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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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백인엽(白仁燁)
출생
1923년 2월 1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사망
2013년 12월 14일 (향년 90세)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본관
수원 백씨
가족
배우자 주광숙(재혼)
슬하 4남 3녀[1]
''' 백선엽 '''
1. 개요
2. 생애
3. 행적
3.1. 6.25 전쟁
4. 비판
4.2. 수만 명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한 대규모 군비리
4.3. 대한민국 최악의 사학 비리인 선인학원 비리
4.4. 거짓말?
5.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육영사업가 로, 6.25 전쟁 당시의 인물로 백선엽 장군의 동생이다. 최종 계급은 중장이다.
무고한 군인들을 살인하기도 했으며, 대규모 군 비리를 저질러 수만명의 장병들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했다. 또 무려 14개의 학교를 세웠는데, 무허가로 부실하게 짓고 화장실을 거의 만들지 않아 수많은 학생들이 분진에 노출되고 방광염에 걸렸다.

2. 생애


1923년 2월 1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형이 백선엽이다. 약송소학교와 숭실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육군항공학교에 입교하여, 일본제국 육군 항공소위로 종전을 맞았다.
8.15 광복 이후 고향인 평안남도로 귀향하여, 평양에서 국내파 민족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경호대장으로 근무했다(백선엽은 조만식 비서). 그러나 소군정에 의해 조만식의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이어 감금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역시 비서로 근무했던 형 백선엽[2]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 직후인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육군 장교로 임관한다.
창군 초기 이승만의 눈에 띄게 되어 경호를 맡게 되었다. 이런 인연 덕분에 쾌속 승진을 한다.[3] 6.25때 서울에서 결사항전한다는 허위 방송을 켜놓고 대전으로 도망간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지에서 무너진 병력을 수습했고, 그 병력이 사열한 모습을 보고 이승만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백인엽에게 "형도 군인인가?"라고 물어 볼 정도로, 대통령은 백인엽을 먼저 알고 이후에야 백선엽을 알게 되었다. 백선엽은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에서 용감 무쌍하게 싸우고, 국군 최초로 평양 입성 작전에 성공 하였으며, 북한에서 부터 유일하게 건제 유지하며 후퇴하며 계속 공을 쌓았지만, 제1군단장에 부임하여 진급 신고식을 할 때서야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난다. 이때 이승만이 한 말은 "자네가 백인엽이 형인가, 아우인가?"였다. 아무래도 백선엽은 일선부대와 육군본부를 오가던 '흔한 젊은 장교 1' 정도의 이미지였고, 백인엽은 이승만의 바로 곁에서 경호를 서던 인물이었으니. 백선엽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은 하야하는 순간까지 백인엽을 찾았다. "백선엽 장군 형제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이야?"하면서 이들이 군을 이끌고 왜 사태를 정리 하지 않냐며 찾은 것이다.[4]
앞선 주석의 설명처럼 건군기의 빠른 진급 탓에 1948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6.25 전쟁 직전에 그가 근무한 곳은 당시 38선으로 고립된 최전방인 옹진반도였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옹진지구 전투에서 17연대장으로 북한군과 맞섰다.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 제1훈련소장, 제6보병사단장 등을 지내고 1952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9보병사단장, 제2훈련소장 등을 지낸 뒤 1955년 9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제1군단장과 제6군단장을 지냈으며, 육군본부 관리참모부장을 마지막으로 1960년 예편했다.
이후에 선인재단을 세웠다.[5] 그러나 재단을 통한 온갖 비리로 허구헌날 구속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나는 정권이 새로 바뀔 때마다 늘 비리 척결이라며 잡혀간다"라고 자조적으로 인터뷰하기 도했다. 형 백선엽을 여러 번 인터뷰하고 칭송하던 월간조선도 백인엽의 선인재단 운영 및 비리를 수 차례에 걸쳐 고발할 지경이었다.
2013년 12월 14일에 90세로 사망했다.

