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기독교)
1. 개요
영어: glossolalia, gift of tongues
한자: 方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로 얻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언어'''이다.
2. 성경적 근거: 요엘 및 사도행전
방언에 대한 첫 언급으로 추정되는 성경 구절은 요엘 2장이다..[1]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모든 이들에게 임하고, 아들딸[2] 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고 서술한 것을 사도행전 2:1~14에서 인용하며, 요엘에서 예언한 성령 강림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의 최초의 방언이 언급된다.28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29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요엘 2:28~29 (새번역)
예수 승천 후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면서[3] 성령의 힘으로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사도행전 2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여러 지방의 언어'이다. 사도행전 2:10에 따르면 그리스어(프뤼기아, 팜필리아 사투리), 이집트어, 아람어, 히브리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말하는 장면이 분명하게 묘사되어 나오며 7~8절에는 주변에 모여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 사람들 분명 갈릴레아 출신들인데, 저들이 하는 말을 우리는 왜 우리 각자의 고향에서 쓰는 말로 들리는 거지?"라고 궁금해 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여러 속주의 표준어+지방 사투리로 말한 것이다.2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4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5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2~5 (새번역)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저놈들이 새 술에 취해서 저러는 거다'라고 반응한 걸 보면(사도행전 2:13) 모든 방언이 기존의 언어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자기네들 말이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으니,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현재 (특히 개신교 내에서) '방언'으로 언급되는 현상은 외국어가 아닌 '알 수 없는 말'이다. 이러한 '방언'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그리스도교 성립 초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방언은 현재의 형태처럼 '알 수 없는 말'로 나타나며 이를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 표현한다. 사도 바울은 공동체 내에서 방언으로 주는 예언과 축복을 받아 들이기 위해 방언 해석의 은사에 대해 언급한다.
학계에서는 외향적이고 신경성이 낮을수록 방언을 하지만, 정신병리적인 문제와는 의외로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며[4] 트랜스 상태가 항상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5]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서 '종교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으로부터 '''Gift''' - '''능력'''을 '''선물'''로 받았다는 개념이다. [6]
3. 신학적 해석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보는 것은 모든 기독교 신학에서 동일하다. 다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교단마다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정교회ㆍ장로회[7] ㆍ구세군ㆍ그리스도의 교회는 부정적이고, 오순절교회(순복음)ㆍ감리회ㆍ침례회ㆍ퀘이커는 긍정적이며[8] , '''가톨릭ㆍ성공회ㆍ루터교[9] ㆍ성결교'''[10] 는 의견이 섞였다.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도 굳이 막지는 마십시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 39절 (공동번역)
은사주의 기독교 신학에서 방언의 의미는 '''성령이 임하신 표적'''이다. 그렇기에 성령의 은사를 중요시하는 교단에서는 방언이 필수인가 하면, 상대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덜 중요시하는 교단에서는 즉 방언이 성령이 임한 증거인 것은 확실히 인정하나, 구원을 받아 성령이 임했다고 해서 무조건 방언의 은사가 생긴다고 보진 않는다.[11] 그 외에 코린토 1서 13장 2절을 근거로 방언이 천사의 언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방언과 천사의 언어를 분리해서 서술하였기 때문에 다른 것을 지칭한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해서, 확실히 이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견해에 그치고 있다.
