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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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경과
3. 재판과 석방
4. 여파


1. 개요


서독의 마티아스 루스트(Mathias Rust, 1968-)라는 청년이 일으킨 무단 비행 사건. 냉전 시대 공산권 국가의 맹주 소련 영공을 '자유 진영'의 민간 항공기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면서 소련군의 방공망 시스템을 엿먹인 사건으로 유명하다.
 

2. 사건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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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베델 출신인 루스트는 10대 후반이었던 1987년에 비행학교에 들어가 비행사 훈련을 받았는데, 비행 시간이 겨우 50시간에 불과했던 이 신출내기는 1987년 5월 13일에 함부르크 근처의 위터젠 비행장에서 자신이 임대한 세스나 F172P 경비행기(기체 등록번호 : D-ECJB)를 몰고 이륙해 생애 첫 장거리 비행에 도전했다. 루스트의 세스나기는 조종석 외의 잔여 좌석을 모두 없애고 그 자리를 보조 연료탱크로 채워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도록 개조된 기종이었다.
 
루스트는 페로 제도에 중간 기착했다가 아이슬란드의 케플라비크에 도착했고, 여기서 1주일 동안 머물다가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거쳐 핀란드헬싱키에 도착했다. 헬싱키에서 급유를 받고 난 뒤, 루스트는 5월 28일 아침에 다시 헬싱키를 떠나 핀란드 관제소에 스웨덴스톡홀름으로 간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통보 직후 루스트는 스톡홀름과 정반대 방향인 동쪽으로 기수를 틀었고, 핀란드 관제소는 갑작스러운 항로 변경에 놀라 루스트와 교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루스트는 쿨하게 관제 시스템을 꺼버리고 계속 동쪽으로 날아갔다.
 
관제소는 루스트의 비행기가 모종의 사고나 납치 등을 당했을 것으로 보고 긴급 상황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루스트의 세스나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진 지점에서 항공유가 새어나간 흔적을 발견했다는 제보가 들어와 핀란드 국경수비대의 구조선이 출동해 현장을 샅샅이 수색했다. 하지만 잠수부까지 동원해 수색을 벌였는데도 추락 흔적은 전혀 없어서 일단 행방불명 상태로 간주하고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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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트의 세스나기는 그대로 에스토니아에서 소련 영공으로 들어가 무단 비행을 시작했다. 소련 방공군은 레이더에 정체 불명의 기체가 포착되자 적기로 간주하고 대공 미사일로 요격 준비까지 마쳤지만, 상부에서 발사 허가를 내려주지 않아 대처하지 못했다. 이어 인근 상공에서 비행 중이던 전투기도 루스트의 세스나기를 발견하고 소속 부대에 요격 혹은 격퇴 허가를 요청했지만, 부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것은 위에 실린 그래픽 한쪽 구석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엄청난 비난에 시달린 소련 방공군에서 그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민간항공기에 대해 격추 명령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다.
 
소련군 상부에서 제대로 신경쓰지 않은 건지, 혹은 사태 파악이 안돼서 어리버리하고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루스트는 아무런 위협이나 제지도 받지 않고 소련 영공을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이따금 조우한 소련 항공기나 헬리콥터도 특별 임무를 맡은 기체거나 높으신 분의 개인 비행기 정도로 생각하고 경계하지 않는 지경까지 갔다.
 
저녁 7시 무렵이 되자 루스트는 모스크바 중심가까지 날아왔다. 루스트는 이 시점에서 착륙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크렘린을 계획했다가 KGB코르시가 두려웠는 지 포기하고 열병식도 치러지는 널따란 붉은 광장에 착륙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붉은 광장도 인파와 차량이 많아서, 루스트는 일단 '착륙할 테니 피하라'는 제스처로 낮게 저공비행해 주의를 끈 뒤 사람들이 비행기를 보고 놀라 흩어진 틈을 타 무사히 착륙했다. 루스트의 이 무모해 보이던 착륙 시도는 때마침 붉은 광장을 둘러보던 한 영국 출신 여행객의 비디오 카메라에 담겼다.
 
난생 처음 붉은 광장에서 경비행기 착륙을 본 행인들은 비행기에서 내린 루스트를 일류 비행사처럼 대하며 사인을 요구하기도 했고, 인적 사항을 묻기도 했다. 루스트의 독일어를 알아들은 한 사람은 '동독에서 왔습니까'라고 물었는데, 루스트가 '아니, 서독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상당히 놀라기도 했다. 이어 근처에서 근무 중이던 군인들과 경찰이 달려와 루스트의 신원을 확인한 뒤 체포했고, 루스트는 바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3. 재판과 석방


1987년 9월 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재판에서 루스트는 항공법 위반과 국경 무단 월경 등의 혐의로 4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루스트를 바로 교도소로 보내지 않고 레포르토보 특수 교도소로 보내 구금해두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마침 두 달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미국을 방문해 로널드 레이건과 중거리 핵무기 폐기에 대한 정상회담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88년 8월에 소련 최고회의에서는 서방에 대한 화해 제스처의 일환으로 루스트를 특별 사면한다고 발표했고, 루스트는 풀려나 8월 3일 귀국했다.
 

4. 여파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자신하고 있던 소련 방공망이 겨우 일개 민간 경비행기에게 맥도 못추고 무력화되자, 곧바로 고위 장성들이 줄줄이 보직해임되었다. 당시 소련 국방장관이었던 세르게이 소콜로프와 소련 공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콜두노프가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옷을 벗었고, 휘하 간부 수백 명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이 사건 후 방공망을 대폭 보강하고 서방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자는 군부 보수파의 주장을 억눌렀고, 오히려 이 사건을 그들의 세력 약화에 써먹었다.
 
루스트는 귀국 후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노코멘트로 일관했지만, 주간지 슈테른에는 자신과 관련된 인터뷰를 댓가로 10만 마르크를 요구해 기사가 실렸다. 루스트는 자신의 비행 동기와 소련에서 받은 처우 등을 소개했고, 순식간에 영웅시되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루스트의 행동이 중2병스러운 독단적 행동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루스트는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범죄를 저질렀다. 1989년에는 자신을 해고한 여성을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혀 살인미수 혐의로 2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년 3개월 만에 가석방되었다. 1996년에는 인도의 한 차 무역상 딸과 결혼하면서 힌두교로 개종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2001년에 의류 절도 혐의로 1만 마르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005년에도 절도 혐의로 붙잡혀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이후에는 신냉전에 반대하는 평화 운동가로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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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건 기체였던 D-ECJB는 베를린 독일과학기술박물관(German Museum of Technology)에 전시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