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신흥고등학교

 




전주신흥고등학교
Jeonju Shinheung High School
全州新興高等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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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751a> 개교
1900년
유형
일반계 고등학교
성별
남자
운영형태
사립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
교장
임희종
교감
김병호
교사수
68명 (2019)
학생수
907명 (2019)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 (중화산동 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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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개교
3. 연혁
4. 건학이념 및 교훈
5. 교가
6. 교목과 교화
7. 역사
7.1. 3·13 만세운동
7.2. 광주학생항일운동 참여
7.3.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7.4. 6·25 학도병 참전
7.5. 5·27 민주화운동
7.6. 전주신흥고 역사 다큐멘터리
8. 졸업생
8.1. 정치인/독립운동가
8.2. 공직자
8.3. 학자/교수
8.4. 방송인/언론인
8.5. 군인
8.6. 예술인/체육인
9. 전주신흥고등학교 체육부
9.1. 전주신흥고등학교 씨름부
10. 기타
10.1. 학교명칭
10.2. 졸업생 기수
10.3. 사건·사고,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와의 관계
10.4. 희현당
10.5. 미션스쿨
10.6. 찬송가&합창 경연대회
10.7. 학교행사(희현축제, 미스 신흥 선발대회, 미스터 신흥선발대회, 추수감사절 등)
10.8. 강당, 본관포치
10.9. 서남동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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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주신흥고등학교(全州新興高等學校)는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사립 일반계 고등학교이다.

2. 개교


1900년 9월 9일에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레이놀즈가 설립하였다. 본래 학교명은 "예수학교"[2] 였으나 1908년 신흥학교로 개명했다. 1909년 사립 신흥학교로 인가 받았고, 제 1회 졸업생 5명 배출 했다.

3. 연혁


  • 1900년 09월 09일 미합중국(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윌리엄 레이놀즈(이눌서) 선교사가 희현당 옛터에 학교 시작
  • 1906년 04월 01일 학교 교명을 "예수교학교"로 정한
  • 1908년 09월 01일 학교 이름을 "신흥학교"라고 함
  • 1909년 06월 23일 제1회 보통과(초등학교) 졸업생 5명 배출
  • 1909년 11월 23일 2층 홍벽돌집 신축, 고등과 4년제 모집
  • 1912년 03월 25일 고등과 제1회 졸업생 4명 배출
  • 1915년 06월 02일 "전주사립기독신흥학교"로 교명 변경
  • 1919년 03월 13일 기전학교와 함께 전주지역 3·1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함
  • 1920년 04월 01일 "전주신흥고등보통학교"로 교명 변경
  • 1922년 09월 07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사립신흥학교"로 승인 받음
  • 1928년 06월 20일 RICHARDSON HALL(구 본관) 준공
  • 1930년 01월 25일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
  • 1931년 04월 02일 일제에 의해 학교 교명이 "일사립신흥학교"로 변경
  • 1933년 04월 01일 지정학교로 승격됨
  • 1933년 04월 13일 학교를 3년제에서 5년제로 변경
  • 1936년 03월 07일 EGBERK SMITH AUDITORIUM(대강당) 준공
  • 1937년 09월 08일 린튼(인돈) 교장이 기전학교와 신흥학교의 폐교 사령장을 받아옴
  • 1937년 09월 23일 기전학교와 함께 폐교식 거행
  • 1937년 10월 05일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 정식 폐교
  • 1946년 11월 26일 전주신흥중학교로 복교 (중학교만 복교)
  • 1950년 04월 20일 중학교 3년제, 고등학교 3년제로 분리함
  • 1962년 10월 07일 재단법인 호남기독학원으로 개편
  • 1964년 09월 10일 전주신흥중학교 본관이 설립되며, 구 본관과 대강당이 전주신흥고등학교로 인계되고 병설고등학교에서 단설고등학교로 변경
  • 1980년 05월 27일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
  • 1983년 09월 30일 신관 준공
  • 1999년 08월 28일 정보관 준공
  • 2001년 12월 06일 100주년 기념관 준공
  • 2002년 10월 15일 교직원 편의실 준공
  • 2005년 01월 14일 인톤 다목적관 준공

4. 건학이념 및 교훈


건학이념: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을 기른다.
교훈: 지인용(智仁勇)
지(智) : 진리를 탐구하고
인(仁) : 사랑을 실천하고
용(勇) : 정의를 실현한다

