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제3차 대오스만 전쟁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모레아와 신성 로마 제국을 주축으로 당대 유럽 주요 국가들로 구성된 십자군과 오스만, 베네치아간에 벌어진 3번째 전쟁에 대해 다루는 문서. 대략적으로 주인공이 모레아로 귀환하고 십자군 재결성이 선포된 1436년 10월부터 베네치아가 패배하며 전쟁이 끝난 1438년 5월까지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2. 각 진영의 전쟁 준비
2.1. 십자군
1436년 10월 1일, 주인공은 안코나를 떠나 모레아로 향했고 며칠 뒤 도착해 가장 먼저 토마스를 만난다. 오스만이 총력전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는 보고를 토마스에게서 전해들은 주인공은 며칠간 황후들과 시간을 보내고 , 1년간 만나지 못했던 유일한 자식인 헬레네와도 시간을 보낸 뒤 이바니아에게 용병대장으로서 법관 데미클레오테스와 함께 미스트라를 지켜줄 것을 부탁한다.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 측의 대표격인 헝가리 고명대신 후녀디 야노시에게서 십자군의 또다른 한 축인 신성 로마 제국군이 전쟁을 준비하는 데에 약 반 년에서 1년 정도가 걸릴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의 지시에 따라 모레아군 또한 총력전을 대비해 농성 준비와 물자 이동을 시작하며, 그러는 동안 주인공의 파문이 철회되었다는 희소식이 11월 15일 전해진다. 이를 신호로 삼기라도 한듯 유럽 각국의 사절단이 찾아와 주인공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다.
이러한 유럽의 움직임에 편승해 나폴리의 적법한 왕이 된 르네 드 앙주가 제노바와 손잡고 모레아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는데, 특히 나우플리온으로 배송된 파비스 방패와 제노바제 석궁, 그리고 300여 벌의 판금갑옷으로 가스뮬리 중 수백 명의 유사 제노바 쇠뇌병을 편제할 수 있게 된 게 큰 도움이 된다.
모레아가 뜻밖의 선물을 받는 동안,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 또한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난 전쟁에서 헝가리가 황폐화되고 야전에서 큰 손실을 입은 바 있지만 어떻게든 군사를 다시 동원한 신성 로마 제국은 후녀디의 지휘 하에 1만 명의 병력을 갑옷과 무기의 규격화 및 정예화를 통해 그 유명한 '흑군'으로 편제하며, 전투수레 방진 전술의 약점인 기동성을 파비스 방패 방진으로 개량해 보완한다. 트란실바니아의 유민들과 헝가리 병사들의 유족들로 이뤄진 1만 명의 흑군은 왈라키아에 대한 처우를 정할 권한을 부여받고 철저한 복수를 맹세한다.
1437년이 밝아오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도 피난갈 자들은 미리 피난보내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보수와 물자의 절약, 배급제 시행 등의 전쟁 준비를 시작하며, 이를 통해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 등의 일부 농성을 지휘할 귀족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들이 모레아로 대피한다. 한편 요안니스 8세에겐 콘스탄티노플의 정부 첩보조직인 '이민국'이 오스만의 총동원으로 인해 모레아측이 승전한다면 데브시르메 제도가 붕괴될 것임과 발칸에서 오스만이 완전히 몰아내질 것임을 보고한다.
알바니아에선 주인공의 '모레아의 출병과 동시에 세르비아를 쳐 주라지의 신병을 확보하라' 라는 지시를 받은 제르지가 아버지인 지온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르비아와 싸울 것 없이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묘책을 준비하며, 5천 명의 자원병을 모은다.
2.2. 오스만
한편, 십자군 참여국들의 이러한 행보에 맞서 오스만 또한 전쟁 대비를 차근차근 해나간다. 더이상 뒷일은 생각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오스만은 말 그대로 총동원령을 내려, 마케도니아에 기반을 두고 있던 티마르 시파히들을 차등 보상을 주겠다고 해서 경쟁시켜 발칸의 마을들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성인 장정을 군적에 올리고, 데브시르메 수혜자들 또한 기독교 가정들을 돌아다니면서 자원병을 모은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할릴은 불가리아 정교회와 불명의 조직이 제국 정부를 지지하면서 수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을 것임을 주장하며, 조만간에 불가리아에서 반오스만 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감지한다. 이를 역이용하기 위해 팔레올로기 파샤를 얼굴마담으로 삼고 교회통합 반대파 불가리아인들을 타르노보 대주교좌 복원 등의 종교적 관용정책을 미끼로 낚아 강력한 반모레아 정서를 이끌어낸 무라트 2세는 불가리아에서만 7500명의 인력을 확보하는 등 발칸 전역에서 모을 수 있는 인력을 싹싹 긁어모은다.
거기에 더해 티무르를 격파하기 직전 바르스바이가 급작스레 병사한 이후 혼란에 빠진 맘루크를 손절하려는 카라만과 잔다르를 회유한 할릴은 무라트에게서 범죄자들로 구성된 형벌부대 보주쉬크[1] 를 설립하라는 명을 받아 충실히 이행하며, 병력의 질과 규율이 크게 떨어질 것을 감수하고 모든 역량을 투입한 결과 '''도합 7만 이상의 어마어마한 대병력'''[2] 이 동원된다.
