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역사

 



1. 개요
4. 동프랑크 왕국 - 독일 왕국
6. 종교전쟁과 30년 전쟁
8.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
11. 전후 분단과 동서독 통일
11.1. 통일 후유증
12. 관련 문서


1. 개요


독일역사를 다루는 문서.

843년 베르됭 조약부터 현재까지의 독일의 역사를 다룬 타임맵.

2. 로마제국 시기: 게르마니아


기원전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발트해 연안 지역에 머물던 게르만족은 기원전 2세기경 남하를 시작하여 기원 전후 라인강과 도나우강까지 진출했다. 로마에서는 이 땅을 게르마니아라고 불렀다. 기원전 50년경 갈리아 정복에 나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군과 게르만족이 최초로 접촉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일부를 차지하려고 시도했으나 게르만족의 호전성과 게르마니아의 울창한 숲을 이용한 게릴라 전투의 위험성을 깨닫고 곧 포기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 필적할만한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자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게르마니아 전역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라인강의 경계를 엘베강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은 로마 제국 역사를 통털어 최대의 정복 사업이라 할 만했는데, 무려 11개 이상의 군단이 투입되었다. 기원전 9년 시작된 게르마니아 정복은 기원후 4~5년경 엘베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기원후 9년 벌어진 유명한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군이 로마군에 대승을 거두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 참패를 당한 로마제국은 이내 라인강 건너로 물너나고 만다.
이로써 게르마니아는 오늘날 서유럽 지역에서 유일하게 로마제국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으로 남게 되었고, 게르만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 종교(북유럽 신화아리우스파 기독교) 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토이거부르거 숲의 전투의 승리를 오늘날 독일 정체성의 정신적 근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1] 그러나 일부는 이러한 시각이 19세기 독일 통일 이후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태동한 역사관일 뿐이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근세까지 독일 지방에서 살고 있는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 더 거슬러 올라가면 트로이인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로마인들이 자신들이 트로이 인들의 후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19세기 민족주의의 열풍 속에서 크게 재부각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독일 민족의 정신적 근원으로 보는 시각은 충분히 존재했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세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 개념이 희박했고, 종교로서 기독교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기준이 중요했기 때문에 중세시대에는 기독교 세계의 일원이라면 언어가 다른 것에는 크게 구애되지 않았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중세 시대에는 교황이 있는 로마를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여겼고 매우 중시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세 시대 독일인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이라고 여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0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과정에도 이러한 측면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중심, 로마 중심의 세계관은 중세 시대에 한정된 세계관일 뿐이며, 그러한 중세 시대조차도 게르만이라는 민족 의식은 분명히 존재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15세기(1485년) 국명에 '독일 민족'을 추가하여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으로 국호를 고쳤다. 중세 말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네덜란드 태생이자 스페인 국왕이었음에도 '숭고한 게르만'을 들먹거릴 정도였다. 아르미니우스와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독일 정체성의 기원으로 본 사람들은 이미 19세기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독일 민족정신의 근원으로 여긴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르미니우스라는 라틴어 이름을 헤르만이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처음 부른 것도 루터였다. 무엇보다도 고대 시대에 벌어진 토이토부르크 전투 당시 게르만인들은 자신들이 로마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군에 굴복한 게르만 부족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나아가 그들은 폭압적인 식민 통치를 하던 로마인들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게르만족은 수많은 로마군 포로들을 생포할 수 있었다. 게르만족은 포로 교환을 통해 로마제국으로부터 막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고, 또 포로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부려먹거나 외국에 노예로 팔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이나 노예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로마인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포로들은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로마인에 대한 게르만인들의 적개심을 엿볼 수 있는 일면이다. 나중에 복수를 위해 게르마니아로 재출병한 로마군이 토이토부르크 숲에 도착하여 시체들이 나무에 박혀 있는 잔혹한 장면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복수를 포기하고 시신만 수습하고 돌아갔을 정도였다.
서기 98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저술한 유명한 게르마니아에 당시 게르만족의 특징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게르마니아에 따르면 게르만인들은 호전성과 복종심, 일부일처제, 혼전순결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타키투스가 바라보는 게르만인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고귀한 야만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로마 제국 말기인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훈족의 압박 등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고,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인 481년 클로비스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세워진다.