방언이 하나님에 대한 간구,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한 수단임을 성경에서는 긍정하고 있다. 즉 공공연히 할만한 기도라고 보진 않는다. 더불어 복음주의나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개신교 교단에서는 다 하나같이 방언을 권장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개신교 내부의 신학적 분포를 잘 몰라서 생긴 '''대표적인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장로회 등의 칼뱅주의 교단에서는 예장고신[12] 같이 보수 성향을 강하게 띨수록 방언을 '''경계한다.''' 기도 중에 누가 방언을 하는 게 보이면 일부러 툭툭 쳐서 눈치를 주기도 한다.[13]'''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 2절 (공동번역)
또한 가톨릭 전통에 의한 예식이 많이 남은 성공회 및 일부 고교회파 루터교회에서도 방언을 성경에 써있으니 존중하는 정도이지, '''중요시하지는 않는다'''. 대한성공회의 분위기를 말하자면, 방언을 터부시하지도 않지만 굳이 권장하지도 않는 정도로, 교회 내에서 방언을 의미가 큰 신앙의 주제로 삼는 분위기가 아니다. 신앙에 핵심적이지도 않은 문제에 너무 심취하여 하느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과 같이 정작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 방언을 하는 신자든 안하는 신자든 서로를 존중하며 지내는 편이며, 방언을 놓고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14]
이처럼 개신교 내에서 방언에 회의적인 교단은 일부 이단 수준이 아니며 실제로는 상당히 세계구급 입장이다. 이름하여 '''은사 중지론.'''[15] 아마도 대한민국에서는 무당의 푸닥거리와 나름 유사한 측면이 있어서 방언이 강조된 듯도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다음의 책들도 참고하자. 옥성호[16] 의 저서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는 굉장히 과격하게 방언을 비판하는 책이다. 보다 온건하게 비판하는 책으로는 고신대학교 신학교수인 박영돈의 저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방언이 아니라 '''신령한 언어''' 라고 부른다. 천주교 번역 성경에서는 그렇게 번역하였다. 현재와 같은 방언에 크게 심취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주로 전통 가톨릭 등 교회의 전통적 내지는 보수적인 이들은 신령한 언어를 믿지 않거나 크게 경계한다.[1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신교(특히 오순절교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성령기도회[18] 등 같은 주로 '성령' 신심을 깊이 중시하는 기도모임 등에서 행하기도 한다. 다만 가톨릭교회에서 신령기도는 아람어와 비슷하다.
천주교의 성령쇄신운동은 과도하게 은사를 받기 위한 신비 체험 목적의 기도를 하지 않도록, 그리고 조용하게 하나의 올바른 신심으로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개개인이 하는 방언을 모두 은사며 은총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며, 방언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신앙의 지표나 모범이 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각 교구마다 성령쇄신모임에 담당 신부를 배정해 절대 일정선을 넘지 않도록 지도하도록 한다. 올바른 신심의 토대 없이, 단순히 신비로운 체험을 원하는 이유로 이러한 기도를 접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는데, 이는 '신령한 언어'가 천주교의 전통적인 영성이 아니라 20세기에 도입된 일종의 신비체험인 만큼 가톨릭 정통 교리를 벗어나 신비주의적 신앙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19] 일례로 90년대 말에 성령쇄신운동회를 통해 국내 천주교 내부에 가계치유가 신학적 비판 없이 확산되어 신자들 사이에 금전적 피해가 발생하고 심지어 사상자까지 나오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긍정적인 요소도 없지는 않겠지만, 은사를 쫓아다니고 거기에 매달리는 기복적 사고를 갖거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내적 탐욕과 교만에 빠지거나 봉사자들끼리 상처를 주고 받아 물의를 빚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성령쇄신운동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교회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교회에서는 소위 방언이라는 것은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지 않았으며, 따라서 성령의 은총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방언 기도니 성령기도회니 그런 거 없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방언은 사탄이 주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정교회가 이처럼 강경하게 반대하는 근거는 만일 그것이 사도들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면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많은 교부들과 성인들이 이에 대해 언급했을 텐데, 저런 식의 랄랄랄라 거리는 방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 교부들과 성인들이 그런 기도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순절교파에서 방언을 받아야만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세례와 견진성사로 이미 성령을 가득히 받으며 성령이 신도들과 영원히 함께 한다고 보기에 강하게 부정한다.[20]
정교회에서도 방언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은총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 있기에 공적 계시는 끝이 났고, 성경과 성전을 통해 충분히 하느님의 계시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사실상 사도 시대 때 방언은 제 역할을 잃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본다.(참고)
정교회든 가톨릭교회든 방언의 존재 자체는 인정을 하긴 하지만, 오순절주의의 영향을 받아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로 에베베거리는 소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들을 외국인과 대화할 때를 보면 종종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 하여 대화를 하거나, 혹은 서로가 자신의 모국어로 이야기 하고 서로가 서로의 모국어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통하는 기적이 있고, 교부들 중에도 이러한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주의에 의해 참의미를 잃어버린 방언의 진짜 모습이고 사도들이 처음에 성령을 받아서 행했던 기적의 원모습인 것이다.