3. 행적



3.1. 6.25 전쟁


덕장인 형과 달리, 저돌적인 맹장으로 전투지휘관으로서 능력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개전 초창기만 해도 대단했다. 개전 당시 옹진지구 전투에서 독립 제17연대를 지휘했는데, 전차를 몰고 들어온 적군과 3대 1에 가까운 병력 열세 속에서도 잘 싸웠다. 하지만 옹진반도의 특성상 너무 불리했고, 철수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한 이미 철수계획도 있었기에 그에 따라 병력을 운영하였지만 생각보다 적군의 진군속도가 빨랐고, 아군의 해상철수지원은 더뎠다. 어찌어찌해서 수송선이 왔고 병사들을 탈출시켰는데 북한군의 진군이 빨랐다. 백인엽은 포를 '''직접''' 조작하면서 북한군에 포격을 가하면서 아군의 철수를 원호했다. 마지막의 병사들이 탈출할 때, 같이 철수하자는 병사들의 말에 자신은 북한군을 저지할테니 어서 탈출하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포를 놓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수송선이 떠나고 포를 해체하고 자살하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참모가 말려서 살았다고 한다. 이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에 나오는 내용이고, 다른 이야기로는 그냥 병사들이 기절시켜서 탈출 시켰다는 설이있는데 전사편찬에 형 백선엽이 참여했다는 점, 비판 내용 등을 보면 조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시흥전투사령부에 소속되어 지연작전의 기반이 되었다. 낙동강 전투에서의 용맹만큼은 유명했다. 또한 형 백선엽이 쓴 <<실록 지리산>>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전쟁 이전에 여순사건 당시 토벌대로 발령받았으며, 상당히 유능했던 지휘관이라고 언급했다.[6]또한 그가 오랫동안 지휘했던 17연대는 북한군과 잦은 교전으로 실전경험이 풍부해, 부대 자체는 정예부대로 이름높았다. 오죽하면 부대 최하급자의 계급이 하사였다.
그러나 하술할 한신과의 일화를 보면, 맹장이긴 해도 머리는 돌아가지 않았거나, 위 이야기가 국방부의 날조일 뿐 단순한 똥별일 가능성도 높다. 전사편찬에 형 백선엽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4. 비판



