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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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의 목사이자 사랑의교회의 창립자.
진솔한 마음을 담은 설교와 더불어 목회에 대한 열정 덕에 설교 전달력 만큼은 거의 국내 최고였던 목사이다.
반면 옥한흠 목사는 설교를 1주일에 몇 번이나 하는 목사들이 신기하다고 말한 바 있는데, 본인은 주일 예배의 설교 하나만 1주일 내내 준비해도 벅차다고 하며, 자신의 능력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3]
살아 생전에 본인을 '한없이 흠이 많은 옥'이라고 소개하고는 했다. 한없이 흠이 많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미흡한 자신도 귀중한 옥으로 보신다는 기독교의 사랑을 자신의 이름으로 표현한 것. 주변 사람들은 존경의 뜻을 담아 예수에 미친 사람, 광인(狂人)이라고 표현한다.
당초 교계에서 평신도 제자훈련을 도입하여 국내 개신교계에 확산한 것으로 유명하다.
온누리교회를 창립한 하용조 목사, 지구촌교회를 설립한 이동원 원로목사, 남서울교회와 남서울은혜교회를 창립한 홍정길 원로목사 등 목사 3명과 교단을 넘어 친분관계가 두터웠는데[4] 이들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교계에 모범을 보인 대표적인 목회자들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전체 생애
옥 목사의 생전 설교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4대 전통의 장로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로회 미션스쿨에 재학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자퇴하였다. 후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야간, 총회신학교(지금의 총신대학교) 신대원 등에서 공부하고 은평교회, 성도교회, 내수동교회에서 사역했다.
그러던 중 제자훈련에 대해 확실한 신학적 증거와 자신이 사활을 걸 이유를 찾겠다며 돌연 미국 유학을 떠났다. 칼빈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스 큉의 「교회론」이라는 책을 통해 답을 얻고 국내로 돌아와 1978년 7월 23일, 현재 사랑의교회의 전신인 강남은평교회를 개척하고 1981년 사랑의교회로 개칭한다.
사랑의교회를 담임하면서 폭발적인 전도와 제자훈련, 후에 임기보다 5년 이른 은퇴 등으로 교계에서는 매우 인정받는 목사로서 활동하였다. 은퇴 이후 본인이 사역하던 교회에만 너무 집중하였다는 생각에 한국의 개신교 전반에 걸친 개혁과 혁신을 외치며 사역하다가, 2010년 9월 2일, 한국 나이로 73세, 만 71세의 일기로 폐암으로 소천하였다.
2.2. 사랑의교회
사랑의교회는 그가 개척한 교회이다. 사랑의교회[5] 가 서초구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매우 많은 성도 수에도 불구하고 절약과 검소를 외치며 본인부터 그렇게 살았고, 성도들에게도 이를 따르기를 요청했다. 적어도 옥한흠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동안에 사랑의교회는, 강남서초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쪽 지역에 사는 상위계층을 위한 교회라는 대외적 이미지를 심어준 일은 별로 없었다.[6]
옥한흠 목사가 은퇴하던 시기 사랑의교회 교인 수는 4~5만 명에 달했으나, 위의 해당 항목의 구 교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교인 숫자에 비하면 건물이 작은 편이었던 데다가 본당이 지하에 있어서 주변에 위압감을 주는 형태가 아니었기에 강남의 대형 부자교회라는 타이틀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느낌을 준다.
이후 임기를 5년 남기고 2003년 4월 18일 조기 은퇴를 하는 등 교계에서나 사회적으로나 모범적으로 살도록 노력했고, 이러한 그의 노력 덕분에 개신교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를 묻는 설문에서 한경직 목사, 조용기 목사 등을 제치고 1위를 하였다. 큰 교회임에도 절약과 검소를 중요시한 점, 윤리적 및 도덕적 문제가 없었던 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한 예수의 제자로 길러내려 하였던 점 등에서 큰 평가를 받았다.
2.3.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
옥한흠 목사의 기독교 외적 활동 중 주요한 것으로는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을 통한 교육사업을 들 수 있다.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은 한국 개신교에서 중국의 조선족과 북한주민들에게 교육, 문화 지원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으로. 연변과학기술대학과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운영한다. 옥한흠 목사는 김진경 총장, 곽선희 목사 등과 함께 이 재단의 창립주역이었고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 이사장' 및 '연변과학기술대학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사랑의 교회를 통한 사회 기여(후원) 등의 형식으로 중국과 북한 지역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참고로 '연변과학기술대학'과 '평양과학기술대학' 양 학교는 중국과 북한에서 운영되는 학교로, 미션스쿨이 아니다.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은 자체적으로 종교 관련 사업을 하지는 않는다. 두 학교는 설립 자금과 운영비 충당, 교직원 수급, 학술 교류 등에서 사실상 한국 기독교계의 후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기독교계에서 교직원 수급을 지원하므로 양 학교의 교수들도 대부분 한국과 미국의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기독교인 학자들 중에서 가게 된다.