한편 세르비아에선 주인공의 파문 철회 소식을 접하고, 주인공과 후녀디가 어디로 향할지에 대해 주목한다. 후녀디가 지난 전쟁에서 어이없이 빼앗긴 트란실바니아를 수복하려 들지, 아니면 세르비아를 응징하기 위해 요충지인 베오그라드를 공격할지 고뇌에 빠진 주라지는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쪽 개입이 먼저일 것이다' 라는 결론을 에디르네에서 전한 할릴과 세르비아쪽에 주둔하면서 주라지를 도와주던 오스만의 장군인 자아노스 파샤에 의해 걱정거리를 알바니아의 제르지 쪽으로 돌리며, 그와 동시에 세르비아 궁정의 가신단이 자아노스의 무례함에 격분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한편, 주라지 앞에서 물러나던 자아노스는 한 노학자에게 앞길을 가로막힌다. 무라트가 예언을 정말 이룰 수 있을 것인지 묻는 노학자에게 짜증을 내던 자아노스는 그의 이름이 하즈 바이람 밸리라는 대답을 듣는다. 이로 인해 이후 자아노스의 판단에 의해 일어날 오스만의 크나큰 전략적 실책이 예고되었고 그 실책은 오스만에게 큰 타격으로 돌아온다.
2.3.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이번 싸움에서 어느 한쪽이 확실한 승리를 거두면 앞으로 이득을 전혀 볼 수 없으므로, 이를 어떻게든 막기 위하여 원로원의 주도 하에 4차 십자군의 선례를 들어 십자군을 수송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방해공작을 시작한다.
방해공작이 시작되어 십자군의 발이 묶인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봉쇄가 임박하고 주민들이 성벽 보수와 농성 대비를 하면서 배급제가 실시되자 베네치아 주재상인들은 곡물 가격을 2배로 늘리고 폭리를 취한다.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해 모레아나 오스만 한쪽의 해상을 봉쇄할 수 있도록 개입 준비를 마친다.
3. 개전
주인공의 능력을 믿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알브레히트는 갑작스레 변수를 던진다. 1437년 3월 5일 후녀디가 이끄는 1만 명의 흑군이 왈라키아령 트란실바니아를 전면 침공하도록 지시한 것. 아직 십자군이 출범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한 왈라키아는 허를 찔렸고, 2천 명의 왈라키아군이 기습당해 전부 죽거나 포로로 잡힌다. 포로들의 뼈와 살을 모조리 분리해버린 흑군의 소문에 왈라키아 전체가 공포에 떨며, 이와 동시기에 알바니아에서 제르지가 군을 움직이고 몰다비아와 폴란드에서도 군대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현지에서 무제한적인 약탈과 징발로 물자를 충당하고 포로는 모조리 잔인하게 죽여버리는 흑군의 모습에 남은 주둔군마저 대부분 트란실바니아에서 탈주하고, 애초부터 블라드 2세를 딱히 믿고 있지 않았던 후녀디는 아예 이번 기회에 왈라키아를 철저히 박살내려 한다. 그 일환으로 왈라키아 궁정에 보내진 시체들의 끔찍한 몰골에 단 2세를 비롯한 왈라키아인들은 경악하며, 1주일만에 흑군이 트란실바니아를 돌파해 왈라키아 국경을 넘어왔다는 소식[3] 을 듣자마자 무라트에게 헬프 요청을 한다. 단 2세의 명령으로 청야전술을 택한 애꿎은 보야르들만이 희생되는 상황에서, 4월 21일 제르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4. 제르지의 계책과 오스만의 치명적인 실책
헝가리의 흑군이 왈라키아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제르지는 세르비아를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기 위해 행동에 나서려 하지만, 각 지방의 영주들이 세르비아군의 우세와 니슈/소피아에 주둔한 오스만군의 존재, 7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오스만 중앙군 등을 근거로 들어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제르지는 대략 7천 명 정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세르비아-오스만 동맹군의 규모를 3천 명 정도까지 줄일 획기적인 계책을 준비한다.
우선 제르지는 병력을 4천 명의 본대와 1천 명의 별동대로 나누어, 별동대를 자신이 이끌고 산맥을 넘어 오스만군의 본진인 소피아를 기습한다. 알바니아-코소보 접경지대의 험준함을 잘 알고 있던 오스만군의 지휘관 자아노스는 세르비아 접경지대 쪽에 병력 대부분을 배치해놓은 상황이었고, 당연히 소피아와 알바니아 접경지대에는 병력이 거의 없었다. 뜬금없이 본진을 기습당해 대패 위기에 몰린 자아노스는 과거 하즈 바이람 밸리가 자신에게 했던 말[4] 을 떠올리곤 동요하게 되어, 그가 했던 예언을 믿고는 모레아군의 주공이 세르비아로 이미 향했을 것이므로 가망이 없다고 지레짐작해 전면 철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모레아군 주공의 세르비아 진군 같은 건 없었고, 오히려 이 판단으로 오스만의 서부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하고 소피아 서쪽의 모든 영토가 버려지면서 제르지는 전략 목표의 날먹에 성공한다.
