히 성장해오던 토니 크로스 등 실력있는 선수들을 내보낸 바 있다.[34]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주전에서 밀린 선수들과의 불화는 계속 있었다. 클럽 레전드인 세르히오 아궤로 조차도 2016-17 시즌 당시 가브리에우 제주스에게 선발에서 밀렸을 때 과르디올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으며,[35] 유스 출신인 앙헬리뇨는 올렉산드르 진첸코, 뱅자맹 멘디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한 시즌 만에 팀을 떠났는데 경쟁자들의 퍼포먼스들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출전 기회만을 부여받았었다. 결국 리버풀 전과 같은 큰 경기에서 부진한 뒤에 앙헬리뇨는 완전히 과르디올라에게 버려졌고, RB 라이프치히로의 완전 이적이 확정된 2021년 2월에 과르디올라가 자신의 자신감을 죽여버려서 좋은 활약을 펼칠 수가 없었는데 현 스승인 율리안 나겔스만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며 과르디올라를 비난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수비수에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 수비수를 사더라도 패스가 좋고 수비력도 준수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다. 덕분에 과르디올라가 바르셀로나 이후 맡은 뮌헨과 맨체스터 시티에서는 센터백들이 부상으로 나가리당해 수비형 미드필더나 풀백을 센터백으로 굴리다가 이들의 폼도 떨어지고 팀 수비는 개판이 되는 상황이 종종 나온다. 점유율 축구의 극한을 추구하는 과르디올라의 성향을 고려하면 당연한 영입이기는 한데, 이 때문에 정작 한 골 차이를 지켜야 하는 등 단단하게 걸어잠궈야 할 상황에서는 수비 문제로 깨지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가 폭발한 시즌이 바로 2019-20 시즌으로 에므리크 라포르트 하나만 믿고 가던 수비진이 라포르트가 부상당하자 완전히 무너지며 수많은 무승부와 패배를 불러왔고, 이 때문에 28라운드 기준 2위를 달리고는 있지만 1위인 리버풀과의 승점 차이가 22점, 리버풀이 29라운드를 끝마친 뒤엔 25점 차이가 나버리면서 우승 도전에 사실상 실패한 모습을 보여줬다. 게다가 정작 2020-21 시즌에는 라포르트조차 중요한 경기에서 불안정해지는 모습 때문에 후벵 디아스에게 밀리며 버려지는 모양새다.
스카이스포츠는 과르디올라가 내친 선수들로 베스트 11을 구성을 하기도 했다.
3.3.2. 분석
이렇듯 과르디올라는 대인관계가 심히 사무적이고 차가운 사람이며, 자신의 전술에 맞지 않는 선수를 냉정히 내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팀이 추구하는 전술과 맞지 않다고 훈련을 게을리하거나 팀 케미스트리에 악영향을 끼치는 선수를 내쫓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일례로 바르셀로나 시절 호나우지뉴는 과르디올라가 부임했을 당시 막장화가 진행 중이었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인터뷰에서 그가 팀에게 해를 끼칠 정도라고 인터뷰했을 정도. 호나우지뉴 또한 본인이 팀을 위해 나갔으며 과르디올라와의 불화는 없고 오히려 과르디올라가 팀에 남아달라 말했다고 인터뷰했다. 데쿠는 호나우지뉴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데, 과르디올라가 부임하기 직전인 2007년 팀 동료였던 에드미우손이 인터뷰에서 밝히면서 많은 논란을 낳았던 바르셀로나의 검은 양 사건의 중심에 호나우지뉴와 같이 있던 선수가 바로 데쿠다. 결국 과르디올라가 부임한 직후 해이해진 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내부 분란의 주동자로 호나우지뉴와 함께 지목되어 방출된 것이다.[38] 야야 투레의 경우 일단 전술과 맞지 않다는 이야기는 오해인데, 투레는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상당히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고 본인의 부상과 컨디션 저하, 세르지오 부스케츠라는 미드필더의 등장으로 인해 주전에서 밀려서 이적했을 뿐이다.[39] 물론 전술했듯이 불화가 없던 건 아니지만 이는 바르셀로나 시절부터 투레의 에이전트였던 디미트리 셀룩[40] 의 언플이 중심이 되어 발생한 일로 알려져 있다. 2014-15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 뮌헨과 맨체스터 시티가 만났을 때 둘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나, 투레가 언플에 대해 과르디올라에게 사과하고 2016-17 시즌 중반부터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고 결국 어느 정도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1년 재계약에 성공하는 등 둘의 불화는 잠잠해지는 줄 알았으나, 2017-18 시즌 투레가 본인의 노쇠화로 인해서 경기를 전혀 뛰지 못하자 다시 불화가 생기고 말았다. 투레는 2018년 6월 맨체스터 시티와 계약이 종료되자마자 과르디올라가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본인의 커리어를 망치기 위해 작정했기 때문에 본인이 경기에 뛰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41]
