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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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哲雄
1912년 ~ 1999년 1월 8일
1. 개요
2.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인, 기업인이며, 조선대학교덕산그룹 설립자이기도 하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자양(慈陽).
1912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동학농민군 접주 출신인 박학준(1869~1955)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주신흥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하여 구류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33년부터 2년간 춘천매산학교, 호남보통학교에서 교사를 맡다가 일본 메이지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41년부터 일본 도쿄도 후생국, 교육국에서 일하다 퇴직 후 나사공장 제작소를 운영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남조선과도정부 문교부 편수국에서 일하다 1946년, 서민호 광주부윤의 부름을 받아 서무과장, 총무과장을 거쳐 전남도청 운수과장까지 맡았다. 1946년 서민호 전라남도지사와 지역유지들이 모여 조선대학교설립동지회를 만들자 이곳에 실무자로 참여하였다. 이후 6.25 전쟁으로 설립동지회는 해체되고, 박철웅은 조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면서 독단적인 운영으로 많은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1961년에는 부총장을 시켜 설립동지회 관련 문건까지 태우도록 하는 등 설립동지회를 완전히 부정하고, 조선대학교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사유화하였다.
1960년 4.19 혁명 후 학생과 교수들에게 지탄을 받아 '명예총장' 직함으로 대학운영 일선에서 퇴진한 바 있었고, 1963년에 총장직에 복귀했으나 1980년 8월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시절 광주보안대에 부인 정애리시 이사장과 함께 끌려가 학교운영권을 박탈당했다. 1982년 11월에야 학교법인 조선대학교 이사장 복귀가 허락되어 명예총장에도 추대됐다가 1986년에 총장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많은 사립학교에서 부패 재단 퇴진운동이 벌어졌고, 8월 5일에 그와 비서가 강치중 조선대병원장을 공식석상에서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이 그와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며 장기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1987년 12월, 박철웅은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1988년 관선이사진 파견 이후 법원에 반환소송을 제기했으나 1989년에 불구속 기소되었고, 1995년에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판결을 받았다. 결국 그는 1999년 1월 8일에 서울 필운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수십년의 세월동안 조선대학교 재단을 틀어쥐고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는데, 조선대학교 박철웅 일가의 만행 항목 참조. 그야말로 전형적인 족벌사학, 부패사학의 표본 같은 존재이다.
부인은 한때 서석동할머니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던 사채업자 '정애리시'. 박철웅-정애리시 부부는 조선대학교를 기반으로 엄청난 자금을 끌어모아서 고려시멘트를 중심으로한 덕산그룹을 만들었다. 그러나 덕산그룹은 무리한 확장을 거듭하다가 1995년 1조원대의 부도를 내고 공중분해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광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남도 고흥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참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3.15 부정선거 등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공민권이 제한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자녀로는 박성섭 전 덕산그룹-무등일보 회장, 박성현고려시멘트 회장 등 4남 3녀가 있다. 박성현은 2010년대 이후로는 극우유튜버로 활동중이다.
그와 동향인 고흥군 출신이면서 그가 사유화한 조선대학교 출신 인물 가운데에 서남대학교 설립자이자 그를 뛰어넘는 악질 비리사학인이홍하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