5. 교가


전주신흥고등학교 교가[3] (작사 김진상 / 외국곡(프러시아 행진곡) / 편곡 최남식)
1절. 완산 정기 모아드는 수려한 곳은
옛부터 문명한 희현당기지로다
백운간에 솟아있는 층층한집은
지인용을 배양하는 신흥학교다
2절. 풍우상설 반만고난 인내함으로
동량지재 굵은나무 양성하지니
복음진리 여러학문 공부하여서
반도문명 발전하세 우리학도들
3절. 태평양과 대서양의 무한한물은
심산유곡 개천들을 지내옴이니
우리들도 장래목적 성취하려면
백절불굴한 연후에 능히할지라
후렴. 만세 만세 만만세 신흥학교 만만세
지인용을 삼덕으로 신흥할지니
학도들아 용감력을 분발하여서
한 목소리 한 발자국 나아갑시다
독립군들이 부른 용진가와 후렴구 부분은 가사까지 매우 닮아 있는데 1910년대에 이미 신흥학교에서는 이 곡을 교가로 사용 했으므로 용진가보다 먼저 사용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어느쪽이 먼저 사용되었든 서로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000 남북정상회담순안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한 북한 군악대가 이 곡을 연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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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과 후렴구에 붙어있는 (헤이!)는 교내 행사 때 재학생들이 부를 때마다 2, 3학년들이 붙인다. 1학년들은 처음에는 뭔지 의아해 하면서도 나중에 가보면 자기들도 후배들한테 이 짓을 하게 된다.(...)
가끔 교가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하기도 한다. 학교가 미션스쿨이기때문에 찬송가의 마지막 부분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헤이!)나 (아멘)은 교사들에 의해서 제재를 받기도 한다.

6. 교목과 교화


전주신흥고등학교의 교목은 은행나무다. 학교입구에서 교사(校舍)로 가는 길에 운동장을 따라 심어져 있다. 학교 구관(舊館)이 소실된 현재 학교 강당과 함께 학교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전주신흥고등학교의 교화는 무궁화다. 학교 마크는 무궁화를 기반으로 디자인했다.

7. 역사



7.1. 3·13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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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3일 전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지역 인사들과 함께 신흥학교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박태련, 김신극 등 전주지역 지도자들은 군산에서 1919년 3월 4-5일 만세운동이 감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신간회 총무 박태련의 집과 천도교 측에서 필요한 태극기를 인쇄 했으나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계속되자 일본경찰은 전주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날까 염려해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비롯한 전주시내 학교에 강제 방학조치를 취해버렸다. 이에 최종삼 등 신흥학교 학생 5명은 밤을 이용해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 등 인쇄물을 만들었고, 13일 장터서 거사하기로 모의했다, 13일날 학생들은 채소가마니로 위장한 태극기를 장터로 실어 나르고 거사 직전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전주교 건너편에서 군중들에게 은밀히 배부하였다. 낮 12시20분께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및 천도교도 등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남문 밖 시장, 제2보통학교(현 완산초등학교)에서 모여 인쇄물을 뿌리며 시가지로 구보로 행진했다. 시위는 오후 11시까지 서너차례 계속되었고, 다음날 오후 3시에도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고형진, 남궁현,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 등 신흥학교 학생들을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했고, 모두 실형 1년을 언도 받았다. 또한 이 외 신흥학교 학생 3명이 일제의 고문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를 지도한 김인전 목사는 이후 중국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현재 신흥학교 교문 옆에 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이 날의 만세운동을 기념해 매해 3월 전주기전여고와 함께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하고 있다. 2019년 100주년을 맞아 큰 행사가 열렸다. 참조1 참조2

