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트 슈스터
1. 개요
독일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8년에 다롄 이팡 감독을 맡았다.
특유의 금발머리로 인해 '금발의 천사'(der blonde Engel)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별명과는 정반대로 성깔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FC 바르셀로나에서 제일 오래 뛰었으니 바르사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차비 에르난데스의 중간 정도 유형의 선수라고 대강 정리할 수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서독 출신으로 라리가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미드필더이다.
1978년에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에 의해 1. FC 쾰른에서 데뷔하여 쾰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명문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바르셀로나에서 8시즌을 뛰며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주며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1988년 팀에 새로 부임한 요한 크루이프 감독은 바르셀로나를 자신이 추구하는 네덜란드식 축구하는 팀으로 개조하겠다고 선언했고, 바르셀로나 주전 선수들 중 에이스 게리 리네커 단 단 한명만 남기고 전부 방출시켰고, 라우드럽, 쿠만, 바스크 4인방 등 새로운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팀을 완전히 새롭게 개편했다. 참고로 크루이프는 기존 바르셀로나 주전 중 유일하게 리네커만 살려두었으나 윙어로 강제 포변시켰고 이에 열받은 리네커도 1시즌 후 이적한다.
슈스터는 바르셀로나 시절 큰 부상을 입었는데, 클럽에서 제대로 조치를 해주지 않아서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토사구팽 당하게 되자 라이벌 팀인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에서 레알로 이적한 루이스 미야, 미카엘 라우드럽, 루이스 피구와 공통점은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도 있었지만 바르셀로나의 푸대접에 열받아서 굳이 레알로 이적했다는 점이다.
슈스터의 이 이적은 크루이프가 선수단을 완전히 물갈히 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이러한 사정과 관계없이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은 분개했고 바르셀로나에서 슈스터는 금지어 수준이 된다.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도 라이벌팀에서 왔다는 이유로 탐탁치 않아했으나. 클럽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레알도 훗날 슈스터를 감독으로 임명하면서 대접해 주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생활을 접고 더비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팀의 주축으로 경기를 조율해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여 독일로 돌아와 3시즌을 뛰었다.
이후 멕시코리그로 이적하여 거기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선수 평가에 있어서 위상에 비해 크게 언급이 되지 않거나 평가가 짠 유형이 있는데 바로 이렇게 저니맨 생활을 이어간 선수들이 그렇다.
2.2. 국가대표
슈스터는 겨우 20세의 나이로 유로 1980에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같이 서독이 우승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 활약으로 루메니게의 뒤를 이어 발롱도르 2등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둘째 아들 출산 문제로 국가대표 경기에 불참하는 걸로 시작해서 서독의 감독인 유프 데어발, 국가대표에 다시 돌아온 서독의 주축선수이자 고참인 파울 브라이트너, 독일축구협회 등과 갈등을 일으키다 84년 국가대표를 은퇴한다.
자세히 말하면 1980년대 초반 서독의 주축선수는 누가 뭐래도 브라이트너와 루메니게였다. 둘을 묶어 브라이트니게라고 불렀을 정도. 슈스터는 브라이트너와 팀의 코어가 되기 위한 경쟁을 해야 했는데 데어발 감독의 선호는 브라이트너쪽으로 기운 상황이었다. 적은 기회에서 슈스터는 나름 대표팀에서 자신의 기량을 어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슈스터의 활약이 브라이트너의 그것보다 낫다고 여길만한 경기력도 종종 선보였다. 하지만 결국 슈스터는 브라이트너의 벽을 넘지 못했고 그러다 1981년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서 명 페널티 키커로 이름 높았던 브라이트너가 페널티 킥을 실축, 승리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에 슈스터는 '저 꼰대가 기량이 더 나은 나는 팽개쳐두고 브라이트너같은 노땅이나 쓰니 이런 꼴이 나지'라는 식으로 데어발 감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데어발 역시 슈스터 못지 않게 한 성격하는 캐릭터였다. 유소년 선수가 실수로 자신을 공으로 맞췄다고 그 아이를 향해 전력으로 공을 차버릴 정도였으니... 데어발은 이런 슈스터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대로 대표팀에 부르지 않은 것. 브라이트너는 원래 그 데어발보다 더 심한 성격을 가진 선수였으니 문서를 더 작성하기엔 손가락만 아픈 상황.