사무엘 에투[42] 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경우는 논란이 심한 편이다.[43] 2009-10 시즌 바르셀로나에서의 즐라탄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전반기[44] 와 달리 후반기에 급격히 경기력이 저하되며 들쑥날쑥한 활동량과 골 결정력을 보이며 본인의 커리어에서 역대급 부진을 보였고, 즐라탄 대신 보얀 크르키치가 나왔을 때 바르셀로나의 경기력이 오히려 더 좋아져서 차라리 즐라탄이 빠지는 게 낫다는 평을 언론에서 들었을 정도였다. 이 당시 즐라탄을 중앙에 세우면 20~30골을 넣는 반면, 메시는 50골 이상의 득점과 동시에 측면에 있는 페드로 로드리게스의 득점력까지 살려주는데 팀을 이끄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메시를 가운데에 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펩 지지층의 중론이다. 반대로 즐라탄 본인 및 즐라탄 지지층의 경우 티키타카를 기반으로 한 펩 특유의 전술과 점점 동떨어지게 된 것을 부진한 플레이의 원인으로 본다. [45] # 온갖 불화설을 남긴 채 AC 밀란으로 이적한 이후 귀신같이 부활한 것이 그 근거. 또한 즐라탄은 밀란, 파리 생제르맹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등 이후 이적한 구단 라커룸에서 썩 좋은 인간 관계를 맺은 편이고, 그 팀들 사이에서도 이적한 과정에서의 애티튜드를 고려해 보면 과르디올라와의 인간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양쪽 모두 해결하지 못해 감정이 쌓인 상태로 결별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46] 물론 이는 즐라탄 본인의 자서전에서 과르디올라가 메시 중심으로만 팀을 운영하느라 자신을 의도적으로 제쳐두었다는 발언을 하는 등 한쪽 입장에서만 쓰여진 것이므로 걸러 생각할 필요가 있다.[47] #
뮌헨 시절 마리오 만주키치와의 불화 역시 논란이다. 팬들은 첫 시즌에 과르디올라가 만주키치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양측 윙어를 살리고 만주키치의 머리를 노리는 크로스를 많이 시도하였고 이는 만주키치가 주전으로나 교체로나 나와서 골을 넣어주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고 주장했으나, 해당 시즌인 2013-14 시즌에 과르디올라가 시도한 토마스 뮐러-마리오 괴체 제로톱은 제로톱 그 자체의 경기력만으로는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리그 초반 전술상 잦은 결장으로 밀려졌던 것과 달리 점차 중용받게 되었던 만주키치는 결과적으로 해당 시즌에 분데스리가 득점 2순위 공격수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또한 훈련장에서 일어나는 불화에는 항상 중심에 있었을 정도로 불같은 만주키치의 성격이 펩이 그를 주전에서 제외한 이유라는 의견도 있으나, 이 역시 과르디올라 컨피덴셜의 저자 마르티 페라르나우의 발언을 근거로 할 뿐이며[48] 만주키치가 선수들과 불화를 일으키거나 라커룸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만주키치 팬들 입장에서는 만약 훈련장에서 일어난 불화의 중심에 만주키치가 있었다면 그 옆에는 과르디올라가 있었을 것이라는 반박이 가능한 셈. 다만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영입 작업은 과르디올라 이전에 2012-13 시즌부터 뮌헨 보드진에 의해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경우 부상으로 빠진 경기가 너무 많았다. 샤비 알론소가 있는 상황에서 팀에 남기가 애매했을 것이고 과르디올라와의 불화설도 없으며, 오히려 출장을 시킬 수 있을 때는 주전으로 계속 기용했을 정도이다. 실제로 슈바인슈타이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이적 이후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며 레전드 대우는 아쉬움이 남을지언정 적어도 전술적으로는 팀에서 내보내는 것이 옳았음이 입증되기도 했다. 토니 크로스의 경우 과르디올라는 크로스가 남기를 원했지만,[49] 크로스와 구단의 사이가 주급 문제와 같은 이유로 악화된 것이며 결국 어쩔 수 없이 크로스를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시킨 것. 가장 최근에 불거진 조 하트의 경우는 과르디올라가 부임한 후 하트와의 면담에서 하트가 스위퍼 키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라는 과르디올라의 권고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맨체스터 시티 보드진이 조 하트를 좋아하고 존중함에도 불구하고 하트는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 비슷한 예였던 세르히오 아궤로는 초기에는 인터뷰로 항상 비판받아도 끝없는 노력 끝에 기존과는 정반대의 플레이 스타일에 적응하면서 과르디올라에게도 자신이 지도했던 선수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선수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으며 주전으로 도약했다.[50]
정리하면 과르디올라는 기존의 자원을 대상으로 전술을 짜는 감독이 아닌 자신의 전술에 선수를 맞추는 감독이며 이것만으로도 감독으로서 최정상급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기는 하나, 자신의 전술에 선수를 맞추는 특성은 구사하는 전술의 난이도와 함께 전문가들에게 단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51][52] 기존 자원을 대상으로 맞춤 전술을 짜서 성공적인 결과를 내는 것은 어지간한 1류 명장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며, 과르디올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감독들 역시 본인의 전술에 선수를 맞추거나 전술에 맞는 선수를 영입하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든 과르디올라가 이뤄낸 결과들은 1류 감독으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과르디올라의 컨피덴셜이나 다른 선수의 인터뷰를 보아도 선수들과 개인 면담을 하는 데에 꽤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 하트의 이적 상황에서도 과르디올라와의 면담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고.