4. 현재
19세기까지는 교회에서 방언을 잘 하지 않다가 20세기에 아주사 부흥운동[21] 을 전후하여 폭발적으로 재개되더니, 현재 들어서는 많은 기독교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은사가 되었다. 특히 은사주의 운동, 그 중에서도 신사도 운동이 퍼지면서 더더욱 널리 확장되었다.
신사도 운동 류의 극단주의자들은 마지막 때에 성령이 만인에게 부어진다는 요엘의 예언이 현대에 성취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이다. 첫째, 기독교 신학에서 말세는 예수 승천 이후부터 현재까지이지, 특정 누군가가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는 시기가 아니다. 만약 말세지말 이렇게 나온다면 말 장난에 불과하다. 둘째, 요엘의 예언은 이미 사도행전 2장에서 성취'''되었다'''고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신사도 운동에 의해 새롭게 성취된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가감하는 것이다.
요엘의 히브리어 원문은 나중에, 그때에가 맞지만,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이게 요엘의 예언의 성취다!'라고 말할 때에는 마지막 날, 말세에 로 번역하고 있다. 즉 당시 유대인들이 이해한 요엘 2장 28절의 그때에는 마지막 날이다. 그도 그럴 것이 2장 이후에 회복되는 이스라엘과 모여드는 성도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 신학계에서는 현대에 요엘의 예언이 재성취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다만 오순절 방언이 현재에도 유효한가, 즉 오순절에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회에 임했던 그 은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내려올 수 있는가라는 논의는 은사중지론, 계속론의 테두리에서 상술했듯 견해 대립이 있다.
4.1. 양태
대부분은 패턴화되었는데, 으으후루꾸꾸루후으으후루꾸꾸루후으으후루꾸꾸…같은 느낌의 소리나 옛날 테이프 5배속급의 속도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상당히 빠르게 말이 나오기 때문에 몬데그린 현상이 심하다. 외국어(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같이 들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외국어는 아닌 경우도 있고, 묘하게 불경 암송을 듣는 듯한 기분도 든다. 특히 그 조음 원리가 너무 뻔히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사회자가 아예 대놓고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일부 종교 연구가들은 동일한 단어를 빠르게 반복하는 것, 특히 그 발음 속에 ㄹ 발음이나 ㅁ 발음 등이 많이 들어있는 경우는 종교를 막론하고 다양한 주술적 진언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래 있다가 현재 삭제된 영상의 조용기목사처럼 빠르게 말하지도, 패턴화하지 않은 방언도 충분히 존재한다.
사이비 종교인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에서는 방언은 그저 다른나라들의 말일 뿐 이상한 언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방언을 하는 교회들을 비판한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에서도 방언은 외국어라 말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얼떨결에 기도회나 부흥회에 끌려간 비개신교인이 제대로 겁먹거나 쫄게 만드는 대표적인 요인 1순위. 그래도 기왕 교회에 갔으니 경건하게 기도나 해야 겠다 마음 먹는 순간 사방에서 저런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온다면 언뜻 생각하기엔 황당함이나 기분이 더럽다거나 할 것도 같지만, 막상 기도 시간에 저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공포감이 먼저다. 특히 주변에 알던 사람이 이러거나, 앞에서 기타나 드럼의 쿵쿵거리는 소리까지 합쳐지면 정말 무섭다. 특히 순복음 교단처럼 방언을 강조해서 주일 예배 때도 방언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교회라면...
