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데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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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프랑스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2년부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유벤투스 FC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레 블뢰를 이끌고 주장으로서 조국 프랑스에 월드컵 첫 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했으며, 미셸 플라티니, 지네딘 지단, 티에리 앙리와 더불어 레전드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자국 프랑스 대표팀을 이끌고 20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마리우 자갈루, 프란츠 베켄바워에 이어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3번째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2. 클럽 경력
비아리츠 올랭피크에서 짧은 기간동안 럭비 선수로 활약했던 데샹은 아마추어 클럽인 아비롱 바용에서 처음으로 공을 찼으며 낭트 스카우터에게 눈에 띄어 1983년 15살의 나이로 낭트와 계약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1985년 9월 27일 1부 리그 데뷔에 이르게 된다. 놀라운 점은 1987년, 19살의 나이로 주장 완장을 받고 낭트의 주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대표팀에서 함께할 마르셀 드사이를 만나게 된다. 낭트에서 4시즌동안 111경기에 출장해 4골을 기록하였다.
1989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해 17경기에 출장하였고, 그 다음 시즌인 1990년 지롱댕 보르도로 임대이적해 29경기 3골을 기록하고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온다.
1991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복귀하여 장 피에르 파팽과 함께 팀을 이끌면서 1991년에는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루디 푈러, 마르셀 드사이가 이적해 온 1992년에는 리그 우승을 다시 한번 이루어냈고, 1993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며 2017년 현재까지도 프랑스 클럽에서 유일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클럽이라는 대기록을 남기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이듬해 승부조작 때문에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가 강등[2] 당하면서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다.
94/95시즌을 앞둔 1994년 마르첼로 리피의 강력한 요청으로 영입을 시도한 유벤투스 FC로 이적했다. 첫 시즌은 부상으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지만, 유벤투스는 리그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더블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UEFA 컵에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95/96 시즌에는 디디에 데샹 커리어 2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맛보게 된다.
96/97 시즌을 앞두고는 대표팀 후배인 지네딘 지단이 유벤투스로 이적해온다. 그렇게 지단이 2선에서 공격을 이끌고, 데샹이 3선에서 수비를 하면서 이 프랑스 듀오는 유벤투스의 주축으로 자리잡게 된다.
1999년 첼시 FC로 이적하여 27경기에 출장했고, FA컵 우승에 기여한다. 2000년 발렌시아 CF로 이적하여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오르는데 기여하였다. 2001년 여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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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29일 미셸 플라티니 감독으로부터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처음으로 차출되었다.
데샹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년 미국 월드컵 진출에 실패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암흑기에 국가대표팀 데뷔를 하였다[3] .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선출된 이래 프랑스 대표팀에서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였다.
에메 자케가 부임한 뒤 에릭 칸토나가 주장으로 선임되지만 1년 정지를 당하면서[4] UEFA 유로 1996을 앞두고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마르셀 드사이, 로랑 블랑, 유리 조르카에프와 함께 대회 올스타로 뽑히면서 이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기대하게 하였고, 프랑스의 공격진도 장 피에르 파팽이나 다비드 지놀라에서 지네딘 지단으로 중심이 넘어간다.
이후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비셴테 리사라수, 로랑 블랑, 마르셀 드사이, 릴리앙 튀랑으로 이어지는 철의 4백을 보호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고, 이탈리아 전에서 로베르토 바조를, 브라질 전에서 히바우두를 막아내면서, 숨은 수훈갑으로 프랑스의 우승에 일조하게 된다.
UEFA 유로 2000에서 레 블뢰로서 마지막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데샹은 돌풍을 일으키던 체코의 파벨 네드베드, 4강에선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를 막아냈고, 결승전에선 이탈리아의 에이스 프란체스코 토티를 마크[5] 하며, 대역전극을 이끌고, UEFA 유로 2000의 우승을 달성한다.
UEFA 유로 2000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으며, 2000년 9월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로랑 블랑와 함께 정상의 자리에서, 말 그대로 박수칠 때 떠났다.
