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씨 몰살

 


1. 개요
2. 설명
3. 배경
4. 왕씨들을 죽인 까닭
5. 진행
6. 중지
7. 결과
8. 살해당한 왕씨 혹은 살해대상으로 지목당한 왕씨
9. 논란
9.1. 기득권 숙청과 관련된 정당성
9.1.1. 긍정설
9.1.2. 부정설
9.2. 당시의 윤리 기준으로 볼 때
9.2.1. 옹호
9.2.2. 비판
9.3. 이후 비롯된 사건들와의 연관성
10. 성을 바꿔 살아남다
11. 비슷한 전 왕가 숙청 사례
12. 얼마나 많은 왕씨들이 희생당했는가?
13. 여담
14. 창작물에서


1. 개요


조선 초에 일어난 대규모 개성 왕씨 숙청. 학살이란 용어는 학술적으론 잘못 쓰이는 용어다. 학술논문에선 왕씨 학살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고려 시대 때 태조 왕건의 사성 정책 남발로 넘쳐났던 왕성인 개성 왕씨전주 이씨경주 김씨, 밀양 박씨, 김해 김씨 등과는 달리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수 성씨로 남은 이유이기도 하다.[1]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기록은 많지 않아 왕씨 처분에 대한 인식은 전적으로 야사에 의존해 왔다. 실록에 나오지 않는 내용도 다수 수록되어있는 승정원일기를 포함한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사료들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관계로 사료가 부족하여 명확한 전개와 처분 규모는 추정이 어렵다. 정사에 기록이 부족하고 야사에 의존하는바가 크다보니 나무위키에도 오래도록 제대로 된 학술연구 인용 없이 뇌피셜로 끄적거려 놓은 내용 투성이었고 이는 수많은 오해와 억측을 불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사건은 방치봉건론을 주장한 이성계와 왕씨주멸을 주장한 신료들이 부딪쳐서 신료들이 끝끝내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킨 사건이다.

2. 설명


개성 왕씨는 고려 500년간의 국성으로 번영한 가문이지만,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주 이씨 조선의 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방해물로 간주된다. 개국 초기에 왕씨들을 섬으로 옮겼다가 시간이 약간 지나자 다시 섬에서 나와도 된다며 재주 있으면 벼슬도 하게 해 준다고 했는데 태조 3년 1월 17일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이 점쟁이에게 태조와 공양왕 중 누구 운세가 더 좋은지 왕씨들 중에서는 누가 제일 운세가 좋은지 물어보는 역모행위를 하자 고려 왕씨 일부를 거제도로 옮겼다.[2]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태조는 왕씨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고 4월 15일에 윤방경 등이 강화도에 있던 왕씨 일족들을 강화 나루에 익사시켰다. 4월 17일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일가가 살해당했으며, 4월 20일에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모아놓았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익사시켰고,[3] 같은 날에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제거했다.

3. 배경


조선은 정도전 1인에 의해 기획된 극도로 급진적인 체계를 갖고 있었고 따라서 특권을 잃게 된 많은 구 기득권 층의 불만을 살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경우엔 오히려 궁예와 그 친위 세력에게 기득권을 위협받았던 구 기득권층인 패서 호족들에 의해 건국되었고,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도 친 궁예파인 청주계처럼 대놓고 반항하지 않는 한 기존의 구 기득권층을 왕건이 모조리 포용하면서 끌어안았기 때문에 대규모의 신라계 반고려 반란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4] 게다가 후백제의 지배층은 신검의 쿠데타로 인해 내부적으로 풍비박산났고 신라는 전통적으로 왕가란 것이 그렇게 강력한 상징성을 갖고있지 않았으며 경주 김씨가 왕이 아니었던 때도 부지기수였다.[5] 결국 왕의 성이 왕씨로 바뀌었어도 진골 경주 김씨는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대귀족이며 옛날의 메인 왕비족에 준하는 최고 기득권층이었던 것이므로 굳이 고려에 반발할 필요가 없었던 것.[6] 다만 왕건 당대에는 이렇게 대충 평화롭게 넘길 수 있었어도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이 왕비족들 간의 주도권 쟁탈전 와중에 비명횡사하는 비극적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는 광종이 칼을 빼들고 호족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나서야 겨우 정리되었다.
비록 동북면 천호 출신이자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쿠데타로 세운 왕조라 하더라도, 조선이란 나라가 기득권층을 포용하고 그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나라였다면 (오래 가지는 못했겠지만) 고려의 왕가에 대한 별 존경심도 없는 대부분의 기득권층들은 역성혁명을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정몽주나 최영같은 최소의 위인들을 제외하면 고려의 지배층에게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란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었음은 실로 공민왕 때부터 증명되어왔지 않는가?[7]
허나 조선은 철저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면서 귀족 지주 세력은 물론 지방 호족 자체를 혁파해버리는 초급진적 개혁을 거쳤고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조선의 지배층은 급진파 사대부들의 양반계층으로 재편되면서 동시에 지방 호족 세력은 지방 관청 밑의 아전, 즉 중인층으로 몰락하였다.[8] 여기서 수백년동안 누려온 특권을 잃게된 자들은 당연히 조선에 반발하게 되었다.[9] 이는 과거 친몽 권문세족과 조금은 다른 길을 걸은 온건 사대부 세력도 별 다를게 없었다. 다만 탐욕을 그대로 내보일 수는 없으니까 있지도 않은 고려에 대한 충심 어쩌고 하는 명분을 내세웠을 뿐이다. 특히 위화도 회군 이후 죽은 최영이 많이 이용당했는데[10] 구 기득권층은 충신 최영 장군의 제사를 지낸답시고 모여 불온세력을 형성하였다.
여기에 또 다른 구 기득권층에 해당하는 사찰을 위시한 불교 세력까지 합세해 반조선 비밀결사 당취를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이는 등 조선 초의 정세는 그야말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4. 왕씨들을 죽인 까닭


이렇게 이미 왕실과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개성 왕씨들을 전부 몰살시켜야 했던 가장 큰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고려를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공양왕정몽주의 발악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끝까지 저항하는 바람에 이성계의 즉위가 요순을 본받은 선양도 아니고, 탕무를 본받은 방벌혁명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 이뤄져 즉위 명분이 퇴색되었고 이것이 조선 건국세력에게 커다란 불안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쥐었을 때 이성계와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이 신왕조 개창의 가장 완벽한 그림은 우왕은 폭정을 명분으로 폐위시키고 사돈인 왕요를 즉위시켜 평화롭게 선양받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조민수와 이색이 창왕을 옹립함으로서 이그러져 버린다.
창왕은 너무 어려서 폭정을 명분으로 폐위시킬순 없었다. 그래서 왕통 자체를 부정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선 이색과 조민수를 탄핵해 쫒아낸 다음 우왕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11]을 이용해 창왕을 폐위시키고 처음 구상대로 정창군 왕요를 옹립했다. 한번 돌아가긴 했지만 어쨌든 여기까진 계획대로였다.
진짜 문제는 공양왕이었다. 그가 정말 이성계의 의도대로 공손히 양위해주었다면 제대로 선양으로 명분상 흠이 될 게 하나도 없으니 왕씨를 경계할 필요성이 크게 줄어든다. 최소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꼭두각시로서 공양왕은 살려둘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 조비후한 헌제를, 사마소유선(삼국지)을, 송태조 조광윤이 후주 공제를 보전해줄 수 있었던 이유도 (자긴 가만있는데 신하들이 떠받들었다는건 당연히 지어낸 이야기고) 각 황제의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유약한 황제가 아무 저항없이 순순히 선양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사돈이 되는 왕요를 왕위에 올린 이유도, 사적으로 가까우면서 별다른 능력도 없는 정창군이라면 손쉽게 선양받을수 있다는 의도에서 였다.
그러나 막상 왕위에 오른 공양왕과 흥국사 9공신의 일원인 정몽주는 이성계의 의도와는 다르게 움직이며 이성계와 그 세력을 당황하게 했다. 비록 직계에서는 멀었을지언정 나름 왕건의 후손이었던 공양왕은 나름대로 왕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암중모색했다. 우왕과 창왕을 내모는데 활용된 우창비왕설은 우왕의 정통성을 부정했을 뿐 왕씨 왕조의 정통성 자체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별 부담없이 우왕과 창왕을 참해버린 공양왕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성계와 반대노선을 타기 시작한 정몽주에게 크게 힘을 실어주면서 이성계와는 대치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1392년 3월 이성계가 황주에 갔다가 낙마하여 와병으로 거동을 못하고 지방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공양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모두 탄핵하여 귀양보냈고 그들을 처형하려고 시도했다.[12] 정몽주는 내친김에 이성계까지 제거하려 했으나, 공양왕이 이를 주저하고 있던 사이 이방과, 이방원, 조영규, 조영무 등이 작당하여 사람 다보는 길거리에서 정몽주를 급습해 암살해버렸고, 개경으로 복귀한 이성계는 처음의 구상을 포기하고 정비 안씨에게 폐위 교서를 받아내 공양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다.
결국 이성계의 즉위는 '''왕을 무력으로 끌어내린 반정도 아니고, 절차를 거쳐 왕위를 받은 선양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성계는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역성을 이루고도 고려의 왕으로 즉위해 한동안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다 명이라는 초강대국에게서 명분을 얻어낸 다음에야 고려의 이름을 떼낼수 있었다.
이같은 명분의 부족은, 조선왕조 개창세력에게 왕씨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남겨주었다. 변방에서 막강한 군사력으로 일어난 무장 출신 이성계는 그래도 좀 덜했지만 그에게 건국 이념을 제공한 공신들은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성향 차이도 있겠으나 모두 유학자 출신들이다보니 선양과 천명 같은 명분 문제에 훨씬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몽주가 계속 이성계를 행보를 같이 하며 선양을 이뤄냈거나 공양왕이 정몽주가 움직이기전에 선양의 의사를 내비쳤거나 이성계에 대한 선양식례를 올리게 되었다면 오히려 왕씨들이 몰살당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직을 지키려고 한 일이 일족 전체의 목을 옥죄는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지방의 전승이나 정황증거를 배제하고 제대로 된 기록을 살펴보면 왕씨 전체가 조선을 들어엎으려 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고 실록에서 왕씨의 역적모의라는 사건들이 대체로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왕씨의 몰살은 왕씨 세력의 불온한 움직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후환을 없애기 위해 꼬투리를 잡을 사안이 생기자 이를 전체 왕씨로 확대시켜 주멸한 것이다.
[윤훈표 조선정치의 속살] 고려 왕족 숙청 사건의 놀라운 배경
이에대해 본래는 기존의 관례대로 왕씨를 보전해주려 하였으나, 명나라 주원장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위해 결국 이런 선택을 했다는 추정도 있다. 사실 중국이나 한국의 왕조들이 기존 왕족을 보전해준것도 어디까지나 그들이 반격하지 않을것이라는 확신이 있을때나 진행된것이나, 당시 명나라가 트집을 잡아 공양왕을 앞세워 조선을 공격할 위험도 있었고, 또 실제 명이 그런 분위기를 풍겼기에 왕씨를 학살하게 되었다는 내용.
확실한건 이성계와 공신 세력은 이건에 대해서 명백히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이는 왕씨 처분을 다룬 학술논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안이다.