방언을 내뱉는 상태에 들어가면 시간감각이 사라져, 10분 정도 기도한 것 같지만 알고보니 1시간이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극도의 흥분이나 격양 상태가 되면 주위를 인지하는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기독교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토속종교 등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무당(샤먼)의 트랜스 상태와 거의 동일하다.''' 다른 여러 종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고행이나 명상, 심지어는 약물을 통해 종교적 무아지경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부류로 볼 수 있는 것.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환시나 환청 등의 환각도 대동소이하다. 불교 승려, 무슬림, 힌두교도에게서도 방언과 비슷한 현상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방언이 기독교와 관련되어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22] 실제로 관련 학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트랜스 상태를 기독교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종교체험''' 또는 '''종교적 신비'''의 일종으로 분류한다. 이는 또한 자유주의 성향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절대자가 어떻게 오직 한 종교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냈겠느냐'는 주장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23]
녹음해서 나중에 들어보려고 해도 녹음한 걸 틀어보면 소리가 안 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래 영상으로도 입증되는 쌩구라다.''' 애초에 소리는 사방으로 전파되는 파이므로 귀가 들었다면 녹음기도 캐치하는 게 당연하다. 방언이 입술로[24] 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텔레파시 파동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이상에야.
야매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면 교회에서 정해주는 기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사용된다. 기도제목은 몇 개 안 떨어지는데 기도시간은 한 시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령영성교회 서모세 목사 방언집회
심령부흥회 방언기도 영상. 장로님 에쿠스 타신다의 피처링에 쓰인 원본 영상이다.
천주교 성령기도회 영상
바로 위 영상에도 있지만 간혹 성령이 임하셔서 하는 말이라며 어떤 예언이나 정보 등을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그러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25] 냉정히 말해서 무당이 신들려서 내뱉는 소리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특히 다른 영혼이 말을 해 준다는 경우에는 이단이라고 취급해도 좋다.
방언으로 예언하는 은사일 수 있지 않느냐라는 주장도 가능하지만, 사도 바울이 지적했듯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우는 은사이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과는 다르다고 구분한다. 특별히 예언하기를 사모하라는 바울의 지적처럼, 예언을 위해서 방언을 사용한다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보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특히 기적 검증에 깐깐한 천주교의 경우, 천주교에서 흠숭(하느님)하거나 공경하는 존재(천사들과 성인들)의 이름을 대고 나오는 계시들을 사적 계시로 간주하고, 설사 교황청에서 인정한 것이라도, 못 믿겠으면 안 믿어도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하물며 아예 인정받지 못한 것이라면, 한술 더 떠서 하느님이나 성인들, 천사들이 아닌 다른 영적 존재와 소통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4.2. 폐해
은사의 특성상 '''심지어 초기 기독교에도 폐해가 있었다.''' 기독교 내에서 방언으로 인한 폐해는 방언 그 자체보다는 방언으로 인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실제로 방언에 대해서 '''성경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언급'''이 "방언하는 거 잘된 일이긴 한데 막 자랑하고 다닐 일은 아니다~"였음을 보면 명백하다.“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테오 복음서 6장 5~6절
우선 가짜 방언을 말하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많은 경우 신앙심과 관련이 되었다.[26] 물론 방언과 신앙심은 관계가 없지만, 다들 방언하는 분위기라서 방언을 못하면 신앙심이 부족하다고 보일까 봐 방언을 하지 못하는데도 방언을 하는 양 따라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난 방언을 받을 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하고 자랑하기 위하여 하는 사람도 있다.[27]
이러한 문제는 위에서도 밝혔다시피 초기 기독교에도 있었던 심각한 문제였으며, 특히 코린토스 지방에 있던 교회가 이러한 폐단이 심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코린토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로는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몇가지 방언 사용의 원리와 원칙을 정해주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키워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2~5(공동번역)
이러한 바울로의 편지에서 드러난 바울로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그러면, 형제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는 찬송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모든 것은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해석할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교회 안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느님하고만 말하십시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26~28(공동번역)'''
1. 방언 은사를 가진 자들은 방언 해석의 은사를 겸하여 가짐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킴으로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
2. 공중 예배시 초신자들을 포함한 예배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함으로 방언의 은사를 소유하지 못한 신자들을 배려해야 한다.