4.1. 즉결처분 살인


백인엽은 장교로서의 특권의식과, 생명경시 사상이 유달리 심해 병사들을 썼다 버리는 보급품으로 여겼다. 어느 트럭이 그의 차를 추월하자, 쫓아가서 감히 이등병이 장군의 차를 추월했다고 트럭을 운전한 통신병을 직접 쏴 죽여 곁에 있던 부하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또 자기 차를 운전하던 운전병이 실수로 차 시동을 꺼뜨렸다고 쏴죽여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훈련중에 자세가 불량하다며 세명을 그자리에서 쏴죽이기도 하였고 이런식으로 부하들을 쏴죽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7]
워낙 유명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책에서는 차마 실명을 거론 안하고 창군원로 중에 그런 놈도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이무호의 <어느 졸병이 겪은 한국전쟁>에서 추월했다고 같은 한국군을 쏴죽인 바로 그 인간의 이름 석 자가 바로 백인엽이라고 폭로해 버렸다. 그외에도 계속 즉결처분을 저질러 부하들한테 살인 장군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그중 한 건은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아예 그의 별명이 즉결처분의 제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얘기도 있으니 말 다했다.
이러다보니 부하들에게 증오를 받았고, 군에서도 미친 놈이라고 비난이 많았다.[8]. 오죽하면 백인엽이 부하를 하도 많이 쏴죽이니, 보다못한 상부에서 즉결처분을 금지하고 앞으로 처벌을 하려면 재판을 열라고 군법까지 바꾸었다. 이후로 백인엽도 재판까지 가자면 귀찮아서인지 줄였다고 하지만 이 사람 때문에 군법이 고쳐질 정도였으니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만하다.
연대장 시절에는 '''대령''' 주제에 '''장성 차량에만 부착하는 성판'''을 자체 제작해 달고 다니다가 형 백선엽에게 크게 혼이 난 뒤에야 떼어냈다. 김석원 장군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이 되었을 땐 일도 안하다가 후임 송요찬에게 인수인계도 안해주고 홀연히 떠나버려 송요찬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또 6.25 전쟁 당시 대전교도소에서 예비검속으로 수감자 1800명을 학살하고 1000명을 트럭으로 실어 외부에서 추가로 학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사건의 책임자가 바로 17연대장인 백인엽 대령이다.
그러나 약자에게만 강하고 강자에겐 어지간히 약했던 모양이다. 6.25 전쟁 당시 비학산 전투에서, 한신 장군은 1연대장이었고 백인엽은 수도보병사단장이었다. 그런데 용전분투하며 치고 올라가던 1연대에, 영문을 알 수 없게 포병의 화력지원이 정지되었다. 그 덕분에 기세좋게 올라가던 1연대의 진격이 돈좌되었다. 알고보니 백인엽이 오랫동안 맡아온 바로 그 17연대도 같은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화력지원이 1연대로 쏠려 있자 17연대로 돌려버린 것이었다. 포병관측소에서 사태의 전모를 파악한 한신 장군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곧장 사단본부로 쳐들어갔다. 당시 사단본부에는 이형근 장군의 동생인 이상근 대령이 참모장으로 있었는데, 만류하는 참모장을 던져버리고 사단장실에 박차고 들어가 '''권총을 뽑아들고 매우 강력하게 항의했다.''' 즉, '''연대장이 사단장실로 쳐들어가 권총을 뽑아들며 사단장에 따져든 것이다.''' 예하 연대장의 불같은 항의에 사단장 백인엽은 '''매우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사태는 한신 장군이 던져버렸던 사단 참모장과, 한신 장군을 따라온 1연대 작전주임이 간신히 뜯어말려 끝났다고 한다.
결국 이 일로 백인엽은 수도보병사단장에서 해임되었으나, 형 빽인지 아니면 인재가 없었는지 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이 된다.

4.2. 수만 명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한 대규모 군비리


1962년 1월 29일 ‘6군단장 군사 독직 사건’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일명 ‘혁명정부’에 의해 구속돼 무기징역과 함께 거금 7247만 1723환 추징을 선고받았다. 당시 6군단장 백인엽의 심복 부하들은 장병 부식 납품업자들로부터 6000여만환을 뇌물로 뜯어 냈고, 군납업자들로부터 납품액의 10% 내지 15%를 거둬 1억 212만여환을 백인엽에게 뇌물로 상납하는 등의 비리를 저질렀다. 그 결과 수만명의 장병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었다. 또 6군단 예하 259수송부대의 자동차를 불법으로 후생 사업에 보내 1000여만환을 부정 취득했고, 예하부대에 배급하는 휘발유 중 매달 200드럼씩 총1000 드럼을 빼돌려 500만환 상당의 이득을 취했다.
백인엽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박정희의 은인인 친형 백선엽 덕분에 10개월만에 풀려났다. 풀려난 후 백인엽은 선인학원 비리에 본격적으로 전념하게 된다.
여담으로 백인엽이 6군단장으로 있었을 당시인 1957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박정희가 6군단 부군단장으로 발령을 받아 경기도 포천의 군단사령부에서 백인엽 밑에서 일했다고 한다. 당연히 백인엽은 상술한 행적들과 유사한 권력 남용을 저지르면서 박정희를 포함한 6군단의 모든 장교들에게 각종 모욕행위와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9] [10]
결국 참다못해 백인엽을 들이박은 박정희는 당시 참모총장인 백선엽의 중재로 1957년 9월 3일 제 7사단장으로 전보되어 강원도 인제로 갔다. 그 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얼마 후 백인엽은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어 이른바 혁명재판을 받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백선엽이 박정희 생명의 은인이라 백인엽은 10개월 만에 풀려나왔다.