5. 진행


몇몇 왕씨의 모반에 대한 제보가 있었고, 이를 구실로 정도전, 이방원 등 개국공신들도 왕씨들에 대한 숙청을 주청했다. 왕씨들을 강화도거제도 등으로 유배을 보내는 식으로 왕씨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으며, 태조 3년에는 결국 거제도나 강화 등지에 모여 있던 왕씨들을 '''바다에 빠뜨리는 식으로 일대 학살이 벌어졌다.'''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돼 있던 공양왕과 아들들도 이 때 살해되었다.[13] 또 태조 3년 4월 20일의 기록에 따르면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고 한다.
에 살게 해 주겠다며 왕씨들을 모아 배에 태워 그대로 수장시켰다는 기록이나, 고려 태조 왕건이성계의 꿈 속에 나타나 마구 야단치며 따져 물었다고 하는 기록[14]은 야사를 중심으로 기록한 추강냉화, 연려실기술의 기록으로, 실록에는 다만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사들이 보일 뿐이다. 단, 야사가 으레 그렇듯이 당시 민중들이 두고두고 왕씨를 안쓰럽게 생각했다는 민간의 인식을 보여 주는 일화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정 많은 이성계가 왕씨들을 죽이는 데 끝끝내 반대했고 신하들이 알아서 손을 더럽혔다는데, 이게 그 뒤로도 조선측의 공식 입장이 된다. 태조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밑의 신하들이 멋대로 저질러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는 식의 뻔한 레파토리. 그리고 그 일을 주도한 신하는 당연히 정도전.
하지만 실록의 기사들에서도 사실을 읽어낼 수는 있는데, 후일 숨어 사는 왕씨들을 밀고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왕씨 색출 및 학살은 매우 철저하고 대대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왕씨 몰살의 규모와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사성정책으로 고려 건국 후 엄청난 수의 왕씨들이 생겨났으며, 이후 그 자손들이 번성하여 왕씨는 고려 시대 최대의 성씨가 되었고, 고려 말기에는 왕씨가 지배층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다.[15] 때문에 왕씨 몰살이 자행되자 이성계와 새 왕조에 대한 민심은 아주 흉흉했다. 특히 왕씨들이 많이 살았던 개성에서는 다른 성씨라도 해도 외가, 처가 등으로 왕씨와 엮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성계에 대한 민심은 거의 증오에 가까웠고, 결국 이성계가 천도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나중에 이성계가 1차 왕자의 난을 겪으며 이방원과 그 수하들에 의해 두 아들과 정도전과 남은 등의 충복들을 잃게 되자, 민중들은 이성계가 왕씨들을 몰살한 업보로 천벌을 받은 것이며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왕건이 저주를 걸어서 이성계의 두 아들들과 충복들이 희생을 당한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것도 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6]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충격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왕위를 내놓고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이복형제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 이방원이 실권자로 등극한데다가 거기에 또 나아가서 2차 왕자의 난까지 겪는 등의 비참한 일들을 겪은 이성계도 말년에는 왕씨 몰살을 후회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이 시점되면 왕씨의 대다수가 이미 소멸당한지라 별로 남아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때 왕씨의 대다수가 몰살되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모계의 성씨나 왕(王)자가 들어간 성씨[17]로 바꾸면서 겨우 연명한 걸로 보인다.
개성 김씨의 경우 고려 왕족의 후예이기 때문에 왕씨라고 하면 죽으니 본관을 개성에서 왔기 때문에 개성 김씨로 본관을 만들어놓고 살았다고 한다. 개성 김씨는 왕 김씨라고도 불리었다.

6. 중지


왕씨 숙청은 왕조가 어느 정도 자리잡으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태종에 들어서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413년에 태종이 왕씨 몰살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다. 사실 이 시점 되면 조선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을 시점인 데다가 태종 입장에서도 아버지가 왕씨 몰살 정책을 추진하다 민심이 이반되고 자신이 직접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을 겪고 나서도 "왕위를 찬탈한 것도 모자라서 왕씨를 대거 죽이더니만 천벌받았고만, 꼴좋다"면서 동정조차 받지 못한 꼴을 직접 지켜봤으니 굳이 더 시행할 동기도 없었다. '''물론 1413년 폐지 이전까지, 즉 재위기간의 절반이 훨씬 지날 때까지도 공식적으로는 계속됐다'''. 이 정도면 상술됐듯이 더 이상 죽일 왕씨를 찾기가 어려워졌거나 웬만한 유력 왕씨들은 다 죽여서 왕씨 몰살을 중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기 아버지의 정책에 대한 디스까지도 감수했다. 1416년에는 공양군으로 격하되어 있었던 공양왕을 복위시켜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숨겨 준 사람들까지 처벌을 받고 대간이 찾아낸 왕씨를 죽일 것을 주청하는 등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여전히 왕씨들은 모계의 성씨로 바꾸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였으며 임관도 막혀 있었다.
개성 왕씨에 대한 차별이 그나마 철폐된 건 문종 때의 일이었다. 문종 대에 제씨로 성을 바꾸고 숨어 살던 왕씨의 후손 왕우지와 다툼이 생긴 사람이 그를 해꼬지할 목적으로 '저놈 사실 왕씨래요!'하고 관가에 일러 바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씨에 대한 방침을 바꾼 덕에 왕우지는 도리어 벼슬을 얻고 왕순례라고 이름을 고쳐 왕씨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문종-단종-세조-성종대를 거치며 의전상 상당한 우대를 받았다. 왕순례는 서자는 있어도 본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고 그마저도 그의 손자를 끝으로 후손이 단절됐다. 결국 다른 왕씨들 중에서 숭의전을 지킬 후손을 정하게 되는데 선조때부터 왕훈(王勳)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자세한 내용은 이왕삼각 문서를 참고.
단종을 죽이러 갔다가 시를 읊었다고 청구영언에 기록 된 금부도사 왕방연은 왕순례보다는 서울에 살았던 동양군파인 왕미의 자손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왕방연은 음서로 출사하여 벼슬이 금오랑(金吾郞)에 이르렀다.[18]
동양군파는 지금까지 내려오는 개성 왕씨의 90%를 차지하는데다, 그가 살던 곳은 아예 왕촌(지금의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1451번지)이라 불렸을 정도.

