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image]
홈페이지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로)에 있는 복합 공연장. 운영주체는 (재)세종문화회관이다.
1978년 4월에 개관한 이래 1988년 예술의 전당 음악당이 개관하기 전까지 10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연장의 역할을 했으며, 각종 정부 행사는 물론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1] 등 각종 굵직한 행사와 공연을 도맡아 왔다.
1999년부터 운영주체를 서울시 직영에서 재단법인으로 바꾼 뒤 2003년 대극장을 대대적인 리모델링하였으며, 이후 소극장을 리모델링하여 세종M씨어터로 개관하였으며, 체임버홀을 추가 건립하였고, 2018년에는 블랙박스 시어터인 S씨어터를 개관하였다. 그 밖에도 2개의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1년에 삼청각을 인수했고, 2009년 개장한 강북구 북서울 꿈의 숲에 소재하는 '''꿈의 숲 아트센터'''를 운영중이다.
서울남산국악당[2] 도 운영하고 있었으나, 2014년에 남산골한옥마을로 운영권을 넘겼다.
현재 세종문화회관 산하에 서울시무용단, 국악관현악단, 오페라단, 합창단 등 9개 예술단체가 있다. 다만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경우 이명박이 서울 시장시절 정책적으로 추진하여 별도의 재단으로 출범하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독립했다.[3]
2. 역사
원래 세종문화회관 자리는 서울시민회관이 있었다.[4] 서울시민회관은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연장이었는데 1972년 12월 2일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가 발생하여 서울시민회관이 전소 되어 헐리고 말았다.[5] 당시 우리나라에는 서울시민회관 이외에는 이렇다 할 대형 공연장이 없던 상황이었다.[6][7] 때문에 서울시민회관을 대체할 종합 공연장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74년 1월에 서울시민회관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건립되어 1978년 4월에 개관하였으며, 시공사는 대림산업이다.[8]
[image]
서울시민회관(1961년) 밤을 통곡한다라는 영화 제목이 걸린 것이 눈에 띈다.
[image]
화재가 발생한 서울시민회관(1972년)
[image]
건설 중인 세종문화회관
[image]
준공 당시의 모습(1978년)
대강당은 처음에는 4,000석 규모로 지어졌다가 곧 3,822석으로 줄여 운영되었다. 무대의 전면은 오페라 공연시 오케스트라 피트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1999년 서울특별시 산하 기관에서 재단법인으로 바뀌었으며, 시설의 노후화로 2003년 1월 13일부터 전면적인 개, 보수에 들어가 1년 여 후인 2004년 2월 재 개관했다. 좌석을 고급화하고 좌석간 간격을 넓혀 객석 규모는 현재 3,022석으로 운영되고 있다.
3. 건축물
개관 당시 대극장을 비롯해 소극장, 전시장까지 잘 지었으며, 당시 유럽과 미국의 세계적인 홀과 비교해 봐도 크게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남북통일시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써먹으려고 괜히 크게 지었다는 설이 널리 펴져 있는데, 결과적으로 거짓 루머다. 세종문화회관보다 몇 년 앞서 완공된 여의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 이미 통일을 대비한 규모[9] 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 루머는 설득력이 없다. 또 1972년 성립된 유신 독재 체제의 장기 존속을 대비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청사로 쓰기 위해 4,000석 규모로 크게 지었다는 것이 설도 있었지만[10] 실제로 세종문화회관이 완공된 후에도 여전히 장충체육관에서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이 역시 그냥 루머에 불과하게 되었다.
