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누가사 사치오

 

'''기누가사 사치오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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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선수(MVP)'''
1983년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5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1976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1975년
오오시타 츠요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
44도루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카프)'''
'''31도루'''

1977년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34도루
'''1984년 센트럴리그 최다 타점'''
1983년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103타점

'''기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102타점'''

1985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134타점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영구결번'''
'''No. 3'''
'''No. 8'''
'''No. 15'''
기누가사 사치오
야마모토 코지
구로다 히로키



'''히로시마 도요 카프 No. 3'''
'''기누가사 사치오
(衣笠 祥雄)
'''
'''생년월일'''
1947년 6월 24일
'''사망'''
2018년 4월 23일 '''(향년 71세)'''
'''국적'''
일본
'''출신지'''
일본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포지션'''
1루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조건'''
175cm, 73kg
'''프로입단'''
1965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65~1987)'''
1. 소개
2. 학창 시절
3. 프로 시절
4. 은퇴 이후
5. 카프의 영원한 철인이 되다


1. 소개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이며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했었다.
루 게릭이 갖고 있던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경신[1]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철인이었다.

2. 학창 시절


1947년 미군 흑인 사병이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며, 중학교 시절 유도에 관심이 많았으나 학교에 유도부가 없어 대신 야구부에 들어갔다고 한다. 교토의 야구 명문 헤이안 고교에 입학하여 포수로 활동하면서 고시엔 대회에도 출전하는 등, 나름 좋은 활약을 보였다.

