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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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가나안 지역에 있었던 히브리인의 국가이다.
2. 역사
고고학적으로는 철기 시대에 해당한다. 기원전 1000년경 이후로 200년간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가나안 일대에 인구가 늘어났고 무역이 활발해졌다.
이집트 제22왕조 파라오인 셰숑크 1세의 전투 기록에는 기원전 900년대에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가 있었다고 한다. 정작 성경에서는 이시기까지는 사마리아가 수도가 아니었지만.
아시리아 국왕 샬마네세르 3세는 카르카르 전투 비문에 적장의 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인 아합'을 언급하였고, 다른 비문에는 '오므리의 후손 예후'가 자신에게 조공을 바치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또한, 모압 왕국의 메사 석비에는 오므리의 자손들을 자신이 무찔렀다는 내용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크게 통일 시대와 분열 이후로 구분된다. 아래 내용은 대부분 성경, 그중에서 열왕기와 역대기를 참고하였다. 성경은 야훼 유일신 신앙(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입장에서 서술되었기에 바알 신앙을 비롯한 기존 가나안 전통 신앙을 '우상숭배'라 하며 이를 따르는 인물들과 세력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일부러 야훼 신앙에 유리하게끔 편향되게 해석된 내용이 존재할 수도 있어서 객관적으로 자료 삼아 읽을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2.1. 통일 시대
성경에서는 사울과 다윗, 솔로몬의 치세 아래 유다와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을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고고학자들은 통일 왕국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다윗과 그의 왕조는 실존했더라도 오로지 유대 지역만을 통치하던 족장이었고, 북쪽의 이스라엘과는 상관없다고 보고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처음부터 별개였다는 것이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의 이스라엘 정복 이후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후대 유다 왕국의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마치 옛 이스라엘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며 '통일 왕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다. (참고)
고고학과는 별개로 성경에 따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울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국왕 자리에 오르면서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10세기 즈음 그 유명한 다윗과 솔로몬의 치하에서 '''이스라엘 왕국의 최전성기'''가 이루어졌다고 기록된다. 다윗은 일생에 걸쳐 수십 번의 전쟁을 통해 12지파로 갈라진 이스라엘 민족을 통일하고 뛰어난 용병술을 자랑하는 군대장관 요압을 앞세워 주변국을 병탄하기에 이른다.
이스라엘 주변으로는 암몬, 모압, 에돔, 티레, 시돈과 같은 페니키아 계열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을 비롯한 이들 모두는 페니키아어(히브리어)를 입말로 썼고, 지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다윗과 솔로몬은 이들을 쉽게 합병 시켜 단시간 내에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북쪽으로는 시리아 남부까지 남쪽으로는 요르단 강 동편까지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또한 페니키아의 뛰어난 조선기술과 운수기술은 이스라엘을 지중해 서쪽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다르싯(또는 다시스, 타르테소스로 추정)과 심지어 홍해로 나아가는 에시욘게벨 항을 통해 인도 반도와도 교역을 할 수 있게끔 도왔는데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중동 국가 중 어느 국가보다도 부유한 상업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은 솔로몬 치세 말기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는데, 다윗의 무자비한 정복 전쟁의 결과로 민족주의적 저항의식이 싹튼 북동쪽의 아람과 남쪽의 에돔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스라엘의 통치에서 벗어났으며, 동쪽의 모압과 암몬에 가해지는 영향력도 예전만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의 무역을 돕던 북쪽의 페니키아계 왕국들마저 독립하게 되어 이스라엘과의 무역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솔로몬 사후, 12지파 중 10지파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여로보암은 이들 10지파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성공, 북이스라엘의 국왕이 되었다. 유다 지파와 소수가 된 벤야민 지파만이 르호보암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남부에 유다 왕국이 건국됨으로써 히브리 민족의 국가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2.2. 분열 이후
여로보암의 국왕 즉위와 유다 왕국의 건국으로 히브리인의 영토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유다 왕국이 이스라엘 왕국과 대등하게 분열되었다는 관점에서는 이후의 이스라엘 왕국을 (남)유다 왕국에 대비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분열 이후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이름을 따 '사마리아 왕국'이라 일컫기도 한다.