한편, 자아노스가 벌인 치명적인 실책은 물론 각 방향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황의 악화로 양면전쟁의 위기가 닥쳤음을 보고받은 무라트는 데브시르메 제도에 대해 점점 더 회의감을 품으며, 자아노스 본인이 세레 인근의 요새로 도망친 뒤 행적이 묘연해졌다는 보고를 들은 뒤 제르지의 배신을 눈치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라트는 세르비아와 왈라키아로 가는 지원병력은 없을 것임을 확실히 하며, 한 달 전 들은 오흐리드 주교좌 주도의 반란 획책 보고를 떠올리곤 가장 강력한 적군인 모레아군에 맞서기 위한 우주방어 구축에 집중한다.
5월 29일, 무라트는 새로운 칙령을 내려 만 12세 이상의 모든 남성을 징집하기 시작한다. 자신 또한 맏아들인 아흐메트를 전장에 데리고 갈 것임을 이야기하며 소년병까지 동원하려 드는 모습에 병사들마저 질려하지만, 그중 항변을 하는 사람은 아흐메트의 보호자인 이스하크 혼자뿐이었다. 아흐메트를 희생하려는 듯한 무라트의 모습에 항의하는 이스하크에 대해 할릴은 걱정을 표하며, 나중에 뭔가 큰일이 터질 것임을 암시한다.
5. 세르비아의 항복
12세 이상의 모든 남성을 징집해 7만 명의 병력을 8만 명까지 늘리는 데에 성공한 오스만이었지만, 무라트는 반격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수도 인근에 우주방어를 구축하고 적에게 소모전을 강요할 생각이었기에 에디르네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오스만 또한 국력이 바닥을 드러냈음을 직감한 주인공과 토마스는 마케도니아에 주둔중인 1만 1천 명의 모레아군 본대를 이끌고 출병할 준비를 하며, 이와 동시에 무라트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블라드의 통수를 막기 위해 불가리아로 출병한다.
그러는 동안, 세르비아에선 자아노스의 철수로 인해 정치와 군사 양쪽으로 완전히 고립된 주라지가 크게 동요한다. 후녀디가 왈라키아에만 집중해 베오그라드 쪽에는 신경을 안 쓰는 상황 속에서 계속 시간만 끄는 알바니아군에 주라지는 노이로제에 걸리다시피 하고, 과연 주인공이 자신을 용서해줄지 전전긍긍하던 도중 데미클레오테스를 비롯한 모레아의 사신단이 도착한다. 사신단은 코소보 및 제타 지방의 할양과 베오그라드의 헝가리 귀속, 충성서약 및 주라지의 양위라는 4가지 조건으로 세르비아의 자치를 보장하며, 이를 수락한 주라지는 6월 15일 곧바로 퇴위하고 세르비아군 전체가 알바니아군에 흡수된다. 9천 명의 병력을 이끌게 된 제르지는 주인공의 때이른 출정이 블라드의 배신 때문임을 즉시 간파하고, 곧바로 불가리아로 떠난다.
불가리아쪽을 걱정하던 주인공의 모습은 흑군의 만행으로 인해 분노한 블라드가 자신들에게 칼을 돌리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5] 다행히 블라드는 키릴코스의 필사적인 저지로 배신을 거행하지 않았고, 7월 11일 미리 도착한 알바니아-세르비아군과 함께 모레아군에 합류했지만 황제에 대해 불신을 보인다. 키릴코스 역시 흑군의 행적은 도를 지나쳤다고 말하면서 공포로 인한 불가리아의 이반을 우려한다. 그러면서 백색기사를 설득해 만행을 멈출 것을 요청한다.
6. 베네치아와 아라곤의 개입
한편,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는 물론 세르비아, 서부 불가리아까지 넘어가자 드디어 베네치아가 행동에 나선다. 베네치아 원로원은 자신들이 주인공의 능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하곤 6월 28일 파문을 각오하고 침공을 준비하며, 7월 6일 로마 제국의 상선들에 대한 전면적 공격이 이뤄진다.[6]
상선에 대한 통상파괴작전이 실시된 이후, 그 다음 단계로 베네치아는 4천 명의 병력을 메쏘니/코로니/나우플리온 등등 펠로폰네소스 내의 조차지에 상륙시킨 뒤 모레아를 침공한다. 주인공이 건설해놓은 요새가 워낙 많아 빼앗은 거점을 지키는 데에도 인력이 모자랄 수준이었지만, 수도와 본토의 방어조차 내팽개쳐둔 채 모든 인력을 쏟아붓고 심지어는 과거의 잠재적 적국이었던 아라곤과도 손을 잡아 제노바의 함대를 묶어놓자 대부분의 상비군을 오스만과의 결전에 투입한 모레아는 서서히 밀려난다.
이를 막기 위해 모레아에 남은 토마스 마기스트로스와 니케포로스 주교가 각지의 민회를 소집하고, 민병대를 긁어모아 대베네치아 전선에 투입한다. 이 과정에서 할리드의 추천을 받은 암브로시오스가 군정을 맡아 코린토스, 미스트라, 레온타리온 세 도시를 중심으로 조직적 저항을 벌인다.