7.2. 광주학생항일운동 참여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된지 3달 후인 1930년 1월 25일 신흥학교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벌였다. 교우회 문예부장 박문수(후의 이름은 박철웅), 운동부장 이재영(후의 이름은 이철), 그리고 문예부의 문예계와 서무부의 사교계를 맡았던 함수만, 문예부 도서계와 서무부 기록계를 맡았던 원용덕 등이 중심이 되어 12월 2일 개교 기념 행사 후 거사할 예정이었으나 연기되었다. 이 후 12월 12일에 다시 거사하려 하였으나 학교 당국이 사태를 눈치 채고 조기 방학에 들어감으로 무산되었다. 개학(1월 25일) 이 후 재차 거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학교에서는 개학 이후에도 학생들에게 등교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간부들은 기숙사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규합하여 1월 25일 거사 하기로 결정하였다. 학생들은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해놓고 태극기와 전단을 붓으로 그려가며, 거사를 준비했다. 1월 25일 아침 8시 30분 간부들은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을 모아 태극기와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다가교 쪽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규합하여 80여명을 모았다. 9시 30분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단을 살포하면서 "자주독립만세! 학생만세! 동감(同感)[4]만세!" 등을 외치며 다가교를 건너 시내로 진출했다. 시위학생들은 중앙동으로 진출하였고, 출동한 일본경찰들은 총을 쏘며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 날 경찰에 연행된 학생 총수는 36명이었다. 검거된 학생에게 최고 29일, 최하 15일 구류처분을 즉결하여 동일 오후 4시경에 전주 형무소로 넘겨졌다. 주동자의 한사람인 함수만은 감옥을 나온 후 후유증으로 예수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1930년 5월 19일 예수병원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해방 후 함수만에게는 공적이 인정되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7.3.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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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를 앞두고 학생들[5]이 학교 이니셜 S자를 만든 모습
1930년대 들어 일본이 군국주의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면서 신사참배가 조선에도 강요됐는데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세워진 신흥학교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에 위배되는 신사참배를 수용 할 수 없었고, 신흥학교의 설립 주체인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 1937년 2월 2일 총무인 풀톤목사를 파견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했다. 한달여의 조사 끝에 1937년 2월 말경 전주에서 풀튼의 성명이 발표되었는데 "현재의 상태로는 학교사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라는 간단한 성명 이었다. 풀튼 성명에 따라 남장로교 선교회가 경영하고 있는 10개의 중등학교는 1937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았고, 당국이 재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는 한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 발발 후 매달 6일을 애국일로 정해 전국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9월 4일 전라도의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사전협의회가 열렸다. 결국 9월 6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다가공원에 있는 신사로 인솔되었다. 참배 구호 후 일본 순사와 관리만 참배를 하였고, 학생들은 참배를 하지 않고 꼿꼿이 서있었다. 재차 참배 구호가 내려졌지만 신흥학교 학생들은 퇴장하였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자리에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신사참배는 무산되었고, 조선총독부는 학교를 폐교하려 했으나 이에 앞서 신흥학교는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9월 22일 학교 문을 닫았다. 폐교 후 전체 학생 246명 가운데 197명은 고창고보로 전학을 했고 나머지 49명은 전학을 위한 학비 150원이 없어 중도에 학업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학생들 외에도 고창고보로 5명의 교사가 전근가야 했으며 신흥학교에서 사용하던 책상과 걸상의 일부도 고창고보로 옮겨졌다. 학교와 관련된 서류 일체는 도청 학부부에 보관되었고, 건물은 후에 일본인들의 저금 관리국수련소로 사용되었다.

7.4. 6·25 학도병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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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발발하자 전주신흥고 학생들도 학도병으로 징집[6]되었다. 학도병으로 징집된 학생들은 전주북중학교[7] 운동장에 모인 후 순천 등지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안강·기계전투,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 인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낙동강 전투에서 인민군의 남하는 지연되었고, 국군은 반전의 계기를 마련 할 수 있었다. 60여년이 지난 2012년 6월 19일 육군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호남 지역 최초로 전주신흥고등학교 강당에서 '6․25참전용사 명패 모교 증정 행사'를 가졌다. '6․25참전용사 명패'는 가로 90cm, 세로 120cm의 크기로 돼 있으며, 71명의 학도병의 이름이 새겨졌다. 6.25 당시 전주신흥고에 재학하다 학도병으로 징집 되었던 최승규 옹의 블로그에 당시 상황히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자세히 알고 싶다면 참고 해볼만 하다. 한국동란과 학도병

