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난
淮南
영어 Huainan
중국 중남부 안휘성의 지급시. 지명이 시사하듯 회하(淮河, 화이허) 남안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회남은 합비에서 북쪽으로 80km, 벙부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져 있다. 화이난은 전한 시대에 제후국이던 회남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행정구역 내에는 초한지 항우의 수도였고 삼국지에서는 원술의 근거지였던 수춘이 포함되어 있다. 4세기에는 전진과 동진 간의 비수대전이 회남 인근 회수 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엄청난 양의 석탄이 묻혀있는 인근 광산 덕에 광광업도시로서 발전하여 인구가 240만명에 이른다.
화이허 ~ 양쯔강 사이의 지역을 의미한다. 고대 양주의 구강군에 해당하였으며 농사가 잘되는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이후 전한의 제후국인 회남국이 세워졌으나 여러 차례의 반란을 거쳐 구강(주장)군으로 개편되었다. 400여년이 흘러 후한 말기의 군웅 원술이 회남 이라는 지명을 부활시켜 회남왕을 칭했고 비록 그는 조조에게 멸망하였으나 회남군은 이후 송나라(북송) 대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화이난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03년에 항우 측에서 유방에게 귀부한 영포(英布)를 회남왕에 봉하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회남국의 수도는 현재의 루안에 위치해있었는데, 영포는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기원전 196년) 이후 유방은 자신의 늦둥이 아들 유장(劉長)[1] 을 회남왕으로 삼았고 수춘이 새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유장은 기원전 174년에 반역죄에 연루되어 촉으로 유배를 떠나던 중 객사하였다.
기원전 172년, 유장의 네 아들을 측은하게 여긴 한문제는 그들을 복권시켜 제후로 삼았고 장성하자 왕으로 봉하였다. (기원전 164년) 한편, 회남왕의 작위는 기원전 168년에 부활하여 성양공왕이 다르리고 있었는데 기원전 164년에 유장의 장남 유안(劉安)이 회남왕이 되자 성양으로 돌아갔다. 유안은 도교에 심취해 있었고 신선이 되고자 선식을 개발하였는데, 왕여안(王厲安)이라는 도인과 함께 만든 음식이 바로 두부이다. 화이난에서는 지금도 두부 축제가 열린다.
도교를 바탕으로 박식한 지식을 쌓은 유안은 일종의 백과사전인 회남자(淮南子)를 편찬하였는데 그 일부는 현존한다. 기원전 154년,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유안도 그에 가담하고자 하였으나 승상이 미리 조정에 도움을 요청하여 무산되었다. 기원전 122년, 유안은 반란을 꾀하다가 들통나 자살하였고 회남국은 한세기 전의 지명인 주장 (구강)군으로 개편되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안이 아버지 유장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자녀가 없는 한무제의 죽음에 대비하여 거병을 준비하였다고 서술하였지만 유안의 지식에 감탄한 한무제의 총애를 받은 것과 그의 사후 무제가 유안의 반란을 고발하였던 오피를 사사한 것을 보아 진위 여부가 의심스럽다.
이렇듯 3번의 반란 (영포-유장-유안)에 연루된 회남국은 해체되었지만 후한 말기에 원술이 회남왕을 자처하며 회남 지명은 부활하였다. 이후 회남은 조조의 위나라 땅이 되어 합비와 함께 오나라와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위나라 말기에 (수춘 문서에도 나오듯) 화이난 지방은 251년에 왕릉 255년에 관구검, 257년에 제갈탄 등이 위나라의 집권 가문인 사마씨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사마염의 서진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30여년 만에 5호 16국 시대가 도래하였고 화이허가 남천한 동진과 북방 유목계 왕조들과의 경계가 되며 화이난 지방은 재차 남북조 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383년, 북조에 의한 통일이 200년 미뤄지게 되는 비수대전이 회남 지방에서 일어났다. 이후 남조, 수, 당을 거치면서도 유지되던 회남군은 당 말기의 방진 중 하나인 회남 절도사가 설치되었고 904년에 그 절도사이던 양행밀이 5대 10국 중 하나인 오나라를 세웠다. 오는 937년에 남당으로 교체되었고 5대 중 마지막인 후주의 세종에 의해 정복되었다.(955년)
이후 송나라(북송)의 시기인 1071년에 회남군은 동서로 나뉘어 없어졌다.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와 남송의 평화 협정(소흥 화의)에 따라 화이허가 재차 남북 왕조의 국경이 되며 회남은 다시 전선이 되었다.