7. 결과


당시 고려가 건국되고 470년이 지나 조선이 새로 건국된 시점에서 왕씨 종친은 지금의 김해 김씨마냥 길가에 널린 돌멩이 수만큼 흔했는데, 조선의 왕씨 학살 결과 고려 왕실과 촌수가 너무 멀어서 그야말로 성만 왕씨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수많은 개성 왕씨 일족이 거의 사라졌다.[19]어쨌든 이 학살로 인해 개성 왕씨를 비롯한 구 고려 왕실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면서 다시는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위치를 가지지 못했고 현대에도 왕씨는 김씨나 이씨, 박씨와 달리 화교 취급 안 받으면 다행인 정도로[20] 한국에서 소수 성씨집단으로 전락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숙청의 결과 고려의 부흥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왕씨를 다 제거하지는 못했고 여전히 상당 수의 왕씨가 잔존했으나, 왕씨 주멸이 진행되는 동안 그토록 고려 부흥을 명분으로 조선에 반기를 들 틈만 노리던 옛 문벌관료/부원/불교 세력은 이미 고려 조선 교체기 과정에서 정리가 되었고 남은 세력들은 손을 놓고 방관하거나 일치단결해서 왕씨 주멸을 강력하게 부르짖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이성계가 온건한 입장을 취하자 법을 맞은 형조부터, 핵심 중신들이 모인 도평의사사에 젊은 관료들이 모인 대간까지 일치단결해서 왕씨를 발본색원해 주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는데 공신들의 위기감이 젊은 신료들에게까지 공유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왕조가 공고해지며 탄압이 멈추고 개성 왕씨가 공식적으로 양반 가문이 된 뒤에도 누구도 고려 부흥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준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들은 고려의 신하로 남고자한 원천석, 길재조차 자신의 자식, 제자들이 조선에서 벼슬살이 하는건 만류하지 않았고 이색의 제자인 권근도 뜻을 꺾고 조선 조정에 합류했으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만하다. 이 철저한 숙청 덕분에 신생국가 조선은 1차,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태조의 난) 같은 크고 굵직굵직한 위기를 겪고도 단단한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설령 왕씨 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왕씨들은 민심을 얻지 못한 채 고려 부흥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희박하게나마 존재하던 고려 부흥 가능성이 왕씨 몰살로 인해 아예 0%가 되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고려의 왕도였던 개성에 살던 주민들의 반발은 아주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근거 없는 야사에 의존한 주장이 너무 많아서 가려들어야 한다. 근거랍시고 가장 먼저 거론하는게 성계탕조랑떡이고 그 다음이 한양 천도가 개성의 흉흉한 민심을 견딜수 없어 벌어진 조치라는 주장인데 신료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신왕조를 건국했으니 새술을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이성계의 명분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진행된 일로 왕씨를 대거 죽여 민심이 흉흉해져서 그렇다는건 근거없는 이야기다. 왕씨 발본색원해 주멸하라 부르짖은 그 신료들은 개성 사람 아닌가?
태조 3년 천도 결정으로 조성된 수도 '''한양 인구 상당수는 개성에서 이주시킨 인구다.''' 그리고 '''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혼란한 상황에서 정변 세력은 개성으로 환도를 단행했다.''' 태조 5년 한양 재천도 이전까지 조선은 한성과 개성의 양경 체제로 운영되었고 재천도 이후에도 세종 20년 개성유후사가 개성부로 위상이 떨어지기 전까진 형식적으로나마 양경 체제가 유지되었다. 인터넷발 상상력 처럼 개성 민심이 왕씨의 원한을 기억하며 부들부들 떨었다면 그게 가능했을까?
개성이 고려의 수도라서 과거에 대대로 불이익을 받았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낭설이다. 수도와 그곳에 거주하는 집단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 어느 왕조든 동일하다. 개성이 더 이상 수도가 아니어서 지역의 위상이 떨어진걸 지역 차별에다 고려왕족과 연결짓는건 억지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도 개성의 위상이 결코 낮지 않았다.''' 세종 20년 개성유후사의 철폐를 계기로 양경 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지만 수도 한양을 제외한 경기도의 행정을 책임지는 경기관찰사를 개성부윤이 겸하게 하여 수도 한양을 보좌하는 주요한 배후 도시로서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유지했다. 경기도 중심도시로서 경상도의 경주나 진주, 전라도의 전주에 비견되는 위상이었다.
개성이 과거시험 등에서 차별을 받아 상업도시가 되었다느니 하는 기록은 1648년(인조 26)에 편찬된 김육의 <송도지(松都志)>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야사로 18세기에 날조된 두문동 72현과 마찬가지로 꾸며낸 이야기다. 성종과 연산군대에 개성의 유생들이 개성유생들을 위한 알성시(특별과거)를 열어줄것을 요청했으나 신료들이 그랬다간 한양사람들이 개성가서 시험친다며 반대한 사례에서 엿보이듯 조선시대 지리관념상으로도 개성은 한양과 같은 권역으로 여겨져서 조정 입장에서 불이익을 주고말고 할 것도 없었다.
17세기부터 개성소외론 같은 야사가 등장한 이유는 16세기 이후 개성의 위상변화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의 수학기관은 절과 학당, 향교 등인데 개성은 수도 한양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좋은데다 고려시대부터 수도라 학당도 있고, 공부하러 들어갈 절도 지천에 널려있어 개성문인들은 맘껏 혜택을 누리며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16세기들어 조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완전히 정착하고[21] 사화와 당쟁으로 중앙의 관인층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원을 통한 자체적인 교육과 전승 체계를 마련하면서 중앙에 비해 낙후되었던 지방의 학문적 역량이 향상되면서 개성과 타 지방의 차이는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재난으로 도시가 쑥밭이 되면서 학문교육 시설도 재가 되어버리니 개성의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경덕(徐敬德), 차천로(車天輅), 최립(崔岦)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15~16세기의 영예는 끊어져 버렸다. 과거 누려온 메리트가 모두 사라지고 자부심을 드높일 문인들도 배출되지 않은 상실감과 박탈감, 피해의식이 개성소외론이란 가공의 역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개성의 떨어진 자존감은 18세기에 노론 낙론 종장들에게 수학한 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나서야 회복된다.
그리고 상업은 소외받아 융성한 게 아니라 500년간 수도로 기능하며 원래 상업 종사자가 많던 도시였다. 고려 태조 왕건부터가 예성강 하구를 기점으로 무역을 해 부를 쌓은 해상 세력 출신이다.

8. 살해당한 왕씨 혹은 살해대상으로 지목당한 왕씨


  • 공양왕 왕요, 왕세자 왕석, 왕자 왕우와 함께 피살되었다.
  • 왕강, 왕승보, 왕승귀, 왕격 등의 유력 왕씨들.
  • 왕백안, 왕연금, 왕금만, 왕약사노 등의 왕씨 서얼들.
  • 삼척, 거제, 강화 등지에 모아 놓았던 왕씨 일족 전체
  • 그 밖의 중앙, 지방에 있던 왕씨 가문 상당수[22]

9. 논란



9.1. 기득권 숙청과 관련된 정당성



9.1.1. 긍정설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고려의 지방제는 몽골과 왜구의 침입을 거치며 근간이 무너져 내렸고 소수 특권층이 서로 짝짓기하며 관직을 독점하고 도당이라는 특정기관에서 모든 정사를 관할하며 대토지 점유와 양인수 감소 등 사회모순은 극심했다. 그리고 이성계는 왕건처럼 무력으로 타국을 정복한 군주가 아니라 고려에 귀부했다 힘으로 왕을 폐위시키고 왕이 되었다. '''전조의 후손에 잘 대해줘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도전과 조준 양 날개를 두고 대대적인 사회개혁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 구왕조의 지배층은 개혁을 막는 걸림돌, 새 왕조의 안정에 방해가 되는 전조의 기생충일 뿐이었다. 고려 멸망을 막고자 발악했던 '''공양왕만 해도 대토지를 점유한 농장주 아니었던가.''' 고려말의 모순을 타파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이들에게 고려왕실은 절대 무고한 세력이 아니었고, 제거되어야 했다.
태종실록은 태조정도전이 배제하려 한 고려 구세력이 품었던 태종정도전을 제거한 이후 치뤄진 과거에서 실력있는 자들이 모두 떨어지고, 세도가의 어린 자제들이 뽑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구세력은 그런 놈들이었고 왕이 되기 위해 이들을 품은 태종은 그들을 직접 견제하고 안전장치를 마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엔 반대하지만 개혁의 필요성에는 찬동하는 하륜을 중용했다.
더욱이 위화도 회군 이후에 윤이 이초 사건 같은 지금으로 치면 외환행위가 벌어졌다. 즉 내용이 매우 충격적인데 명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고려 내부의 정적을 친다는 것이었다. 연루자들이 이색, 이숭인, 권근 등등이 있었다. 이런 반론에 대해서 위화도 회군을 이야기할 것인데. 위화도 회군은 명나라가 좋아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민심은 '''물론 군인들의 처우가 매우 안좋았고 숙청될 위험성이 컸다. ''' 고려말에는 장수가 전쟁터에 뛰면 그 장수가 보상은 고사하고 숙청으로 목숨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23] 이로 인해 수신전, 훌양전 등이 도입된 것이고 그리고 애초부터 주원장과는 우호관계가 아니였고, 즉 쉽게말해 신흥무관인 군인들의 대우를 위해서였다. 그들의 예상대로 명나라가 조선초에는 이성계에게 권지고려국사라는 명칭을 주고 그들의 역사서에 이성계를 간신 이인임의 아들로 적어서 조선측은 종계변무를 해야 했기에 조선 역시 요동정벌 준비를 했다.

9.1.2. 부정설


애초에 왕씨 일가 = 나라 갉아먹는 기생충/적폐, 이성계 세력 = 개혁 세력이라는 등식 자체가 극도로 단순한 선악 이분법에 불과하다. 물론 공양왕이 대지주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의 욕심과 착취만을 위해 움직였다는 근거도 없고, 우왕처럼 폭군이라고 부를 만한 왕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공양왕이 밀어준 것은 구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온건개혁파인 정몽주였다. 그리고 언제나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움직였던 먼치킨급의 인재 정몽주를 죽인 건 결국 친공양왕파가 아니라 이성계의 세력이었다.
공양왕이나 유력 왕씨가 대지주니까 사회의 기생충이고 악인이었으며 이성계는 순수한 개혁의지로 이를 심판한 것이라는 논리는 조악하기 그지없는데, 중앙이 아니라 지방이 기반일 뿐이지 '''이성계 자신도 고려의 내로라하는 대지주이자 당대 최대 규모의 사병집단을 거느린 군벌이었다.'''[24] 그리고 이성계가 대지주로서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내수사라는 관리국까지 세워져서 조선 왕실의 비상금 자금원으로 대대손손 전해지게 된다.[25] 정말 이성계가 대지주를 나라를 좀먹는 적폐로 보았고, 자신의 정치적 불안이나 이해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치국안민을 위해서 전 지배층을 일소한 것이라면 정작 이성계 자신이 평생 그리고 죽어서도 토지에 대한 권한을 포기하지 않았다는데서 이미 모순이 생긴다. 결국 공양왕 및 왕씨 = 지주 = 악이며 이성계 = 선이란 식의 논리는 공양왕이나 이성계나 대지주였단 사실로, 이성계가 정치 및 경제적인 이해논리 없이 순수한 개혁의지로 지주들을 숙청했다는 주장은 이성계 자신이 물려준 일족의 사유지의 존재로 간단히 반박된다.
애초에 구 기득권의 사회 착취를 명목으로 학살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왕씨 이외의 다른 고려의 기득권 세력, 다시 말해 기타 권문세족 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숙청의 기록은 왜 보이지가 않는가? 고려가 신라처럼 철저하게 왕족들이 모든 권익을 최우선으로 차지하는 골품제 국가라도 된단 말인가? 애초에 스스로가 왕씨 몰살에 참여했던 조선 건국세력조차 집안을 파고들면 소위 '권문세족'들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26] 단순히 착취범들과 같은 집안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을 당한다면 이들 역시 이성계의 손에 죽임을 당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나 정황은 찾아볼 수가 없다. 결국 왕씨에 대한 숙청/학살은 구 왕조 기득권 숙청과 적폐청산이 목적이 아니라, 이성계 세력 스스로가 마련한 역성혁명의 부족한 명분 때문에 일어났던 참사일 뿐이다.
윤이 이초 사건 같은 행위에 대해서 말하자면 '''애초 위화도 회군과 관련해서 명나라와 비밀 조약을 맺은 것은 급진사대부들이었다.'''[27] 뿐만 아니라 명나라가 좋아서가 아닌 군인에 대한 대접으로 회군했다지만 정작 최영을 죽인 이들은 본인들이었고 '''심지어 회군 동지였던 정지같은 장군을 고문해 죽인 것도 본인들이었다.''' 쉽게 말해 군인들에 대한 대접으로 회군했다는 것은 최영의 숙청이나 정지같은 장군의 고문해 죽임으로 순전히 변명이 되었다. 그리고 윤이 이초 사건 관련해서 왕조를 뒤집었다고 하는데 '''정작 공양왕은 윤이 이초 사건에 수사를 지시했다.'''[28] 그렇다면 신돈을 죽이는데 최영이 가담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들 상관이나 스승들 역시 신돈으로 인해 숙청되고 탄압받은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무엇보다 신돈을 싫어한 건 최영이나 신진사대부나 같았다.
그리고 이성계가 전 왕조에 잘 해줘야 할 이유가 없었다며 그 이유로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이라 말했는데 선양은 말이 좋아 선양이지 실질적으로는 쿠데타 행위와 별 다를 게 없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선 전 왕조를 싹 갈아버리고 세워진 왕조들은 전 왕조의 왕가처럼 참혹한 최후를 마쳤다. 반면 전 왕조를 잘 대해준 경우에는 송나라 빼고는[29] 비교적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30] 실질적으로 봐도 전 왕조가 심하게 또라이짓을 하지 않은 이상은 그래도 전 왕조를 따르는 이들도 있을텐데 굳이 전 왕조를 싹 갈아버려 후세에 두고두고 욕먹는건 물론이요 전 왕조를 따르던 이들이 이를 가는 짓을 하는게 나을까 어느정도 우대해주어 포용해주는 것이 나을까?