어쨌든 세종문화회관은 건립 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을 위해 지어졌다는 루머 때문에 '''독재자의 과시욕을 드러낸 거석 구조에 무의미한 문화적 상징물의 차용'''이라는 숱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도시 중심에 이정도 규모의 문화 시설을 한국 고유의 문화적 상징물들을 잘 섞어서 지은 것 아님?'''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실제로 당시 세종문화회관이 건립되었을 때 대다수의 서울 시민들의 반응은 이제 다른 나라에 내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걸출한 공연장을 가지게 되었다면서 반기는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경복궁 내의 구 국립박물관처럼 전통 건축물을 그냥 가져다가 붙인 직설적인 모습에 비하면 세종문화회관은 한국 전통 건축과 현대적인 건축물의 융합에 나름대로 고민을 한 건물인 것은 사실이다. 전통 건축의 요소가 서양식 건축물에 튀지 않게 잘 섞여 있어 무난한 편이고, 건물 구성 자체도 엣날 설계 치고는 충분히 기능적이다. 세종문화회관 건립 이전 시민회관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연장이었다는 점에서 세종문화회관은 당시로서는 충분히 문화시설로서 가치가 있고 실제로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평소 음향반사판이 내려와 있을 때 객석에서 보면 알수 없지만 무대 뒤와 옆에도 엄청나게 넓은 보조 공간이 있다. 또 무대 전체가 회전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즉 기본적으로 보이는 부분은 무대의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클래식 콘서트나 행사 때 음향 반사판을 쓰지만 뮤지컬이나 오페라 공연 때는 음향판을 올려 깊은 무대 뒤쪽과 측면까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회전 기능을 쓰지 않는다면 넓은 무대 공간 전체를 다 쓸 수 있다. 덕분에 앞뒤로 깊이 있는 무대 공간 구성과 연출이 가능하다. 슬라이드되는 가림막도 십여 개를 쓸수 있어서 막/장 전환이 쉽다. 출연자가 바닥에서 튀어나오는 연출을 위한 무대 위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2층 관객석 층 앞부분과 무대 옆쪽에 영사기(디지털 프로젝터)가 있으며, 일반 영사막도 있다. 과거에는 영화를 상영한 적도 있고, 현재는 프로젝터를 이용해 여러 가지 무대 배경을 투사하거나 투명 영사막으로 무대 전면을 덮고, 풍경이나 비 오는 장면 같은 미리 만들어 놓은 것 투사해 장면에 가상 환경을 표현하거나 입체적 효과를 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당시 서울 시민을 위한 공연 예술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오죽하면 1973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내한했을 때 하필이면 서울시민회관이 전소된 후라 서울에 제대로 된 공연장이 없어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공연했는데 당시 지휘자였던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공연장 시설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고, 20여년이 지나서도 아바도는 객석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하며 한국에 내한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11] 이후 세종문화회관이 지어지고 나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한 세계적 거장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매우 큰 홀이라며 칭찬했다.
다만 어느 쪽이든 세종문화회관 중앙의 광장의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듯. 명색이 광장인데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12] 그리고 올라가 보면 그 면적이 상당히 좁다. 입점한 편의점과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야외 탁자 십여 개로 다 찰 정도. 당시의 기준에서는 넓은 공간이었지만 지금 보면 광장이라 부르기 민망하다. 광장은 좁은 건 앞뒤 계단은 크고 아름다운 것 때문인데, 계단을 크게 만든 이유는 크고 긴 계단은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13] 당시의 건축에 대한 정치인들 생각을 알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계단은 유럽이나 미국의 유서 깊은 홀이나 미술관, 박물관에서도 흔히 존재하는 것이다. 딱히 당시 정권을 까고 싶어 비판한다 해도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대극장이 지나치게 크다든지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든지, 간격이 좁다던지, 경사가 가파르다던지 하는 비난하는 것은 지은 때가 70년대라는 것을 간과한 평가이다. 개관 당시에는 한국인 평균 체격이 현재보다 꽤 작았기 때문에 작은 의자, 좁은 좌석간 간격과 통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럽의 세계적인 홀을 가봐도 최근에 지어진 홀이 아니라면 리모델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석이 너무 좁다거나 통로가 너무 좁다거나 객석 각도가 무대와 영 안맞다던가, 앞좌석에 가려 무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던가 하는 수많은 난점들이 존재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홀인 빈 무지크페라인 그로서 잘[14] 은 의자를 계속 바꾸면서 현재 어느 정도 쾌적해졌지만 여전히 현대 기준으로 편한 좌석이 아니며 간격 역시 넓지 않다. 그리고 무지크페라인 잘이나 암스테르담의 콘서트헤보[15] 등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며 높이 평가받는 홀들은 1층 객석의 경우 계단 경사가 없는 대신 무대가 너무 높아 객석에서 오케스트라를 보려면 목을 쳐들어야 해서 목디스크가 걸릴 지경이고 그렇게 봐도 오케스트라가 충분히 잘 보이지 않는다. 또 콘서트헤보의 전면 객석 경사는 세종문화회관보다 더 심하다. 혹은 또다른 세계적인 홀인 뮌헨 헤라클레스 잘[16] ,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 대강당 등은 고개를 많이 쳐들 필요는 없지만 대신 앞사람에 가려 무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런던을 대표하는 홀인 로열 앨버트 홀의 그 유명한 프롬스 콘서트에서 청중들이 내내 서서 음악을 듣는 것은 앉아서 아무리 고개를 쳐들어도 무대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예 콘서트 내내 서서 듣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런 홀들에서 사각지대나 무대와 맞지 않는 측면 객석 방향 등의 문제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무지크페라인이나 콘서트헤보,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홀, 로열 앨버트 홀이 20세기초 혹은 19세기말에 지어진 구시대 홀이라고 비판한다면 1963년에 완공된 현대적인 홀의 대명사인 베를린 필하모니[17] 도 음향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무대 방향과 맞지 않는 틀어진 측면 객석, 올라갈 수록 경사가 심하고 사각 지대가 존재하는 등의 여러 문제가 있다. 베를린 필하모니는 개관 이후 몇차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당시 세종문화회관은 카라얀도 현대적인 홀이라고 충분히 호평했던 홀이다.