영어 Huainan
1. 도시
중국 중남부 안휘성의 지급시. 지명이 시사하듯 회하(淮河, 화이허) 남안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회남은 합비에서 북쪽으로 80km, 벙부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져 있다. 화이난은 전한 시대에 제후국이던 회남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행정구역 내에는 초한지 항우의 수도였고 삼국지에서는 원술의 근거지였던 수춘이 포함되어 있다. 4세기에는 전진과 동진 간의 비수대전이 회남 인근 회수 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엄청난 양의 석탄이 묻혀있는 인근 광산 덕에 광광업도시로서 발전하여 인구가 240만명에 이른다.
2. 지역
화이허 ~ 양쯔강 사이의 지역을 의미한다. 고대 양주의 구강군에 해당하였으며 농사가 잘되는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이후 전한의 제후국인 회남국이 세워졌으나 여러 차례의 반란을 거쳐 구강(주장)군으로 개편되었다. 400여년이 흘러 후한 말기의 군웅 원술이 회남 이라는 지명을 부활시켜 회남왕을 칭했고 비록 그는 조조에게 멸망하였으나 회남군은 이후 송나라(북송) 대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2.1. 회남국
화이난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03년에 항우 측에서 유방에게 귀부한 영포(英布)를 회남왕에 봉하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회남국의 수도는 현재의 루안에 위치해있었는데, 영포는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기원전 196년) 이후 유방은 자신의 늦둥이 아들 유장(劉長)[1] 을 회남왕으로 삼았고 수춘이 새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유장은 기원전 174년에 반역죄에 연루되어 촉으로 유배를 떠나던 중 객사하였다.
기원전 172년, 유장의 네 아들을 측은하게 여긴 한문제는 그들을 복권시켜 제후로 삼았고 장성하자 왕으로 봉하였다. (기원전 164년) 한편, 회남왕의 작위는 기원전 168년에 부활하여 성양공왕이 다르리고 있었는데 기원전 164년에 유장의 장남 유안(劉安)이 회남왕이 되자 성양으로 돌아갔다. 유안은 도교에 심취해 있었고 신선이 되고자 선식을 개발하였는데, 왕여안(王厲安)이라는 도인과 함께 만든 음식이 바로 두부이다. 화이난에서는 지금도 두부 축제가 열린다.
도교를 바탕으로 박식한 지식을 쌓은 유안은 일종의 백과사전인 회남자(淮南子)를 편찬하였는데 그 일부는 현존한다. 기원전 154년,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유안도 그에 가담하고자 하였으나 승상이 미리 조정에 도움을 요청하여 무산되었다. 기원전 122년, 유안은 반란을 꾀하다가 들통나 자살하였고 회남국은 한세기 전의 지명인 주장 (구강)군으로 개편되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안이 아버지 유장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자녀가 없는 한무제의 죽음에 대비하여 거병을 준비하였다고 서술하였지만 유안의 지식에 감탄한 한무제의 총애를 받은 것과 그의 사후 무제가 유안의 반란을 고발하였던 오피를 사사한 것을 보아 진위 여부가 의심스럽다.
2.2. 반역향과 국경지대
이렇듯 3번의 반란 (영포-유장-유안)에 연루된 회남국은 해체되었지만 후한 말기에 원술이 회남왕을 자처하며 회남 지명은 부활하였다. 이후 회남은 조조의 위나라 땅이 되어 합비와 함께 오나라와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위나라 말기에 (수춘 문서에도 나오듯) 화이난 지방은 251년에 왕릉 255년에 관구검, 257년에 제갈탄 등이 위나라의 집권 가문인 사마씨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사마염의 서진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30여년 만에 5호 16국 시대가 도래하였고 화이허가 남천한 동진과 북방 유목계 왕조들과의 경계가 되며 화이난 지방은 재차 남북조 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383년, 북조에 의한 통일이 200년 미뤄지게 되는 비수대전이 회남 지방에서 일어났다. 이후 남조, 수, 당을 거치면서도 유지되던 회남군은 당 말기의 방진 중 하나인 회남 절도사가 설치되었고 904년에 그 절도사이던 양행밀이 5대 10국 중 하나인 오나라를 세웠다. 오는 937년에 남당으로 교체되었고 5대 중 마지막인 후주의 세종에 의해 정복되었다.(955년)
이후 송나라(북송)의 시기인 1071년에 회남군은 동서로 나뉘어 없어졌다.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와 남송의 평화 협정(소흥 화의)에 따라 화이허가 재차 남북 왕조의 국경이 되며 회남은 다시 전선이 되었다.
[1] 자가 여왕이라 종종 여왕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조왕 장오가 유방에게 바친 애첩의 소생이며, 한문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민월을 끌어들여 반역을 꾀하였다가 유배형에 처해졌고 그 와중에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굶어 죽었다. 그의 자손 중 유분자는 신나라 말기 ~ 후한 성립기의 내전에서 적미군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