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image]
Bartolomé de las Casas
(1474년 8월 ~ 1566년 7월 17일)
스페인의 수도자, 사제, 역사가. 도미니코회 소속 수도자, 아메리카 최초의 수도자[1] 로 "인디오의 수호자"라 불린다.
그의 활동은 비록 근대적 인권 개념이 아닌 신앙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그의 활동으로 인한 성과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권을 상승시킨 역사적 분기점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운동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1474년 세비야에서 소상인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497년에 그라나다에서 군대에 복무했으며, 1502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2번째 항해에 동행하였다가 영지를 받았다. 스페인에 귀국해서 신학 공부를 하다가 1510년에 아메리카로 돌아간다.
1513년에 군종 신부로써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와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의 쿠바 정복 등 많은 탐험에 참가하였지만, 그 탐험에서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함부로 대하면서 학살하는 만행을 목격하였다. 탐험에 참가한 공으로 원주민 농노를 받는다.
1515년에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원주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1516년 11월에 서인도 제도의 총독으로 원주민 실태 조사 의원을 맡아 떠났다. 1519년 2월에 열린 스페인의 의회에 참석하여 카를 5세 앞에서 스페인 사람과 원주민들이 협력해서 신대륙에 '자유 인디오 도시'를 세우는 계획을 발표하여 승인받았다.
1520년 12월에 다시 신대륙으로 떠나서 스페인 식민자들과 원주민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밝히면서 협력하여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방안을 내세우지만 양쪽 모두의 반발로 1522년 1월에 실패로 끝났다.
1523년에 소속 수도회인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돌아가 수도생활에 매진하다가, 1526년에 <변명의 역사>를 저술했다. 1531년, 1534년, 1535년에 마드리드에 있는 원주민 통치기구인 인디아스 자문위원회에 엔코미엔다[2] 제도를 이용하여 원주민을 억압하는 인물과 기관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다.
1537년에는 <유일한 길 : 모든 사람을 참된 종교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에 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정복되지 않은 원주민들의 영토[3] 로 가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선교하였다. 1542년에 원주민 파괴에 대한 짧은 보고서를 저술하였으며, 11월 20일에 카를 5세가 엔코미엔다의 세습을 금지하는 새 법률을 발표하게 된다.
멕시코의 치아파스의 주교로 임명되자 1544년 7월에 아메리카로 가서 1545년 1월에 스페인 고해신부들에 대한 훈계와 규정을 저술하고, 그 규정에 따라 시행했지만 1545년에 신자들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1547년 스페인으로 돌아갔으며 <서인도의 역사>를 저술하였다.
1550년 8월에는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원주민들을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에게 "그들도 인간으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다. 누구도 그들을 함부로 할 권리가 없으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취해야 한다."고 반박하여 1551년 이 논쟁에서 사실상 승리하였다. 하지만 엔코미엔다들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의 혹독한 생활은 변함없었다. 또한 이 논쟁에서 그는 흑인 노예를 도입하여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노예 상태에서 구하자는, 지금으로서는 많이 당황스러운 논리를 내놓았다(...)# 정확히는, 라스카사스는 인디오들이 흑인에 비해 근력이나 지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노예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라스카사스의 시대까지 유럽에서는 흑인은 근력과 지구력이 뛰어나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로 흑인들이 학대받는 모습을 보며 후회하고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고 한다.[4]
1562년에는 <인디오의 역사Historia de las Indias>의 서문 부분만 출판하였다. 1566년 7월 17일에 마드리드의 아토차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선종하였으며, <인디오의 역사>는 그의 뜻에 따라 1602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문부터가 "하느님께서 스페인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인도에서 자행한 파괴 행위 때문이며, 스페인을 파괴하려는 하느님의 생각은 명백히 정당하고 그것은 40년이 지나면 분명해질 것이다"라는, 스페인인으로서는 매국노라고 불려도 할 말 없는 언급도 하였다. 이 책은 적국인 프랑스와 영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어 스페인을 공격하는 요소로 쓰였다.
그의 적극적인 원주민 권익 옹호 활동으로 인해 중남미에서는 물론 스페인 내부에서도 대체로 평가가 좋은 인물이다. 라스카사스의 평판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태동한 19세기 이전 16, 17, 18세기에, 특히 라스카사스를 계승해 인권론과 국제법에 관심이 많았던 살라망카 학파를 중심으로 훌륭한 스페인의 지식인이자 교회의 아들로 좋게 평가한다. 라스카사스가 공부했던 살라망카, 성직자로 일했으며 토론에 참여했던 바야돌리드 등 스페인 각지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나 각종 지명들이 있다.