4. 대극장의 음향 문제
개관 이후 오케스트라 공연을 위한 전문 클래식 공연장으로는 미흡한 음향으로 까여왔다.[18] 애초에 전문 클래식 콘서트홀이 아닌 다목적홀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음향적인 고려가 미진해 여러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음향 문제 중 가장 큰 문제점은 잔향 부족이다. 잔향이 매우 짧아 사막의 울림이라는 악평을 듣기도 했다. 세종문화회관의 잔향이 짧은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홀의 구조가 음향학적으로 좋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넓적한 홀의 구조상 홀 측면이 충분한 잔향을 반사하지 못한다. 또 지나치게 큰 홀 규모, 천장의 형태, 거대한 2, 3층 객석계단의 존재 등 여러가지 난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3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면서 대극장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이용한 음향보조시설을 설치하여 다소 개선되긴 했지만 홀구조상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근본적인 개선은 불가능했다.
최근의 음향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길쭉한 모양의 직육면체 홀이 클래식 음향에 이상적이라고 한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홀인 빈 무지크페라인이 좋은 음향을 가진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지어지는 클래식 전용홀에 이런 설계가 반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고양아트센터와 성남아트센터가 최근 지어진 홀 중 음향이 상당히 상당히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홀들이 바로 길쭉한 직육면체 형태로 지어졌다. 그런 점에서 세종문화회관은 태생적으로 음향에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정 음향을 개선하고 싶으면 홀 자체의 측면을 대폭 좁히고 천장을 낮추는 수 밖에 없다.
대극장의 파이프오르간은 한국 최대로, 세종문화회관 개관 당시에는 동양 최대였지만 1987년에 대만 타이베이 국가음악청의 오르간에게 기록을 빼앗겼다. 세종문화회관의 오르간은 독일 칼슈케사에서 제작하였으며 설치에서 조율까지 13개월이 소요되었다. 또한 독일 인기사 1400명을 포함하여 연인원 4000명이 투입되었고 파이프만 8098개 건반은 6단이며 높이 11m, 폭 7m, 무게는 45t이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0억원정도.
5. 교통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이 바로 옆에 있다. [19] 단, 1번 출구와 8번 출구를 이용해야 한다. 나머지 출구는 세종대로 건너편이나 세종대로 사거리 지하보도로 통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6. 기타
- 여담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3.1운동 관련 연설을 여기서 하지 않았다고 조선일보에서 박정희 죽이기 및 유서깊은 건물을 무시한다고 주장하다가 동아일보에선 이 건물의 노후화를 기사로 써서 충분히 낡았으니 노무현 대통령이 그럴만하다"는 투로 기사를 쓰며 이런 낡은 시설에서 연설 안 한다고 뭐라던 조선일보를 은근히 까버린 적이 있다.
- 본관 바로 옆 화단이 구한말 한성전보총국 터였고, 대로변 쪽이 조선시대 형조 자리였다.
- 2013년에 동아일보와 SPACE가 선정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과 한국 최악의 현대건축에는 모두 선정되지 않았다. 양 측 모두 20위까지 세는데 두 곳 모두 21위에 선정됐다고.(...) #
- 2015년 3월 5일에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이 이 곳에서 일어났다.[20]
- 19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 이 곳에서 골든디스크 시상식이 열렸었다.[21] 그러나 세종문화회관이 2003년 1월부터 보수에 들어가면서 2003년 시상식부터는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 몇몇 버스노선들이 세종대로네거리 좌회전 차단 등 신호 문제 때문에 이 곳에서 U턴 운행한다.
- 인디 언론 서울의 소리에서 '숭일 매국 집단'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한 적 있다. 이유는 이순신 관련 전시관에서 '왜구'라는 표현을 '일본군'이라고 변경했기 때문이라고(...). 이 매체는 해당 기사에서 일본이라는 국호는 1900년대 이전에는 쓰인 적 없다느니 임란 때 일본의 국호는 전국시대였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아 비판받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의 소리 문서 참고
- 대한민국 대표 공연장이었던 세종문화회관에서 시행한 주류반입허용 공연 3인3색 기획시리즈와 아울러 2020년 예정인 자체기획공연에 대한 전망과 우려, 극장과 공연예술형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다룬 글이다. #
- 1984년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공연을 이곳에서 가졌다. 일본 방일공연 후 내한해 10월 27일 베토벤 교향곡 제 6번 & 5번, 29일에는 브람스 교향곡 제1번과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5번을 연주했다. 당시 카라얀은 세종문화회관을 ‘매우 큰 홀’이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 서울특별시가 영등포구 문래동의 구 (주)방림 영등포공장 터에 오는 2025년까지 2000석 규모의 대형 다목적공연장을 짓고 있는데 이 공연장의 명칭이 '제2세종문화회관'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칭이다. 진짜 세종문화회관의 이름을 따서 '제2세종문화회관'이나 '세종문화회관 영등포분관'의 이름이 지어질 수 있고 아니면 제3의 이름이 명명될 수도 있다.