은퇴 당시엔 레 블뢰의 A 매치 최다 출장자였지만 이후 릴리앙 튀랑, 마르셀 드사이, 티에리 앙리, 지네딘 지단이 줄줄이 갱신하며 5위로 밀려난다. 2018년에는 위고 요리스가 기록을 갱신하면서 6위가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주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 였는데 흔히 말하는 육각형 미드필더처럼 공-수 만능인 선수는 아니었다. 수비력이 좋고 패싱력도 겸비했지만 공격능력(슈팅, 드리블, 공간침투, 상대 박스에서 이뤄지는 모든 페너트레이션 행위 등)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편.[6]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전성기 시절 프랑스 국대나 유베에서 뛸 때 팀은 4-3-2-1, 4-3-1-2, 4-2-3-1, 3-4-1-2 등의 포메이션을 사용했고 데샹은 항상 지단 뒤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공격하러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거의 없었다. 상황에 따라 가끔 올라가서 마무리 패스나 슛팅도 하긴 하지만 결코 장점은 아니었다. [7]
5. 지도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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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모나코 감독시절
현역 은퇴이후 2001년 AS 모나코 감독에 선임되었다. 2002-03 시즌에는 팀이 리그 2위로 마쳤고, 2003-0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체인 팀을 이끌고 준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여 뛰어난 젊은 감독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 당시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었는데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거뒀다면 유벤투스 감독으로 부임했을 거라는 것이 정설이다. 2005년 9월 성적 부진과 클럽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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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 감독 시절
2006년 7월 유벤투스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칼초폴리 여파로 세리에 B 소속이 된 유벤투스를 승점 삭감이 있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리그 1위로 세리에 A로 승격하는데 성공시켰다. 승격 이후 보드진에 영입 전권을 요구하였으나 보드진은 이를 거절하였고, 선수 영입 의견에도 역시 마찰이 생겨 결국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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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 감독 시절
이후 2009년 7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선임된 후 첫시즌만에 리그컵과 리그앙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2011-12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8강과 리그컵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리그에서는 10위로 부진하였다. 2012년 여름 마르세유와 계약이 만료되었고, 로랑 블랑의 후임으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5.1.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명선수도 명감독이 될 수 있다'''
로랑 블랑 후임으로 부임 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팀을 8강까지 끌어올렸으나, 하필 대회우승팀 독일을 만나 탈락했다. 그래도 나름 지난 월드컵과 비교하면 나름 리빌딩에 성공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UEFA 유로 2016을 홈에서 치루기 때문에 많은 팬들이 기대하는중이지만, 최종명단 발표 이후 프랑스 현지에서는 으리엔트리(...) 논란으로 홍명보급으로 까이는중. 내용은 여기서 참조.
그렇게 프랑스는 결승에서 UEFA 유로 2016 우승을 포르투갈에게 내주고 말았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지역 예선을 1위로 마친 후 월드컵 본선 조별예선도 무난히 통과한다. 그 후 16강에서 만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노쇠한 아르헨티나 수비진을 젊고 빠른 프랑스 공격진으로 뚫는데 성공했다. 이후 8강에서 우루과이도 꺾으면서 12년만에 팀을 4강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4강에서는 황금세대 벨기에를 또 다시 꺾으며 12년만에 결승진출을 이끌었고,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월드컵 우승에 도전하게 되었다. 참고로 선수시절과 감독시절 월드컵 우승을 모두 경험한 축구인은 브라질의 명장이자 축구 원로인 마리우 자갈루와 독일의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뿐이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4-2로 크로아티아를 대파하면서 자갈루와 베켄바워에 이은 3번째로 선수, 감독으로 모두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축구인이 되었다. 그리고 베켄바워와 함께 대표팀 주장과 감독으로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2번째 축구인이 되었다.
러시아 월드컵 이후 계약기간은 UEFA 유로 2020까지 연장되었다. 유로까지 우승할 경우 최초로 월드컵과 유로를 선수와 감독으로 1번씩 우승하는 감독이 된다.[8] 그리고 2019년 12월 계약을 연장함으로써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데샹이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아마도 카타르 월드컵이 데샹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일 것으로 추측된다.