슈스터의 뛰어난 실력에도 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서독 국가대표팀으로 그가 참가한 메이저 대회는 유로 1980 꼴랑 하나다. 그리 좋지 못한 성격이 큰 원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 전성기에서 뭔가 아쉽게 1982년 월드컵과 1986년 월드컵에서 2번 연속으로 월드컵 콩라인에 그친 당시 서독 대표팀에 적어도 1986년에라도[2] 슈스터가 서독 대표팀에 있었으면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는 클래식 축구 매니아들의 상상의 주인공이 되곤 한다.
사실 위에는 슈스터가 유로 1980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것처럼 나오지만 당시 슈스터는 서독 대표팀의 풀주전이 아니었다. 물론 슈스터는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결승에도 스타팅으로 나왔지만, 예선에서는 벤치에 앉아 있었을 때가 더 많았다.
3. 감독 경력
3.1. 유럽
감독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는 헤타페 CF의 지휘봉을 잡았던 시기이다. 2006-2007 라리가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7위를 차지했고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를 누르고 결승전에 진출하며,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는 등 인상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친정팀 레알 마드리드 CF의 지휘봉을 잡게되고 2007-2008 라리가 우승을 기록한다. 그러나 감독 2년차인 2008-2009시즌에는 기대 이하의 활약을 펼치며 시즌 도중에 경질된다. 이후 베식타슈 JK와 말라가 CF의 지휘봉을 잡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며 해임되었다.
3.2. 중국
한동안 놀다가 2018년 중국 슈퍼 리그의 다롄 이팡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다롄은 개막전을 8-0으로 참패하는 등, 여러가지로 암담했으나, 시간이 지날 수록 빅리그 출신 용병들이 실력을 발휘함에 따라 강등권(16,15위)을 간신히 벗어났다.
선수시절과 레알 마드리드 감독 시절 그리고 현재 모습을 보면 역변중의 역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같은 시대에 라리가에서 뛴 독일인 울리 슈틸리케가 5살이나 위인데도 중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3]
2018년 리그를 11위로 마쳤으나, 황사머니 구단인 다롄이 돈 쓴 만큼의 성적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결국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3.2.1. 슈틸리케의 구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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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8일 경기 전 슈틸리케와 이야기를 나누는 슈스터. 슈틸과 슈스터는 서독 국대 동문이고 같은 시기에 라리가에서 뛰었다. 슈틸리케는 3연패를 하고 있었고, 모두 어이없이 점유율을 강조하다 패했기 때문에, 이 경기마저 졌으면 경질각이었으나, 3-2로 승리하여 생명연장을 했다.
2018년 슈퍼리그에서는 슈틸리케의 구원자(?) 노릇을 하고 있다. 슈틸리케의 톈진 터다는 월드컵 브레이크 이후 졸렬한 전술로 3연패를 하면서 경질압력에 시달렸으나 7월 28일 다롄 이팡전에서 3-2로 승리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고, 이후에도 11연속 무승으로 팀을 강등권까지 추락시켰으나, 또다시 11월 4일 29라운드에서 슈스터가 지휘하는 다롄 이팡을 3-1로 격파하여 간신히 강등권 확정을 모면했다.
30라운드를 앞두고 16위 구이저우가 강등 확정된 가운데, 톈진 터다, 다롄 이팡, 창춘 야타이, 충칭 리판이 모두 32점으로 12위를 기록하여 강등권 한자리를 두고 11위의 톈진 취안젠(승점 33점)까지 5팀이 경쟁했다. 리그 마지막 경기인 30라운드에서 슈틸은 강팀 광저우 헝다에게 1-5로 참패해서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슈스터의 다롄 이팡이 창춘 야타이를 잡아주고, 구이저우가 충칭 리판을 잡아서 세팀(터다, 충칭, 창춘)이 승점 32점으로 강등권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 승자승 원칙에 따라서 창춘이 강등되고 슈틸은 살아남았다. 만약 다롄이 창춘과 비겼으면 충징은 터다에 승자승으로 앞섰기 때문에 터다가 강등이 될 뻔 했으니, 결국 잔류 하고 1년 재계약까지 성공한 슈틸은 강등전도사라는 오명을 피하게 해준 슈스터에게 절이라도 해야할 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슈스터는 재계약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