3. 프로 시절


[image]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5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천만엔'''이란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2]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했다. 입단 시의 등번호는 '''28번'''을 달았는데, 그 당시 인기 애니메이션 철인 28호를 본따 기누가사에겐 '''철인'''이란 별명이 붙었고 이후 기누가사는 후술할 연속경기 출장 기록으로 '''진짜 철인이 되었다...'''
입단 초기에 '''시라이시 카츠미''' 감독의 지시로 내야수로 전향했지만, 처음 3년간은 1군 경기에서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 못한 채 2군에 머무르며 언제 모가지를 당할지 전전긍긍 하며 지내야 했다. 그러다 입단 4년차 시즌인 1968년, 히로시마의 감독으로 취임한 네모토 리쿠오가 던진 '''"기누가사라는 선수는 어떤 선수인가? 그 이미지를 네가 만들어 보라"'''는 말에 감명받은 기누가사는 '''"항상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지만, 한번 맞았다 하면 크게 날아가는 풀 스윙 히터가 기누가사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실력을 쌓으면서 이해 시즌부터 히로시마의 주전 1루수로 활약하기 시작하며 1군에 정착하였다. 그때부터 '''기누가사 하면 풀 스윙''' 이란 이미지가 따라붙으며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1975년부터는 등번호를 28번에서 후에 영구결번이 되는 3번으로 바꿨고, 히로시마의 신임 감독으로 온 '''조 루츠'''[3]의 지시로 기누가사의 주 포지션은 3루수로 변경 되었으며[4] 타선에서는 4번이던 야마모토 코지의 뒤를 받치는 5번 타자로 맹활약하면서 그 해 히로시마가 창단 이래 처음으로 센트럴리그를 제패하고,[5] 이후로도 카프가 기록한 3회의 일본시리즈 우승(1979~1980년, 1984년)에 큰 힘을 보탰다.
특히 1979년 일본시리즈 7차전, 4대 3으로 박빙의 리드를 지키던 9회말에 히로시마의 마무리 투수이자 절친에나츠 유타카킨테츠 버팔로즈 타선에 안타와 포수 송구실책, 도루 등을 허용하며 무사 2, 3루의 위기에 빠지면서 고바 타케시 감독이 투수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에 에나츠가 불만을 표시하자, 1루수였던 기누가사는 마운드로 올라가 에나츠에게 '''"네 기분은 나도 잘 안다. 지금 네가 마운드에서 내려간다면 나도 같이 나가 줄 수는 있어. 하지만 이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녀석이 너 말고 누가 있냐? 타자한테만 집중하고 힘내자!"''' 라고 충언을 건넸고, 친구의 말에 각성한 에나츠는 결국 킨테츠에게 한 점도 내주지 않은 채 이른바 에나츠의 21구를 선보이며 카프의 첫 일본 제일을 일궈낸 장면은 최고의 에피소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image]
1987년 6월 13일, 루 게릭을 뛰어넘는 2,131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우고 주니치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축하 꽃다발을 받는 기누가사.[6] 당시 카프 감독이던 아난 준로의 뒷모습도 보인다.
그 후 기누가사는 야마모토 코지 등과 함께 '''빨간 헬멧군단'''의 주포로 꾸준히 플레이했고 1976년 도루왕, 1984년 타점왕을 차지 하였으며 시즌 최다안타 기록 1회, 최우수선수(MVP) 1회, 베스트 나인 3회를 수상하는 등 히로시마의 주축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기누가사가 자랑할 만한 기록 중 하나가 바로 '''2,215경기 연속 출장기록'''[7][8]이며 이는 1970년 10월 1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부터[9] 1987년 10월 22일 시즌 최종전이자 그의 현역 은퇴 경기(대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전)까지 18시즌에 걸쳐 작성된 것이다. 그 외에도 통산 2,500안타, 500홈런의 기록도 달성하였다.
야마모토 코지 - 기누가사 사치오의 4-5번 콤비는 '''YK포'''로 불리우며 통산 86회의 백투백 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역대 최고의 클린업 멤버로 손꼽히는 오 사다하루 - 나가시마 시게오 콤비의 '''ON포'''(통산 106회)에 이어 통산 2위의 기록이다.
1987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23시즌 동안 '''2,543안타, 타율 0.270, 504홈런, 1,448타점, 266도루'''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500홈런-200도루는 장훈 옹, 야마모토 코지와 함께 일본프로야구에서 단 3명만이 갖고 있는 진기한 기록이다. 통산 2,500안타 이상으로 범위를 좁히면 장훈과 기누가사 2명 뿐.[10] 이 해에 제 6호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프로 통산 몸에 맞는 공 '''161개'''로 역대 3위를 기록했지만 아무리 큰 부상을 입을 위험한 사구(死球)를 맞더라도 투수에게 화를 내거나 마운드로 뛰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괜찮다, 아프지 않아" 라면서 상대 투수를 안심시킬 정도로 신사적인 모습을 보였다. 1979년 8월 1일, 카프와 요미우리 자이언츠 와의 경기 때 상대 투수 니시모토 다카시의 공이 기누가사의 왼쪽 어깨를 강타하는 바람에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음에도, 기누가사는 사과하러 다가온 니시모토에게 '''"지금은 위험하니까 벤치로 들어가 있어"''' 라며 도리어 그를 감싸 주었다. 그날 시합은 기누가사의 사구 전 까지 7대 1로 거인이 앞서고 있었지만, 니시모토가 기누가사를 사구로 쓰러뜨린 후 페이스가 무너지면서 대량 실점 하는 바람에 8대 8 무승부로 끝나면서 니시모토의 승리는 날아갔는데, 경기 후 니시모토가 사구로 좌측 견갑골이 부러진 기누가사에게 전화로 "(사구로)다치게 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자 기누가사는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마라. 그것보다 오늘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놓쳤으니, 네 손해가 크다"''' 라면서 니시모토를 위로해 줬고, 니시모토는 ''''기누가사 씨는 그릇이 정말 큰 인물이다'''' 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기누가사는 다음 날 경기에 골절상에도 불구하고 대타로 나와 에가와 스구루가 던진 공 세개를 전부 크게 헛 스윙 하여 삼진으로 돌아섰는데, 경기 후 인터뷰 때 '''"첫 번째 공은 팬들을 위해서, 두 번째 공은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세 번째 공은 니시모토에게 내가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휘둘렀다"''' 라고 밝히면서 야구계에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11]