3. 프랑크 왕국 시대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세워진 프랑크 왕국(481~843)은 게르만족의 최초의 국가 정치 체계였다. 프랑크 왕국은 처음에 프랑스 북부와 네덜란드 남부, 독일 중서부 지역에서 일어나 점차 영토를 확장했다. 클로비스는 서부 프랑스와 남서 독일의 슈바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클로비스가 사망한 후인 531년에는 다른 게르만족 국가인 부르군트 왕국을 병합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은 특유의 분할 상속제 때문에 여러차례 왕국이 분열되었다가 재결합되기를 반복했다.
751년 궁재 피핀이 국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메로빙거 왕조가 끝나고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카롤루스 대제 때 활발한 영토 확장으로 프랑크 왕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작센, 바이에른, 롬바르디아 등이 이때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나중에 독일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국(Stem ducky) 중에서 프랑크 왕국 초기에 병합된 로트링겐, 프랑켄, 슈바벤을 '구 부족 공국(Älteres Stammesfürstentum)'으로, 카롤루스 대제 때 새로 병합된 작센, 바이에른을 '신 부족 공국(Jüngeres Stammesfürstentum)'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4. 동프랑크 왕국 - 독일 왕국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후 843년 프랑크 왕국은 세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베르됭 조약). 이때 루트비히가 차지한 동쪽 지역(현재의 독일 지방)이 동프랑크 왕국이 된다.[2] 서프랑크(프랑스)에 비해 동프랑크는 카롤루스 대제 때 새로 병합된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각 공작령들의 독립성이 강했다. 동프랑크 왕국의 왕권이 약해지는 과정에서 각 부족들의 독립성과 자치권이 강화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카롤링거 왕조 마지막 국왕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900년경 동프랑크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작령인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로트링겐은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획득했고 이들을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의 5대 부족 공국(Stem ducky)라고 한다.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 4세(재위 900~911)이 어린 나이에 후사없이 죽으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기게 되었다. 동프랑크 공작들의 회의를 거쳐 루트비히 4세의 친척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재위 911~918)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 1세 시절 왕국 내 각 부족 공국들의 자치가 더욱 강화되었다.
콘라트 1세 역시 후사 없이 죽게 되었다. 콘라트 1세는 죽기 전에 당대 가장 유력한 제후였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재위 919~936)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작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했던 경쟁자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와 슈바벤 공작이 하인리히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다. 결국 하인리히는 바이에른과 슈바벤의 이권과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협상을 통해 공작들 모두로부터 승인을 받아 919년 국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와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한 하인리히 1세부터 독일 왕국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하인리히 1세는 '독일국'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고, 자신을 '독일인(게르만인)들의 왕'이라고 불렀다. 하인리히는 왕국의 결속력을 강조했으나, 아르눌프의 바이에른 공국 등은 사실상 별도의 왕국과 다름없는 자치권을 누렸다. 공작들은 자치권의 확대를 추구했지만 프랑크 왕국 시절과 달리 더이상 왕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편 콘라트 1세 이래 공작들의 동의를 얻어 국왕으로 선출되는 관례는 이후 신성 로마 황제를 선출하는 관례로 이어지게 된다.