4.3. 대한민국 최악의 사학 비리인 선인학원 비리


예편 후 교육계에 투신한 백인엽은 자신의 이름과 형 백선엽 장군의 이름을 딴 사학재단인 '선인학원'을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가히 엄청났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까지 한정으로 인천광역시 출신인 사람들은 선인학원 또는 선인재단이라는 이름을 선명히 알고 있으며 지금도 인천지역 택시 기사들에게 "선인재단 정문으로 가달라"고 하면 정확히 선인고/인화여고 정문 앞에 택시를 세워줄 정도로 지역민들에게 잘 알려진 학교법인이었다.
선인학원은 1980년대 당시 동양 최대의 사학 재단으로 유명했는데, 1980년대 초반 당시 재단 산하 학교에 진홍유치원, 효열국민학교(이상 현재 폐교), 선인중학교, 인화여자중학교, 선화여자중학교, 선인고등학교, 인화여자고등학교, 인천체육고등학교[11], 선화여자상업고등학교(현 인천비즈니스고등학교), 운봉공업고등학교(현 인천대중예술고등학교), 운산기계공업고등학교(현 도화기계공업고등학교), 항도실업고등학교(현 인천전자마이스터고등학교), 인천전문대학(현재 인천대학교에 통합됨), 인천대학교가 있었다. 속칭 마징가 제트 체육관으로 유명한 구 선인체육관 주변(구글 어스로 북위 37도 28분 17초 동경 126도 39분 21초 주위)을 중심으로 해서 재단 소속 학교들 거의 전부가 소속되어 있었다. 오죽 하면 1980년대 초까지 인천지역 중학생과 고등학생 중 4분의 1 정도는 선인학원 계열 학교에 다닌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학교의 숫자가 어마무시하게 많았다.
참고로 저기서 진홍 유치원의 진홍은 당시 백인엽의 아들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효열국민학교의 효열은 백선엽 백인엽 형제의 어머니인 방효열 여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12] 선인은 형제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고, 선화와 인화 역시 형제의 이름 앞글자와 꽃 화(花)자를 합친 것이다. 운봉과 운산 역시 각각 형제의 아호에서 교명을 따왔다(운봉이 백인엽 본인의 호이고, 운산은 형 백선엽의 호이다).
그런데 재단 운영이 개막장 오브 개막장이어서, 인천 지역 고교 평준화 이전 선인고등학교는 인문계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이하의 학생들만 득실대었다. 여기에 견줄만한 사람은 서남대학교로 악명높은 이홍하상지대학교개판으로 운영했던 김문기, 민립대학인 조선대학교를 사유화 했던 박철웅 정도이다. 그 악평은 평준화 이후에도 지속되는 선인재단의 운영 속에서 여전히 이어졌으나, 공립고등학교가 된 이후에는 수준이 완전히 달라져서 신흥 명문고가 되었다. 오죽 개막장이었으면 그저 이름에 한 글자만 들어간 형 백선엽 장군까지 도매금으로 욕을 먹을 지경이었을 정도다(···). 아무튼 막장 선인재단의 전설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도봉산'''으로 불리던 악명높은 항도, 운봉, 운산 라인은 수십년이 지난 현재도 악명이 자자하다.
결국 인천대학교와 선인고등학교 모두 막장의 극을 달리는 운영 끝에 1994년, 인천직할시에 흡수되었다. 인천대학교는 2013년에 국립이 되었고, 나머지 학교는 공립들이 되어서 지금은 선인재단 따위는 없다. 사실 월간 조선에서 백인엽을 취재한 이유도 바로 이런 학내 분규의 해결 때문에 기획했다. 그렇지만 인천 사람들에게 선인재단이라는 단어는 남아 있다. 물론 그것도 아주 안 좋은 이미지로··· 저 동네 저 시절에 근처 고등학교를 나왔거나 또는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백선엽'과 '백인엽'은 똑같은 존재다.
오죽하면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백인엽은 '''나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감옥에 가는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다. 물론 무슨 민주투사같은 건 아니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사회기강 정리 차원에서 반드시 혼내주고 넘어갈 정도로 유명했다는 이야기.
백인엽의 막장 행각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보도한 언론 매체가 바로 월간조선. 그것도 북한 핵개발 문제로 시끄러울 때라서 나름 북한에 대한 비판이 매서운 시기였다. '''그 월간조선'''이 그럼에도 백인엽의 막장 행각을 상세하게 보도할 정도로 재단 운영을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했으며 그로 인해 당시에도 비난을 무수히 받았는지 알 수 있다.