다만 이러한 불화설이 언론에 의해 유독 과르디올라에게 부각되는 것은 실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르디올라 특유의 축구 전술이 선수단과의 인간 관계 및 관리 부분에 그대로 적용이 됨으로서 기존 스쿼드에서 중용받던 명망이 높던 선수들조차 제2 혹은 3옵션으로 쉽게 밀려날 수 있다는 점, 이렇게 기존에 스타성이 있던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에 언론에 의한 이슈화가 빠르게 진행된다는 점, 그리고 팀과 구단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선수가 불만을 표시할 경우 굳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거나 개선하는데 노력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란에 대해서조차 별로 해명을 하려 하지 않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라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53] 과르디올라 본인도 자기를 싫어하는 전 지도 선수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면서 그 선수들은 대부분 경기 출전을 자주 하지 못한 선수들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54] 따라서 과르디올라는 자신의 전술에 따라 전략을 세우기 때문에 이 기초 전술이 흔들거리면 본인의 전술의 유연성 능력의 심각한 부족 때문에 팀이 흔들리지만, 전술을 잘 세웠을 시에는 상대팀을 완벽히 이길 수 있는 감독이다.
3.4. vs 무리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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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8살 차이의 주제 무리뉴와는 기이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1996년, 무리뉴가 바르셀로나에서 코치 겸 통역사로 일하던 시절 둘은 처음 알게 되었는데, 같은 팀에서 일하는 사이인 그때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96/97 시즌 바르셀로나가 라리가 빌바오 원정에서 1:2로 패한 이후 경기 내내 계속된 빌바오의 거친 플레이에 흥분해있던 무리뉴가 빌바오 감독 루이스 페르난데스에게 자식 관련 패드립을 해가며 욕설을 했고 분개한 페르난데스가 무리뉴를 잡으러 갔는데, 팀의 주장인 펩이 막아서서 무리뉴 대신 싸워줄 정도로 돈독했던 사이였다.[56]
세월이 흘러 2008년, 레이카르트가 경질되자 첼시 감독에서 경질된 이후 휴식 중이던 무리뉴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직을 지원하게 된다. 이 계획에는 펩을 자신의 수석코치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애초에 바르셀로나는 무리뉴를 선임할 생각이 없었고 차기 감독은 과르디올라가 되었다.[57] 이 결정에 무리뉴는 자신이 아닌 펩을 감독으로 선택한 것에 '''실망'''하였고 이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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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둘의 악연이 시작'''되는데, 무리뉴는 인테르 밀라노 감독직으로 재직하면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끝끝내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을 이룬다. 이때 준결승전에서 인테르 밀라노가 바르셀로나를 꺾게 되는데, 경기 중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교체 준비하던 펩에게 무리뉴가 다가가 "이봐, 아직 경기는 안 끝났다고?"라고 귓속말로 얘기한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경기 종료 후 그라운드에서 세레머니를 하던 무리뉴를 바르셀로나 골키퍼인 발데스가 억지로 잡아끄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여러 논란이 일었다.
이후, 무리뉴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취직하면서 역시나 바르셀로나와 과르디올라를 향한 특유의 언플을 시전하고[58] 둘의 사이는 급격하게 틀어지고 말았다.[59] 오죽했으면 그 과르디올라가 무리뉴의 언론 플레이에 빡쳐서 인터뷰 도중 욕지거리를 했을 정도였다.[60][61][62]
인터뷰할때는 정확한 사실만을 전하고 그다지 립서비스를 하지 않는것에 대해[63] 스페인 언론들은 그를 위선자라 부르기도 한다. 너무 냉소적이고 침착하게 말하니까. 하지만 2011/12 시즌 챔스 8강 후 자서전에서 과르디올라를 잘근잘근 씹었던 즐라탄이 무리뉴가 했던 말을 언급하며 판정에 불만을 제기하자 드디어 빡쳤는지 이런 인터뷰를 했다. 그 외에도, 리그 우승이 멀어지면서 비꼬는 어조의 인터뷰를 많이 보여주어 신사적인 이미지에 상당히 타격을 입었다. 감독 등 축구계에서 경쟁하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는 서로 비슷한 존재들이라고 인터뷰한 무리뉴에게 대고 "당신이랑 내가 비슷하면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것"이라고 쏘아붙이기도 했고 무리뉴가 우승이 확정되기 직전 인터뷰에서 과르디올라의 사임 결정에 그가 스스로 만족하기를 바란다며 예의를 지킨 인사를 했는데도 "레알의 우승을 축하한다. 우리(바르셀로나)의 침묵으로 가려진 많은 것들로 뒷받침된 승리지만."라며 뒤끝을 보여주는 인터뷰를 해서 빈축을 샀다. 그러나 무리뉴는 평소 라이벌인 바르셀로나와 자신을 잘근잘근 씹어왔으니 서로 감정이 좋을리가 없고 사실상 뒤끝 인터뷰와 음모론 드립은 무리뉴가 바르셀로나의 승리시 자주 시전하는 스킬이었으므로 이 건수 역시 무리뉴와 원투펀치 주고 받았다고 보는게 맞다. 물론 무리뉴의 저 인사만큼은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과르디올라에게 감독 대 감독으로서 동업자에 대한 격려가 담긴 것이라고 보는게 맞고. 어쨌든 피치 밖의 신사로도 불렸던 과르디올라가 무리뉴 부임 2시즌만에 불만을 주고 받는 수준으로 추락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위에서 알다시피 사실 이 둘은 매우 사이가 좋았던 적이 있었다. 무리뉴의 바르셀로나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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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사이가 좋았다. 시기를 봐선 2010년 UEFA 코치 컨퍼런스 때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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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이 바르사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즌의 엘 클라시코. 경기 전 악수는 나누었지만 둘의 표정으로 봐선 사이가 확실히 안 좋아졌다.
