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

 

[image]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쓰리런 홈런을 친 홍세완과 하이파이브 하는 모습
'''이름'''
루이스 마누엘 데 로스 산토스 마르티네즈
(Luis Manuel de los Santos Martinez)
'''생년월일'''
1966년 12월 29일 (57세)
'''국적'''
도미니카 공화국
'''출생지'''
도미니카 공화국 산크리스토발
'''신체'''
196cm, 92kg
'''포지션'''
1루수, 3루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4년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44순위, KC)
'''소속 팀'''
캔자스시티 로열스 (1988~1990)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1991~1992)
슝디 엘리펀츠 (1994~1996)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7)
가오핑 레이공[1] (1998~1999)
사라페로스 데 살티요[2] (2000)
해태-KIA 타이거즈 (2001)
디아블로스 로호스 델 멕시코[3] (2002)
게레로스 데 오악사카[4] (2002)
다네시 카페 네투노[5] (2003)
'''응원가'''
'''동요 산토끼#s-2'''[6][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43번'''
케이스 미첼(2000)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2001)

문현정(2002~2003)
1. 소개
2. 선수 시절
2.1. MLB 데뷔 전
2.2. MLB 시절
2.5. 대만 대연맹 리그 시절
2.5.1. 가오핑 레이공 시절
2.6. 멕시코 야구 리그 시절
2.7. KBO 시절
2.7.1.1. 산토스가 떠난 이후의 KIA의 외인 타자 잔혹사
2.8. 멕시코 야구 리그 시절
3. 은퇴 이후
4. 연도별 성적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용병 타자이자 마지막 경기의 4번타자이며, KIA 타이거즈 인수 후 첫 용병 타자. 주포지션은 1루수이다.[8] 또한 해태의 마지막 승리에서 결승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9]

2. 선수 시절



2.1. MLB 데뷔 전


드래프트에서 잠재력을 인정받아 전체 44순위로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지명되었다.

2.2. MLB 시절


1988 시즌에 첫 데뷔를 했다. 11게임에 출장하여 22타수 2안타 0.091이라는 별 볼일 없는 성적을 거뒀고, 그 다음해인 1989 시즌에는 28게임에 출장하여 87타수 22안타 0.253의 성적을 거뒀다. 1990 시즌에는 한 경기도 콜업되지 못하고 결국 10만 달러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이적을 한 1991 시즌에는 30타수 5안타 0.167의 성적을 거두고 그 후로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게 된다. 1993 시즌에는 플로리다 말린스 산하 마이너 팀으로 들어갔으나 메이저리그 콜업을 다시는 받지 못하고, 더 이상 메이저리그에서 볼 수 없게 된다.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은 타율 0.209에 홈런은 기록하지 못했다.

2.3. 대만 프로야구 리그 시절



2.3.1. 슝디 엘리펀츠 시절


더 이상 미국에서 뛰기 힘들다고 판단한 산토스는 대만으로 진출하여 1994 시즌부터 슝디 엘리펀츠에서 뛰게 된다. 대만에서의 포지션은 3루수. 첫 해부터 .358/.389./562라는 타출장 기록을 남기고, 홈런 14개에 타점도 64개를 기록했다. 이런 좋은 활약에 힘입어 팀은 1994 시즌 전기, 후기리그에서 1위를 하며 타이완 시리즈가 열리지 않고 통합우승을 이뤄낸다.[10] 시즌이 마무리 된 후, 베스트 10에도 들게 되며 대만 프로야구 리그 데뷔 첫 해부터 최고의 활약을 하게 된다.
1995 시즌에는 .352/.395/.526의 타출장과 14홈런 72타점을 기록한다. 직전 해와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고, 1996 시즌에는 포텐이 만개하여 .375/.430/.645라는 좋은 타출장을 기록하고 22타점 78타점을 기록한다.
대만에서의 기록은 홈런보다 2루타가 2배 이상 많은, 평균 2루타 27개 이상을 기록하며 하이 애버리지 중장거리 타자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그 활약을 토대로 산토스는 '대만의 이치로'라는 찬사를 들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게 된다.

2.4. 일본프로야구 시절



2.4.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하지만 요미우리에서는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237/.282/.307의 타출장을 기록했다. 특히 홈런은 하나도 치지 못해서 하위 리그의 한계를 보여주게 되며 결국 요미우리에서 방출된다.