9.2. 당시의 윤리 기준으로 볼 때



9.2.1. 옹호


사실 학살이라고는 해도, 왕씨 중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죽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 자체가 현대 기준의 시각일 뿐으로 역적은 3족을 멸하는게 당연했던 14세기 왕이 정치적 숙청을 했는데 어린아이 같은 노약자까지 죽였다고 비판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무엇보다도 왕씨 몰살의 정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조선왕조가 초기 태조, 태종, 세종, 문종 등 명군들의 노력으로 고려 말 혼란스럽던 한반도를 안정시킨 건 엄연한 사실이다. 왕씨 몰살에 대해 조선 왕조가 건국 정당성마저 부정 당해야 한다면 세종같은 조선의 명군들의 정통성도 부정당해야한다는 소리이다.

9.2.2. 비판


위에 옹호란에서는 이 행위를 현대 기준 시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그 주장의 가장 큰 오류는 이 왕씨 몰살은 '''당대의 시각으로 봐도 결코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당대에서부터 이미 욕하고, 후회하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사실 연좌제가 흔히 사극 등지에서 나오는 "3족을 멸하라!"라는 대사의 임팩트 때문에 반역자들의 가족은 어린애고 뭐고 싸그리 죽여버리는 것으로만 흔히 오해되는데, 엄밀히 따져보자면 해당 문서의 조선 문단에도 나와 있듯이 그냥 상황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지고 줄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원칙적으로는' 16세 이상의 남성, 당대 기준으로 어른 남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 많았지만. 10년전만 해도 나이가 드신 왕씨분들은 손자들한테 자신의 육이오 경험를 말하는 것처럼 왕씨 학살은 몰살이었다고 말씀들을 하셨었다.[31] 그래도 보편적으로는 역모 사건이 터지면 당사자와 당사자의 직계들의 목이 날아가고 삼촌, 조카, 형제 등이 유배되는 걸로 끝났음을 생각해보면 왕씨라면 족족 다 목을 날린 건 확실히 심한 거 맞다. 숙청으로 유명한 홍무제나 영락제도 이 짓은 안했다.
이 짓은 육조시대 유송에서 송나라까지 이어졌던 선양 후 전 왕조 왕가를 분쇄해버린 일과 유사한데 송나라가 전 왕조인 후주의 공제와 시씨 일족을 보전해주기 전까지는 다들 자기가 한 짓 그대로 당했다. 동진의 사마소는 자기 조상들이 황제 조모를 죽인 일을 두고 "그게 사실이면 이전의 우리나라망한 건 망해도 싼 일이고 지금의 우리나라도 오래 못 갈거다."[32] 라며 부끄러워했음을 생각해보면 전 황실의 황제 하나 죽였지만 그래도 황실 자체는 보존해줬는데도[33] 이 모양인데 왕은 그렇다고 쳐도 왕가 일원이라면 몽땅 다 목을 날려버린 것이 정당화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이 학살 사건이 당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나를 보려면 단순히 연좌제 운운보다는 이후 위정자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왕씨 색출 및 살해는 이성계가 물러나고 나서부터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는 이성계의 아들이 "그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다"라며 공식적으로 중단시키기에 이른다.[34] 근데 이 아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정적 잘 때려잡기로 이름이 높은 태종 이방원'''이다. 한 마디로, 고려 말 군계일학의 인재였던 정몽주를 비롯해 막나간다 싶을 정도로 정적들에게 강경했던 태종조차도 이 학살만큼은 직접적으로 옹호하지 못하고 "아바마마 뜻은 아니다."라며 둘러대는 게 고작이었던 것. 거기다 결정적으로 '''이성계 본인조차도''' 아들 2명측근들이 죽고, 남은 아들들용상을 두고 싸워대는 역지사지격의 경험을 하고 나서는 자신의 업보라 여겨 왕씨 학살을 후회했을 정도였다. 왕씨 학살을 저지른 장본인들 스스로도 끝내 정당화하지 못했을 만큼 당대 사람들의 눈에도 차마 못할 짓이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 문단의 '정통성' 논란에 관해서는, 사실 정통성이란 개념 자체가 다분히 결과론에 입각한 것이라 현대에는 별 의미가 없지만, 우선 명백히 하자면 역사를 거시적으로 봤을 때 조선이 고려 왕조를 뒤이은 한반도의 정통 국가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정통성 논란은 왕씨 몰살로 '인해' 조선의 정통성이 약화됐다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통성(집권 정당성)의 불안성으로 '인해' 왕씨 몰살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위 문단에서 말하는 '그래서 조선이 정통성이 없는 국가냐'는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또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역사적 의의로서의 정통성)과 과거인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집권 정당성으로서의 정통성)을 뒤죽박죽 섞어놓은 소치이다. '''후세인들이 봤을 때 조선이 정통성이 있냐 없냐가 아니라, 당장 혁명을 일으킨 당사자들 스스로가 자기네의 집권 정당화 논리에 자신이 없었으며, 그래서 전조 몰살이라는 무리수를 뒀다'''는 것이 문제의 요지인 것이다.[35] 태조 자신과 후세의 선정으로 왕씨 몰살의 흉터를 메워가며 차근차근 구축된 결과론적 정통성, 역사적 정통성과 왕씨 몰살의 원인이 된 당시대의 정통성, 집권 정당성은 다른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

9.3. 이후 비롯된 사건들와의 연관성


직접적인 인과 관계까지는 없지만, '구 지배 세력과의 갈등 문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결국 맥락이 같다.
조선 건국에 아무런 공도 없고 심지어 막내이기까지 한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원인은 결국 이성계가 고려 지배 세력과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는 후계자를 두고 싶었다는 데 원인이 있다.[36] 이성계는 고려 구세력과 자신의 세력의 갈등을 봉합하는데 결국 실패했고(혹은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고), 이 문제는 결국 왕씨에 대한 대규모 학살과 자신의 자식들간의 패륜극으로 인한 불안한 정세,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만 단위의 군대를 동원한 내전을 벌이고 그 이후 비참한 말년을 보내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38]

10. 성을 바꿔 살아남다


몇몇 왕씨들은 왕(王)에서 획을 더하거나 점을 찍은 전(全), 전(田), 옥(玉), 차(車), 신(申) 등의 성씨 혹은 왕을 상징하는 용(龍) 등의 성씨로 성을 바꾸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있다.[39] 조선 제 5대 왕인 문종에 이르러 왕씨 멸족령이 해제되기까지 왕씨임을 못밝히고 숨기고 살거나, 탄압이 끝난 뒤에도 이미 몇 대에 걸쳐 익숙해진 성에 적응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야기인 만큼 야사 정도로 생각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바로 위의 왕순례의 사례나, 여말선초의 왕사온 (王斯溫)이란 사람이 다른 기록에서는 옥사온(玉斯溫)이라고 기록된 것처럼 진짜로 성을 바꾸어 숨어 살았던 케이스가 있긴 있는 것을 보면 아주 근거가 없다고 보긴 어렵다. 전씨 옥씨 등 단골로 의심받는 성씨 문중에서는 사실 유무와 관계없이 수백년이 지난 이제와서 자기들 성을 갈아버리는 문제라서 이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며, 설령 같은 집안 어르신이라도 꺼내는 것 자체가 민감한 주제이다.
참고로 실록에는 대대적인 왕씨 학살 이후, 입장을 선회해 왕족과 관련없는 왕씨와 사성 왕씨는 성을 바꿀 수 있도록 유화책으로 선회한다.[40] 사성받은 왕씨의 경우는 원래의 성을 가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강릉 김씨. 물론 그 외의 왕씨는 문종때까지 색출 및 탄압. 이 소리는 결국 그 전에는 왕씨라면 구분없이 탄압하고 죽였다는 의미도 되지만. 위의 많은 야사의 기록은 위 실록의 기사와 관련 있을 수는 있다.