3.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유치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또한 바울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있는 곳에서는 되도록이면 방언을 사용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즉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하는 것이 더 이롭다고 본 것이다. 이 또한 어디까지나 ''''방언 은사를 가진 자들은 방언 해석의 은사를 겸하여 가짐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킴으로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의 원칙에서 방언 사용을 절제할 것을 권면한 것이라 할 수 있다.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이상한 언어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계시나 지식이나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나 가르침을 전해 드리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 없는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나팔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 준비를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세상에는 갖가지 말이 있지만 뜻 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나는 서로 외국인이 됩니다. '''성령의 선물은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이니 되도록 풍성하게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6~12(공동번역)
하지만 방언이 성령이 임재하셨다는 증표인 만큼 바울로는 방언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다.[28] 오히려 자신이 방언 말함을 자랑하기까지 했다.
다만 현대 개신교에서는 바울로가 세운 원리와 원칙을 잘 지키지 않고 있다. 특히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감리교단이나 순복음교단이 이런 경향이 심한 편이다. 애초에 방언 자체가 성경의 기록과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당연히 위에서 언급한 폐해들이 발생했으며 이미 2000년 전에 했던 삽질을 또 하고 있다.''' 방언이 성령이 임재하신 표징으로 해석될지라도 이에 지나치게 집착해 신앙생활을 왜곡하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요는 비단 방언 뿐만 아니라 소위 '은사'로 분류되는 모든 행위들이 그렇다.
5. 최고의 은사
은사를 기록한 고전12장에서는 우리가 흔히 은사로 부르는 현상들을 서술하고,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밝히며 이윽고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다며 고전13장으로 넘어간다. 그렇다. 크리스천이라면 히브리서 11장인 믿음 장과 더불어 애송하는 사랑 장이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자주 오용, 오인용되는 구절이 12장 마지막 절이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으니 은사중지론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모하라고 한 더 큰 은사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밝히는 그 장이다.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2 (개역개정)
모든 은사의 중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방언을 하던, 예언을 하던 사랑이 없이는 무익하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이 있어야만 방언도 예언도 완전해지고, 교회 공동체는 각각의 모양으로 각 사람이 직분과 은사를 행하지만 이를 묶어 든든히 세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선언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다. 방언이 무엇인지, 방언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논쟁 이전에 바울은 분쟁이 없고 서로 북돋아주는, 사랑을 하는 그리스도 교회가 되길 간구하며 고린도 서신을 부쳤다. 즉 은사 중의 은사인 사랑을 사모하고, 너희가 그렇게 고민하고 논쟁이 있는 은사도 사랑을 따라, 사랑 안에서 하라는 현대에도 매우 간절한 가르침이다.
6. 신사도 운동과의 관련성
하지만 사람들은 특이한 거 좋아한다는 게 문제로 신사도 운동과 같은 현상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뜨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이 현상에 정말 집중을 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쓰러짐 현상이라든가 울부짖음이라든가, 치아가 금으로 변한다든가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 십중팔구는 이 신사도 운동과 관련된 것이다. 문제는 각 교단에서는 비성경적인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알파코스와 G12, 경배와 찬양의 형태로 이런 것들이 교회 내부에 엄청나게 침투해 들어오는데도 막지를 않는다. 방언도 이 과정에서 딸려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