7. 왈라키아의 붕괴와 상시 십자군 지정
수도 트르고비슈테 등 요새로 보호받는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시골 마을들이 흑군의 습격으로 농노들까지 일체 예외 없이 학살당하는 사태가 계속 이어지자 왈라키아 피난민들의 구심점이 된 블라드는 흑군을 막지 않는 모레아군을 비난하려고 했고, 이를 가만 둘 수 없었던 주인공은 흑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직후 그는 후녀디를 찾아가 회담을 연다. 어느 정도의 의견차가 있었지만 전후 주라지의 신변을 신성 로마 제국이 책임지는 조건[7] 을 얻어내자 후녀디는 바로 흑군의 학살 행위를 멈추고 단 2세에게 저항을 중지한 뒤 블라드에게 공위를 넘기라는 요구를 보낸다. 이 요구를 후녀디의 함정으로 생각한 단 2세는 요구를 거부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생존이 우선인 보야르들에게 잡혀 처형당한다. 왈라키아는 황제와 후녀디의 요구대로 수도의 문을 열고 그대로 블라드를 새로운 군주로 받아들인다.
왈라키아도 무너져 오스만의 루멜리아 내 세력권의 반절 이상이 넘어가자, 후녀디는 교황청을 비롯한 몇몇 유럽 국가에게 이번 전쟁은 서로의 역사적 감정과 반목을 넘어 이교도에 맞서 싸우는 순수한 성전이며 이교도들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십자군이 멈추어선 안된다며 또다른 레콩키스타, 즉 상시 십자군의 필요성을 공포한다. 이와 함께 처음으로 드래곤 기사단의 존재를 알리는데, 이미 후녀디는 물론 드라가시스 황제와 왈라키아 공작이 된 블라드, 구호기사단장이 가입했고 개종한 무슬림도 합류했다는 소식은 기독교 세계를 크게 고무시킨다. 이에 교황은 크게 기뻐하며 드래곤 기사단을 상시 십자군으로 승인한다.
전쟁은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이에 후녀디가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다뉴브 강 동쪽으로 주둔지를 옮기자는 제안을 한다. 첫번째 이유는 왈라키아의 황폐화[8] , 둘째로는 점점 흑군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오스만의 의표를 찌르자는 것이었다. 마지막 이유가 사실상 꼬라박을 하자는 이야기였기에 지휘관들이 놀라고, 이에 그는 현재 오스만의 군세는 7만에 육박하지만 대신 훈련도가 떨어지며 겨울에는 물자 수송도 어려울 것인데 적이 진격하면 오스만은 요격 또는 수비의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다며 설명을 마친다. 프란시스코를 제외한 모든 이가 동의하자 후녀디의 '''수십년동안 혼자 깽판을 쳤으니 판때기로 한번 맞아봐야 한다'''는 말과 함께 동진이 시작된다.
8. 터르노보 전투
원활한 보급선 구축 및 타국들의 합류를 위해 바르나로 십자군이 동진을 시작하자, 오스만 측은 존버를 끝내고 십자군의 2배 전력인 '''7만 6천'''에 달하는 대군을 3개의 부대[9] 로 나누고, 북진을 시작한다. 또한 북진하기 한참 전부터 오스만령 루멜리아 전역에 있던 정교도들을 선동해 교회통합을 주도한 주인공을 적대하게 해 현지의 지원을 최대한 차단하는 것은 물론, 정교도계 오스만 병사들의 사기를 올린다.[10]
그래서 그런지 십자군이 비딘을 떠나 터르노보에 다다를 때 이들을 본 현지 주민들은 십자군을 환영하는 게 아닌 의심과 침묵을 하는 분위기였는데, 직접적인 방해 행위는 하지 않았기에 십자군은 그냥 터르노보를 그냥 통과하여 계속 동진한다. 그러다 12월 25일, 터르노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행군하던 도중 오스만군의 정찰대가 관측된다.
처음은 서로 대치했으나 시간을 더 끌다간 불리해지는 건 십자군이라는 걸 알았던 제르지는 오스만 선봉대를 빨리 격파하기 위해 사흘 동안 주변 지형과 하늘을 지켜보면서 전략을 세웠고, 그 후 이틀 동안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사병과 일부 선발당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선견대를 편성하고 야간 행군 훈련을 했으며 12월 30일의 밤이 되자 주저없이 야습을 시도한다.
야습을 예측하고 있던 앙겔로이는 예비대를 호출했으나, 양동작전 때문에 예비대가 일부만 온다. 하지만 제르지는 이를 틈타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늘이 푸르러질 때 일부의 병사들만 귀갑진을 갖춰 진격시킨다. 귀갑진의 접근 직후 벌어진 화공에 이스하크는 진화 작업을 실시하나 제르지의 특기인 날뛰는 군마와 황소를 그대로 적진에 풀어놓는 전술 때문에 진화작업이 실패한다. 이에 앙겔로이가 반격을 시도하지만 지원군의 부재로 휘하 병력 대부분은 질이 떨어지는 징집병이었고, 해가 갓 떠오르는 틈에 숲 밖으로 나오는 제르지의 승부수가 합쳐진 결과 오스만군이 맞이한 것은 능선에 걸쳐진 햇빛이었다. 시야가 차단되어 사기가 떨어진 오스만군을 제르지가 일거에 공격하자 일부 정예병을 제외한 오스만군 전 병력이 패주하고, 앙겔로이는 남은 정예병들과 함께 전멸을 각오하고 최대한 시간을 끈다. 그 틈을 타 이스하크가 병사들을 어느 정도 수습해 탈출하긴 하지만, 앙겔로이 휘하의 정예병을 포함한 7천의 병사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한다.