무리뉴와의 앙숙관계는 계속되어 2014년 유럽 빅클럽 감독모임에서 펩이 무리뉴에게 "무리뉴는 우아한 축구보다 결과에 집착하는 축구만 좋아한다"라고 비판하였고 무리뉴는 이에 "펩이 대머리가 된거는 축구를 즐기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펩의 신체적 약점을 들어 비꼬아 파문이 되었다.[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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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클라시코에서 맨체스터 더비로'''
그리고 16-17시즌, 펩은 맨시티의 감독으로, 무리뉴는 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들은 EPL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맨체스터 더비는 더욱 흥미로워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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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많은 사람들과의 예상과는 다르게 16-17시즌 들어서는 서로간의 관계가 어느정도 누그러진 모습을 보였다. 과르디올라가 무리뉴에 관해 인터뷰를 할때도 도발성 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그를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실제로 맨더비에서 만났을때도 이전처럼 눈도 안마주치고 억지악수를 할때와 달리 나름 포옹(!)도 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얘기하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2016-17 시즌 초 프리미어 리그 감독들이 만나는 자리가 있었을때 어느 정도의 화해가 있었지 않았을까하고 추측중. 그 이후로도 두 감독은 16-17 시즌 내내 서로를 언급하는데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7-18 시즌 초중반 맨시티와 맨유가 우승경쟁을 하게 되자 두 감독간의 신경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무리뉴는 맨더비를 앞두고 펩 과르디올라가 정치색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 특혜라 주장했다.[66] 또한 무리뉴는 같은 기자회견에서 (맨체스터 더비 전 공식 기자회견) 펩의 팀이 다이빙을 많이 하고 테크니컬 파울을 많이 저지른다고 맹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경전 속에서도 두 감독 둘 다 서로의 실력은 인정하고 있다. 예전 라리가 시절에 비하면 갈등의 정도가 매우 약해진 것은 분명하다. 두 감독 분명히 서로에 대한 직접적인 맹비난은 자제하는 모습을 18-19 시즌 들어와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8년 12월 18일 무리뉴가 경질된 이후 과르디올라는 카라바오컵 8강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자기는 그의 편이고 '''감독들은 외롭다'''며 그는 최고의 감독이며 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2019년 5월 7일 해설자로 나선 무리뉴는 펩을 '단순히 현 시점 최고의 감독이 아니라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하나' 라며 극찬했다.[67]
이후 2019년 11월, 무리뉴가 토트넘 홋스퍼 감독으로 부임함에 따라 다시금 PL에서의 맞대결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무리뉴 토트넘 부임 이후 첫 맞대결에서는 귄도안이 거하게 삽질, 진첸코 퇴장 등으로 팀이 자멸하며 패배.
무리뉴가 토트넘에 부임하면서 차츰 회복세에 접어드는 반면, 펩은 맨시티에서 한계점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해 펩 본인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기류가 흘러가고 있다.
2020/21 시즌 토트넘 전에서 다시 한 번 무리뉴의 토트넘에게 2:0으로 패해 리그 순위가 11위로 추락하였다.
3.5. 정장이 잘 어울리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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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트가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감독. 보통 '수트 입었을때 간지나는 감독 이미지'를 생각했을때 떠오르는 감독이다. 180이라는 우월한 기럭지에 얼굴도 잘생겨서 사실 어느 옷을 입어도 대부분 잘 어울린다. 그런데 요즘은 배나온 모습을 보여주는지라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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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의 아내는 패션계에서 일을 한다고 하여 자신의 패션코디는 오로지 패션쪽 전문가인 자신의 아내한테 맡긴다고 알려져있다. 자신은 오로지 축구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그렇다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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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뉴와는 여러모로 얽힐 수 밖에 없는데, 수트 잘 입기로 유명한 두 감독의 스타일을 남성 패션지 GQ에서 다루기도 했다. 두 감독의 패션은 클래식 vs 모던이다. 무리뉴는 주로 무채색의 포멀한 스타일의 수트에 컬러타이, 혹은 노타이로 포인트를 준다. 그리고 겨울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아르마니 회색 오버코트에 머플러를 코디한 모습은 중년 남성 패션의 교본과도 같다. 펩은 보다 활동적이고 모던한 스타일을 중시한다. 타이트한 핏의 수트를 즐겨 입고 언제나 셔츠에 다양한 색상의 풀오버를 매칭시켜 포인트를 준다. 때로는 자켓 없이 셔츠 소매를 롤업하기도 하고, 슬랙스나 슬림핏 데님을 입어 캐주얼한 느낌을 살리는 편이다. 펩의 스타일은 보다 캐주얼하고 모던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남성에게 좋은 모범이다. 남성들에게 좋은 패션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두 미중년 감독이다.
하지만 2017-18 시즌 기점으로 펩은 더 이상 경기장 위에서 수트를 입지 않는다. 후드와 트레이닝 바지로 복장이 아예 바뀌었다. 복장을 바꾼 이유에 대해선 이쪽이 더 편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캐주얼한 복장으로 코디 스타일을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션 센스로 관중과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곤 한다. 펩이 즐겨 입는 브랜드는 스톤 아일랜드.