11. 비슷한 전 왕가 숙청 사례


사실적으로 말해서 전 왕조가 몰락한 후 새 왕조가 전 왕조의 왕가를 숙청하는 건 그 사례가 매우 많다.[41] 괜히 송태조의 시씨 일족 보호가 유별나게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 서진은 건국 과정에서 조위의 황제 조모를 시해했고,[42] 이후 동진이 유송에게 망할 때부터 전 왕조의 종실들을 몰살시키는 징크스가 계속된다. 전 왕조 성원들에 대한 처우가 관대해지는 것은 송태조 조광윤 시절부터다.
  • 아바스 왕조는 시조 아부 아바스가 옛 우마이야 왕조의 인사들을 세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상급들은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투항을 받은 다음 살해했고, 중급들은 화해의 잔치자리를 마련해 먹고 마시던 도중 모조리 살해했으며, 나머지 하급들은 내숭 떨 것도 없이 바로 살해했다. 딱 한 명만이 아라비아에서 이베리아까지 도망가서 후우마이야 왕조를 재건했다.
  • 대월에서는 리 왕조에서 쩐 왕조로 왕조가 교체될 때 리씨 왕가가 숙청당했으며 이용상 한 사람만이 겨우 살아남아 무턱대고 북동쪽 방향으로 도망친 끝에 여몽전쟁 당시의 고려에 도착하여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쪽은 800년만에 베트남으로 금의환향에 성공했다. 베트남에서는 전 왕조의 모든 자손들을 다 죽이는 것이 상례이고, 그래서 현대에서도 응우옌 왕조가 망하자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늦기 전에 전재산을 챙겨 프랑스로 도망간 예가 있다.[43] 일단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응우옌 왕조의 후손들은 베트남 입국이 금지되어 있지만 예외적으로 함의제의 후손들은 함의제가 프랑스와 맞서싸운 공적이 인정되어[44] 베트남 입국이 허용되고 있다.
  • 천조제의 후손인 요나라 황실 직계후손들은 요나라가 금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에도 한동안 이어져왔으나, 금나라 최악의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희대의 불륜황제인 해릉양왕에 의해 몰살되어 대가 끊어졌다.[45] 요나라의 중앙아시아 망명 왕조인 서요의 황실은 요나라 황실의 방계였다. 그러나 이 방계도 결국 쿠츨루크에 의해 멸족되어 사라졌다.
  • 명말청초에 청나라명나라 주씨를 멸족시켜 나갔으나 강희제가 즉위하는 시점부터 멸족정책이 중단되고 주씨 집안이 보전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숭정제의 아들이라는 주자환 일가를 학살한 사건이 있고, 현재 중국에서 명나라 황실의 남계 혈통은 주원장의 미미한 아들들의 자손만 남아 있지 영락제 이후의 황제 자손은 남계 혈통이 모두 끊기고 여계만 남아 있다. 청조가 이왕삼각으로 서임한 연은후(延恩侯) 작위도 주원장의 서자의 후손이 받았다.[46] 설령 남아있다 해도 성씨를 바꾸어 살아남고 더 나아가 명나라 황실의 후예로서의 정체성마저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47] 주씨 멸족의 업보인지 훗날 청나라 황실은 동치제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요절하면서 직계가 단절되었을 뿐더러 방계 출신 후임 황제인 광서제선통제 또한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에 따라 현재는 더욱 먼 방계에서 청나라와 만주국왕위 요구자[48]를 배출하고 있다.[49] 만주족 자체가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한 걸로 모자라 아예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건 덤.
  •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당시 청나라 황족들 중 일부는 혁명군의 만주족 학살에 휘말려 일반 만주족들과 함께 학살당하기도 했다. 조상들이 명나라 황족들에게 저지른 것에 비하면 훨씬 덜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50], 그 이전에 상술한 것처럼 만주족 자체가 나라 없는 민족이 된 걸로 모자라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버렸으므로, 명나라 황족들과는 다른 쪽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셈이다.
  • 장미 전쟁을 종결시킨 인물이자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초대 국왕인 헨리 7세요크 왕조의 마지막 남계 후손이었던 워릭 백작 에드워드를 처형하여 요크 왕조를 단절시켰다. 다만 헨리 7세가 요크 왕조 초대 국왕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 영국 왕실에서 요크 왕조의 여계 혈통은 여전히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뒤 콤니노스 왕조가 다스리던 잔당인 트라페준타 제국도 멸망시키고 남아있던 콤니노스 왕조를 몰살시켰다.
  • 호타키 왕조를 세운 미르 마흐무드 호타키는 사파비 왕조를 멸망시킨 후 사파비 왕실과 귀족들의 화합을 가장한 연회에 초청하여 사파비 왕실을 몰살시켰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파비 왕조 왕위 계승자 타흐마습이 나디르 샤의 도움으로 호타키 왕조를 물리쳐 타흐마습 2세로 즉위하면서 사파비 왕조가 재건되었으나, 나디르 샤가 타흐마습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그를 폐위하고 그의 아들인 아바스 3세를 즉위시킨 후 본인은 일단 실권자(섭정)가 되는 데 그쳤다가 훗날 아바스 3세마저 폐위하고 본인이 샤가 되어 아프샤르 왕조를 세우면서 사파비 왕조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이집트 맘루크 왕조 역대 술탄들의 후손들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도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으나, 훗날 이집트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킨 인물인 메흐메드 알리에 의해 학살당했다.
  • 프랑스 혁명 직후 부르봉 왕조의 왕족들이 대거 학살당했으며 그 뒤 나폴레옹의 황제즉위를 거쳐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으나 결국 그 영향으로 대가 끊기고, 현재 남은 왕가 자손들은 직계는 아니다.
  • 러시아 혁명 직후 러시아 제국의 황족들이 공산당에 의해 황제 일가 전원을 포함해서 대거 학살당했다. 물론 해외로 도주한 방계 일족들은 살아남아 1991년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 정부로부터 귀국을 허용받았다.
  • 1958년 이라크에서 자유장교위원회의 군사 쿠데타 직후 이라크 왕국의 왕가인 하심 가문의 국왕과 왕족들이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의 반란군에 의해 모조리 학살당했다.[51] 업보라면 업보랄까, 카심 장군은 5년 뒤 압둘 살람 아리프와 바트당이 연합해서 일으킨 쿠데타로 살해당한다.
  •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쿠데타로 에티오피아 제국이 무너진 후 에티오피아 제국 솔로몬 왕조는 하일레 셀라시에와 이야수 5세의 직계혈통이 무사히 살아남은 대신 방계황족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 칭기즈 칸의 후예인 보르지긴 가문은 만주족에게 패배하여 몽골이 몰락한 후 청나라 시대에도 황후를 꾸준히 배출하며 내몽골의 최고 세력으로 군림했으나 몽골의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대학살로 완전히 망해버렸다. 물론 보르지긴 가문의 모든 혈통이 단절된 건 아니고 현재까지도 그 혈통이 계속 이어지긴 하지만 적어도 독립국가가 된 외몽골에서 보르지긴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은 정말로 칭기즈 칸의 후손인지,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성씨 폐지 정책으로 본래의 성씨를 잃고 몽골 민주화 후 보르지긴이라는 성을 새롭게 쓰게 된 것인지 불분명하다.
  • 왕실이 아닌 세습실권자 가문의 사례도 존재한다.
    • 고려 무신정권 시절에 최충헌이 교정별감이 되어 최씨 정권이 세워지면서 최충헌이 속했던 우봉 최씨 가문은 크게 번성했으나, 현재는 우봉 최씨가 개성 왕씨보다도 훨씬 적은 수백여 명만이 남은 상태인데, 이는 최씨 정권이 무너진 후 우봉 최씨가 대거 학살당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오사카 전투에서 에도 막부가 승리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어머니인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했으며, 히데요리의 아들이자 히데요시의 손자인 도요토미 쿠니마츠가 에도 막부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지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계혈통은 단절되었다.[52] 그에 따라 현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계후손만이 남아있는 상태다.[53] 오늘날 도요토미라는 성을 쓰는 일본인들은 혈통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무관하다.

12. 얼마나 많은 왕씨들이 희생당했는가?


왕씨들 '상당수'가 살해당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정확히 '얼마나' 죽었는지를 제시할 만한 단서는 부족했고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민족참역사 같은 유사역사학단체 등지에서는 20만을 제시하고 있지만 고려말 인구가 조선초 통계에서 역산으로 500만 가량으로 거칠게 잡히는데 왕씨가 20만씩이나 있었을리가... 또 왕씨가 아니라 양민 20만을 죽였다는 견해도 있으나 역시 근거는 없다.
2019년 재미 한국사학자 유진 박 펜실베니아대 교수의 연구#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초청강연을 통해 소개되면서 전기가 마련되었다. 박 교수는 강화도, 거제도, 삼척 등지에서 일어난 제거 작업으로 희생된 희생자 규모를 100여명 대로 규명했다. 이는 당시 희생당한 인물의 원혼을 빌기 위해 작성된 제문에 근거했는데 실제로도 공양왕 직계를 포함해 고려 말 왕위 계승권에 근접한 왕씨 '남성'을 중심으로 제거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여인들과 방계 왕씨, 조선 개국세력과 혼맥으로 얽혀 있는 인물은 숙청에서 제외되었다.
다 안죽였는데 왜 왕씨가 적냐고? 이성계가 직접 지명하여 빼준 두 왕씨 집안. 왕씨면서도 조선 건국에 협력한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 일가와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에게 딸을 시집보낸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일가를 보면 답을 알수있다. 왕승의 아들들은 전씨로, 왕우의 아들들은 노씨로 성을 바꿨다. 항우가 패망한후 유씨로 성 갈아버린 항백의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이성계가 직접 구명해준 두 사람의 집안이 알아서 기는데 방계들이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록에서도 핵심적인 왕씨들을 처리한 다음에는 숨어사는 왕씨의 존재가 들통나더라도 적당히 다른 성으로 바꾸게 한 선에서 그친 정황이 확인된다. 쉽게말해 인터넷에서 떠드는 왕씨 대량학살론은 야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턱없이 과장되어 있다.