전투가 끝난 후 사흘 뒤, 주인공이 이끄는 본대가 제르지의 군세와 합류하고 이와 같은 압도적인 승리에 모든 무장들이 제르지를 극찬한다. 그리고 진행된 주인공과 후녀디의 담화에서 후녀디는 이번 서전이 예언에 대한 확신으로 움직이던 오스만 군대에게 의심을, 십자군에게는 승리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었다는 의미였다는 설명을 하면서 승리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게된 십자군을 둘러보고 '''지금까지는 아니었어도 이제부터는 해볼 만한 싸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한편, 패배의 소식은 무라트 2세에게도 흘러들어가고, 자신이 챙겨주었음에도 끝내 자신을 배신하고 십자군에 붙은 제르지를 한탄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서전의 동요가 모두를 무너트리기 전에 십자군을 무너트려야 한다고 판단, 후방 교란을 위해 보냈던 아킨지들도 모두 끌어오면서까지 마지막 힘을 모아 결전에 나선다.
9. 1438년 2월 3일, 결전
1438년 1월, 눌러앉아있던 오스만군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주 적은 양의 군량만을 쟁여놓고 나머지를 소모해 휘하 전병력을 배불리 먹여 사기를 북돋은 무라트는 마치 군량이 부족하면 결전을 통해 먹을 입을 크게 줄이면 된다는 듯이 과감하게 진격하고, 그 모습에 아흐메트와 이스하크, 그리고 하즈 바이람 밸리는 씁쓸해한다.
오스만과는 달리 제국 쪽은 땅과 백성을 되찾은 뒤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 징집병들이 먹을 식량이 없다는 건 마찬가지로 큰 문제였고, 양쪽 모두 전쟁을 최대한 빨리, 최대한 적은 피해만으로 끝내야 한다는 점에 집중한다. 무라트의 북상 소식을 들은 주인공은 1월 20일, 3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7만 명의 군세와 정면으로 맞선다는 선택을 내린다.
질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갖춘 십자군에 맞서기 위해, 오스만 또한 만반의 준비를 한다. 우익에 비싼 사석포와 핸드캐논을 최대한 배치해 기병을 끌어들이고 진지의 요새화 또한 막는 것을 노린 무라트는 징집병들이 고기방패가 된 사이에 최대한 빨리 적의 기병전력을 격멸하고 남은 보병을 머릿수의 우세를 활용해 쌈싸먹는다는 작전을 세운다. 이를 알 리 없는 십자군은 숫적으로 2배에 달하는 오스만측 기병전력에 맞서기 위해 4천여 명의 혼성 기병전력을 모조리 좌익에 몰빵하고, 보병전력 중 비교적 약한 알바니아-세르비아 혼성군을 기병의 후위에 둬서 공격을 덜 받게 만들어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노린다. 하지만 전선에서 유일하다시피한 망치를 담당하기엔 프란시스코 한 명으론 부족했고, 이에 토마스가 직접 나서 편제를 완성한다. 그렇게 1438년 2월 3일, 3만과 7만의 가망없어보이는 싸움이 벌어진다.
7만의 적군을 목도하고 처음부터 동요하기 시작한 세르비아군을 붙잡기 위해, 주인공은 가뜩이나 열세인 병력에서 1천 명의 차코네스[11] 를 차출해 좌익으로 보낸다. 그럼에도 세르비아군의 동요를 막지는 못했고, 이를 포착한 이스하크는 1만 병력을 데리고 사석포와 핸드캐논, 그리고 대기병 장애물을 이용해 십자군 좌익을 분쇄할 준비를 한다.
이스하크가 준비를 갖추는 동안 중앙에서 첫 교전이 벌어지고, 1만 명의 중장보병이 배치된 십자군 중진은 3배 정도의 숫적 우세를 지닌 오스만군을 상대로 초반부터 압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은 보병들의 체력소모와 포위 및 역습을 우려해 일부러 대기하고, 그러는 동안 양익의 혼성군과 흑군이 서서히 전진한다. 별 타격도 주지 못하는 궁병들의 스웜 전술을 씹고 나아가는 양익과, 프란시스코 휘하 기병대의 기동을 통해 전투 초반은 십자군의 근소 우세로 진행된다. 하지만 수십 문의 사석포가 준비 완료되고 일제포격이 시작되자 좌익의 혼성군의 진형이 순식간에 분열되고, 여기에 적 궁병의 사격까지 이어지자 좌익은 혼란에 빠진다. 좌익을 지키기 위해 나선 프란시스코는 좋은 먹잇감처럼 보이는 사석포 쪽으로 향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스하크의 노림수였다. 기습적인 핸드캐논 사격에 이어 오스만 징집병의 파상공세가 이어지면서 십자군 기병대의 대부분이 적진 한가운데에 발이 묶이고, 이 때를 노려 카프쿨루 시파히가 십자군 기병을 격멸하기 위해 달려온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토마스는 간신히 빠져나온 4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시파히를 이끄는 적장이자 자신의 친형인 팔레올로기 파샤에게 돌진한다. 일기토를 통해 팔레올로기를 전사시킨 토마스였지만 그 사이 이미 기병대가 1천여 명의 피해를 입었고, 기병대가 밀리는 모습을 본 세르비아군이 전장에서 탈주하면서 좌익이 무너진다. 제르지는 어떻게든 휘하 병력을 수습하고 전술적 능력의 우위를 기반으로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잠시 전장에서 이탈하고, 그 사이 오스만군 우익이 십자군 중진을 거세게 압박한다. 아킨지들의 접근으로 우익의 흑군이 묶여있는 동안, 주인공은 모레아군 1만과 불가리아군 3천 등의 병력으로 4배나 많은 5만 명의 적병을 상대할 처지에 놓인다. 그렇게 적군의 포위, 아킨지들의 흑군 봉쇄, 시파히들의 기병 저지 등의 악조건이 겹치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버티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버티는 중군을 도우러 가려는 프란시스코를 막아세운 제르지는 오히려 중군이 질적으로 대단히 우수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중군을 미끼로 삼아 재정비를 마친 뒤 적의 징집병들이 휘청일 때 일거에 역습해 전세를 역전시키자는 주장을 하고, 토마스 또한 이에 동조하면서 언제까지가 될 지 모를 도박수에 가까운 존버에 들어간다.