4. 기록
4.1. 선수
4.1.1. 대회 기록
- FC 바르셀로나 B (1990~1992)
- 세군다 디비시온 B: 1990-91
- FC 바르셀로나 (1990~2001)
- 라리가: 1990-91, 1991-92, 1992-93, 1993-94, 1997-98, 1998-99
- 코파 델 레이: 1996-97, 1997-98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1, 1992, 1994, 1996
- 유러피언컵: 1991-92
- UEFA 컵 위너스컵: 1996-97
- UEFA 슈퍼컵: 1992, 1997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 하계 올림픽 금메달: 1992
4.1.2. 개인 수상
4.1.3. 클럽 기록
4.2. 감독
4.2.1. 대회 기록
- FC 바르셀로나 B (2007~2008)
- 테르세라 디비시온: 2007-08
- FC 바르셀로나 (2008~2012)
- 라리가: 2008-09, 2009-10, 2010-11
- 코파 델 레이: 2008-09, 2011-12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9, 2010, 2011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8-09, 2010-11
- UEFA 슈퍼컵: 2009, 2011
- FIFA 클럽 월드컵: 2009, 2011
- FC 바이에른 뮌헨 (2013~2016)
- 분데스리가: 2013-14, 2014-15, 2015-16
- DFB-포칼: 2013-14, 2015-16
- UEFA 슈퍼컵: 2013
- FIFA 클럽 월드컵: 2013
- 맨체스터 시티 FC (2016~ )
- 프리미어 리그: 2017-18, 2018-19
- FA컵: 2018-19
- EFL컵: 2017-18, 2018-19, 2019-20
- FA 커뮤니티 실드: 2018, 2019
4.2.2. 개인 수상
- FIFA 올해의 감독: 2011
- UEFA 올해의 팀: 2009, 2011
- 라리가 최우수 감독: 2008-09, 2009-10, 2010-11, 2011-12
- 돈 발론 어워드 라리가 최우수 감독: 2008-09, 2009-10
- 트로페오 미겔 무뇨스: 2008-09, 2009-10
- 프리미어 리그 시즌의 감독: 2017-18, 2018-19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 2017년 2월ㆍ9월ㆍ10월ㆍ11월ㆍ12월, 2019년 2월ㆍ4월, 2021년 1월
- IFFHS 세계 최우수 클럽 감독: 2009, 2011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2009, 2011
-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 2009, 2011, 2012
- 유럽 축구 올해의 감독: 2011
- 유럽 축구 시즌의 감독: 2008-09
- 글로브 사커 어워드 올해의 감독: 2013
- 카탈루냐 올해의 감독: 2009
- Royal Order of Sports Merit: 2010
- 리그감독협회 명예의 전당: 2019
4.2.3. 리그 기록
5. 어록
'''"무언가를 변화 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 부터 바꿔야 한다."'''[69]
'''"어떠한 위험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70]
'''"재능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나 결국 노력은 각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축구에는 항상 문제점이 존재한다. 끝이란 없다. 왜냐하면 늘 가능성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승리하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또 한 번 성취하는 것은 훨씬 힘들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에게도 힘든 시기가 찾아 올 것이다. 그 때도 지금과 같이 팬들이 우리에게 성원을 보내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는 팬들을 위해 축구를 하는 팀이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선수에게 존중을 보여라. 누군가 부상을 당했고 수술을 앞두고 있다. 그 이후에나 우린 그것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날 대단하게 만들어주는 이들은 바로 선수들임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늘 캄프누의 그늘 밑에서 살았고 그것보다 더 열망을 일으킨 건 없었다."'''
'''"트로피를 약속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자랑스러워하도록 만들 것이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이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다."'''
'''"축구는 훌륭한 교육과 같다. 상대방이 나보다 낫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공을 소유하는 것이 곧 수비이다. 우리 팀이 공을 가지고 있을 때, 상대 팀은 공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을 다시 탈취하는데 6초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6. 과르디올라에 대한 말, 말, 말
[image]
'''최고의 감독? 과르디올라를 고르겠다. 그는 특별하다. 그와 함께한 시대가 단연 최고였다.'''
'''리오넬 메시'''
'''그는 자신이 세계 최고라는것을 늘 증명했다. FC 바르셀로나를 시작으로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지금 맨시티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감독이 더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는 최고는 과르디올라다. 모든 감독은 과르디올라 감독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예전에도 말했으나 나는 과르디올라 감독이 바이에른에 있을 때 그를 지켜보며 배우기 위해 뮌헨을 찾기도 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지네딘 지단'''
'''과르디올라 감독을 존경한다. 맞대결을 펼칠 때마다 항상 이기고 싶었다. 그는 현시대 세계 최고의 감독이다. 내 솔직한 의견이며 100% 진심이다.'''
'''위르겐 클롭'''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 있는 선수들이 모여 한 세대로 함께 자라났고, 또한 펩 과르디올라처럼 훌륭한 감독이 있었다. 팀의 정체성을 만드는 건 감독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과르디올라는 아마 인도 팀에 가더라도 자신의 축구 철학을 똑같이 펼칠 것이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최고의 감독? 과르디올라가 월등하다. 나는 공격적인 축구를 좋아하는데 펩은 공격적인 축구 명장이다.'''
'''아르연 로번'''
'''처음 펩 과르디올라의 팀을 상대했을때, 경기 후 난 팀 벤치에 앉아 내 커리어 동안 처음으로 진지하게 축구계 은퇴를 생각했다. 그 2009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프로 축구선수로서의 23년 동안 최악이었다. 그 날 우린 틀렸고, 바르셀로나는 옳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인생에 대해 심사숙고했을때, 가장 우선시되었던 감정은 두번 다시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게 그때 축구를 그만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그 순간엔 적어도 뭐 그렇다. 과르디올라는 분명 그의 세대에서 최고의 감독이다.'''