고려 왕조에서 왕씨(王氏)로 사성(賜姓)이 된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本姓)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또한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4월 26일 을미 1번째기사

또한 인구 조사가 훨씬 더 체계성을 띈 지금도 고려시대 제 1성이었던 왕씨들이 모든 본관 통틀어도 83위에 최고 랭크될 정도로[54] 수가 줄었다는 거만 봐도 분명히 상당비율의 왕씨들, 그중에서 개성 왕씨들은 전체 대비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를 근거로 왕씨가 많이 죽었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성을 바꾼 인원들이 많을 수도 있기 때문.본관으로 비교하면 순위가 더 내려간다, 개성 왕씨는 223위로 거의 중하위에 있다.

13. 여담


왕씨 몰살과 굉장히 비슷한 학살사례가 있는데 방데 전쟁 당시 카리에가 주도한 낭트 수장이다. 낭트 수장도 학살 대상을 배속으로 몰아넣고 수장하는 방법으로 학살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주도 세력이 민심을 잃고 이후 집권한 세력이 학살을 중단시킨 점도 같다.
전 왕가 숙청은 아니지만 고려 초기에 광종은 신라 말 이래로 존재해오던 호족 세력을 대량으로 갈아낸 일이 있다. 단 왕씨 몰살에 비해서는 이쪽은 주목도 덜 받고 역사적 평가도 그렇게 부정적이지는 않다. 특정 성씨라는 이유로 마구 죽인 게 아니었고, 애초에 호족 숙청은 왕권강화를 위해 광종이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었다.
사실 이전 왕조의 성씨를 이토록 잔혹하게 말살한 것은 세계사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다. 그나마 직접 비교할 만한 사례는 베트남이다. 대표적인 경우 대월국(베트남)에서 쩐 왕조가 벌인 리씨 왕족 학살이다. 쩐 왕조는 훨씬 더 철저한 학살을 벌였기 때문에 대월국 내의 리씨 왕족은 일단 족보상으로는 아예 100% 삭제되어 대가 끊겼고, 고려로 도망간 '''단 한 명'''만 살아남아 가문을 이을 수 있었으니 바로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리씨들은 대부분 성을 응우옌으로 바꿔 살아갔다고 전해진다.[55] 그 외에도 쩐 왕조[56]응우옌반후에의 모든 자손과 친척들,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학살당했고 설령 살아남아 대를 이은 이들이 있었다고 해도 앞서 말한 리씨와 마찬가지로 성을 바꿨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지금 그들의 자손은 찾아 볼 수 없으며, 후에의 일가를 모두 죽인 응우옌푹아인이 건국한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조상인 가륭제의 업보를 잘 알기 때문에 미리미리 프랑스로 도망갔다.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전 왕조의 자손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고려 멸망 이후 개성 왕씨의 상황이 더 나아보일 정도인데, 적어도 개성 왕씨는 한국 본토에서 소수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 왕가가 통째로 숙청된 건 아니지만 홍건적의 난으로 원나라가 멸망할 당시 몽골족이 홍건적에게 학살당하고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당시 만주족한족 혁명군에게 학살당한 사례가 있다. 두 사례는 이민족의 정복왕조가 피지배민족이었던 한족들에 의해 멸망하는 과정에서 한족들이 각 왕조의 지배민족을 숙청한 사례인데, 양쪽 모두 중국 화남 지역에서 한족들의 봉기가 시작된 만큼 화남 지역에 살던 몽골족과 만주족의 인구 대부분이 그야말로 증발해버렸다. 현재까지도 중국의 몽골족과 만주족은 대부분이 중국 북부 지역에 사는데, 만주족의 경우 중국 남부 지역에서는 홍콩, 마카오, 윈난성 등 일부 지역에서 극소수가 살고 있으며, 몽골족 또한 중국 남부 지역에서는 윈난성에 극소수가 살고 있을 뿐이다. 원나라와 청나라의 황실은 각각 몽골 초원으로 돌아간 것청나라 소조정의 영향으로 한족들에 의한 직접적인 학살은 면했지만, 청나라의 방계황족들은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사실상 일반 만주귀족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선통제를 포함한 청나라 소조정의 황족들과 달리,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일반 만주족처럼 청나라가 멸망하자마자 매우 열악한 삶을 살게 되었다.

14. 창작물에서


창작물에서 왕씨 몰살 사건을 자세히 다룬 작품은 《조선왕조 500년 - 추동궁 마마》와 《용의 눈물》 정도다. 그나마도 전자는 실제 역사에서의 행보와는 정 반대로 이방원이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나와 고증이 제대로 되었다고 보기가 힘들다.
  • 조선왕조 500년 - 추동궁 마마》에서는 9회 중후반부에 나온다. 정도전(이효재 분)과 남은(변희봉 분)이 이성계(김무생 분)에게 건의해 거제도강화도로 왕씨들을 이주시킬 것을 허락받았으나 이방원(이정길 분)의 명을 받은 이숙번(김희라 분) 이하 이방원의 부하들이 왕씨들이 탈 배 4척에 각각 탑승해 한 밤 중에 도끼로 배에 구멍을 뚫어 수장시키는 것으로 나온다.[57] 이 때 한 고려 왕족의 하나를 소개하였다.
> 一聲柔櫓蒼波外
> 푸른 물결 밖으로 잔잔히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
>
> 縱有山僧奈爾何
> 비록 산승이 있다하나 자네는 어찌 할 텐가
  • 용의 눈물》에서는 24화 후반부와 25화 초반부에 걸쳐 왕씨들을 속여 배에 태운 뒤 수장시키는 장면과 군사들을 끌고 가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도륙내는 장면들을 묘사하고 공양왕까지 살해하면서 막을 내린다. 내레이션으로 학살의 전개와 이에 얽힌 야사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정도전(김흥기 분)이 주도해 개성 왕씨들을 잡아들이고 저항하는 구 세력들을 쳐내며 목을 졸라가는 과정과 재미삼아 본 사주를 빌미로 역적모의로 몰아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내켜하지 않았지만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에 왕씨 몰살을 윤허한 이성계(김무생 분)는 병이 생겨 의식을 잃고 누워있다가 왕건(김경응 분)이 "이놈, 난신적자 이성계야! 네놈은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네 어찌 내 용상을 뺏었는가? 네 이놈! 나의 나라를 역적질하여 빼앗고도 부족해서 또다시 나의 자손들을 바닷속에 수장하여 죽였느니라. 내 자손을 죽인 만큼 반드시 네게 되갚아 주리라!!!"며 이성계를 매섭게 몰아붙이자 관록의 맹장이었던 이성계답지 못하게 잔뜩 쫄아붙아서 무릎까지 꿇고 어쩔 줄 몰라하면서 "폐하!!!"라고 쩔쩔매다가 왕건이 다가가 이성계에게 칼을 들어 베어버리자 깜짝 놀라서 일시적으로 깨어난 후 왕씨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을 했지만 곁에서 이성계의 환후를 보던 의형제 이지란(강인덕 분)이 이미 왕씨들을 모두 죽였다고 말하자 탄식하면서 다시 의식을 잃고 드러누웠다. 아무튼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가 주도한 것이 아닌 정도전과 남은(이영후 분)을 필두로한 개혁파 중신들이 주도하고 이성계는 적극적으로 밀어주진 않으나 굳이 막지는 않다가 재가를 내려주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 부분은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충실히 고증한 것으로 기록상으론 이성계는 한발 물러나있다 공론을 받아들이는데 머물렀다.
2014년작 《정도전》을 비롯한 어떤 드라마와 비교해도 《용의 눈물》만큼 여말선초 왕조교체 과정을 탈법적이고 피비린내 물씬나게 그려낸 드라마가 없다. 김저와 정득후의 이성계 암살모의는 우왕에게 칼을 받은 두 사람이 이성계를 암살하려다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된 걸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정도전도 이 서술을 충실히 따랐는데 《용의 눈물》은 이를 각색해 우왕(권병준 분)은 쫒겨난 자신을 잊지않고 찾아준 신하들이 고마워서 정말 순수한 마음에 날없는 '과도'를 선물했는데[58] 이방원(유동근 분)이 곽충보(최헌철 분)를 협박해 '환도'를 주고 이성계 암살을 사주했다고 고변하라 조작한 걸로 그려진다. 정도전과 남은도 여기에 합세해서 정득후(주호성 분)는 이성계 면전에서 참살, 김저(이기영 분)는 감옥에서 옥졸을 시켜 교살해 버렸고 공초내용을 조작해 이색, 하륜, 권근, 이숭인, 변안열 등 정몽주를 제외한 온건파 관료들을 싸그리 엮어서 제거하고 자기 사람들로 조정이 가득차자 '우창비왕씨설'을 거론해 창왕까지 내몬다. 이 때의 묘사만 보면 정도전과 남은은 화흠이나 가충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공양왕 폐위 과정도 마찬가지인데 《정도전》에선 이미 체념한 정비 안씨가 큰 저항 없이 폐위 교서와 어보를 내놓지만 용의 눈물에선 칼과 갑주를 갖추고 대비전에 들이닥쳐 끝까지 버티는 안씨를 겁박하다 힘으로 빼앗아 강제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의 두 사위 우성범과 강희계가 항의하자 공양왕 면전에서 난도질해 도륙낸다.
  • 대왕 세종》에서는 배에 구멍을 내서 익사시키는 것으로 짤막하게 묘사되었고 그 외 《정도전》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이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으며 실제로 여말선초를 다루는 매체에서 정몽주와 더불어 다루기 굉장히 어려운 잔혹한 학살 사건이다. 그나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공양왕 처형이 나오기는 했고 안타깝게도 제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질 쯤에 공양왕의 아들이 이방원의 비밀 무기고에서 목숨을 잃는다. 물론 무명이 공양왕과 지속적인 거래를 했다는 것을 빌미로 공양왕을 비롯한 왕씨를 몰살했다.[59] 애초에 고려를 거악으로 표현한 드라마인만큼 왕씨 몰살에도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무명을 엮은 것으로 보인다.
  • 드라마 《정도전》의 경우는 드라마가 방영되던 시기에 대형 참사가 일어나서 왕씨들을 수장시키는 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긴 했으나 《용의 눈물》처럼 그냥 군사들이 베어 죽이는 걸로 묘사해도 상관없다는 걸 감안하면 조선 건국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안하고 넘어간 게 맞다. 그나마 왕씨 학살은 짤막하게 언급이라도 되는 형편이고, 권문세족에 대한 재평가(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 구분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는 아예 다큐로도 다뤄진 적이 없다.