그리고, 존버는 곧 결실을 맺는다. 흑군이 서서히 무너지는 동안에도 훨씬 많은 병력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십자군 중군에 오히려 오스만 징집병들 쪽이 기가 질리고 , 장창병 방진이 천천히 징집병 전열을 밀어내자 이를 포착한 제르지와 프란시스코가 즉시 행동에 나선다. 프란시스코의 기병이 시파히를 묶어두는 사이 제르지의 알바니아군이 십자군 중군을 반포위한 채 공세를 퍼붓던 이슬람군 우익의 측면을 강타하고, 그 모습을 본 후녀디 또한 살아남은 흑군을 규합해 목숨을 걸고 좌익의 적병을 격파한다. 이 과정에서 흑군에게 큰 피해를 입은 아킨지들 또한 이탈하면서 숫적으로 우세했던 오스만군이 순식간에 역포위당하는 형세가 연출된다. 오스만군의 급격한 붕괴에 멘탈이 무너진 무라트는 1만 명의 병력과 함께 후위에 자원한 아흐메트를 미끼로 내준 채 철퇴하고, 이 1만 명의 병력이 전멸하면서 십자군은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둔다. 대규모 군제개혁과 징집령을 통해 일군 7만 6500명의 오스만 병력 중, 단 1만 8천 명만이 살아남은 대승이었다.
10. 오스만의 패전
패전의 소식이 미처 전달되기 이전에 사냥을 진행중이던 알라앗딘 왕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샤드라잠인 할릴 파샤의 계획으로 예언에서 삼중성벽을 넘을 사람으로 지정된 5살배기 이복동생이 술탄의 자리에 오르는데 걸림돌이 될 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알라앗딘의 사망 이후 패전 소식이 빠르게 퍼지고, 승리를 예상했던 대부분의 오스만인은 혼란에 빠진다.[12] 패전을 염두에 두고 있던 할릴은 실의에 빠져 잠적한 무라트를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고, 더이상 루멜리아를 지킬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수도 에디르네를 포함한 루멜리아 전체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종전협상을 진행하기로 한다. 이에 군부 및 공신세력, 특히 피후견인인 두 왕자를 잃은 이스하크와 이브라힘이 크게 반발해 반할릴 파벌이 형성되며, 할릴은 어떻게든 이들을 설득해 종전협상을 계속 추진한다.
할릴과 그 심복들을 통해 결정된 사안은 방에 틀어박혀 있던 무라트에게 '''통보'''되고, 무라트는 루멜리아 전체를 내준다는 결정에 당연히 분노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참패로 인해 권위도, 통치 의지도 사라진 무라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할릴의 말을 수긍하고 계속 방에 틀어박힌다.
일단 철수가 결정되자, 오스만은 신속하게 움직인다. 설령 에디르네를 내주더라도 이후의 발칸 수복 의지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할릴은 열흘도 채 되지 않는 기간만에 남은 병력 전체와 관료들을 소집해 갈리폴리 반도로 향하고, 폭이 단 7km밖에 되지 않는 갈리폴리 반도의 특징을 적극 활용해 최후의 굳히기에 들어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디르네를 탈환하기 위해 트라키아로 남하하던 십자군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진다.
이 소식을 접한 십자군은 즉각 추격을 개시하지만 투라한이 지휘하는 아킨지의 견재로 끝내 추격에 실패한 채 에디르네 근교의 주둔지로 귀환한다. 그 동안 종전협상을 위해 사신으로 할릴이 직접 찾아오고, 종전의 조건으로 오스만의 루멜리아 완전 포기와 오스만 함대의 정박지를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제한, 갈리폴리의 절반 이상의 할양과 베네치아/제노바 견제를 위한 아라곤과의 화해 주선까지 걸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에 주인공은 제국의 미래에 크나큰 걸림돌이 될 할릴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지만, 오히려 할릴 쪽에서 그렇다면 고삐를 잃고 날뛰는 오스만군에 양쪽 모두 공멸하는 결말을 맞이하자는 식으로 강경하게 나오자 마음을 바꿔 할릴을 죽이지는 않는 대신 전장에 나서서 활약하지 못하도록 오른손을 자르는 정도로 협상에 응한다.