4. 은퇴 이후


[image]
2017년 WBC 일본 대표팀의 평가전 경기를 해설 중인 기누가사.
(좌측부터 기누가사 사치오-마키하라 히로미-캐스터 닛타 에츠오)
지도자 생활과는 연이 없었으며[12], TBS 테레비의 해설가[13], 아사히 신문의 평론가로 일했었다. 한편으로 TBS 라디오에서 음악방송의 MC를 맡거나 니혼 TV의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 하기도 했다.
히로시마 카프 시절 팀메이트였던 에나츠 유타카와는 생전에 동료이자 친구로 막역하게 지냈다. 특히 에나츠가 각성제 소지 혐의로 형무소에 수감되자 에나츠의 난카이 호크스 시절 스승인 노무라 카츠야와 에나츠의 또 다른 친구이자 당시 국회의원이던 에모토 타케노리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에나츠 구명 운동을 벌인 바 있다. 덕분에 에나츠는 1995년 4월 가석방으로 풀려나며 야구계에 복귀했고, 당시 에나츠는 "나의 석방을 위해 힘써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만약 내가 형무소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죽은 목숨이었을 지도 모른다" 라면서 기누가사를 포함하여 그를 도와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2016년 8월 11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투수 미우라 다이스케가 기누가사의 23시즌 연속 안타 기록을 24시즌 연속으로 경신하는 장면을 중계했고, 캐스터가 기누가사와 비교하여 이 기록을 설명하자 기누가사는 '''"에이 캐스터 양반, 그래도 안타 수 차이가 얼만데 이러시오 ㅋㅋㅋ"''' 라고 맞받아치며 팬들에게 재미를 주었다. 참고로 미우라의 통산 안타 수는 123개...