'''라이언 긱스'''
'''과르디올라는 불완전한 과학인 축구를 끊임없는 고뇌를 통해 미제를 풀듯 풀어낸 사람이다. 플레이스테이션과 같은 축구, 그런 축구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안드레아 피를로'''
'''펩은 혁신가이다. 우리세대 최고의 감독이다. 과거엔 요한 크루이프 현재는 펩이다.'''
'''리오 퍼디난드'''
'''과르디올라가 이탈리아에 감독들과 수비수들을 망쳐놨다. 그가 너무 휼륭한 감독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감독들이 그를 흉내내려고만 했다. 이탈리아 수비수들에게 무턱대고 그의 철학을 강요하게 만들었다.'''
'''조르조 키엘리니'''
'''챔스 준결승 2차전 후반 45분간 상대한 바이에른은 내가 감독이 된 후 그동안 본 팀 중 단연 최고였다. 바이에른의 힘, 스피드, 패스, 그리고 볼 경합에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대단했다. 나는 펩의 바이에른과 사랑에 빠졌다. 특히 바이에른이 이러한 방식으로 일관성 있게 축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후반전 45분 동안 그들의 축구를 당해낼 해답을 찾지 못했다.'''
'''디에고 시메오네'''
'''많은 팀과 코치들을 분석 해봤는데 펩 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 우린 같이 시작했는데 그는 바르셀로나 B팀이었고, 그가 훈련을 시작할 즈음에 난 로르카 다음으로 알메리아 감독이 되었다. 그의 팀을 보면서 참 많이 배웠다. 그는 단순히 세계최고의 커리어를 갖고있을뿐만 아니라 매년 바르샤, 뮌헨, 시티의 선수들을 모든 부분에서 한단계 더 앞으로 갈수있게 해줬다. 이 능력들 때문에 그를 세계 최고라고 부를수 밖에 없게만든다.'''
'''우나이 에메리'''
'''내 생애 최고의 감독이다.'''
'''다니 아우베스'''
'''과르디올라는 센세이셔널한 감독이다. 그는 24개의 트로피를 가져왔다. 과르디올라가 어떤 팀을 가든 그곳에서 하는 축구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과르디올라는 맨시티에 부임한 후 경기장 안팎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만약 당신이 훌륭한 축구선수라면 과르디올라 같은 감독 아래에서 뛰고 싶을 것이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대단하지만 과르디올라가 보여주는 팀 스타일을 봤을 때 분명 역대 최고의 감독이다.'''
'''제이미 레드냅'''
7. 논란
본래 과르디올라는 신사적인 인터뷰 매너와 차분한 태도로 언행에 있어서 논란을 만드는 감독은 아니었다. 그러나 감독직을 오래 수행하면서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맨체스터 시티 부임 이후로 여러 실언으로 논란의 도마에 오르내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 상단에 적힌 것처럼 브레시아 선수 시절 약물 복용 논란이 있었다.
- 카탈루냐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수시로 밝히는 것을 넘어서 카탈루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리버풀 선수가 받을 거다. 우리가 EPL을 우승해도 리버풀 선수가 받았다. 이 상은 항상 리버풀을 위한 상이다"'''
- 2019-20 시즌에 누가 PFA 올해의 선수가 될지에 대해 위와 같은 망언을 하였다. 맨시티가 리그 우승을 한 시즌에 리버풀 선수가 PFA 올해의 선수상을 탄 경우는 2013-14 시즌의 루이스 수아레스, 17-18 시즌의 모하메드 살라, 18-19 시즌의 버질 판데이크가 있는데 당연히 이 선수들은 모두 우승 여부와는 별개로 해당 시즌에 엄청난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상을 탄 것이다. 따라서 펩의 이러한 발언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다. 그리고 이걸 보여주듯이 19-20 시즌 PFA 올해의 선수상은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훌륭한 활약상을 보인 케빈 더 브라위너에게 돌아갔다.
'''"테바스는 영국 축구를 질투하고 있다. 라리가가 걱정되고 염려되면 거기에 집중해라."'''
'''"20년 전, 벵거는 챔피언스 리그에 가려고 많은 돈을 썼다. 퍼거슨도 마찬가지. 우리는 알렉시스, 매과이어를 바랐지만 금액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우린 맨유처럼 돈을 쓸 수 없다.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도 돈을 많이 쓴다. 다른 잉글랜드 구단들도 돈을 많이 쓴다."'''
- CAS를 통해 맨시티가 FFP 규정 위반에 대한 무죄를 판정받게 되자 어마어마한 광역 어그로성 인터뷰와 발언들을 쏟아내면서 논란을 일으켰다.[71] 그 중에서도 퍼거슨과 벵거를 언급한 것이 엄청난 논란이 되었는데 퍼거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챔피언스리그로 올리기 위해 돈을 많이 썼고 벵거도 30년 전부터 돈을 엄청나게 썼다고 언급한 것이다. 이 발언은 축구 팬들, 특히 아스날 팬들의 커다란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72][73] 게다가 그것은 사실도 아니어서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건립 이전에도 아스날은 재정상태가 썩 좋지 못해 세계에서 유망주를 헐값에 사들여 포텐을 터뜨린 뒤 비싸게 파는 방식으로 재정을 확대해 명문클럽의 반열에 올랐다. 애초에 빚을 무리하게 내서 에미레이츠를 지은 것도 기존의 경기장인 하이버리가 워낙 작아 하이버리로는 입장료 수입을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후 맨체스터 시티는 FA컵 4강전에서 그 아스날에게 2-0으로 패배했고[74] 전 세계의 축구 팬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맨시티와 과르디올라를 조롱했다. 심지어는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도 전력이 두수는 아래에 가까운 올랭피크 리옹에게 뜬금없는 전술을 내세웠다가 3대 1로 무참히 당하면서 전술조무사란 불명예까지 썼다.