2.5. 대만 대연맹 리그 시절



2.5.1. 가오핑 레이공 시절


급여 문제로 자신이 활약했던 대만 프로야구 리그슝디 엘리펀츠가 아닌 경쟁리그인 대연맹 리그의 가오핑 레이공을 선택하며 슝디 시절보다 더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1998 시즌에는 .358/.395/.615의 타출장을 기록했고 143안타 27홈런 96타점을 기록했다. 이 성적으로 타점왕과 골든 글러브를 획득하게 된다.
1999 시즌에는 .317/.368/.526의 타출장에 11홈런 58타점을 기록한다. 하지만 나이가 먹어갈수록 수비가 막장이 되가면서 더 이상 3루수를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2.6. 멕시코 야구 리그 시절


2000년에는 사라페로스 데 살티요로 이적을 한다. 당시 리그에서 52년 째 이어지던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을 깨고 36경기 연속 안타를 새롭게 갱신한다.[11]

2.7. KBO 시절



2.7.1. 해태-KIA 타이거즈 시절


멕시코 리그에서의 활약과 망하기 직전의 해태의 상황과 맞물려, 당시 35세의 노장이었던 산토스는 15만 달러라는 연봉에 해태에 입단하게 된다. 원래 3루수로 활용을 하려다가 수비가 안되고 주루도 상당히 느려서 안습했던 당시 해태의 4번타자 겸 지명타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6월 중순까지만 해도 타율 .376 13홈런 45타점을 기록하며 도루를 제외한 모든 부문에 상위권에 랭크하며 리그 최고의 타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타율이 2할까지 떨어지면서[12] 김성한 감독은 산토스를 방출하고 대체 용병으로 다니엘 리오스를 데려오려고 계획하게 된다.
리오스를 영입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산토스는 김성한 감독을 찾아가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눈물을 흘렸고, 마침 리오스가 방광염에 걸려서 입국을 거부하게 되자 구단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산토스를 계속 활용하게 되었다. 9월에는 다시 3할이 넘는 타율과 7개의 홈런을 추가하며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13] 결국 시즌 초반에 비하면 스탯이 많이 떨어졌지만 결국 타출장 .310/.365/.510 26홈런 107타점 wRC+ 121.2 war 2.38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산토스의 단점은 위의 문단에서 기록했듯이 수비를 볼 수 없어서 지명타자로 활용해야 했고 주루 능력이 상당히 안좋다는 것과 영입 당시 노장이었던 나이 때문에 체력이 받쳐주지 못한 점이다. 반대로 장점을 뽑아보자면 밀고 당기고 타격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구 분포도가 그라운드 어느 쪽이든 타구가 고르게 분포되었다는 것. 게다가 말많고 탈많은 다른 해태 용병과 달리 '''자신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아주 성실한 선수'''였다. 지적으로 보이는 안경을 착용하고 매너도 뛰어나서 신사답다는 평가도 있었고, 노장의 나이에 수비는 안되고 주루도 느렸지만 최선을 다하고 끈기 넘치는 플레이에 괜찮은 타격을 보여주며 많은 타이거즈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타이거즈팬들이 붙여준 별명은 '''검은 호랑이'''[14]와 '''산토끼'''[15]. 많은 팬들은 응원가도 동요 산토끼를 개사해서 불러주며 산토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비록 노장의 나이에 수비 포지션의 문제와 여름 이후의 하락세까지 겹쳐서 재계약엔 실패했지만, 많은 타이거즈팬들의 기억에는 역대 타자 용병 중에 괜찮았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게다가 기아에서 방출된 후 고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에 돌아가서 쉬고 있는 와중에 몇 년 후 김성한 감독과 스카우트가 용병을 알아보려고 도미니카로 찾아오자, 기아 시절에 시즌 도중 방출을 할 것이라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하여 성대하게 대접하며 용병감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2.7.1.1. 산토스가 떠난 이후의 KIA의 외인 타자 잔혹사

산토스가 떠난 이후 타이거즈의 외국인 타자는 영입하는 선수마다 부진을 해서 팀에 저주라도 걸린 듯 싶었다. 특히 이듬해인 2002년 기아는 시즌 내내 1위를 달리고는 있었지만, 4번타자 부재에 시달리며 마지막 6경기를 남기고 삼성에게 1위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게다가 플레이오프에서는 4위 LG에게 2승3패로 역전을 허용하며 V10의 꿈을 접었다. 홍세완은 냉정히 말해서 땜빵 4번타자에 불과했으며[16], 두 외국인 타자인 워렌 뉴선과 루디 펨버튼은 합작 2할4푼도 안되는 타율에 18홈런 65타점에 그쳤다. 만약 산토스가 2002 시즌에도 재계약하여 전년도의 성적 정도만 내줬어도 기아의 득점력은 훨씬 향상되었을 것이며 페넌트레이스 우승과 한국시리즈 V10을 이뤘을지도 모르는 일.
그 이후에 들어온 마이크 서브넥, 윌슨 발데스 등은 모두 없느니만 못한 수준으로 조기 퇴출된다.[17] 그나마 외국인 3명에 타자 1명 강제적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이 바뀐 2014 시즌부터 브렛 필이 나타나서 나름 괜찮은 성적을 기록하며 외국인 타자 수난사가 드디어 끝나는가 싶었는데, 세이버매트릭스 상 별로 효율이 뛰어나지 않은 선수라는게 드러나고 고액의 연봉에 비해 몸값을 못한다는 의견이 있어서 팬들 사이에 '''필송논쟁'''이라고 불리는 논쟁 끝에 필은 2016 시즌이 끝나고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게 된다.[18] 필을 방출하고 나서 새로 데려온 타자는 로저 버나디나. 산토스와는 정 반대로 버나디나는 2017 시즌 초반에는 부진했지만, 가면 갈수록 믿음에 보답하며 30-30에 가까운 성적과 KBO 골든글러브도 획득하게 되며 타이거즈팬들의 숙원이었던 외국인 타자 수난사를 드디어 해결하게 된다.
그런데 버나디나 역시 술과 유흥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준수한 성적을 내고도 2년 만에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2019년 헤즐베이커의 성적에 따라 수난사가 끊어질 지 수난사가 이어질 지가 결판날듯.
그러나 헤즐베이커 역시 기아 외인 타자중 역대 최악의 성적을 보여주며 채 20경기도 못 뛰고 방출되었다. 원인은 스프링캠프 때 타격폼을 수정한 것 때문으로 보이는데, 원래부터 변화구에 약했던 타자가 타격폼을 바꾸니 더욱 더 대처가 안되는것... 다행히도 대체 외인으로 들어온 프레스턴 터커가 제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터커가 2020년 리그 최상급 타자로 각성하면서 외인 타자 수난이 '''끊어졌다.'''