5.2. 지도자 스타일
데샹은 로랑 블랑이 시도했으나, 메이저 대회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던 4-3-3 전술을 국대내에서 제대로 완성시켰다. 그 예가 바로 프랑스가 다시 재기하게 된 2014 월드컵이다. 벤제마가 원톱, 그리즈만과 발부에나를 각각 좌우 윙포워드로 배치한 이 라인업은 당시 횡적으로 움직이는 마튀이디와 전방위로 피치위를 움직이는 포그바와 함께 좋은 시너지를 내면서[9] 8강까지 진출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유로 2016에서 역시 4-2-3-1전술과 4-3-3전술을 혼용하려 했는데, 여기서 벤제마가 문제의 그 협박 스캔들로 인해서 나가리가 되어버린다. 벤제마 없이는 4-3-3 전술을 쓰기 힘들었던지라, 데샹은 당시 폼이 좋던 라사나 디아라가 축이 되는 4231전술을 고려하였다. 허나, 또 대회가 시작하기 직전에 라사나 디아라마저 나가리가 되어버리게된다.[10] 결국 데샹은 유로대회에서 캉테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하면서 맞이하게 된다. 허나, 현실은 개망이었다. 포그바나 마튀이디는 왼쪽 메짤라 위치가 주선호 포지션이다 보니 다른 위치에 서게 되면 폼도 시망이었고, 캉테는 수비는 잘했으나 전성기 카바예나 라스와 같은 경기 조율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게다가, 2014 -15 시즌부터 소속팀에서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한 탓에 톱에 익숙했던 앙투안 그리즈만은 윙어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고 지루는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팀의 전체적인 모습이 아쉽게 되었다. 그나마, 그리즈만 & 지루의 갑툭튀 골과 드미트리 파예의 군계일학과 같은 플레이가 팀을 토너먼트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프랑스는 아일랜드전에서 팀을 결승에까지 올리게 되는 중요한 전술적 변화를 맞는다. 기존의 4-3-3 전술 대신에 그리즈만을 지루와 함께 중앙에서 플레이하게하는 4-2-3-1 전술을 채택했던 것.
'''지루&그리즈만'''의 플레이는 전형적인 빅&스몰의 정석을 보여주면서 아일랜드를 무너뜨렸고, 이후에도 존 스탁턴과 칼 말론처럼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팀을 결승에 올리는데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더불어서, 파예와 무사 시소코가 수비가담을 중요시하는 윙어로 밸런스를 맞춰주고 3선의 포그바 & 마튀이디는 좀 더 중원 장악에 힘쓰는 스타일로 전환을 하면서 팀을 본궤도에 올렸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4-3-3 전술을 주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조별리그 첫경기였던 호주전에서 윙어로 출전한 그리즈만이 역시나 기대 이하의 활약상을 보여주자 두번째 경기였던 페루전에서 다시 4-2-3-1로 전술을 바꾸고 그리즈만을 본 포지션인 쉐도우 스트라이커 배치한 뒤 왼쪽 윙에는 중앙 미드필더인 블레즈 마튀이디를 투입하는 독특한 전술을 선보였다. 이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결국 결승전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나아가 마침내는 우승까지 하게 되었다.
5.3. 단점
5.3.1. 확실한 중원의 조율사가 부재
프랑스를 유로 결승에 올렸음에도 데샹이 까인 것은 라스 디아라가 나가리가 된 이후에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한 것이다. 다만, 이는 데샹을 커버쳐줄 거리가 좀 있는게... 마튀이디 & 포그바가 너무 별로였다는 것이다. 자원이 한정된 국대감독으로서, 저 두명이 그나마 패스와 중원장악이 될 선수다 보니 라스가 빠지게 되자 프랑스 축구는 아이슬란드전을 제외하고는 다 지지부진한 경기력으로 결승에 올라갔음에도 계속 까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스티븐 은존지의 성장과 '''은골로 캉테의 등장'''으로 이 자리를 메울 선수가 생기게 되었다. 거기다 월드컵에서는 맨유에서 부진한 활약으로 조롱받던 포그바까지 살아나면서 고민하던 문제점이 너무나도 쉽게 해결되어버렸다.
5.3.2. 아쉬운 선수 발탁?