'''상대가 너무 깊은 수비를 펼쳤다. 우리는 그 틈을 파고들지 못했다. 그들은 경기를 하고 싶어하는게 아니라, 그저 역습만 하고 싶어했다.'''
- 20/21 시즌 레스터 시티에게 5-2 대패를 당하고 구단 홈페이지에서 한 말. 역습이 축구가 아니라는 어이없는 말에 팬들은 어이를 상실했다.
8. 개인사
- 흔히들 부르는 '펩(Pep)'라는 이름은 애칭이다. 본래의 이름은 카탈루냐식으로 주제프(Josep)이다.
- 중증 일 중독자로 유명하다. 초과 근무와 야근이 기본인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매일매일 수첩을 들고 다니며 전술연구를 하고 다니면 하루에 거의 16시간을 일하는 데 보내며 심지어 08-09 시즌 트레블 하고 나서 바로 다음 시즌 구상을 했다고 한다. 일과를 완벽히 끝내지 않으면 잠도 자지 않는다고.
- 이렇듯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철저한 성격이라 선수단을 거의 집착 수준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르사 1군에 신임 감독으로 처음 부임할 당시 기자회견에서 이미 "열심히 하지 않는 선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고 시작했고 부임 기간 내내 그대로 실천하였다. 이런 면모가 지나칠 정도로 통제와 간섭을 거부하는 성격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만나 엄청난 갈등을 빚게 되었다. 바르샤 드림스 다큐멘터리에서 바르샤의 측근 기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통제광에 가까운 그의 성정에 나중에는 애제자인데다 그를 어린 시절부터 받들어온 FC 바르셀로나 선수들마저도 지쳐 나가 떨어질 정도였다고 하며 당시 선수였던 앙리 역시도 훈련장에서 뭐 먹고 마시는 지도 다 통제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어린 시절의 리오넬 메시가 단 것을 너무 좋아하자 식습관을 통제하려고 훈련장 근처의 자판기를 전부 없애버리라 했으며 요주의 인물(?)이었던 헤라르드 피케는 아예 사립탐정까지 고용해서 사생활을 감시했다고 한다. 밤이나 주말마다 선수들이 얌전히 집에서 다음날 경기 준비하고 잘 쉬고 있나 확인하려고 랜덤으로 아무한테나 전화를 돌렸고, 받으면 그냥 넘어가지만 안 받고 놀러나간 것이 확인되면 철퇴를 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 예로 08-09 시즌 엘클라시코 경기 전날 여느 때처럼 밤 늦게까지 전술 고민하다고 불현듯 좋은 전략이 파박 떠올랐고 그 즉시 리오넬 메시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사무실로 와보라고 했단다. 근데 이때 시각이 밤 10시. 당연히 얌전히 집에 있었던 메시는 부리나케 그의 사무실로 찾아왔고 펩은 자신이 구상한 전술을 메시에게만 일러두었다. 그리고 다음날 결과는 역사적인 6-2 대승.
- 언어 습득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 5개국어를 구사한다. 감독생활을 하면서 쓰게 된 다양한 외국어들을 각각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모국어인 카탈루냐어, 스페인어는 물론이고[76] , 상대적으로 배우기 어려운 독일어도 단기간에 빠르게 습득해내어 뮌헨 시절에도 선수들이나 언론과 의사소통으로 인한 지장이 거의 없었다. 또한 맨시티에 가기 전에는 미국에서 단기간에 영어를 공부했는데도 수준급으로 구사한다.[77] 그리고 이탈리아어까지 구사를 한다. 스페인어, 카탈루냐어 둘 다 발음이 강한 편이라 외국어를 할 때 그 특유의 억양은 어쩔 수 없지만, 어차피 프로축구 감독에게 중요한 건 자기 생각을 얼마나 정확한 표현으로 전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억양은 큰 상관은 없으며, 독일이나 영어권 나라들은 외국인들의 발음에 대해 대체로 관대한 편이다. 너무 많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다보니 인터뷰 도중 스페인어와 독일어를 혼용하다 기자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언어로 대답해야되는지 고민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좌중을 웃음바다에 빠뜨린 적이 있을 정도.
- 축구 감독 중에서 특히 국내외로 개인 팬덤이 많은 감독이다. 주로 바르셀로나 시절 팬이 된 케이스가 많은 듯하며, 이 팬들이 과르디올라 감독을 따라 응원 팀을 옮겨가서 그 팀의 원래 팬들과 다투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2013-14시즌 슈퍼컵 경기 중 자기가 FC 바르셀로나에서 직접 데려온 티아고 알칸타라에게 수정펀치를 가해서 유럽축구 팬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78] 아비달에게도 수정펀치를 날렸다가 다음 훈련세션 때 수정당할 뻔한 적도 있고...