7.5. 5·27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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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당시 전주신흥고등학교 현장 모습
'5·27 민주화운동'은 5.18 민주화운동 후 광주 외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고등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였다.
신흥고는 미션계 학교다보니 종교단체를 통해 알음알음 광주 소식을 전해들을 수가 있었다. 인근에 있는 서문교회 근처에 하숙집들이 많기도 했고(27일 전날 밤 주동 학생들이 교회에 모여 내일의 행동지침을 정리하였다), 광주에서 유학(遊學)을 온 학생들도 적지 않아, 전화가 끊기기 전까지 본가와 통화를 하고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되면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팔마성당의 박창신 신부가 자신이 작성한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들을 성지야학 학생을 통해 신흥고 학생들에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이는 좌절되었다. 그걸 받아서 5.27에 뿌리려고 했으나 약속시간에 오지 않자 불길한 예감을 느껴 자리를 떠났다고. 짐작했겠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이유는 오기로 했던 사람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잡혀가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고... 결국 학생들이 직접 호소문을 작성해서 등사기로 유인물을 만들었고 고등학교마다 마구 뿌리기도 했다. 주동 학생들은 그것뿐만이 아니라 한밤중에 페인트, 시너들을 가지고 시내 각종 중, 고등학교란 학교는 다 돌아다니며 들어가서 '전주시내 고등학생 총궐기하자!'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이런 낙서를 닥치는 대로 하고 다니기도 했다.[8] 결과적으로 봉기한 학교는 오직 신흥고 뿐이었지만.
1980년 5월 27일. 전주신흥고 학생 1500여 명이 '비상계엄 철폐',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철폐 독재타도', '유신잔당 척결' 등을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교문[9] 밖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학교 상공엔 헬기 두 대가, 무장한 군인·경찰 500여 명이 출동했다. 교사들은 교문을 잠가놓고, 대걸레 자루를 휘두르면서 '나가면 안 된다, 나가지 마 이놈들아. 나가면 너희들 다 죽는다!'고 절규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류하였고 이로 인해 학교 외부로의 진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호소문을 배포하는 데도 실패했다.
사실 당시 교사들도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말리긴 했지만 내심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나중에 인터뷰에서 술회하기도 했다. 이게 차라리 다행인 것이, 군은 학생들이 밖으로 진출하면 발포하려고 했다고 한다(!) 어느 수사관이 전날 교감에게 연락하여 '귀교에서 오늘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제2의 광주 사건으로 우려하고 있다.'라고 전화했고, 근처 산에서 따로 만나자고 하여 가보니 지역 계엄사령관이던 모 대령이 '세 번이나 진압하라고 독촉을 받았다. 완전히 불바다를 만들어 버려라, 아이들을 다'라는 소리를 위로부터 들었다고 경고했다고.. 참가 학생 본인들도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민주 제단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실현되었다면 전주는 군경이 경고한 그대로 제2의 광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학생들은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다 강당에서 토론회를 가진 후 자진해산하였다.
사건 후 교사 2명이 구속 및 해직, 2명의 학생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이후 제적되었고, 7명의 학생이 무기정학, 17명의 학생이 1주~3주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자퇴한 이들도 있는데 학생들이 처벌을 받고 학교로 돌아왔어도 요주의 학생이 되는(강제로 다른 반으로 옮겨지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는 등) 사실에 분개하거나, 복학이 어려울 것 같자 선택한 것. 무기정학을 받은 학생은 독일로 유학을 간 뒤 동기들과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참조1 참조2
신흥고등학교에서는 이 일을 기념하여 매년 재현행사로 기념 연극을 하고 있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의원 시절이던 2016년 기념행사 때 방문한 적이 있다.
2020년, 단편 다큐멘터리 <5·27 꺼지지 않은 불꽃: 나와 5·18>이 공개되었다. 여기서 당시 학생들은 자신들을 저지한 교사들을 내심 원망하고 실망했었고, 수업 거부를 하면서 '선생님을 참 존경했는데 실망했다. 위선자라고 생각했다. 이 심정으로 수업을 도저히 받을 수 없다'고 대놓고 말하거나 사제관계고 뭐고 잊고 격렬한 토론을 하기도 했으나[10], 나중에는 자신에겐 나쁜 선생님이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을 지키려고 했던 의로운 행동이었음을 안다고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당시 교감(교장은 고인이 되었다)도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실망했을 학생들에게 매우 미안하고 눈감을 때까지 있을 괴로움 중 하나일 것이며, 참 장했다고 치하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전해들은 학생들은 이 진심어린 말에 굉장히 감동하고 선생님들을 용서하였으며, 옛 은사를 다시 찾아가 재회하여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와서 자신이 학생이 아니라 교사였다면 같은, 아니 더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므로 이해한다고.

7.6. 전주신흥고 역사 다큐멘터리



이제 안 보여준다.

8. 졸업생



8.1. 정치인/독립운동가


강상구: 前 정의당대변인
강완묵
김생기: 前 정읍시장
강원국: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청와대 연설 담당 행정관 및 비서관. 상술한 5.27 민주화운동 당시 3학년으로, 본인도 이에 참가했다가 1주일 정학 징계를 받았다.
김경신: 독립운동가
김원전: 4대 국회의원, 전 고려제지 대표.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11]
김형섭: 4대 국회의원
남궁현: 독립운동가
박철웅: 2, 4, 5대 국회의원. 전 조선대학교 총장.
백형남: 제헌 국회의원
송완용: 전 전북 정무부지사, 쌍용정보통신 대표이사
송철: 독립운동가
이용철: 前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이사
이환주: 現 남원시장
정경진(1965)
정세균[12][13]: 제46대 국무총리,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15, 16, 17, 18, 19, 20대 국회의원. 전 산업자원부 장관.
황두연: 제헌 국회의원

8.2. 공직자


박문석: 前 문화관광부 차관
서호: 現 통일부 차관

8.3. 학자/교수


● 권이종: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원장
● 전일환: 전 전주대 부총장
● 차경섭: 차병원그룹 설립자. 전 차의과학대학교 이사장
탁명환: 신흥종교 및 이단종교 연구가

8.4. 방송인/언론인


고장환: 희극인(개그맨, 코미디언), 가수
김진규: 대한민국 배우 피아골, 하녀(1960)등 출연
온대호: 기업인, 스포츠 해설가
하경덕[14]: 전 서울신문사 사장, "코리안타임"창간, 과도 입법의회 의원.