그리하여, 1438년 3월 15일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동로마-오스만 간의 평화조약이 에디르네에서 선포된다.
오스만은 조약의 1, 2, 3번째 조항을 즉시 충실히 이행했고, 할릴은 에디르네에 오스만 충성파 주민들을 소집한 뒤 그대로 오스만에게 남은 유럽 내의 유일한 영토인 갈리폴리 최남단으로 떠난다. 주요 공문서들의 소각을 맡은 투라한을 마지막으로 오스만측 인사들이 에디르네에서 완전히 퇴거하자, 시민들에 대한 공격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배제된 흑군을 제외한 십자군 또한 비로소 에디르네, 이제는 아드리아노폴리스라는 이름을 되찾은 도시로 입성한다.*1. 오스만은 루멜리아, 즉 발칸 전체의 통치를 포기한다.
*2. 오스만 측은 소개령을 내려 희망하는 자에 한해 루멜리아 주민을 아나톨리아로 이주시킬 권리를 갖고, 십자군 측 또한 이들에 대한 안전을 약속한다.
*3. 오스만 측은 갈리폴리 반도의 최남단을 점유하고, 나머지는 제국에 반환한다. 오스만의 함대가 2주일 이상 정박할 수 있는 지역은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으로 제한된다.
*4. 오스만 측은 함대가 기동하기 이전 제국에게 사전 통보를 할 의무를 가지며, 이를 어길 경우 적대행위로 간주된다.
*5. 오스만 측은 제국과 아라곤 사이의 관계가 원만히 회복될 수 있도록 중재역을 맡는다.
또한 조약의 5번째 조항도 제대로 이행한 오스만에 의해 오래 지나지 않아 아라곤의 사절이 찾아오는데, 나폴리 정복의 실패 이후 그 원인을 주인공이 아닌 제노바에게서 찾아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던 알리폰소 5세는 드래곤 기사단의 창설, 교회통합 등의 사건들을 순순히 인정하면서 오히려 이를 발판으로 삼아 동방에서 큰 성공을 거둔 주인공과 손을 잡아서 자신은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을, 주인공은 레반트의 무슬림들을 몰아내고 각각 서쪽과 동쪽의 지중해 기독교 제국을 건설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품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알리폰소의 사신은 제국의 해군 재건을 위해 숙련된 선원 200명과 선장 2명을 자문역으로 보내고, 베네치아를 견제하기 위해 밀라노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두 가지 제안을 했고 이를 주인공이 받아들이면서 베네치아와 제노바 양쪽을 모두 에게 해에서 몰아내기 위한 제국-아라곤 동맹이 성립한다. 그렇게 아드리아노플에서 모든 외교 교섭을 마무리한 주인공은 십자군을 이끌고, 오랫동안 고립되어왔던 천년고도 콘스탄티노플로 발길을 돌린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넘어 황제와 십자군이 시내로 들어오자, 거리 곳곳에 초최한 몰골로 있었던 시민들과 수비군 병사들이 십자군 선두에 서 있던 황제를 보며 기쁨과 슬픔 등이 뒤섞인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맞이하였고, 성 소피아 성당 앞에서 주인공을 맞이했던 총대주교와 천년고도의 수호자 요안니스 황제도 시민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주인공을 만나게 된 요안니스 황제는 주인공을 지키라는 마지막 사명이 완수되었다며, 스스로 제위를 내려놓고 물러나게 된다.
이 전쟁의 승리로 주인공은 알렉시오스 1세 치세 초반 수준의 영토를 수복하였고, '''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서게 된다.'''[13]
11. 베네치아의 몰락, 그리고 종전
승리의 소식은 모레아를 공격하던 베네치아에도 전해지고, 1438년 5월 12일 주인공이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다는 소식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파병와있던 4천여 명의 베네치아군이 와해된다. 밀라노의 기습적인 침공에 골머리를 앓던 베네치아는 결국 펠로폰네소스의 모든 조차지를 포기하고 철수해 국력을 보존한 뒤 알브레히트와의 협상을 통해 제국을 압박하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아라곤 함대의 기습으로 함대가 박살나고 패잔병들까지 모조리 포로로 잡힌다. 이에 베네치아는 아라곤에 항의하지만 '''강하고 유능한 자를 막지 못했으니 이제 친구가 되어야겠지'''라는 알리폰소의 말과 함께 베네치아의 몰락이 시작된다.
절박하게 동맹을 찾는 베네치아였지만 밥먹듯이 배신과 협상을 반복해온 행적 때문에 어느 나라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고, 유일한 희망이던 신성 로마 제국의 알브레히트 황제 역시 후녀디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아드리아 해의 식민지에 더해 달마티아를 즉시 내놓지 않으면 협상은 없다는 완고한 태도를 보인다. 이에 베네치아의 유일한 선택지는 주인공과의 타협이었고 주인공은 베네치아 본토를 지키기 위해 절실한 패잔병의 무사귀환에 대해 크레타 섬을 제외한 모든 베네치아 조차지의 반환과 지금까지 약탈해온 모든 현물의 반납을 조건으로 내건다. 이에 대해 베네치아는 폭리라고 항의했지만 그들이 벌인 만행 때문에 주인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결국 베네치아는 조건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베네치아를 에게 해에서 완전히 몰아내면 가장 기뻐했어야 마땅할 제노바도 마냥 기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주인공과 알폰소 사이에 맺어진 동맹이 어떤 건지 대충 알아차린 밀라노의 비스콘티 공작이 알폰소와의 물밑 협력으로 1438년 5월 23일 제노바를 다시 종속시키러 움직였고, 제노바는 본토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빼면서 에게 해에서 어떠한 이득도 보지 못한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양대 세력의 육해군이 모두 빠진 상황에서, 주인공은 빠르게 베네치아의 옛 조차지들을 장악한다.