- 이런 저런 이유로 K-리그팬들에겐 K리그 올스타전 사건으로 인해 아주 나쁜 놈 취급받고 있다. 항목 참조.[79]
- 바르셀로나 시절 첫 시즌 6관왕 등 워낙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았던지라 토탈사커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와 압박축구의 창시자 아리고 사키와 동급으로 놓는 경향의 팬들이 있었는데, 이 두 감독은 현대축구의 전술의 토대를 마련했고 전 세계 대다수의 감독들의 전술이 20년 넘게 이들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르디올라의 소위 티키타카는 FC 바르셀로나만의 전술로 자리잡혀 다른 팀은 모방은 커녕 따라하지도 못했고 뮌헨 시절때도 초반에는 애매한 공돌리기가 이어지는 애무축구가 적지 않았다.[80] 아무리 결과가 중요하다는 축구판이지만 과르디올라의 영향력은 아직 이들에 비교하면 따위라 불릴정도로 미미한 편. 물론 사키나 미헬스보다 더 세밀한 전술을 짜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감독은 과르디올라를 포함하여, 주제 무리뉴, 알렉스 퍼거슨 등을 비롯하여 많지만 사키와 미헬스는 전술의 패러다임을 이끌며 현대축구의 기반을 만든 자들로 온갖 매체에서 역대 최고의 감독을 뽑는 투표에서 항상 1, 2위를 차지한다. 다만 토탈사커나 압박축구도 처음부터 모든 팀이 따라한 것은 아니다. 티키타카의 경우 스페인 대표팀이나 독일 대표팀에 이식되어 큰 성과를 내기도 했기에 향후 10년 후에는 평가가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 유독 메시를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르셀로나를 떠나 다른 팀 감독을 하고 있지만 아무리 자신의 팀 선수들이 잘하더라도[82] 항상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수는 메시임을 강조하는 말을 자주한다. 바르셀로나 시절 펩에게 메시가 어떤 존재였는 지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 2017년 5월 23일 발생한 맨체스터 아레나 테러 현장에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일부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이 있었으나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고 한다.#
- 카탈루냐 독립 선언서를 대표로서 낭독하였다. 이로 인해 펩 본인이 영국에게도 상당히 민감한 정치적 문제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탓에, 축구 외적인 문제로 과연 영국 내 감독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계속 하고 있는 걸로 보아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또한 18/19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 대진에 대한 인터뷰에서 '런던이 스페인이나 카탈루냐 같은 외국보다는 가까우니까요'라는 발언으로 카탈루냐에 대한 여전히 지조있는 펩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 사람들이 라이벌이라고 하는 무리뉴에 비해 말을 아끼고 젠틀하다는 평이 있지만 출생부터 카탈루냐 출신에, 현역시절 ~ 감독시절까지 인생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 몸을 바친 바르셀로나 성골 중의 성골이라 물러난 이후에도 은근히 레알 마드리드를 까는 발언을 한다. 예를 들어 챔스 8강에서 리버풀한테 졌을 때 레알 마드리드와 뮌헨 경기에 일어난 오심에 대해 얘기를 꺼낸다든지[83] 2018-2019 시즌에 시티는 유럽 강호들과 겨룰 수 있는 레벨을 구축해야 된다면서 유럽 강호 팀을 언급할 때 레알 마드리드를 쏙 빼고 바르셀로나, 뮌헨, 유벤투스 세 팀이 맨시티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팀들이라고 말 했다.[84]#
- 7월 24일에 벌어진 맨시티와 킷치 SC와의 친선전에서 상대 선수이자 해당 경기가 은퇴 경기였던 김동진 선수의 은퇴식 날 김동진과 포옹함과 동시에 김동진의 이름이 담긴 맨시티 유니폼을 선물해주는 훈훈한 장면을 보여주었다.[85]
- 펩 과르디올라 자신의 감독 커리어 동안 상대했던 팀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팀으로 MSN을 보유했던 FC 바르셀로나와 2018-19 시즌부터 역대급 우승 경쟁을 한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 FC를 꼽았다.[86]# 이후 2020년 인터뷰에서 다시 한번 본인의 감독 커리어에서 가장 힘든 상대로 리버풀을 꼽으며, 어떻게 하면 이길까 가장 많은 고민을 안기는 것이 위르겐 클롭 감독임을 밝혔다.[87]
- 감독이 아닌 레전드 선수로서 FIFA 20에 아이콘으로 출시된다.
- 2019년 11월 29일, 펩은 위르겐 클롭과 함께 잉글랜드리그감독협회(LM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 2020년 4월 6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펩의 어머니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 뛰어난 플레이를 봤을 때 경탄하거나 해맑게 기뻐하는 표정이 상당히 코믹하고 인상 깊은데 특히 레반도프스키의 전설의 9분 5골이 나온 경기에서 이를 보면서 소녀스러운 리액션을 보인 장면이 짤로 나돌기도 한다. 일명 펩르가즘.
- 선수 경력에도 나와 있지만, 펩이 선수 시절 현역으로 뛰었던 마지막 클럽은 멕시코 리가 MX의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 였다. 이때 도라도스 데 시날레아의 감독은 비선수 출신으로 15살부터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1965년생 후안마 리요 (Juanma Lillo) 라는 사람이었는데, 2020년 펩이 아스날 감독이 되어 떠난 수석 코치 미켈 아르테타의 빈자리에 후안마 리요를 불러왔다. 무명처럼 보이지만 이 사람도 스페인어권에서 나름 대단한 커리어를 쌓았기도 하고 펩의 말로는 자신에게 느낌을 준 감독이었다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