8.5. 군인


이정기: 전 육군항공작전사령관(중장)

8.6. 예술인/체육인


박지현: 탁구 국가대표 코치. 前 국가대표 탁구 선수.
정율성: 팔로군행진가 작곡가. 의열단 단원.[15]

9. 전주신흥고등학교 체육부



9.1. 전주신흥고등학교 씨름부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전국체전에서 입상하거나 프로씨름계에 진출한 선수가 다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민속씨름이 침체되어 안습인 상황...

10. 기타



10.1. 학교명칭


공교롭게도 신흥고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고등학교가 대한민국에 세군데나 있다. 동두천신흥고, 청주신흥고, 전주신흥고이다. 때문에 인터넷에서 신흥고 관련 검색을 하면 세 학교의 검색 결과가 뒤범벅 돼서 나오므로 잘 가려가며 봐야 한다. 동두천 신흥고는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고 청주 신흥고는 상대적으로 역사는 짧지만 지역에서 나름 끗발이 있는 학교기 때문에 데이터 양이 적지 않다. 결국 정확한 검색을 원한다면 전주신흥고라고 정확히 검색하는 것을 추천한다.
2004학년도 수능이 끝나고 전주신흥고 고3 학생들이 서울로 여행을갔는데 공교롭게도 청주신흥고도 같은 곳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문제는 전주신흥고나 청주신흥고 모두 풀네임을 쓰는 대신 신흥고라고 줄여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었다. 버스에 신흥고 몇 호차라고만 쓰여 있었던 것. 일부 학생들이 상대 학교 버스에 기웃거리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인솔 교사들이 이를 눈치채고 지도하여 다른학교 버스에 학생들이 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기막힌 우연이었다.
신흥고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00년에 개교한 전주신흥고이다. 동두천 신흥고가 1960년, 청주신흥고가 1978년에 개교 했으니 시기적으로 한갑자 이상 전주신흥고가 먼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신흥고 명칭을 고집한다면 전주신흥고가 우선권이 있다 볼 수도 있겠지만 신흥이라는 명칭 자체가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새로이 일어난다'[16]라는 보통명사기 때문에 우선권을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결국은 신흥고라는 명칭을 줄여서 쓰는 것은 세 학교 모두의 권리라고 봐야할 것이다.


10.2. 졸업생 기수


전주신흥고등학교는 몇 회 졸업생인가 하고 물으면 3가지로 대답이 나눠진다. 첫번째는 개교 연도부터 계산하여 말하는 것이다. 1900년을 기준으로 2000년에 졸업했으면 100회 졸업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학교가 계산하기도 편하게 1900년에 세워진 관계로 이 방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 두번째는 복교 몇회라는 식으로 말하는건데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교 되었었기 때문에 다시 개교한 1946년을 기준으로 졸업 연도를 말하는 것이다. 보통 첫번째 방식으로 졸업연도를 표기한 다음 옆에 괄호로 복교 졸업회수를 표기한다. 세번째로는 폐교이전 졸업 회수와 복교 이후 졸업 회수를 합하여 말하는 것인데 복잡해서 그런지 사용 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엄밀히 말하면 3번째 방식이 가장 적합할 것이나 산출 기준이 복잡하다는게 문제다. 당장 폐교 이전 졸업 횟수를 계산하려 해도 학제가 변경되었었기 때문에 처음 졸업생을 배출한 1909년을 기준을 삼아야 하는지 아니면 고등과 학생이 처음 졸업한 1912년도를 기준을 삼아야하는지 문제가 된다. 더구나 3.1운동의 여파로 고등과에서는 2년동안 졸업생이 배출되지 못한 때도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앞으로도 첫번째 방식으로 졸업 회수를 표기하는게 대세가 될 듯 하다.