유로 2016에서는 벤제마야 그렇다 치더라도[11] , 굳이 팀 내에 지루가 있는 상황에서 지냑을 선발한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실제로, 지냑은 유로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진작에 가메이로와 같은 선수를 발탁했으면 전술적인 폭이 더 다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아쉬웠다. 실제로, 지루와 그리즈만은 유로 결승에서 터프한 포르투갈 수비진을 상대로 무언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또한 라비오와 관련해서 말이 많지만... 애초에 라비오가 그 정도로 좋은 선수는 아니다. 게다가, 라비오를 대체한 듯한 은존지는 홀딩 미드필더 롤에서 그 어떤 프랑스 선수들보다 중원 조율에 있어서 탁월한 선수이다. 오히려 문제는 톨리소. 톨리소는 확실히 라비오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다만, 그럼에도 뽑은 이유를 돌아보자면... 아무래도 중원 깊숙한 곳에서 득점을 노리는 유형의 중미가 전무한 팀의 특성상 톨리소를 선택했을 여지가 있다. 실제로, 데샹이 이번에 선발한 미드필더들의 색깔은 모두 다 다르다. 라비오와 같은 유형은 이미 포그바라는 훨씬 뛰어난 존재가 있고, 박스 투 박스에서 수비적인 롤로는 캉테와 마튀이디가 더 뛰어난 존재인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라비오는 지가 지 무덤을 판게...어린애도 아니고 2018 월드컵 스쿼드에 안뽑히니까 데샹과의 인연을 끊겠다라고 했다. 데샹의 잘못보다는 라비오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반대로 최전방 공격수를 지루 1명만 데려가는 바람에, 지루가 골은 커녕 유효슈팅을 전혀 때려내지 못하며 부진하고 있는데도 마땅한 교체자원이 없어 전 경기를 뛰고 있는 상황. 물론 앙투안 그리즈만이 내려앉은 중앙 공격수로 위치하고 최고의 폼을 보여주고 있는 킬리안 음바페와 반대편에서 우스만 뎀벨레를 이용해 공격 루트를 확보해 볼 수 있겠으나, 지루의 명확한 대체 자원이 아예 없다는 것이 문제. 앙토니 마르시알이나 알렉상드르 라카제트 둘 중 한 명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뽑았어야 했다는 의견이 많다.[12][13] 알렉상드르 라카제트와 앙토니 마르시알은 이전에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킬리안 음바페와 앙투안 그리즈만이 죽어버렸기에 무조건 지루카드밖에 사용할 수 없었던게 현실. 애초에 라카제트와 마르시알은 프랑스인들에게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던터라 뽑았어야했다는 의견 자체가 나올수 없었다. 측면자원들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지루는 유효슈팅이 아닌 상대 센터백들과의 경합을 통해 2선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포스트업의 역할이었지 유효슈팅과 골을 기대하는 전술은 아니었다. 2018 월드컵에서 지루에게 향한 패스들의 90분당 기대도움수치만 보더라도 월드컵 스트라이커들중 12위였다. 애초에 지루에게 양질의 패스가 제공되는 전술이 아니었다. '''지루의 포스트업으로 음바페와 그리즈만의 활약은 지루가 있었기에 가능했던것이라는것을 명심하자.'''
그 외에 아드리앙 라비오나 킹슬레 코만[14] 이 제외되긴 했으나 각각 동 포지션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이 잘해주고 있어서 별 말이 없었고, 월드컵 우승을 한 지금은 누구를 안 뽑았냐는 소리는 쏙 들어간데다 데샹 까면 사살 분위기라 이런 말을 하면 프랑스 국내에선 축알못 취급받는다(...).
다만 그 뒤에도 선수 기용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은데 그 이유가 부상에서 회복하지 얼마 안 된 선수를 주전급이라고 무조건 뽑는 것에 있다. 2019-20 시즌에 은골로 캉테가 이 때문에 A매치 데이만 되면 부상당하고 돌아와서 시즌 전반기에 첼시에서 많은 경기를 뛰지 못 했다. 뤼카 에르난데스도 무릎에 통증이 있어 클럽 경기를 결장하고 있었고 구단에서 차출 거부를 요청했는데도 자기가 확인해야겠다며 무작정 뽑았고 결국 뤼카는 '''오른쪽 관절에 안쪽 인대가 파열되어 경기를 뛰지 못 했다.'''[15][16] 이게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같은 시기에 똑같이 구단에서 차출 거부를 요청했던 킬리앙 음바페의 차출 거부는 그대로 들어줬으면서 뤼카에게는 똑같이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 기타
비셴테 리사라수 문서에 설명되어 있듯 프랑스계 바스크인이다.