4.4. 거짓말?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인천상륙작전에서 용맹을 떨쳤다고 주장한다는 논란이 있다.관련내용 위 항목에도 기재되어 있었으나 논란 중인 내용이라 삭제.

5. 기타


메조소프라노로 나름 네임드였던 성악가 백남옥 전 경희대 교수가 장녀이다.
전설적인 사채업자 명동 큰손 '백 할머니' 백희엽[13]이 사촌 누나이다. 백희엽은 '광화문 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고성일과 더불어 '백 할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대한민국 사채업의 양대 거물이었고,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70~90년대 슈퍼개미(개인 주식투자가)였다. 영화 '마스터' 에서 주인공 김재명 팀장(배우 -강동원)이 사기꾼 진현필 회장(배우-이병헌)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 자금을 빌린 할머니(배우 - 박정자)가 바로 백할머니 백희엽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이다.

이 인간 자체가 당대의 대한민국 국군 내부에서는 충격과 공포와 분노 그 자체였다. 백인엽이 개인 혼자 군인이면 애시당초 즉결처분당할 짓을 여러번 저질렀지만 문제는 이 인간이 '''당대의 군인인 백선엽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에 형의 뒷배경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아무도 못건드렸다. 심지어 절대권력을 갖게 된 이후의 박정희조차 자신이 소령(진)시절에 공산당에 연루되어 현역부적합전역을 당했을 때 자신이 총살당하는 것을 모면하게 해준 은인이 백선엽인지라 그 백선엽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백인엽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1] 첫번째 부인인 정숙일과 이혼한 경력이 있으며, 전처 사이에 2남 2녀, 두번째 부인인 주광숙씨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2] 조만식의 비서가 백선엽 한 명이었던 것은 아니고, 조만식의 비서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유명한 선우진 역시 유일한 비서인 것처럼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여러 비서진 가운데 한 사람이 선우진이다. 당장 소설가 김훈 부친도 비서로서 활동한 전례가 있다. 백범 암살 전후의 정황을 언론에 적극적으로 증언했고, 남북연석회의에 백범의 차남 김신과 함께 동행한 유이한 인물이기에 그런 오해가 있다.[3] 다만 건군초기 국군 이전 군 경력이 고작 위관급이었던 인물들이, 국군에선 쾌속 승진을 했다. 딱히 백인엽이 무공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일례로 김신 장군은 38세에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에 올랐는데, 당시로선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30대 장군이 넘쳐나던 시대였으므로...[4] 당시 백선엽은 4성장군이고, 백인엽은 3성장군이었다. 특히 백인엽은 4.19 직전까지 포천에 주둔한 6군단장으로 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입할 위치에 있었다.[5] 형 백선엽과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만든 재단이다. 그런데 교육자는 개뿔? 사실 편법상속의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가 재단 설립이다. 사회에 재산을 환원(하는 척)하고 본인과 그 자손들은 대대손손 그 재단이사회(정부로 부터 다시 재단 운영권을 위임받아)를 장악하고 재단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다. 거기에 덤으로 사회사업 한다며 폼도 잡는다. 