7. 역대 임원
7.1. 재단법인화 이전
7.1.1. 시민회관장
- 박임웅 (1961~1963)
- 이남용 (1963~1972)
- 기천식 (1972~1973)
- 김동현 (1973~1974)
- 배문환 (1974~1978)
7.1.2. 세종문화회관장
- 배문환 (1978~1979/1992~1993)
- 이영화 (1979~1980/1981~1984)
- 윤백영 (1980~1981)
- 유중호 (1984~1985)
- 이진호 (1985~1986)
- 반충남 (1986~1987)
- 허재구 (1987)
- 김문종 (1987~1988)
- 배병호 (1988~1989)
- 윤두영 (1989~1991)
- 권이긍 (1991~1992)
- 김진욱 (1993)
- 유천수 (1993~1995)
- 이광우 (1995)
- 조성두 (1995~1996)
- 윤우길 (1996~1997)
- 지건홍 (1997~1998)
7.2. 재단법인화 이후
7.2.1. 이사장
- 표재순 (1999~2002)
- 구자호 (2002~2003)
- 장충식 (2003~2005)
- 손봉호 (2005~2008)
- 장대환 (2008~2011)
- 김석만 (2012~2015)
- 김명곤 (2015~ )
7.2.2. 사장(구 총감독)
- 이종덕 (1999~2002)
- 김신환 (2002~2004)
- 김용진 (2004~2005)
- 김주성 (2005~2008)
- 이청승 (2008~2009)
- 박동호 (2009~2011)
- 박인배 (2011~2015)
- 이승엽 (2015~2019)
- 김성규 (2019~ )
8. 노동조합
-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세종문화회관지부: 민주노총 소속.
9. 관련 문서
[1]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번스타인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마젤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2] 충무로역 근처에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 안에 위치한 전통음악 전용 공연장이다.[3] 그래도 서울시향 사무실과 연습실이 세종문화회관에 상주하는 등 아직도 밀접한 관계는 지속하고 있다.[4] 1956년 건설 당시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회관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건설 중 터진 4.19 혁명으로 인해 서울시민회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참고로 시공사는 극동건설이다.[5] 여담으로 이 화재 때문에 새로 지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불이 나지 말라는 뜻에서 고전에서 화재를 막아준다는 뜻으로 쓰였던 박쥐 문양의 장식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 벽면 곳곳에 일부러 만들어 넣었다. [6] 때문에 화재가 일어난 지 몇 개월 후인 1973년에 내한한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당시 열악한 공연장 시설 때문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상당한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7] 이 당시면 장충동 남산 자락에 국립극장이 한참 건립 중이었고, 1973년 10월에 개관하였다.[8] 짓는 동안은 일제시대 부민관이었던 건물을 임시로 시민회관으로 다시 사용하였으며, 세종문화화관 완공 후에는 별관으로 쓰다가 현재는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건물로 사용 중이다.[9] 통일이 이뤄질 시에 현재 본회의장인 제1회의장을 하원, 예결위 회의장인 제2회의장을 상원 회의장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10] 유신 시대 박정희의 거수기 역할을 하기 위해 조직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 규정상 2,000인 이상 5,000인 이하의 대의원으로 구성하도록 규정되었는데, 실제 2,500~2,600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고, 이런 대인원이 들어갈 회의장이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11] 실제로 아바도는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시절 내한을 하지 않았다.[12] 미켈란젤로의 카피톨리노 광장은 언덕으로 올라간다는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계단을 최대한 완만하게 짓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쪽은...[13] 이 동영상에 나오는 나치의 집회 장면이 그 극한이라 할수 있다. http://www.youtube.com/embed/Q1LFWONlP_k [14] 세계 최정상의 오케스트라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홀[15]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인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상주홀[16]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인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상주홀이며,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과거에 함께 상주했었다.[17] 세계 최정상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홀[18]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했던 쿠르트 마주어는 음향상태를 보완하기 위해서 오케스트라를 최대한 앞으로 당겨서 배치했고, 그래도 마음에 안들어 공연 당일날 1악장이 끝나고 갑자기 퇴장해버리기도 했다.[19] 광화문역의 부역명부터가 세종문화회관이다.[20] 바로 길 건너편에 주한미국대사관이 있다.[21] 2002년 시상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