심각한 노안이다. 2018년 기준 50대밖에 안 된 젊은 감독임에도 생긴 건 거의 70대 노장이다. 나이로만 따지면 황선홍과 동갑. 아무래도 지나치게 흰 머리카락과 약간의 탈모,[17] 주름, 말투 때문에 그런 듯 하다. 또한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 때 만났던 2살 더 많은 즐라트코 달리치와 비교를 했을 때도 더 늙어 보인다. 사진에서처럼 미소를 지을 때 주름 때문에 더욱 늙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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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봐도 1945년생인 유프 하인케스옹과 같이 있어도 동년배로 보일정도다. [18]
선수시절에는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었다. 구글에 검색하면 선수시절 착용 축구화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국대 스폰서가 나이키인지라 국대 감독을 맡고서는 나이키를 신고 다닌다.
마르세유 감독시절에는 체중조절 실패인지 후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허나 프랑스 국대 감독으로 취임한 후에는 체중조절에 성공하며 어느정도 살이 빠진 모습을 보인다.
크로아티아에게는 그야말로 불구대천지원수나 다름없는데 선수로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다보르 슈케르를 쓰러트렸고, 감독으로서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루카 모드리치를 쓰러트리면서, 크로아티아의 월드컵 우승을 좌절시켰다.
7. 데샹에 대한 말말말
'''클럽에는 친구 디디에 데샹이 있었다. 바스크 지방 출신이었는데 막강한 놈이었다. 다리 힘이 어찌나 센지 당할 사람이 없었다. 우람한 허벅지를 보면 ‘바용의 기둥’이라는 별명이 틀린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라운드에 들어가면 그는 나를 주눅들게 했지만 경기가 끝나면 우린 마냥 즐겁기만 했다. 15살이었지만, 이미 데샹은 완벽한 프로선수였다. 듬직한 데샹 옆에만 있으면 나는 마음이 놓였다.'''
'''마르셀 드사이'''
데샹은 미드필드에서 모든 공을 따내곤 했다. 그러곤 너무도 쉽게 공을 처리했다.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빠른 결정을 내리고 최선을 이끌어내는 선수였다.'''
'''프랑크 르뵈프'''
기술과 체력은 땀과 노력으로 배양했지만 '''선수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마음가짐은 데샹으로부터 배웠다.'''
'''지네딘 지단'''
'''위대한 주장이며, 사소한 그의 향기조차 대신할 인물이 지금 있을까?'''
'''로저 르메르'''
'''그는 타고난 리더다. 투지와 정신력이 필요하면 주위에 있는 선수들은 데샹을 찾았다.'''
'''장 피에르 파팽'''
'''그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승리해야 한다는 열정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파트리스 에브라'''
8. 경력
8.1. 선수 시절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9/90 - 1993/94)
- 프랑스 디비전 1 (2) : 1989/90, 1991/92
- UEFA 챔피언스 리그 (1) : 1992/93
- 유벤투스 FC (1994/95 - 1998/99)
- 세리에 A (3) : 1994/95, 1996/97, 1997/98
- 코파 이탈리아 (1) : 1994/95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 ; 1995, 1997
- UEFA 챔피언스 리그 (1) : 1995/96 , 준우승 (2) : 1996/97, 1997/98
- UEFA 슈퍼컵 (1) : 1996
- 인터콘티넨탈컵 (1) : 1996
- 발렌시아 CF (2000/01)
-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1) ; 2000/01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 1998
- UEFA 유로 : 2000
8.2. 감독 시절
- 유벤투스 FC (2006/07)
- 이탈리아 세리에 B (1) : 2006/07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2016 준우승
-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우승
8.3. 개인 수상
- 1996 프랑스 올해의 선수
- 유로 1996 베스트 일레븐
- 1998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 FIFA 100
- 2004 프랑스 올해의 감독
- 2018 FIFA 올해의 감독
- 2018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20]