10.3. 사건·사고,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와의 관계


전주기전여고 역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로 사실상 그 뿌리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전주신흥고와 전주기전여고는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일제 시대때만 하더라도 학교 앞으로 흐르는 전주천 건너에 있는 서문교회에 같이 예배를 드리러 가기도 했다. 심지어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한 것도 똑같다. 해방 후에도 두 학교는 밀접해 있었던데다가 서로 교정을 연결해주는 계단이 있어서 왕래가 쉬웠다. 후에 계단은 사라졌지만 이웃한 학교로서 두 학교의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2000년 두 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도전 골든벨에 참여했는데 각각 75명씩의 150명의 학생이 출연했었다.[17] 그러나 전주기전여고가 2005년 전주 서부 신시가지로 이사 감에 따라 100년 넘게 이웃해온 두 학교는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현재 전주신흥고에서 가장 가까운 여고는 전주근영여자고등학교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가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가 서부 신시가지로 이사가면서 18억 원의 빚을 지게 되었는데, 호남기독학원(전주신흥고등학교와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가 이에 속한다)15년간 56억 원으로 불어날 때까지 해결을 미루어 문제가 되었다.
호남기독학원의 이사회는 같은 법인 소속 학교인 전주신흥고등학교의 재산으로 빚을 탕감키로 하여 교사들의 반발이 이루어졌다.참조1 여기서 말하는 재산은 서울에 위치한 주차장인데, 이 주차장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인하여 호남기독학원에 속한 학교 중 전주신흥고등학교 만이 유일하게 흑자이다.
그런데 이것을 팔아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의 빚을 탕감하려는 것이다. 전주신흥고등학교의 교사들은 전북교육청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지속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고 학생들은 반대서명운동 등의 활동을 진행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주차장을 넘겨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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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제가 또 발생하는데, 주차장을 팔았지만 5억 원이라는 채무가 남는다.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홈페이지 팝업창으로 성금 모금 광고를 한다. 여기서 또 문제는 51억 원의 빚을 탕감한 과정을 전혀 설명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잘못을 일절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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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희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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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학교는 조선시대의 학당이었던 희현당 위에 세워졌다. 교가에도 희현당이 등장하며, 건물 중에도 희현당의 이름을 가진 신흥 건물이 있다. 희현당은 숙종 26년(1700)에 당시 관찰사로 재임한 김시걸(金時難)이 지방 유지인 오명기와 더불어 황학대(黃鶴臺) 기슭인 옛 사마재터에 학당을 창건했다. 김시걸은 희현당을 지어 놓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사하고만다. 창설당시의 규모를 보면 강당과 주방을 마련했고, 전답을 사들여 그 수입으로 경비를 쓰도록 하였으며, 책을 비치하여 학업을 돕고 당규(堂規)를 제정하여 규율을 세웠다. 봄·가을 반으로 나누어 전주에서 10명, 도내에서 20명의 학생을 뽑아 수강하도록 했다. 그 후 관찰사 이집(李集)이 중수(重修)하려고 하였으나 임기가 짧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아들 이주진(李周鑛)이 영조 14년(1738)에 부임하여 먼저 규모보다 더 넓게 중수했으며, 새로 당규 40종목을 제정하고 당기(堂記)를 써서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당쟁으로 선비들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경영이 충실하지 못하여 퇴락한 상태에 있다가 이곳에 신흥학교가 세워지게 됐다. 현재 신흥학교에 남아 있는 희현당 사적비와 희현당 중수사적비는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해서 세운 것으로 희현당을 창설한 김시걸과 이를 중수한 이주진의 곡정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전주신흥고등학교와 전주신흥중학교에서는 사생회, 백일장, 학교축제 등을 희현당의 이름을 따서 희현제로 명명하고 있다.

10.5. 미션스쿨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학교이다 보니 매일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연도마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1주일에 한번 강당에서 학년별로 예배를 드리고 한달에 한번은 전교생이 강당에서 예배를 드린다.
학교에는 교목이라고 불리우는 상주하는 목사가 있어서 강당에서의 예배를 주관한다. 화요일 아침에는 방송예배를 하고 그 외의 날들은 학급에서 반별로 예배를 드리는데 선교부장[18]이 학급 예배를 주관한다.[19]
과거에 전주시에서는 고등학교를 진학할 경우 4지망 까지만 학교를 쓰게 되어 있었는데, 4지망 안에 있는 학교에 진학을 못 할 경우 일명 뺑뺑이를 돌려 임의적으로 미달이 된 학교에 학생을 배정하였다. 문제는 종교재단이 세운 학교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진학해야하는 학생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전주신흥고등학교에 진학한 비기독교도인 학생이 예배에 불참하겠다는 일이 있어서 문제가 되었다.
학교도 학생도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되버린셈.... 결국 현재는 전주시에 있는 모든 학교를 지망 순대로 모두 기입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종교 재단이 설립한 학교가 싫다면 전주신흥고를 비롯한 종교재단 학교에 진학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열린셈이다.
한편 신입생은 '종교서약'이라는 문서를 작성해 제출해야 했는데 내용은 ‘학교의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순종하겠습니다. 이를 위반하면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할 것을 서약합니다’라는 다소 종교에 대한 강제성이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비 기독교인 학생들과 학부모 사이에서 불만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2011년 부터는 종교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10.6. 찬송가&합창 경연대회