그렇게 베네치아도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종전을 선언했지만, 불행히도 제국에게 엄청난 과제가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전란 속에서 국토가 폐허가 되어 고작 150만[14] 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던 인구수였다. 그 외에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마누일 2세의 황후이자 주인공의 어머니인 헬레나 태후가 세상을 떴다는 가슴 아픈 소식도 있었다. 그러나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우선 왈라키아 공국과 구호기사단이 봉신화를 자처하였고, 세르비아 역시 주라지의 피살 후 공석이 된 전제군주의 임명권을 황제에게 묻는 사절을 보냈으며, 4차 십자군의 잔재였던 테오도로 공국과 트라페준타 제국에서도 사절을 보내오는 등 에게 해의 패권이 회복되었음이 암시되면서 제국은 천천히 재건에 돌입한다.
[1] 바쉬보죽(başıbozuk). 현실에선 무제한적인 약탈 권리를 약속받아 발칸 전체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2] 실제 역사의 바르나 십자군의 경우, 오스만이 동원한 야전군 병력은 니슈 전투 당시의 병력 2만 정도에 바르나 전투의 병력 6만을 합쳐 8만 정도는 됐다. 이때도 국가의 명운을 걸고 캐삭빵을 걸어서 아슬아슬하게 이긴 걸 생각해본다면 진짜 이번 전쟁 한 번으로 루멜리아 전체의 상실까지 각오한 것.[3] 대략적으로 데바-시나이아 간의 최단거리가 300km쯤 되는데, 1주일 만에 이 거리를 주파했다는 건 하루에 43킬로미터를 진군했다는 소리가 된다. 참고로 이 정도면 산악지대에서 천리행군을 하는 수준이다.[4] 배신자가 그대의 군을 칠 것이오.[5] 원래 계획은 단 2세가 블라드에게 평화롭게 양위하는 무혈 정권교체를 하려던 것으로 보인다.[6] 물론 이 조치에 대해서 베네치아 내부에서도 너무 심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주인공의 다음 목적은 에게 해의 완전 탈환일 것이라는 강경파의 말에 일축된다.[7] 주라지에게 큰 원한이 있는 후녀디는 아마 주라지가 외교관 역할로 길을 떠나다 괴한의 습격으로 실종 및 피살당한 것으로 처리할 것으로 보인다.[8] 물론 이는 흑군의 잘못이 컸기에 모두들 불만스러워했다.[9] 좌익 부대는 투라한의 4천 명의 아킨지로 편성되어 보급선 차단을 미끼로 한 적군 교란을 목적으로 하고, 우익은 이스하크와 앙겔로이 파샤 등의 지휘관들이 통솔하는 아잡 중심의 2만 명의 선견대로 메셈브리아의 요새화과 동시에 십자군을 1차적으로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마지막으로 나머지 4만 이상으로 추정되는 중군은 무라트가 친히 통솔하여 일전을 맡기로 한다.[10] 또한 전쟁에서 패배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이 적대적인 정교도들이 아나톨리아로 진격할 드라가시스 황제의 발을 묶을 올가미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할릴 파샤가 무라트에게 전하는데, 이 대화을 통해 이제 오스만도 최악의 상황도 고려할 정도로 약화된 걸 보여준다. 당장 무라트도 불쾌감을 표했을 정도였으니.[11] 다만, 차코네스가 원래 경보병인지라 중보병 중심으로 유지되는 전열에는 별 손해가 되지 않는다.[12] 특히 오스만령 루멜리아와 불가리아 정교도인들의 멘탈 붕괴가 더 심했다. 교회 통합을 이유로 오스만을 적극 지지하며 같은 동족과 싸웠으나 패배하였으니 이제서야 상황 파악이 되어 무자비한 보복이 닥칠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십자군이 오스만령 루멜리아로 들어오자 정교도인들은 모조리 멘붕해 집으로 도망가기 바빴다.[13] 제국이 피폐해져 그래도 주요 도시에 10만 이상의 인구가 있던 콤니노스의 제국보다 내부상황은 좋지 못하지만, 북, 서로 제국을 위협하던 페체네그, 시칠리아의 노르만족 대신 명실상부한 친제국파인 나폴리의 르네와 왈라키아의 블라드가 있는 만큼 전선이 동부로 안정되있는 상태.[14] 이 150만도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불가리아쪽 인구가 제대로 집계되지 않았고, 전란으로 인해 산으로 숨었거나 유랑민이 된 주민들도 꽤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무엇보다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알바니아, 세르비아, 중부 그리스 등이 포함되지 않은 수치라 실제로는 적게 잡아도 200~250만 가량은 될 것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