2.8. 멕시코 야구 리그 시절


기아에서 재계약을 포기하게 되자 결국 다시 멕시코 야구 리그로 돌아가서 말년 야구 생활을 하게 된다.

2.9. 이탈리아 야구리그 시절


2003 시즌에는 다네시 카페 네투노라는 이탈리아 리그에 속해있는 팀에 들어가서 당시 한국나이 38세의 나이에 이탈리아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하며 리그 폭격을 하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3. 은퇴 이후


2006 시즌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코치를 짧게 경험했다. 2009 시즌에는 현역 시절 추억이 많았던 멕시코 야구 리그의 올메카스 데 타바스코에서 수석코치 역할을 했다. 2010 시즌부터 2012 시즌까지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산하 구단인 DSL 브루어스에서 감독을 하고, 2013 시즌부터는 감독이 아닌 코치로서 활약 중이다.
2015년에는 중신 브라더스의 레전드로 초대되어 대만에서 친선 게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4. 연도별 성적


<color=#004687>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88
KC
11
.091
2
1
1
0
1
1
1
4
0
4
.231
.227
.458
1989
28
.253
22
3
1
0
6
6
0
5
0
14
.293
.310
.60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91
DET
16
.167
5
3
2
0
0
1
0
2
0
4
.219
.233
.45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2001
해태 / KIA
130
.310
150
19
0
26
107
74
1
46
1
66
.365
.510
.875
<color=#373a3c> '''KBO 통산'''
(1시즌)
130
.310
150
19
0
26
107
74
1
46
1
66
.365
.510
.875
[1]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존재했던 대만 대연맹 리그의 팀이다. 대만 프로야구 리그와는 다른 리그이다.[2] 메이저리그 산하 트리플A에 속해있으면서 독립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멕시코 태평양 리그와 달리 이 리그의 이름은 '''멕시코 야구 리그 Liga Mexicana de Béisbol(Mexican League)''' 이다.[3] 멕시코 야구리그에 속한 팀이다.[4] 멕시코 야구리그에 속한 팀이다.[5] 이탈리아 야구리그에 속한 팀이다.[6] KBO 등록명이 산토스였는데, 어감이 산토끼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팬들이 붙인 별칭이다. 덕분에 응원가도 동요 산토끼를 사용했다.[7] 산토스 토스야 어디를 가느냐 홈런 홈런 치면서 어디를 가느냐[8] 하지만 대만에서는 3루수로 활약했고, 기아에서는 주로 지명타자로 출장했다.[9] 해태의 마지막 승리는 2001년 7월 25일 사직 롯데전으로 당시 2:0으로 최상덕이 완봉승을 거두었는데, 팽팽하던 0대0의 균형을 깨는 솔로홈런을 터뜨린 타자가 산토스이다.[10] KBO로 비유하자면 삼성 라이온즈1985년 통합우승과 똑같은 경우라고 생각하면 된다.[11] 이 기록은 2012년에 결국 다른 선수에 의해 다시 깨지게 된다.[12] 공교롭게도 산토스의 부인이 따로 떨어져 살다가 같이 살게 되니 성적이 곤두박질쳤다.[13] 당시 이종범-김종국-장성호-산토스로 이어지는 상위타선은 당시 최강이었던 삼성, 현대타선에 결코 꿇리지 않았으며, 당시 이종범-김종국-장성호는 모두 전성기였다.[14] 당시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던 펠릭스 호세의 별명이 검은 갈매기였는데, 그에 상응하는 별명으로 타이거즈 팬들이 지어준 별명이다.[15] 이유는 단지 이름이 산토끼라는 어감과 비슷했기 때문.[16] 특히 당시 타력이 강했던 현대나 삼성에서는 7번정도가 어울리는 타자였다.[17] 외국인 타자에 뒷통수를 계속 맞은 기아는 2000년대 중반 이후 2명의 외국인 슬롯을 모두 투수에 쓰게 된다.[18] 참고로 브렛 필이 3년을 뛰면서 기록했던 단일시즌 war은 매년 산토스와 비슷했지만, 고액의 연봉에 비해 돈값을 못하는 성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