[1] 백제 왕성인 부여씨는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후 당나라 귀족이 되었거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여융 문서로. 고구려 왕성인 고씨 중 일부는 당나라의 귀족이 되었는데, 고선지 등 대표적인 케이스. 또 일부 고씨는 발해 건국에 참여하면서 중앙 귀족이 되었고, 다른 일부 고씨는 신라에 귀순하였는데, 고안승진골이 되면서 김씨 성을 사성받았고 그의 형인 고인승은 횡성 고씨의 시조가 되었다. 안승 문서로.[2] 그런데 이 사건은 이상한 면이 있는데 사실 김가행과 박중질은 자의가 아닌 누군가의 지시로 물어보았다. 박위가 그 주인공인데 이 일이 들통나 김가행, 박중질, 이홍무(점을 본 점쟁이), 왕화, 왕거(이홍무가 운세가 좋다고 한 이들) 등이 잡혀가고 이들은 모두 결국 죽게 된다. '''박위만 빼고''' 더하여 이 사건이 일어난 후 대신들의 청도 가관인데 보통 같으면 이런 사건이 터지면 끽해봐야 "김가행, 박중질, 박위 공양군, 이홍무, 왕화, 왕거를 죽이소서" 라고 해야 정상이고 실제로 박위 빼고는 모두 죽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렇게 되기도 했고 그런데 이들은 그 주장이 "재주 뛰어나고 용맹한 왕씨들을 섬으로 옮겨 살게 하소서" 라는 것이었다.[3] 일족을 모아다가 호의를 베푸는 척 좋은 곳으로 이주시켜 준다며 배에 태워 보낸 뒤, 미리 명령을 받았던 뱃사공이 '''밑창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단 이는 야사의 기록이며 실록에는 단지 바다에 던졌다고만 기록한다.[4]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지나치게 왕족들이 많아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태조 사후 혜종이 즉위하자, 강력한 호족 출신인 왕규가 난을 일으키는 등 건국 초기 왕권이 위협받을 정도로 왕권이 취약해지는 악영향을 초래했다. 이 문제는 후에 광종이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반항하는 호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해결되었다.[5] 신라는 내물왕 이전까지는 박, 석, 김 3씨가 돌아가면서 임금을 했었고, 김씨 왕조가 고착화된 이후에도 내물왕계와 무열왕계가 임금 자리를 놓고 끊임없이 권력투쟁을 하고 있었다. 물론 후삼국시대에는 박씨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그마져도 후백제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사망하면서 김부가 경순왕이 되어 다시 김씨가 정권을 잡았다.[6] 다만 여기에 끼지못한 듣보잡 구 신라 귀족계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 신라부흥운동이기는 한데 별 호응을 못 받고 무관심 속에 관군에 패해 궤멸되었다.[7] 이미 고려의 권문세족은 친원파가 숙청된 이후에도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갖다버린 지 오래였다. 원으로부터 독립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공민왕조차 내부 개혁을 시도하기도 전에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민왕은 귀족들에 대한 방패막으로 삼는 동시에 권문세족을 상대할 친왕세력을 육성하려 신돈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의 난산 후 승하로 인해 정치적, 심리적 지지 기반을 잃게 되었고 공민왕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의심병으로 인해 신돈조차 자기 손으로 숙청하면서 유일한 친왕세력조차 잃게 되었다. 이는 마침내 공민왕이 현실에 절망하고 폭주하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8] 대표적인 정책이 사병 혁파와 향, 부곡, 소를 현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모든 지방에 수령을 파견한 것이 있다. 사병 혁파를 통해서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귀족들의 지지기반을 빼앗았고, 모든 지방에 수령을 파견시킴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시켰다.[9] 흔히들 두문동 설화를 예로 들며 고려 왕실에 대한 충심으로 사대부들이 조선에 반발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이미 급진 사대부든 온건 사대부든 고려 왕실을 갈아 엎어야 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다만, 정도전을 위시한 급진사대부들은 조선 건국의 개국 공신으로써 특권을 얻을 수 있었지만, 온건 사대부들은 개국공신에 해당되지 않아 별다른 특권이 없었고, 이는 곧 조선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10] 실제 최영은 정치 군인이었던 이성계와 달리, 순수한 군인에 가까웠고,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언을 평생 지키고 살았다는 점이나, 고려 최후의 충신이자 무장이라는 점에서 구 기득권층들에게 많이 이용당했다. 그러나, 이미 고려에는 최영을 제외하고는 충신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으며, 온건 사대부들 역시 최영이 제거되자 이성계의 눈치나 볼 뿐이었다.[11] 공민왕이 정비로부터 후사를 보지 못했고 우왕의 생모인 반야가 신돈의 노비임을 이용한 것.[12] 이들 중 조준의 경우는 공양왕을 직접적으로 디스한 적이 있었던지라 공양왕이 정권을 찾았다면 영영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공양왕이 대지주였다는 점도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추구했던 조준을 실각시키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 수도 있다.[13] 수수께끼 투성이라 추측만이 가능하긴 하지만, 공양왕도 이 과정에서 뭔가 사건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해당 문서로.[14] 이성계가 이 일을 계기로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15] 하지만 왕씨 성을 받은 사성왕씨의 경우 조선 건국 시점에 옛날 원래 성씨로 다시 되돌렸다. 태조 왕건 때 왕씨 성을 하사받은 김순식강릉 김씨의 경우가 대표적.[16] 실제로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고나서 몇년 후에 태종으로 즉위를 하는데 조선이 개국한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조선왕조에 대한 민심이 흉흉해서인지 1413년 왕씨몰살을 공식적으로 중지하기는 한다. 물론 본인도 왕씨 학살을 주청한 적이 있는지라 결국 잘 보이기 위해 고수하던 입장을 되레 바꿔버린 것.[17] 주로 전(全)씨나 옥(玉)씨 등의 성으로 바꿨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천안 전씨 문서로.[18] 그의 무덤이 있는 곳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 왕방골이라 한다.[19] 다만 촌수로 따지기에도 애매하고 왕실본가와 너무 먼 집안은 성을 바꾸거나 하는식으로 학살을 피해갈수 있었다.[20] 대표적으로 한국의 유명한 여배우 전지현이 본명이 왕씨라서 화교 의심을 받았을 정도였다.[21] 속현, 소 같은 고려시대의 차별적 행정구역은 조선개국후에 바로 사라진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사라지다 16세기에 가서 완전히 사라졌다.[22] 다만 사성받은 왕씨나 일반 왕씨는 그 후 성을 바꿔서 살아남은 것으로 여겨지고, 성을 바꾸지 않은 왕씨들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23]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룰 때 초나라 정복을 맡은 왕전이 이거 끝나면 땅과 집을 달라고 자꾸만 요구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자신은 재물이나 탐내는 인간일 뿐 권세엔 관심없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다.[24] 건국 이전에만 해도 태조 소유의 땅은 함경도 크기의 1/3 정도 크기였다. 이 정도 수준이니 공양왕이나 태조나 뭐가 다른가?[25] 물론 이성계 본인은 권문세족과 같은 부패한 인물이 아니긴 했지만, '''노예''' 출신 창업군주인 석륵이나 '''빈농''' 출신 창업군주인 주원장에 비하면 사실상 기득권 수준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더군다나 태조의 재산 규모를 보면 권문세족급이라 할 만하다. 처지 때문에 그들과는 엄연히 다르기는 했지만...[26] 심지어 이직, 이제 같은 경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인임'''의 아주 가까운 혈족이다(...). 말할 것도 없지만, 이인임은 우왕 정도를 제외한다면 썩어빠진 고려 사회에 대한 책임이 그 어느 왕씨보다도 큰 인물이었다.[27]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보면 어쩔 수 없었다. 위화도 회군의 원인이 된 요동정벌은 애초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했다 실패하면 실패하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빡친 명나라가 압록강 넘어 쳐들어올 수도 있었던 문제였다. 외환의 죄라 볼 수 있겠지만 좀 멀리 보면 불가피한 측면도 없진 않았다.[28] 이는 윤이 이초 사건 당시 "공양왕은 실은 왕씨가 아니고 이씨다."라고 말한 것과도 맥락이 닿아있다. 이딴 말을 했는데 그걸 가만히 덮으면 그것도 문제다. 물론 연루자들이 연루자라 그런지 때마침 이색, 이숭인 등이 갇히고 얼마 안 가 큰비가 내려 감옥이 잠기기까지 하자 공양왕이 "이는 하늘의 뜻이니 그냥 풀어줍시다." 라고 해서 풀어주지만.[29] 송나라의 경우엔 하필 선양이 아닌 정복으로 망했기 때문에 비참했다.[30] 청나라 같은 경우에는 푸이의 말년이 파란만장했던 것은 자기가 퇴위한 후 새 왕조가 세워진 게 아니라 공화국이 세워졌고, 본인도 어쩔 수 없던 면도 있었지만(국민정부에 의해 조상들 무덤이 도굴당한 적이 있다.), 일본과 협력하기도 하는 등 벌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짓도 했다. 