2.4. 은퇴 이후의 한국 개신교 책망과 개혁
은퇴 이후에는 장로교단 최대 교회의 설립자 및 원로 목사로서 부패한 한국의 개신교를 향해 많은 질타와 개혁의 주장을 해왔다.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등 다양한 협회에서 활동을 하였다. 특히 개신교의 세속화와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목회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며 개혁을 위해 힘써왔다.[7]
2007년 한국교회 평양대부흥100주년기념대회에서 발언한 내용에 의하면 실천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며 한국의 개신교의 자성을 촉구했다.
옥한흠 목사는 한국 사회가 개신교를 너무 불신하고 있고 목사의 신뢰도는 하위권이라면서, 개신교에 다니다가 실망하여 등 돌리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무종교인 사람들에게 개신교가 제일 인기가 없으며, 일반적으로 이중인격자로 인식되고 비아냥거림의 대상이되는 현실을 예[8] 로 들면서 입만 살았고 행위가 죽은 믿음만 강조하는 방식을 크게 책망하였다.(아래 링크 13:18부터)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하였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는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던지, 회개라던지, 순종이라던지, 거룩이라던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한다면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 원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켜가는 설교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들'''이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2006년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개강수련회의 주강사로 참석하여, 자신의 목회 간증을 통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전망해야 할 목회의 본질과 제자훈련의 중요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아래 링크로.
https://youtu.be/leqEZmHqeaA
3. 비판
3.1. 위임 이후 권력 구조 정리에 관하여
사랑의교회 당회 권력 구조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사망한 것이 훗날 교회에 있어 문제가 되었다. 후임 목회자로 오정현 목사를 선임한 시점에서도 기존 원로 장로들(옥한흠 목사 측)의 권력은 여전히 남아 있던 상태였고, 이는 오 목사 개인의 문제 이상으로 교회 내부 갈등을 불필요하게 확전시키는 양상을 만들었다.
반론하자면 2003년도에 위임하고 2010년도에 소천했으므로 횟수로는 8년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권력 구조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본인이 장로들에게 이렇다 저렇다 하는 성격이 아니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옥한흠 목사가 아무리 담임목사이자 개척목사라고 하더라도 각자 교회에 헌신한 장로들에게 권력을 내놓으라, 교회일에서 뒤로 빠져라 하는 것이 웃긴 일이다. 또한 그렇게 권력에 신경쓰는 사람이면 애초에 5년 일찍 은퇴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게다가 옥한흠 목사 입장에서는 오정현 목사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도 있었을 것이고, 일단 물러난 이상 현 담임목사에게 가장 부담이 되는 원로목사 행세를 할 이유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옥한흠 목사는 위임 후에 주일설교도 거의 하지 않고 예배에만 참여했었다.
오정현 목사가 논문을 표절해서 그게 들켜서 장로들이 반발하는 것과 새 예배당을 수천억을 써서 건축하고, 그 과정에서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해서 특혜를 받은 것이 드러나서 장로들이 반발하는 것이 옥한흠 목사가 권력을 정리하지 못 한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이미 교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교회 덩치 때문이라도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논문 표절은 정말 봐줘서 개인 문제라 치더라도[9] 새 예배당 건축 과정에 드러난 문제점들은 이미 개인 문제 영역 안에 들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로들이 잘못된 것에 반발한 것이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마저도 잘못이라 하더라도 위임 후 옥한흠 목사 소천까지 횟수로 8년, 만 7년이란 시간이 있었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사랑의교회가 갈등 상태로 들어설 때까지로 계산하면 훨씬 길다. 이때까지 오정현 목사가 자신의 생각을 장로들에게 설득하지 못 한 것을 10년도 전에 위임한 옥한흠 목사의 잘못으로만 전가시키는 것은 무리다. 리더라는 자리는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서 공동의 목표를 이뤄가는 자리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사람들로 모두 채워서 자신의 원동력을 얻고 가는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현대사회에서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나 총리조차도 그렇게 하지는 못 한다.