5. 신성 로마 제국 시대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어 독일왕이 된(936년) 그의 아들 오토 대제(오토 1세)는 962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제국(아직 정식 명칭은 '(로마) 제국'Imperium이었지만)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른바, 독일 제1제국)은 이웃 프랑스 왕국과는 달리 단일 민족 국가로 변화하는 데 실패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고대 시대로부터 이어온 게르만족의 전통이 기인한 바가 컸다. 고대 시대 게르만족은 하나의 정치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뉜 가운데, 특유의 종사제를 발전시키게 된다. 이것이 발전하여 중세 시대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중간에 프랑크 왕국 시절을 거치기는 했지만, 프랑크 왕국은 현재의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로 로트링겐, 프랑켄, 슈바벤은 비교적 초기에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지만 작센, 바이에른이 프랑크 왕국에 포함된 것은 카롤루스 대제 때의 일이었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곧 왕국이 분열되었기 때문에 서쪽 일부를 제외한다면 독일 지역이 프랑크 왕국에 복속된 시기는 실질적으로 반세기 정도에 불과했다. 때문에 동프랑크 왕국 시대로 이어지자 반세기 전까지 각자 다른 나라였던 5대 공작령이 독립성을 강하게 유지했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대가 끊기자 5대 부족 공국들의 힘이 강해졌고, 다음 왕들은 줄줄이 5대 제후들의 승인을 거쳐서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초기에 제국을 구성하던 5대 공국은 차츰 분할 상속과 분쟁들을 통해 수없이 쪼개지게 되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분할 상속의 관습이 있던 프랑크 왕국의 중심부에 가까운 서쪽 지역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때문에 서부 독일은 수없이 많은 소규모 영주국으로 분리되었다. 반면 프랑크 왕국에 병합된 시기가 짧았던 동부 독일은 분할 상속이 적용되지 않아 비교적 큰 규모의 공국과 왕국이 유지될 수 있었다. 때문에 동부 독일에서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작센[3],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의 대공국과 왕국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흘러가면서 황제의 실권이 점차 약화된 것도 제국이 수많은 영주국으로 쪼개지던 추세와 궤를 같이 한다. 황제의 실권은 현실적으로 그가 세금을 징발하고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직영지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작센 왕조들의 황제들은 제국에서 가장 강했던 작센 공국에 기반하여 비교적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센 공국은 빠른 속도 분할되어 갔다. 게다가 초기에는 어떠한 제후들에게도 속하지 않은 황제 직영지가 있었는데, 그런 황제 직영지도 점차 소멸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정체성을 정하지 못했다. 실제로 제국의 황제는 독일 내부의 강력한 지방 귀족들을 제압하지 않은(못한) 채, 그 정체성을 이탈리아에서 찾고[4] 이탈리아를 차지하여 그 정치적 토대를 두려고 하였다. 독일의 민족적 신화가 된 바르바롯사도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등을 거치며 황제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으며 결국 누구도 황제로 선출되지 못한 대공위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다. 대공위 시대 직후에는 스위스 일대에 조그마한 땅을 가진 듣보잡 합스부르크 출신루돌프 백작이 황제로 선출되면서 황권이 다시 한번 약화되었다.
1356년 카를 4세에 의해 금인칙서가 반포되었다. 카를 4세는 제국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의도에서 금인칙서를 제정했으나, 유력 제후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황권을 일부 양보하였는데, 결과적으로 황권을 약화되고 제후들의 권한이 강화되어 제국의 분열을 촉진시켰다(...)
중세 성기에 한자동맹 등 상업이 융성하던 독일은 1450년 무렵부터 르네상스 시기가 되면서 독일 민족 의식이 탄생하게 된다. 독일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에 대한 탐구로 게르만인상을 독일인상으로 대입시켰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같은 책에서 등장한, 로마인들이 그려낸 게르만인을 독일인과 동일시하였던 것이었다. 그와 함께 마르틴 루터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운동이 발생하였다.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인문주의자들이 그려낸 독일인상은 개신교와 연결이 되었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이탈리아인들(또는 프랑스인)과 대비되었다. 따라서 민족적인 대립 구도가 발생하였고 독일 민족의 초기 형태가 형성되었다.