[1] 선수로 1998년 FIFA 월드컵 수훈과 감독으로 2018년 FIFA 월드컵 수훈으로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를 2번 받으며 오피시에로 승격 수훈,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Légion d'Honneur Officier[2] 한편 루디 푈러는 1860뮌헨 시절에는 성적 부진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되고 그 다음엔 재정난으로 2부 리그에서 아마추어 리그로 강등되더니 마르세유때는 승부 조작으로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어 루디 푈러는 강등만 가지각색의 이유로 3번 당해 버렸다.[3] 당시 데샹과 비슷한 시기에 국가 대표팀 데뷔를 한 선수로는 로랑 블랑이 있고 1년 뒤인 1990년에는 에마뉘엘 프티가 들어오게 된다.[4] 정지의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5] 이 당시 델피에로는 경기력 난조를 보이며 공격의 무게가 토티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알레산드로 델피에로는 결승전에서 두 번의 결정적 찬스를 날려버렸다.[6] 오히려 이런 공격 가담 능력은 비에라나 마켈렐레가 더 나은 편이었다.[7] 동시대에 육각형 미드필더라 할 수 있는 전천후 미드필더들은 3미들의 좌, 우 미드필더로 나왔다.[8] 그것도 데샹은 선수때 주장으로써 월드컵과 유로를 들어올렸으니, 그 기록의 희소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9] 공격 성향이 강한 이 둘을 수비적으로 보좌했던 것은 카바예.[10] 참고로, 프랑스가 우승을 못한 이유는 벤제마 아웃보다는 라사나 디아라의 공백이 당시에는 컸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사실, 벤제마가 지루보다 기량면에서 압도적으로 좋은 선수인 것은 확실하나, 국대에서 활약을 보면 지루나 벤제마나 비슷하기 때문.[11] 발부에나 사건.[12] 물론 마르시알은 시즌 후반기에 부진했기에 대표팀 제외는 이해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13] 라카제트는 시즌 후반기에 좋은 폼을 보여줬기 때문에 아쉬웠지만...[14] 코망은 부상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 하긴 했다[15] 이때 '''데샹은 "뤼카는 한쪽 다리로도 뛸 수 있다"는 망언을 한다.''' 당연히 바이에른 뮌헨 보드진들과 팬들은 경악했으며 바이에른 뮌헨은 뤼카는 부상으로 대표팀에 갈 수 없다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출처 결국 뤼카는 대표팀에 차출 되었고 선발까지 뛰었다.[16] 뤼카의 오른쪽 무릎의 인대 부상은 '''뤼카가 바이에른 뮌헨 이적을 확정짓고난 뒤'''부터 한스빌헬름 뮐러볼파르트가 이미 발견한 것이었다. 볼파르트는 또다시 뤼카의 오른쪽 무릎에 이상이 있자 뤼카를 뽑지 말아달라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데샹은 이를 완벽히 무시한 것이다.[17] 백발이라 티가 안날수도 있지만 잘 보면 티가 난다. [18] 위의 사진이 찍힌 시기는 바이언이 콩레블을 달성한 11-12시즌의 챔피언스리그 8강이다. 당시 데샹은 국대가 아닌 마르세유의 감독직을 수행중이었다.[19] 이 때의 데샹이 이끄는 모나코를 3-0으로 격파하고 우승을 거머쥔 게 당시 신예 감독으로 주가를 한창 올리고 있던 주제 무리뉴의 포르투다.[20] 1998년 월드컵 우승 후 국가대표팀 선수단 일원으로서 슈발리에를 받았고, 2018년 두 번째 우승을 이끈 감독으로서 오피시에로 승급되었다.
분류
- 1968년 출생
- 누벨아키텐 출신 인물
- 프랑스의 축구선수
- 미드필더
- 프랑스의 축구감독
- 1985년 데뷔
- FC 낭트/은퇴, 이적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은퇴, 이적
- FC 지롱댕 드 보르도/은퇴, 이적
- 유벤투스 FC/은퇴, 이적
- 첼시 FC/은퇴, 이적
- 발렌시아 CF/은퇴, 이적
- 프랑스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2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6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0 참가 선수
-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AS 모나코/역대 감독
- 유벤투스 FC/역대 감독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역대 감독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참가 감독
-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참가 감독
- UEFA 유로 2016 참가 감독
- FIFA 월드컵 우승 감독
- UEFA 유로 준우승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