위의 '당회 권력 구조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은 옥한흠 목사 개인의 실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점이 현재 사랑의 교회의 내부 문제의 원인이라고 볼 수도 있긴 하지만, 원래 장로회 교리상 교회의 주요 의사결정은 (담임) 목사가 아니라 당회에서 이뤄지게 되며, 교회가 교회법에 따라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경우 당회에서 숫적으로 다수가 되는 장로들의 권한이 매우 강하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교회를 개척한 창립 목사가 물러나고 (월급쟁이 CEO의 느낌으로 부임하게 되는) 후임 목사의 시기가 되면 더욱 장로들의 권력은 강해보일 것이다. 즉 옥한흠 목사가 물러난 시기에 오정현 목사를 지지하지 않는 장로들도 다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나, 오정현 목사가 이런 저런 논란에 휘말리면서 문제점이 표출된 것.
목사가 은퇴하여 원로목사로 물러난 이후에도 원래 사역하던 교회에서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으며 그게 꼭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지만 같은 대한민국의 대형교회인 지구촌교회 역시 후임 목사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있었고 원로목사가 종종 주일에 설교를 하는 등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나 운영은 되고 있다.
생전에 오정현 목사에게 "네 정체가 뭐냐."라고 묻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 일을 보면, 후임 오정현 목사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감을 느꼈던 듯하다.
3.2. 가정 사역
목회자로서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개신교 목사들의 적지 않은 수가 그러하듯 가정을 제대로 돌보는 데에는 실패했다.[10] 본인 스스로도 목회에 집중하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큐멘터리 《제자 옥한흠》에 따르면,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 조차 찍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는 대신 기독교 관련 작가가 된 장남 옥성호는 2019년 들어 저서를 통해 신약이 바울에 의해 변질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기독교의 핵심교리들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물론 옥씨는 신학이나 비평학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 목회자들에게 기본적인 부분부터 철저히 비판받는 중이다. 아무튼 현재는 무신론자에 안티기독교인이 된 상태. 본인 입장에서는 친자식, 영적 자식(오정현)을 포함해서 2세에 관한 한 대실패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지경. 또한 옥성호는 한국 대형교회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쿼바디스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가장 먼저 자신의 아버지가 원로로 있었던 사랑의교회를 가장 먼저 비판하여 말이 많았다[11]
4. 기타
4.1. 동성애
1991년 10월 20일, 로마서 강해를 할 때 동성애를 죄악으로 본다는 발언을 하였다. 동성애를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 금지된 쾌락을 맛보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 성적 타락이라고 규정했다. 성 문란이 타락한 사회의 종착점이라고 한다면 동성애는 그 중에서 말기 현상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성애자들을 성직자로 받아주는 교회들을 비판하고, 에이즈는 동성애로부터 시작된 병이고 동성애자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심판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관련 설교) 사실 동성애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비단 옥한흠 목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계, 아니 아브라함계 종교 전반[12] 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물론 보수적 성향의 교단일수록 이런 태도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는 하지만. 이런 기독교계의 입장은 성경 자체가 창세기 19장(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소멸한 소돔과 고모라), 레위기 18장 22절, 레위기 20장 13절, 로마서 1장 27절, 고린도전서 6장 9절 등에서 일관되게 동성애를 규탄-금지하고 있으며 구약과 신약 사이의 태도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에도 교회 내에 동성애를 수용하느냐 마느냐 문제는 교단의 보수성향이냐 진보성향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기에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보통은 교회를 다닐 수 있게는 하되 동성애를 최대한 극복하도록 하고[13] 동성애자인 상태에서는 목회자가 되진 않도록 하는게 일반적이며 보수적일수록 동성애자 상태에선 교회도 못다니게 하는 좋지 못한 경우와 진보적일수록 동성애자가 목회자가 되는것을 허용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14] 그렇기에 옥목사는 보수의 입장에서 비판을 한것이다.
4.2. 저서
<옥한흠 어록집 : 문득, 당신이 그리워질 때> (필로 2015)
<목사가 목사에게> (은보 2013)
<광인 : 옥한흠을 말하다> (국제제자훈련원(DMI) 2010)
<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국제제자훈련원(DMI) 2009)
<제자훈련 열정 40년> (국제제자훈련원(DMI) 2009)
<안아주심> (국제제자훈련원(DMI) 2007)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국제제자훈련원 2004)
<길 : 평신도를 위한 제자훈련 입문> (국제제자훈련원(DMI) 2003)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개정판)> (국제제자훈련원(DMI) 2002)
<하늘행복으로 살아가는 작은 예수> (국제제자훈련원 2001)
<평신도를 깨운다>[15] (국제제자훈련원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