분열 이후로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형편없는 약소국으로 살았다. 물론 이스라엘 왕국은 유다 왕국하고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해서, 이스라엘 왕국이 아람-다마스쿠스 왕국과 연합해서 유다 왕국을 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왕국은 10개 지파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과거 판관들처럼 지파별로 돌아가면서 왕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왕가의 힘은 귀족들의 견제 때문에 약했으며, 제사장 지파였던 레위 지파가 오히려 왕보다도 막강했다. 그래서 왕이 10지파를 대표할 자격이 없거나 의심되면 쿠데타도 손쉽게 벌어졌고, 실제로 8번이나 왕가가 바뀌었다.[1][2] 반면 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만의 왕국이나 다름없어서[3] 다윗의 언약을 명분으로 왕권 강화와 세습을 이어갔다.
이 시기쯤에 히브리인의 종교 역시도 격변하는데, 주변의 다신교 주민들과 교류하고 병존하며 다소 느슨하게 유일신 개념을 믿던[4] 히브리인들은 이 시기를 겪으며 우리가 아는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는 유다 왕국의 이야기이고 이스라엘 왕국에게는 야훼 신앙에 근거한 정통성이 없었기에 여로보암 1세는 금송아지 숭배를 시작했고 이후로도 금송아지 숭배 등 다른 신앙을 가졌으며, 심지어 오므리 왕조의 경우 이민족 신인 바알을 숭배하기도 했으며 유다 왕국에서도 잠깐이지만 이민족 신을 믿기도 했다.
국력은 북이스라엘 왕국이 남유다 왕국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였다.[5] 특히 아합은 페니키아 공주 이제벨과 혼인하고, 딸 아달리야를 유다 왕비로 시집보내는 등 페니키아, 아람, 유다를 연합한 맹주가 되어 신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북이스라엘이 먼저 신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하고, 왕족과 귀족들은 살해당하거나 아시리아 본국으로 끌려갔다. 이에 반해 유다 왕국은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쳐서 아시리아로부터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6] 훗날 북이스라엘 왕국의 유민들은 사마리아인으로 불리게 된다.
[1] 심지어 초기 시절인 '''여로보암 왕가'''와 '''바아사 왕가'''의 경우 초대 왕(여로보암 1세, 바아사)이 죽고 얼마 안가서 무너졌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오히려 유다 왕국이 더 잘나간 편이기도 했다. 그나마 '''오므리 왕가'''와 '''예후 왕가'''가 오래가고 안정되었다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이후로는 말짱 도루묵... 심지어 '''시므리 왕가''', '''살룸 왕가''', '''베가 왕가''', '''호세아 왕가'''처럼 1대로 끝난 왕조도 있다. 심지어 즉위 3년내에 사망한 왕도 수두룩하다.[2] 성경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게 다 하느님 제대로 믿지 않아서다!" 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듯한데 예를 들면 금송아지 숭배를 시작한 여로보암 1세에 대해서는 그 죄악으로 아들이 죽고 집안도 멸문당했다고 설명하고, 바알 신앙을 받아들인 아합의 경우, 그의 오므리 왕가를 멸한 예후가 장군 시절에 기름 부음을 받으며 오므리 왕가와 바알 숭배를 없앨 것을 명령받았으며 그 덕에 예후 왕가가 예후 다음으로 4대까지 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단 그렇다고는 쳐도 북이스라엘은 존속기간 내내 금송아지 숭배를 유지했기에 우상숭배와는 관련이 없는듯 하지만 바알 숭배와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아합 시절에 선지자 엘리야와의 대결에서 패했을 때 엘리야가 군중들을 동원해 바알의 사제들을 제거한 바 있기 때문[3]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자 벤야민 지파 출신인 사울도 자신은 보잘것없는 족속 출신이라고 왕이 되길 두려워했으며, 벤야민 지파는 12지파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멸망 직전까지 가는 등 상당한 약소 지파였다.[4] 다소 느슨하다고는 했지만 나름 부패한 상태였다. 제사장들이 성경 작성자와 선지자들에게 까일 정도였고, 성소 안에서 금지된 행위를 일삼은 적도 있었다.[5] 하지만 초기에는 북이스라엘의 왕가가 계속 바뀌고 종교적 문제도 있어 왕위세습이 안정적이고 종교적으로도 안정되어있던 남유다가 더 강했다.[6] 다만 유다 왕국이라고 피해가 없었던건 아니었는데 히즈키야 시대에 선택지를 잘못 골라 아시리아의 센나케리브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엄청난 공물을 바치고 땅도 대거 뜯겼으며, 전국토가 약탈과 살육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래도 이건 다행이었는 던 것이 다른 나라들은 죽도록 두들겨 맞는게 아니라 그냥 죽었다. 북이스라엘 왕국도 요 테크를 따라 망했다. 그나마 다음 왕인 므나쎄가 현실주의적 관점을 견지하여 통치했기에 살아남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