그래도 푸이는 목숨을 부지하고 평화롭게 말년을 보냈으니 푸이 신세 정도는 아주 나쁜 편은 아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푸이 개인 차원에서 그나마 나은 케이스이고 청나라 황실 전체의 입장이나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 전체의 입장으로 범위를 넓히면 엄청나게 비참한 상황이다. 안 그래도 동치제가 자녀 없이 서거하여 직계가 단절된 청나라 황실이 방계 출신 황제인 광서제와 푸이 모두 자녀 없이 서거하는 바람에 정통성 측면에서는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으며, 만주족은 나라 없는 민족이 된 걸로 모자라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31] 사실 이런 일은 연좌제가 보편적으로 금지된 현대에도 비일비재한 일이긴 하나,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정당하거나 옳은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32] 근데 정작 동진은 북위와 더불어 5호 16국+남북조를 통틀어 100년 이상 간 유일한 왕조다(...) 물론 북위와는 달리 존속기간 내내 황제는 요절하고 권신이 집권하며 제대로 조용할 날이 없는 개판이기는 했다.[33] 실제로 위나라의 조씨 일가는 서진, 동진 시절 진류왕 작위를 이어갔다.[34] 당연히 이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신하들이 멋대로 주동해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재위 당시 이성계의 권한이 만만한 게 아니다.[35] 이는 중국사에서 서진의 건국에 제기되는 문제와 유사하다. '역사적 의의'에 있어서, 전근대 중국사의 사가들 중 서진의 정통성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 사가는 없다. 조위정통론이나 촉한정통론은 후한의 후신이 어디냐는 문제였지 서진이 정통 통일왕조인지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맥락상에서의 위치와 별개로, 사마소고귀향공 시해 등 패역적인 정권 교체 과정은 당대인들 입장에서 '니들이 깡패지 황제냐' 라고 혀를 찰 일이었고, 이것은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미숙했던 것이다.[36] 다만 이는 부정하는 의견도 크다. 애초 이방석의 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지는 뿌리깊은 권문세족 출신에 이방석과 이방석과 가까운 이제(태조의 사위) 등도 구 지배 세력와 인척지간이었으며 이방번(이방석의 친형)은 아예 공양왕의 조카딸과 혼인한 사이였다.[37] 물론 해당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이 당시는 그 조선왕조실록조차 왜곡 의혹이 짙을 정도로 참/거짓 판단이 어렵기도 하다.[38] 주의: 저 3차례의 사건이 단순히 교전 규모가 작고[37] 처벌자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대사건이라는 호칭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다름 아닌 왕조 국가에서 왕족끼리 도성에서 정면으로 수천, 혹은 수만 단위의 군사를 동원해 충돌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사건들이 자칫하면 왕조의 위기를 부를 수도 있었던 대사건들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는 왕씨 척살 사건과 저 3차례의 난 모두에 직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39] 야사처럼 내려와 불확실하지만, 내씨도 왕씨에서 성을 바꾼 사례라고 한다.[40] 실제로 고려는 호족들을 포섭하면서 통일을 이룩했기에 지방의 봉건 귀족들과 정략결혼을 맺는 동시에 왕씨 성을 하사하는 일이 많아서 기존 왕씨들과 혈통적으로 관련이 없더라도 왕씨 성을 가진 귀족이 많았다. 척준경의 절친인 왕자지도 왕족은 아님에도 왕씨 성을 가진 사례.[41] 이러한 행동은 왕위를 빼앗긴 구 왕가의 보복, 혹은 구 왕가를 중심으로 한 구 세력의 결집 등을 예방할 수 있다. 즉 새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 이러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42] 다만 이때는 유선, 헌제, 손호 같은 망국의 마지막 군주들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43] 그래도 호찌민은 바오다이를 이웃나라 중국의 청왕조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와 같이 공산 체제에 편입시키려고 하는 등 구 응우옌 황실을 존중하려 했다. 물론 정작 응우옌 왕조를 무너트린 장본인인 응오딘지엠은 그런 거 없었다.[44] 황제면서 정글에 들어가면서까지 프랑스에 맞서 싸웠고 그 기간만 3년에 달한다.[45] 그 업보인지 해릉양왕 본인도 쿠데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해릉양왕의 자손들도 몰살당했다.[46] 사실 영락제가 쿠데타조카를 몰아내고 황위에 올랐음을 감안하면 영락제의 업보라고 볼 수도 있다. 단지 같은 한족이 아니라 이민족의 주도로 영락제의 후손들이 몰살되어서 그렇지... 허나 영락제 입장에서도 할말이 있는게 먼저 선빵을 친 것은 영락제가 맞지만 당시 건문제는 왕족들을 하나하나 숙청하고 있었고 또 그 최종점은 영락제였기에 그대로 죽기 VS 저항이라도 해보기의 선택지가 강요되었다. 물론 성공한 이후의 모습은 조금 비윤리적이지만[47] 주원장의 미미한 아들의 자손인 화가 석도나, 주원장의 직계도 아닌 화가 팔대산인도 명나라 황실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몰살위기에 몰려, 승려가 되어 미친 사람처럼 살면서 그림이나 그리다가 자손도 남기지 못했는데 하물며 직계인 영락제의 자손이 남아 있었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48] 다만 현재는 합의에 따라 둘 다 왕위 요구자/아시아 항목에서 삭제되었다.[49] 그나마 만주국의 왕위 요구자는 선통제의 이복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런의 후손이라서 선통제의 가까운 방계자손이지만 청나라의 왕위 요구자는 도광제의 직계후손이며 함풍제부터 선통제까지의 청나라 황제들에게는 모두 방계후손이다. 대한제국의 왕위 요구자들이 모두 고종의 직계자손이며 그에 따라 순종의 가까운 방계자손인 것과 비교하면 후자가 매우 안습한 상황이다.[50] 황족 뿐만이 아니고 일반 한족 백성들도 같이 수십만 이상씩 갈아버렸다.[51] 단 영국에 나가 있던 샤리프 알리 빈 알 후세인 등 이라크의 하심 구 왕가 사람들은 생존했다. 이 때문인지 이라크의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이라크내 일부 군주주의 세력들 사이에서는 영국에 거주 중인 이들을 내세워 이라크의 왕정복고를 추진해보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52] 다만 이는 히데요시의 자업자득인데 히데요리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히데요시의 후계자는 조카인 히데츠구였는데 문제는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를 숙청한다. 그런데 히데츠구만 죽인 것도 아니라서 히데츠구와 그의 처자 30여명까지 몽땅 죽였다. 히데츠구가 히데요리의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만큼 우환을 방지하기 위해선 잔혹한 숙청이 어느정도 필요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되었다. 히데요시의 후계자였던 만큼 히데츠구는 유력 다이묘들과 혼인관계에 있었는데 히데츠구의 처자까지 죽였다는 것은 그 다이묘들의 딸과 외손자까지 죽였다는 얘기이므로 이에 일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을 들기도 했으며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와 그 어린 쿠니마츠까지 죽었음에도 당대 백성들도 그래도 히데요리에 대해서는 히데요리 생존설이 도는 등으로 보아 동정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태합 전하가 히데요리에게 천하를 물려주기 위해 죄없는 히데츠구와 그 일가를 학살한 업보" 라고 말했다.[53] 정확하게는, 히데요시의 누나의 아들 하시바 히데카츠와 사극으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오고우(요도도노의 여동생) 사이에 낳은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 다만 그녀가 자식을 많이 낳아 방계후손이 많이 퍼지긴 했다.[54] 김해 김씨(가야)가 1위, 밀양 박씨(신라)도 2위, 전주 이씨(조선)도 3위, 경주 김씨(신라)도 4위였다. 고구려, 백제처럼 외세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왕족도 없었을 텐데 부여 서씨와 더 가까운 순위다.[55] 만약 현대 베트남인들 중 리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리 왕조의 후손이 아니라 중국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56] 다만 쩐씨 학살의 경우 리씨 학살과 달리 호꾸이리가 호 왕조를 세울 때 자신의 찬탈에 방해되는 쩐 왕조 황제와 황족을 살해하였고,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황족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그래서 호꾸이리는 전 왕조 숙청에 있어서는 쩐 왕조보다 욕을 덜 먹는 편이다. 그리고 호 왕조가 명나라에게 멸망당하자, 옛 쩐 왕조의 왕족을 황제로 추대하여 일시적으로 후 쩐 왕조가 건국되었다. 그래서 현대 베트남에 쩐씨가 많이 남아있다. 당장 쩐다이꽝부터가 전근대 베트남의 정치인이 아니라 현대 베트남의 전 국가주석이었다.[57] 공양왕의 형 정양군 왕우와 다른 왕족 한 사람은 고려 왕실의 제사를 지내게 하기 위해 예외로 두었다.[58] 다만 두 사람 모두 "왜 하필이면 칼이란 말인가"라며 난감해하기는 했다. 다만 작중 우왕이 정치적 감각이 모자라고 다소 어리숙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만큼, 칼이라는 것이 꼬투리잡힐 수 있는 물건임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59] 애초에 태조 왕건 때부터 고려 왕실과 동맹을 맺었으니 교류가 있었다한들 이상할 건 없지만, 조선 왕실 입장은 무명같은 조직을 때려잡는 입장이기에 명분으로도 좋았던 것이다. 뭐.. 이방원도 무명을 이용하긴 했지만 이용해서 버릴 용도로만 썼을 뿐이고 때려잡으려고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