5. 카프의 영원한 철인이 되다


해설가와 방송 출연 등 지속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여 왔지만, 2018년 초부터 목소리가 변하는 등 심상치 않은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해 4월 19일 DeNA 대 요미우리 경기 실황의 해설을 맡은 기누가사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건강에 이상이 왔음을 알 수 있는 위화감이 느껴지면서 많은 야구 팬들이 그의 몸 상태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시합 전 그의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알아챈 TBS 프로듀서가 "(해설을)바꿔 드릴까요?" 라고 물었지만 기누가사는 강한 의지를 보이며 괜찮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래도 기누가사 단독으로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프로듀서가 경기 직전에 거인 전담 해설가인 마키하라 히로미를 긴급히 호출하여 더블 해설로 편성하면서 무사히 중계를 마칠 수 있었다.
당일 목소리 상태는 안 좋았지만 기누가사는 평소대로 밝은 어조에 웃음까지 보이며 해설했고,[14] 기누가사의 사무소 측에서도 '''감기'''라고 해명하면서 팬들도 일단 안심했었는데...
사실 기누가사는 약 2~3년 전부터 대장암(상행결장암)으로 투병 중이었고[15], 이 사실을 팬들에게 숨긴 채 활동을 이어가다 결국 악화된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2018년 4월 23일 도쿄 도 소재 병원에서 향년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같은 해 1월 4일 췌장암으로 타계한 호시노 센이치에 이어 1970년대를 풍미했던 명 선수가 한명 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히로시마 시절 동료이자 둘도 없는 친구인 에나츠 유타카는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비통해 했고, '''"그는 정말 좋은 친구였고, 나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면서 '''"나도 곧 따라 갈테니, 기누가사와 저 세상에서 야구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또한 연속경기 출장 세계기록 보유자인 칼 립켄 주니어도 '''"매우 슬프다. 그를 멋진 남자, 멋진 친구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인의 가족과 일본의 야구 팬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한다"'''라는 기누가사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현역 시절 팀 메이트인 야마모토 코지도 생전의 기누가사에 대해 '''"그가 몸에 공을 맞고 부상을 입은 장면을 자주 봐 왔지만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멀쩡하게 그라운드에서 계속 뛰면서 마음껏 풀 스윙 했다. 아무리 아파도 입도 뻥긋하지 않고 플레이 해준 것에 대해 한솥밥을 먹은 동료로서 정말로 고맙다는 말 밖에는 해줄 게 없다"''' 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어찌 보면 그의 생전 대인배스러운 면모는, 흑인 혼혈로서 폐쇄적인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누가사와 재키 로빈슨과 비교하는 사례는 별로 없어 보이는데, 이미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외국인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1] 1987년 6월 13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서 2,131경기로 경신했다.[2] '''거기다가 히로시마는 당시 모기업도 없는 시민구단이었다!'''[3] 일본 야구사상 최초의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그 해 15경기 만에 감독을 사퇴했다(...). 하지만 지금의 '''붉은 카프'''의 이미지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루츠 대신 감독을 맡은 고바 타케시가 이후 카프의 진정한 전성기를 일궈낸 점을 보면, 오히려 루츠의 중도 하차가 전화위복 이었을지도 모르겠다...[4] 이 포지션 변경은 당시 신입 외국인 선수로 들어온 '''게일 홉킨스'''를 주전 1루수로 기용하기 위해 결정된 것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홉킨스는 3번 타자, 기누가사는 5번 타자로서 4번 타자 야마모토 코지와 함께 클린업 트리오로써 맹활약하며 팀의 첫 우승에 공헌했기에 서로 윈윈한 결정이 되었다. 특히 홉킨스는 우승이 결정된 1975년 10월 1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3점 홈런을 날리며 현재까지도 카프 역사상 명 장면으로 종종 회고되고 있다.[5] 일본시리즈에선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2무 4패로 무너지면서 한큐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선물했다.[6] 일반적으로 NPB의 기록을 크게 평가하지 않는 (특히 오 사다하루의 통산 홈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에서도 기누가사의 연속출장 기록과 후쿠모토 유타카의 도루 기록은 인정한다.[7] 기누가사의 기록은 1996년 6월 14일 칼 립켄 주니어에 의해 경신되면서 일본 기록으로 내려앉았다. 립켄 주니어의 최종 연속출장 기록은 '''2,632경기'''.[8] 참고로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1,766경기'''로 기누가사에 이어 NPB 연속 출장 2위 기록 보유자 이지만 '''연속 경기 무교체 출장(1492경기)'''과 '''연속 이닝 출장(13686이닝)'''의 세계 기록을 갖고 있다.[9] 이전 문서엔 최종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었는데, 연속출장 기록은 앞에 적힌 10월 19일 시합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해 카프의 시즌 최종전은 10월 25일의 대 한신 타이거스 전이었다.[10] 야마모토는 통산 2,339안타를 기록했다.[11] 기누가사가 한마디 덧붙이길, '''"그래도 역시 에가와의 공이 빠르기는 했다"'''...[12] 여담으로 이러한 경력과는 상관없이, 게임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2010의 야마가사 코치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13] TBS는 과거 모기업 이었다는 인연 때문인지 요코하마 DeNA의 경기 실황을 중계하기 때문에 주로 DeNA 경기를 해설했다. 도쿄 대첩(야구)에서도 키누가사가 사사키 카즈히로, 나카하타 키요시와 함께 일본측 해설위원을 맡았다[14] 이 날 캐스터로 경기를 중계한 TBS의 '''토사키 다카히로''' 아나운서는 그의 마지막 해설에 대해 '''"기누가사 씨의 목소리가 경기 전 미팅부터 심상치 않아 걱정했지만, 일단 시합이 시작되니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더라. 기누가사 씨가 이 일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라고 털어놓았다.[15] 암 발병의 원인은 평소 좋아하던 육식와인이 원인으로 보인다. 특히 와인을 너무 좋아해서 의사에게 그만 마시라는 권고를 받았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