그러나 조국인 스페인에서는 비판도 좀 있다. 스페인에서도 메넨데스 피달 같은 저명한 학자는 라스카사스를 매우 비난했다. 참고로 피달은 1869년생이고 1968년에 졸했으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사람이다. 심지어 라스카사스에 대한 비판은 말년인 1960년대에 했다. 이 때 미국에선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대표되는 흑인민권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때였다.[5] 이는 19세기 들어 스페인도 다른 유럽 국가처럼 이전보다 강경한 인종주의에 기반해 좀더 폐쇄적이고 노골적인 국익을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이 대두해 라몬 메넨데즈 피달을 비롯한 많은 자유주의, 좌파 지식인들도 이러한 영향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 국가 이전의 16~17세기 근세(early modern)에는 아직 본격적인 생물학적 인종주의의 근간이 되는 유전학 같은 자연 과학적 토대도 없었고, 민족주의가 기껏해야 그 사상적 토대나 다져지는 시대였으니 종교적 정체성과 이해타산만 맞아 떨어졌으면 문화와 민족간의 차이가 의외로 상호간 교류에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의 노예제와 20세기까지의 흑백 강제 분리, 유럽 대륙의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국가관, 인종관은 오히려 '''생물학적 차원에서 유색인종은 근본적으로 백인보다 열등하다'''라는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혔던 19세기, 20세기 초반에서나 조성될 수 있었다. 오히려 라스카사스가 활동했던 시절의 세풀베다가 보여준 강경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은 사실 당대로도 다수 의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달은 19세기 스페인 자유주의 정치판에서부터 미서전쟁, 보르본 왕조 몰락, 제2공화국 탄생, 스페인 내전, 프랑코 독재 정권까지 격동의 스페인 근현대사 온갖 못볼 꼴을 다보며, 나름 당시 스페인, 특히 노년의 프랑코 정권의 악독한 정치적 탄압에 맞서 왕립 스페인어 학회 의장이라는 학자로서 최고로 명예로운 자리도 갖다 버리고, 클라우디오 산체스-알보르노즈, 아메리코 카스트로 같은 해외에 망명 나가있는 동료 학자들도 도와주곤 했던, 자기 시대에서는 양심과 문제 의식을 포기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
후세의 종교인들, 사회운동 진영 사이에서는 해방신학의 선구자로 추앙받기도 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록 필사본을 남긴 인물로 콜럼버스가 적은 그 필사본이 그 아들인 디에고의 손에 있다가 수중에 들어오자 항해록을 대부분 베끼면서 간접 화법으로 요약해 필사했으며, 콜럼버스의 항해록이 현대에 남아있는 것은 이 라스 카사스가 남긴 것이다.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 있는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San Cristóbal de Las Casas)는 그의 이름을 기려서 지어진 도시이다.
Bartolomé de las Casas
(1474년 8월 ~ 1566년 7월 17일)
1. 소개
스페인의 수도자, 사제, 역사가. 도미니코회 소속 수도자, 아메리카 최초의 수도자[1] 로 "인디오의 수호자"라 불린다.
그의 활동은 비록 근대적 인권 개념이 아닌 신앙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그의 활동으로 인한 성과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권을 상승시킨 역사적 분기점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운동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2. 생애
1474년 세비야에서 소상인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497년에 그라나다에서 군대에 복무했으며, 1502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2번째 항해에 동행하였다가 영지를 받았다. 스페인에 귀국해서 신학 공부를 하다가 1510년에 아메리카로 돌아간다.
1513년에 군종 신부로써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와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의 쿠바 정복 등 많은 탐험에 참가하였지만, 그 탐험에서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함부로 대하면서 학살하는 만행을 목격하였다. 탐험에 참가한 공으로 원주민 농노를 받는다.
1515년에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원주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1516년 11월에 서인도 제도의 총독으로 원주민 실태 조사 의원을 맡아 떠났다. 1519년 2월에 열린 스페인의 의회에 참석하여 카를 5세 앞에서 스페인 사람과 원주민들이 협력해서 신대륙에 '자유 인디오 도시'를 세우는 계획을 발표하여 승인받았다.
1520년 12월에 다시 신대륙으로 떠나서 스페인 식민자들과 원주민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밝히면서 협력하여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방안을 내세우지만 양쪽 모두의 반발로 1522년 1월에 실패로 끝났다.
1523년에 소속 수도회인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돌아가 수도생활에 매진하다가, 1526년에 <변명의 역사>를 저술했다. 1531년, 1534년, 1535년에 마드리드에 있는 원주민 통치기구인 인디아스 자문위원회에 엔코미엔다[2] 제도를 이용하여 원주민을 억압하는 인물과 기관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다.
1537년에는 <유일한 길 : 모든 사람을 참된 종교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에 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정복되지 않은 원주민들의 영토[3] 로 가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선교하였다. 1542년에 원주민 파괴에 대한 짧은 보고서를 저술하였으며, 11월 20일에 카를 5세가 엔코미엔다의 세습을 금지하는 새 법률을 발표하게 된다.
멕시코의 치아파스의 주교로 임명되자 1544년 7월에 아메리카로 가서 1545년 1월에 스페인 고해신부들에 대한 훈계와 규정을 저술하고, 그 규정에 따라 시행했지만 1545년에 신자들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1547년 스페인으로 돌아갔으며 <서인도의 역사>를 저술하였다.