6. 종교전쟁과 30년 전쟁


1450년 무렵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여 유럽의 많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450년 무렵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 일대의 4개의 공작령을 보유했던 신성 로마 제국 내 잘나가는 여러 제후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 정책이 연거푸 대박을 터트려 네덜란드 저지대 지역, 부르고뉴의 일부, 스페인, 이탈리아의 상당한 지역 등 막대한 영토를 상속받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인 카를 5세페르디난트 1세는 현명한 할아버지(막시밀리안 1세)를 둔 덕분에 막대한 영토를 상속받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융성은 근세 독일 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면도 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 반박문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의 물결은 삽시간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나 1521년 황제가 된 카를 5세가 제국의 종교 일원화를 명분으로 종교개혁에 완강히 반대하면서 신교도들을 탄압하고 1555년까지 30년간이나 종교적 갈등을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카를 5세가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면 제국의 종교는 평화롭게 개신교로 일원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 물론 독일에도 가톨릭 신자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이것을 강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겠지만 적당히 형식만 바꾸는 경우라면 말이 될 수는 있다. 당시 독일 제후들이 대거 가톨릭을 버리고 개신교로 전향한 것은 종교적 소신 이외에도 독일 정세에 간섭하는 교황의 영향력에 벗어나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종교개혁은 사실 그동안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애썼던 황제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카를 5세가 너무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었다. 카를 5세 역시 평생 교황들과 치열한 권력 싸움을 했지만 그는 너무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을 버릴 수 없었다. 만약 다른 가문 출신이 황제가 되었다면 30년간 종교 전쟁을 수행할 현실적인 능력이 부족해서라도 종교 전쟁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를 5세는 막대한 영토를 보유했기 때문에 스페인과 네덜란드 저지대 지역 등에서 징발한 병력들을 가지고 독일에서 30년간이나 종교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런 보유하고 있던 영토에서도 가톨릭을 유지하려는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가톨릭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30년간 지속된 종교 전쟁 때문에 독일 제후들과 자유도시 시민들은 신교, 구교할 것 없이 지쳐버렸고, 개신교가 박멸되는 마지막 그날까지 항전을 다짐했던 황제를 거부하고 집단 항명하여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맺게 된다. 이후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는 문화적, 정치적으로 북부독일과 독자적인 색체가 강해진다. 게다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독일 각 제후국의 정치적, 종교적으로 독자성이 더욱 강화되어 제국의 결속력은 약해졌고, 황제의 권위도 크게 실추되었다. 이제 제국은 결속력 있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독일 영방 간의 동맹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군주의 종교가 곧 통치 영역의 종교라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한계는 결국 30년 전쟁(1618-1648)을 초래하게 된다. 30년 전쟁을 거치며 독일 강토는 황폐화되었다. 독일 지역에서만 1500년에 인구가 12,000,000명에 달했지만 이후 증가하던 인구도 지속적으로 조금 줄어들기 시작할 정도였다. 자세한 내용은 독일/인구 참조. 게다가 승전국인 프랑스 등은 독일의 힘을 약화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의 힘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자체도 축소시켰고 제국 내의 300여개의 영방국가들을 사실상 개별적인 독립국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30년 전쟁으로 제국이 무능력화된 측면도 있지만 부분적으로 기능은 존속하였다. 제국 법정이 존재하여 약소국 간의 분쟁은 해결될 수 있었다. 여기에 제위를 거의 세습하다시피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여전히 유럽의 막강한 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독일 영방 제후들은 자의적으로 타국에 권한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30년 전쟁 이후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 통일의 걸림돌이 되었다. 30년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유명무실해지기도 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습성 자체가 분리지향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유한 영지는 분리된 각 영지가 이질적인 성격을 가졌고 독립적인 특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해서 통합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보유 영토를 통치하는 하나의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각 영지의 여러 작위를 과시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례로 현재 오스트리아를 구성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산하 네 개의 독일어권 공국들은 이미 14세기부터 정치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나라나 다름없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1차 세계 대전으로 망할 때까지 이 영토를 결코 통합하지 않았다. 현재의 오스트리아는 1918년까지 하나의 나라가 되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 공국, 케른텐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등의 여러 개의 작은 공국으로 분리된 상태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프로이센이 계속 이질적인 영토를 병합하면서도 하나의 프로이센으로 통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근세 시대 독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였지만, 이렇게 여러 지역을 지배했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결국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면서 오스트리아 지역을 제외하고 나서야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7. 프로이센 왕국의 강성


  • 이 항목부터는 프로이센 항목을 참고하는게 도움이 된다.
이 시점에서 독일사와 오스트리아사의 분기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프로이센의 성장과 함께 북독일 지역에 대한 영향력 감소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바꾸도록 만들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 가장 막강해진 독일 영방 제후국은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본래 발트인의 땅이었으나 수백년에 걸친 동방식민운동으로 독일인이 많이 살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제후국이면서도 제국 밖에 영토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장이 용이하였고, 통치자가 '왕'의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해 용인받을 수 있었으며, 프로이센의 세력확장으로 1709년 베를린으로 수도를 삼고, 또 군인왕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사력 강화로,[5] 그 뒤 그의 아들인 대왕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는 아버지의 군사력 강화를 잘 써먹어 오스트리아와 제1,2차 슐레지엔 전쟁의 승리로 슐레지엔 영토를 확보했고 7년 전쟁에서 승리로 적극적으로 군국주의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절대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지역은 경제적으로 크게 발달한 곳은 아니었다. 독일에서 경제적으로 발달한 곳은 오히려 엘베강 서쪽이었고, 프로이센은 그렇게 발달한 지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거의 폐지되어 가고 있었는데 엘베강 동부는 재판농노제라 하여 오히려 농노제가 강화되었다. 그 지역의 영주들을 일컫는 명칭이 융커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상공업을 천시하였지만,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영지의 경영에 적극적인 이윤을 추구하였다. 프로이센은 산업의 발달은 늦었고 시민 계급은 미약했다.
프로이센의 왕은 계몽 절대 군주를 표방하였다. 계몽주의와 절대주의는 사실 모순되는 것이었으나, 국가의 낙후성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러한 구호를 내걸었다. 동시에 프랑스볼테르와 같은 해외 석학들이 초빙되기도 하였다.