봄과 가을에 각각 찬송가와 합창 경연대회가 열린다. 매년 봄 가을만 되면 각 반들은 조회시간, 음악시간 등을 활용해 경연준비를 한다. 학년별로 각 반들끼리 경쟁을 하고, 최종적으로 각 학년 당 3위까지 입상을 한다. 학기 초에 반의 단합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행사이지만 가끔 경쟁이 과열될 때가 있다. 문제는 학생들보다 담임 교사들의 경쟁이 더 심하다는 것..... 담임 선생님이 직접 합창에 참여하거나 편곡, 연주까지 하기도 한다. 입상시에는 상금이 주어지며 대 부분 학급비로 편입되어 회식 및 간식비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10.7. 학교행사(희현축제, 미스 신흥 선발대회, 미스터 신흥선발대회, 추수감사절 등)


희현축제는 학교 개교기념일인 9월 9일을 전후에 열리는 교내축제행사이다. 과거에는 개교기념일을 전후에 열리는 희현축제가 큰행사였기때문에 전주지역 여학생들도 초대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입시때문에 교내행사로 한정이 되어서 예전처럼 타학교와의 교류가 크게 줄어들었다. 공교롭게 9월 9일은 북한의 구구절과 날짜가 같아서 학생들은 종종 구구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스 신흥설발대회는 가장 아름답게 여장을 한 학생을 뽑는 대회이다. 이 행사가 중단 된 적도 있고, 계속 이어지는 때도 있었는데 보수적인[20] 색채가 강한 기독교 재단 학교에서 이런 행사가 행해진다는것 자체가 흠좀무하다. 대체로 키가 크거나 마른체형 또는 왜소한 체형의 학생이 출전을 한다. 가발이나 머리띠를 사용해 머리를 꾸미고, 물풍선과 브레지어를 활용해 가슴 라인을 살린다. 스커트와 스타킹과 하이일 등을 이용해 하반신을 꾸미고, 화장, 핸드백, 거울 등을 활용하여 치장을 한다. 간혹 핸드백에 사탕을 넣고 나와서 관중석에 사탕뿌리기 신공으로 인기 몰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참가자는 사회자와 인터뷰를 나누게 되는데, 대화내용이 지나치게 성적묘사가 심해 교육적 측면과 학교 개교이념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매번 선생님들 사이에 찬반이 갈린다. 또한, 모교 출신의 선생님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학교 다닐 때도 이 행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서 깊은 행사인듯 하다. 또 한 미스터 신흥 선발 대회도 있었지만 미스 신흥만큼 인기가 있지는 않았다. 학교 축제행사의 백미는 미스 신흥선발대회였고, 오프닝 이벤트 성격으로 진행된 행사가 미스터 신흥선발대회였다. 행사가 끝나면 포토타임이 주어지는데 선생님을 비롯한 타반, 타학년까지 함게 사진을 촬영하며 기념을 남긴다.
추수감사절 행사는 매년 추수감사절을 전후에 열리는 행사이다. 학교가 개교된 초기에는 제법 큰 행사였지만, 현재는 의미가 많이 쇠퇴된 행사이다. 그 밖에 만우절을 기해 열리는 반바뀌기 행사 등이 있다. 여담으로 전주기전여고와 지척 가까운 거리에 있어 교류가 활발하던 시절에는 만우절에 여학교반과 남학교반을 바꿔서 수업을 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교사나 학생들 모두 즐기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사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가능했던 것은 교사들 중에 상당수가 선배출신인 경우가 많아서 였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교사와 제자관계가 3대에 걸친 경우가 있다. 즉, 교장의 제자가 학년부장을 하고 학년부장의 제자가 담임을 맡는 경우도 있다. 교사가 교사의 별명을 부르는 경우가 있어 학생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도 종종있다.

10.8. 강당, 본관포치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171호

172호

173호
서울 누하동 이상범 가옥과 화실
전주 신흥고등학교 강당과 본관 포치
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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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포치
강당 전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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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 홀(리모델링 전)
스미스 홀(리모델링 후)
전주신흥고등학교 내에 강당과 본관포치는 교문에 들어서서 바라 볼 때 왼쪽 전방에 위치[21] 하고 있다. 본관은 1928년 12만원의 예산으로 지어졌고, 강당은 1936년 리차드슨의 기증으로 3만 3천원의 예산을 갖고 지어졌다. 하지만 본관은 1982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관 포치만 남아 있다. 두 건축물은 근대 역사 건축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72호로 지정 되었다. 1936년 3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완공된 강당의 모습이 실려있다. 1936년 완성된 강당 모습

10.9. 서남동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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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동홀 전경
서남동홀 명명식
전주신흥고등학교의 개교 100주년을 기념으로 만들어진 건물로 강당과 기숙사가 위치해있는 곳이다. 기숙사는 평범하다.
서남동홀의 강당은 스미스홀에 비해 협소한 편이며 인문사회 특강, 후마니타스 과정을 할 때 주로 사용된다.