1550년 8월에는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원주민들을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에게 "그들도 인간으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다. 누구도 그들을 함부로 할 권리가 없으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취해야 한다."고 반박하여 1551년 이 논쟁에서 사실상 승리하였다. 하지만 엔코미엔다들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의 혹독한 생활은 변함없었다. 또한 이 논쟁에서 그는 흑인 노예를 도입하여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노예 상태에서 구하자는, 지금으로서는 많이 당황스러운 논리를 내놓았다(...)# 정확히는, 라스카사스는 인디오들이 흑인에 비해 근력이나 지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노예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라스카사스의 시대까지 유럽에서는 흑인은 근력과 지구력이 뛰어나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로 흑인들이 학대받는 모습을 보며 후회하고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고 한다.[4]
1562년에는 <인디오의 역사Historia de las Indias>의 서문 부분만 출판하였다. 1566년 7월 17일에 마드리드의 아토차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선종하였으며, <인디오의 역사>는 그의 뜻에 따라 1602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문부터가 "하느님께서 스페인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인도에서 자행한 파괴 행위 때문이며, 스페인을 파괴하려는 하느님의 생각은 명백히 정당하고 그것은 40년이 지나면 분명해질 것이다"라는, 스페인인으로서는 매국노라고 불려도 할 말 없는 언급도 하였다. 이 책은 적국인 프랑스와 영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어 스페인을 공격하는 요소로 쓰였다.
3. 평가
그의 적극적인 원주민 권익 옹호 활동으로 인해 중남미에서는 물론 스페인 내부에서도 대체로 평가가 좋은 인물이다. 라스카사스의 평판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태동한 19세기 이전 16, 17, 18세기에, 특히 라스카사스를 계승해 인권론과 국제법에 관심이 많았던 살라망카 학파를 중심으로 훌륭한 스페인의 지식인이자 교회의 아들로 좋게 평가한다. 라스카사스가 공부했던 살라망카, 성직자로 일했으며 토론에 참여했던 바야돌리드 등 스페인 각지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나 각종 지명들이 있다.
그러나 조국인 스페인에서는 비판도 좀 있다. 스페인에서도 메넨데스 피달 같은 저명한 학자는 라스카사스를 매우 비난했다. 참고로 피달은 1869년생이고 1968년에 졸했으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사람이다. 심지어 라스카사스에 대한 비판은 말년인 1960년대에 했다. 이 때 미국에선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대표되는 흑인민권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때였다.[5] 이는 19세기 들어 스페인도 다른 유럽 국가처럼 이전보다 강경한 인종주의에 기반해 좀더 폐쇄적이고 노골적인 국익을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이 대두해 라몬 메넨데즈 피달을 비롯한 많은 자유주의, 좌파 지식인들도 이러한 영향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 국가 이전의 16~17세기 근세(early modern)에는 아직 본격적인 생물학적 인종주의의 근간이 되는 유전학 같은 자연 과학적 토대도 없었고, 민족주의가 기껏해야 그 사상적 토대나 다져지는 시대였으니 종교적 정체성과 이해타산만 맞아 떨어졌으면 문화와 민족간의 차이가 의외로 상호간 교류에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의 노예제와 20세기까지의 흑백 강제 분리, 유럽 대륙의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국가관, 인종관은 오히려 '''생물학적 차원에서 유색인종은 근본적으로 백인보다 열등하다'''라는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혔던 19세기, 20세기 초반에서나 조성될 수 있었다. 오히려 라스카사스가 활동했던 시절의 세풀베다가 보여준 강경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은 사실 당대로도 다수 의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달은 19세기 스페인 자유주의 정치판에서부터 미서전쟁, 보르본 왕조 몰락, 제2공화국 탄생, 스페인 내전, 프랑코 독재 정권까지 격동의 스페인 근현대사 온갖 못볼 꼴을 다보며, 나름 당시 스페인, 특히 노년의 프랑코 정권의 악독한 정치적 탄압에 맞서 왕립 스페인어 학회 의장이라는 학자로서 최고로 명예로운 자리도 갖다 버리고, 클라우디오 산체스-알보르노즈, 아메리코 카스트로 같은 해외에 망명 나가있는 동료 학자들도 도와주곤 했던, 자기 시대에서는 양심과 문제 의식을 포기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
후세의 종교인들, 사회운동 진영 사이에서는 해방신학의 선구자로 추앙받기도 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록 필사본을 남긴 인물로 콜럼버스가 적은 그 필사본이 그 아들인 디에고의 손에 있다가 수중에 들어오자 항해록을 대부분 베끼면서 간접 화법으로 요약해 필사했으며, 콜럼버스의 항해록이 현대에 남아있는 것은 이 라스 카사스가 남긴 것이다.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 있는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San Cristóbal de Las Casas)는 그의 이름을 기려서 지어진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