8.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에 큰 위기가 닥친다. 혁명 프랑스군의 뛰어난 활약으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크게 패한 것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탈탈 털리자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고, 라인 동부의 독일 지역에 라인 동맹이 세워졌다. 프로이센은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패권을 상실하였다. 이는 오히려 독일 민족 의식이 전 계층에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나폴레옹 정권은 독일에 개혁을 수행하면 독일인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보낸 왕들이 다스리는 괴뢰국(대표적으로 베스트팔렌)으로 구성된 라인 동맹은 부패의 온상이었고 개혁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인들은 독일인들에게 압제자로 보였고 타도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프랑스인에 대비되는 독일민족상이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나폴레옹 타도 이후 1815년 빈 체제가 수립되었다. 기존의 전제 왕정은 유지되었다. 제국을 대체하기 위한 정치체로 독일 연방이 생겨났다. 1820년에 프로이센 왕국의 영역을 모두 포함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역을 모두 제외한 독일 연방의 인구는 24,900,000명으로 인구가 많이 증가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독일/인구 참조. 하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같은 강국에 의해 연방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기본적으로 독일 연방은 구체제 하의 속박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으나, 각국에서 혁명의 영향을 받아 개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48년이 되면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독일 3월 혁명이 일어난다(1848년 혁명). 최초 한 달간의 혁명적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발생하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양국의 정부는 전복될 위기에 놓여있었다. 혁명의 수뇌부였던 민족자유주의자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회의가 세워져서 혁명의 방향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혁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는 정치적으로 독일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군대도 기존 영방 국가들의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 혁명에 방향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여 시간만 지체되었다. 상황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다 보니 노동 대중들의 이탈도 늘어났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도 의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고, 결정적으로 신 독일 제국의 황제로 추대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제위를 거부하여 의회의 무용성이 재확인되었다. 혁명은 실패하였지만 그 영향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자들을 위한 개혁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하였다. 그들의 민족적인 이념은 보수적인 틀 내에서 독일 통일에 이바지하였다.

9. 독일 통일독일 제국의 수립


혁명 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프로이센의 재상이 되었다. 당시 독일 지역은 아직도 수많은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던 지역이였고 그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이끌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통일은 언론과 민중이 아닌 철과 피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 유명한 '''철혈정책'''을 통해 독일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은 군국주의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군사, 외교적인 활동을 추구한 결과, 그 당시 유럽의 거대한 강대국이였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보오전쟁보불전쟁에서 승리하며 독일의 패권을 완전히 쥐어잡게 되었다. 결국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 제국'''을 수립했다. 1870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을 시기에는 인구가 39,200,000명으로 독일 지역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독일/인구 참조.

10. 양차대전


그러나 통일한 지 100년도 지나기 전에 무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6] 제1차 세계 대전은 본토에 군대를 하나도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빌헬름 2세가 퇴위하는 국내 혁명과 함께 끝났는데(물론 미국의 참전만으로도 충분히 밀리고 있었지만), 그 뒤 독일제국 선포 장소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한 조약으로 패전의 대가로 엄청난 양의 보상금을 갚아야 했고 나미비아, 탄자니아, 카메룬, 토고, 뉴기니 등의 해외 식민지들을 대거 잃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파탄나자 파시즘이 급부상한다. 곧 아돌프 히틀러총통이 되는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가 정권을 잡고 '''제3제국'''을 선포하고는 얼마 안되어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지만, 결국 참혹한 패배로 끝나고 알자스-로렌동프로이센을 비롯한 영토를 잃었으며, 독일 지역은 서독동독으로 분단되었다.
전쟁을 시작했던 1913년에 독일 제국의 인구는 65,100,000명으로 빠르게 성장해 서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전쟁에서 패전하고 나서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도 영토를 일부 할양해야 하긴 했지만 1918년에 60,200,000명으로 여전히 서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독일이 주변 국가와 대립하지 않았다면 다시 강력한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 나치 독일이 발흥했던 1936년에는 인구가 67,300,000명으로 증가해 독일 제국이 가장 많았던 시기의 인구를 이미 넘어섰다. 그렇지만 다시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다시 영토를 할양해야 했고 1945년에는 인구가 57,800,000명으로 줄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누어졌을 때는 다시 과거에 가장 많았던 인구를 넘어섰는데 아마 계속 영토를 유지했었다면 인구가 더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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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일은 전쟁에서 패망한 직후 4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각각 미국, 영국, 프랑스[7], 소련이 독일의 영토를 나누어서 점령한 상태였다. 그런데 미국, 영국, 프랑스는 각자 자신들이 점령한 독일의 영토를 합쳐 새로운 독일 정부를 수립시키는 쪽으로 합의를 보았으나 소련만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했던 독일의 영토는 모조리 합쳐져서 서독이 되었고 소련이 점령했던 독일의 영토만 동독이 되었다. 이에 따라 베를린도 서독과 동독으로 분할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소련이 점령한 곳만 동독이 되었다. 이후 동독 정부는 동독 사람들이 동독 안에 있는 서독의 영토인 서베를린으로 가지 못하게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11. 전후 분단과 동서독 통일