[1] 2018년 5월 24일, 5·27 민주화운동 기념행사 당시에 명명식을 가졌다. 기존에는 그냥 백주년기념관(아래의 건물부분)그리고 희현학사(기숙사)라고 불렸었음. 이름의 유래는 서남동 목사. 그는 신흥학교 출신으로 한국 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유신의 이념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교수자리에서 내려왔다. 당시 기존신학의 상투성과 기득권과의 유착을 비판하고 민중신학을 지지하는 등 진보적 색채를 띈 신학자였다.[2] 1900년 개교 당시에는 신학문당(新學問堂)으로 불렀다.[3] 독립군들이 군가로 불렀던 용진가(勇進歌)와 같은 곡이다. 후렴구의 가사도 매우 흡사하다.[4] 광주학생들의 운동에 동감(同感)한다는 뜻 이다.[5] 5학년 학생 전원이 만들었다고 한다.[6] 자원 입대가 아닌 징집이었다. 소집령이 내려지고, 영장이 발부 되었다고 한다.[7] 전주고등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6년제 학제였다. 현재에도 전주고등학교 동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총동창회에 북중학교 기수가 반영된다.[8] 이런 행동 때문에 전국적으로 뭔가 행동을 확산시키려는 조직이 있다고 생각한 경찰과 헌병들한테 주동 학생들이 엄청나게 고초를 당했다고 한다. 뭔가 배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삐리 3명이 다니까(...)[9] 현재의 교문 위치와 달리 전주천 방향으로 교문이 위치했다. 1992년에 본관에 화재가 났기 때문.[10] 무기정학을 당했던 한 학생은 만취한 채로 찾아와서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교감은 마음이 아파서 그냥 잘 달랬다고.[11] 미군정기에 한성부윤으로 부임했으며, 재임 기간중 한성이 서울로 개칭되고 초대 서울시장이 되었다.[12] 무주 안성고와 전주공고를 다니다 전주신흥고에 들어왔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실업계열 학교 대신 인문계열 학교로 옮겨왔던 것이다. 전학 당시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전주공고에서 1 등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는 정세균이라고 합니다. 전주신흥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은데 장학금을 안 주시면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됩니다. 장학금을 주시고 전학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당돌하게 말했고, 학교측에서 이를 수용해 입학하게 되었다.[13] 고등학교 시절에는 운동권학생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선생님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진학이후 학생회장 및 학생운동을 한 것을 보고 선생님들이 놀랐다고 한다.[14]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학 정규과정을 졸업했다.[15] 졸업은 하지 못했고, 신흥학교에 재학 중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자퇴했다. 2008년 명예 졸업장이 수여되었다.[16] 다만 신흥학교 개교 당시 새로운 새벽(New dawn)이라는 뜻으로 교명을 택했다고 한다.[17] 최후의 1인이 없이 전주신흥고와 전주기전여고 학생이 마지막까지 1명씩 남아있다 동반 탈락했다. 방영 당시 두 학교를 은근 라이벌 관계 처럼 엮어 편집 되었는데 사이좋게 끝내자고 동시 탈락한거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그냥 우연히 동반 탈락되었다고 한다.[18] 과거에는 종교부장으로 불렸다.[19] 담임선생님의 재량에 따라 교회다니는 반 학생 전체가 하루씩 돌아가며 예배를 주관하기도 한다.[20] 전주신흥고가 기독교 학교이긴 해도 보수적인 색채보다는 진보적인 색깔이 은근 강하다.[21] 본관 포치는 엄밀히 말하면 전주신흥중학교 뜰안에 위치해 있다.[22] 2018년 5월 24일, 5·27 민주화운동 기념행사 당시에 명명식을 가졌다. 기존에는 그냥 백주년기념관(아래의 건물부분)그리고 희현학사(기숙사)라고 불렸었음. 이름의 유래는 서남동 목사. 그는 신흥학교 출신으로 한국 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유신의 이념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교수자리에서 내려왔다. 당시 기존신학의 상투성과 기득권과의 유착을 비판하고 민중신학을 지지하는 등 진보적 색채를 띈 신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