웬만하면 재단 재정에 문제가 생겨도 정부가 세금으로 손실을 보전해주는 여러가지 장치들이 존재하므로 정말로 대대손손 사골 우려먹듯 재정을 쪽쪽 빨아먹는데, 그 가치의 합을 다더하면 당연히 진짜 기부 안 한 거나 마찬가지. 물론 엄청나게 개판을 치는 경우는 본래 관리권이 정부에 있으므로(사회에 기부한 거잖아) 재단을 해산한다거나, 다른 재단과 합친다거나, 아니면 재단 관리 운영권을 박탈한다. 그런데 상문고등학교 같은 경우를 보면 쫓겨난 재단 이사장 가족이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니 상속세 내기 싫은 부자들은 너도나도 재단을 차린다. 그리고 그 재단을 물려준다. 0포재단도 뭐 그런 식이다. 말로는 수백억을 기부하느니 했지만 그러면 재단 자체의 운영도 하지 말아야지. 보통 이사회뿐 아니라 가족과 친지들을 직원이나 이사로 꽉꽉 채워넣는다.[6] 실제로 여순사건 당시 반군들이 장악한 여수 시내에서 반군들과 시가전을 치러 여수를 탈환한 부대가 백인엽이 이끄는 부대였다. 참고로 그 전에는 토벌군 사령관 송호성이 선두에 나서 여수를 탈환하려 했으나 반란군의 기관총 사격이 그의 지휘 차량에 맞자 그 지휘 차량이 응사하는 도중에 고막이 파열되어 도망가는 추태를 벌였다.[7] 이렇게 정신 나간 지경인데도 프래깅이 일어나지 않은게 용할 뿐이다. 다른 나라 군대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상관 살해 문서 참조.[8] 이 때문에 백선엽 장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백인엽은 사람이 못 돼서 형보다도 일찍 죽었다고 비판한다.[9] 당시 박정희의 당번병인 박환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부대에 비상이 걸리면 박정희도 철모에 완전군장을 하고 대열의 선두에 섰는데. 백인엽 군단장은 지휘봉으로 박정희의 철모를 탁탁 치면서 무슨 훈계 같은 걸 하곤 했고 박정희는 그런 대우를 받고도 꾹꾹 참고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다만 일과가 끝나면 과음하여 당번병이 업고 숙소로 돌아오는 일들이 잦았다고... 게다가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박정희가 더 많다.''' 즉 백인엽은 '''빽으로 진급'''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때문에 백선엽만 아니었으면 박정희가 분노해서 훗날 군사정변 일으킬 때 백인엽을 자기 손으로 혁명재판에 넘겨 사형 판결을 내린 후에 하루 빨리 집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백인엽 못지 않은 악행을 저지른데다, 백인엽보다 더 심하게 그를 하대하는 짓까지 저질렀으면서 정작 군 내부에 자기 세력을 만들지 못한 곽영주는 '''혁명재판에서 진짜로 사형을 언도 받았고, 그 해에 골로 갔다.'''[10] 곽영주는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경력을 문제 삼아서 소장 진급을 막으려고 들었다!(21세기가 된 지금도 정권이나 군 수뇌부의 성향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다고 판단되는 직업군인은 천운이 오지 않은 이상 한직만 돌다가 불명예스럽게 나가야 하는 마당에, 박정희가 진급심사를 받는 시기는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어 지금보다 반북적인 레드 컴플렉스가 훨씬 강했던 1950년대이다! 즉, 곽영주는 '''박정희의 진급을 막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매장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나마 백인엽의 형인 백선엽이 박정희를 보호해주면서 소장 진급에 성공했다. 그러자 곽영주는 박정희의 전 부인이었던 김호남과의 관계를 들먹이며, 그의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이러니 박정희가 곽영주에게 악감정을 안 가질리가 만무했던 것.[11] 2012년에 청라국제도시로 이전하였다.[12] 실제로 백선엽은 6세, 백인엽은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13] 199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