서독은 미국의 압도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에 맞서는 보루로서 키워져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서 3위에 달하는 경제 대국이 된다.(세계적으로 본다면 4위) 동독 또한 발터 울브리히트, 에리히 호네커 등 지도자들 덕에 경제 개발을 바탕으로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 소련, 중국, 폴란드 다음으로 높은 4위의 경제력을 가지게 된다.[8] 하지만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의 결과는 동유럽 공산주의의 와해로 이어졌고, 결국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다.[9]
베를린 장벽 붕괴의 여파로 동독주민들의 자유선거에 따라 1990년 통일을 이루었고 이후 독일은 하나의 국가로서, 유럽연합의 주도적인 국가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1.1. 통일 후유증


그러나 서독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통일이 되니 통일 분담금이 많이 들어갔다. 이 때문에 1990년대 내내 독일의 경제는 통일의 후유증이 제대로 발목을 잡았고 동독 지역의 경제수준을 서독의 75%까지 끌어올리는 데 25년이나 소요된 반면 물가는 동독 지역의 물가가 순식간에 서독 지역의 90%까지 올라가는 등 동독 지역의 경제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25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동독 지역의 경제가 그나마 안정을 찾기 시작했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그리고 동독 사람들이 통일된 독일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옛 동독을 그리워하는 상황이 일어나자 서독 정부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베를린에 동독 박물관을 만드는 등 옛 동독의 유산들을 최대한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동독의 국가국기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금지되어 있지는 않다.

12. 관련 문서



[1]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등 여러 역사 교양 서적에서도 이러한 시각이 소개되어 있다.[2] 중프랑크 왕국은 870년 동서 사이의 영토(지금의 알자스로렌(로트링겐), 네덜란드 등)를 상실하고 북이탈리아의 왕국이 된다.[3] 중세 시대와 독일 왕국 시절 작센 부족 공국은 원래 북해 근처의 독일 서북쪽이 중심지였으나(그래서 영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고 그게 앵글로색슨의 '색슨'이다) 서북쪽은 여러 차례 분할 상속되면서 작은 소국들로 전락했고, 초기 작센의 변방지역이었던 동남부가 남아 작센 왕국으로 이어진다.[4] 오토는 951년 롬바르디아의 왕(중프랑크도 계속 이 이름을 사용함)을 자처했고, 955년부터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으며 이후에도 남진하여 동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였다.[5] 프로이센 1년 총 세입의 약 80%를 군사력 강화에 사용할 정도로 군사력을 강화시켰다...그리고 군사훈련도 빡세게 시켰다고 한다[6] 정확히 말하면 제1차 세계대전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일으킨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독일 제국동맹국들을 주도하였다.[7] 이 당시 프랑스는 아주 강경하게 지배를 해서 점령지에서의 독일인들의 반발을 탄압하는 등 완전히 프랑스화를 시도했었다는 소문이 들렸을 정도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을 재건하고 싶어하는 미국의 압박을 받았고, 프랑스 또한 계속되는 독일인들의 반발 등으로 강경책만 쓸 수는 없는 현실적 상황을 보아 미국의 뜻을 수용한다.[8] 다른 분야에서도 동독은 무척 발달한 상황이라서, 1988년 서울올림픽 등에서도 동독은 2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질 기준으로 경제 규모는 시기에 따라서 서독이 동독의 4~6배 정도였다. 물론 시기에 따라서 서독의 인구가 동독의 3~4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9] 당시 동독인들이 계속 빠져나고 있었고, 동독 정부는 여권 발급 규정을 완화하기로 했다. 이때 이탈리아 기자가 대변인에게 언제부터 이 규정이 시행되냐고 물었는데, 대변인은 답변을 준비 못해서 "즉시 될 겁니다"라고 대답했고, 독일어가 딸리는(…) 기자는 "여행자유화가 돼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오보 기사를 썼고, 이 소식은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서독까지 전해져 베를린 장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게 된다(…). 한국의 신탁통치 오보사건 뺨치는 영향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