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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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建鎬
1927년 9월 27일 ~ 2001년 12월 21일
송건호 평전
1. 개요
2. 생애
3. 송건호언론상
3.1. 역대 수상자


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민주화운동가, 역사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청암(靑巖).
‘한국 언론의 사표’, ‘해직기자의 대부’, ‘민족지성’ 등의 별칭이 따라다닐 정도로 한국 언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언론인이다.

2. 생애


1927년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비야마을에서 송재찬(宋在瓚)과 박재호(朴在鎬)의 3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대대로 충청도 회덕군 동면(현 대전광역시 동구)에 살았으나, 증조부 대에 이르러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증조부께서 가솔을 이끌고 옥천 비야곡으로 이주해왔다고 한다.# 대전욱정공립심상소학교(현 대전신흥초등학교)[1], 한성사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곧 광복을 맞았다.# 광복 직후인 1946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전문부를 거쳐 1956년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3년 『대한통신』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으로서의 첫발을 떼었고, 이어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 주요 신문사를 거쳤다.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으나, 정권의 언론탄압과 기자 대량해임 사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자진 사임했다.(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그후 역사학 집필에 전념하여 '민족지성의 탐구',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국현대사론', '한국현대인물사론' 등 역작을 연이어 출간하며 저술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79년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그러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무고한 옥살이를 하며 고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같은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천관우와도 천관우가 5공에 가담하기 전에는 각별한 사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동아일보 기자직을 사임하고 고서점을 찾아다니며 역사 연구에 매진했던 송건호에게 1977년부터 '''민주화 운동에 함께 하자고 권유한''' 인물이 천관우였다. 이후 송건호가 1979년에 <한국현대사론>을 펴냈을 때도 천관우는 <창작과비평> 제52호에 서평을 싣고 "송건호 형[2]의 이 새 저술은 정통사학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현대사 개설'이라는 중요한 부분에 훌륭하게 선편(先鞭)을 지은 것이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정통 사학계에도 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하고 싶다.", "1979년의 현재로, 우리 현대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국현대사론'에 필적할 것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이 저술은 성공적이었고 또 그만큼 축적된 근고(勤苦)의 산물이었다."라며 송건호를 극찬했다.[3] 하지만 천관우가 제5공화국에서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을 맡게 되자 송건호는 이를 변절이라 비판하면서 천관우와의 교류를 끊었다. 나중에 천관우에 대해 회고하기를,

"지성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현실과 타협해버린 경우가 있어서 결국 사이가 서먹서먹해지고 그러는데 죽은 사람이지만 천관우가 그런 사람입니다.'''"정론직필을 찾아서 - 옥천 출신 언론인 송건호(충북일보)

1984년 해직언론인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련)를 결성, 초대 의장을 지냈다. 특히 월간지 을 창간해 제도권 언론이 외면하는 노동자·농민의 실상과 민주화운동 등을 소개하는 한편, 1986년에는 군사정권보도지침을 폭로해 이듬해 6월 항쟁의 불씨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어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을 이끌었고 초대 사장 및 회장을 지냈다. 그는 이 시기에 편집권의 독립, 냉전보도의 지양 등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신군부에게 받았던 고문 후유증으로 1990년부터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했고, 투병 생활을 하던 끝에 2001년 12월 21일 타계하였다. 제1회 심산학술상(1986), 한국언론학회 언론상(1991), 호암언론상(1994), 금관문화훈장(1999), 정일형자유민주상(2000) 등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평전인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가 발간되어 있다. 송건호 본인의 삶 자체도 훌륭하지만 전기문학으로서의 가치도 높은 작품이므로 관심있는 위키러라면 읽어보자.

3. 송건호언론상


송건호의 타계 이후 고인의 바람인 민주적 언론문화 창달을 위해 청암언론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2002년부터 언론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여 언론민주화에 기여했거나 사회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송건호언론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3.1. 역대 수상자


회차
년도
수상자
주요이력, 수상이유
1회
2002
정경희
한국일보 논설위원
2회
2003
위르겐 힌츠페터[4]
5.18 민주화운동 보도
3회
2004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보도지침 폭로
4회
2005
강준만
월간 인물과 사상 창간
5회
2006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동아일보 해직 언론인들이 결성
6회
2007
조용수
민족일보 창간
7회
2008
MBC PD수첩 제작진
시사고발
전국언론노동조합 YTN 지부
YTN 낙하산 사장 임명에 항거
8회
2009
최문순[5]
MBC 노조위원장, 대표이사
최상재
민주언론노조 위원장
9회
2010
최승호
MBC PD수첩 제작 PD
옥천신문사
지역언론
10회
2011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11회
2012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뉴스타파
대안언론
12회
2013
경남도민일보
지역언론
프레시안 협동조합
인터넷언론
13회
2014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
14회
2015
변상욱
CBS 대기자
15회
2016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16회
2017
JTBC 뉴스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다수 특종(태블릿 PC 입수 등) 보도
17회
2018
김주언
보도지침 폭로
18회
2019
임은정
울산지방검찰청 부장검사
19회
2020
정용욱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1] 1934년 증약사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35년 진학을 위해 대덕군 동명공립보통학교(현 대전동명초등학교) 2학년에 전학, 이후 6학년 때 대전욱정공립심상소학교에 전학하였다.[2] 천관우는 1925년생으로 송건호보다 두 살 연상이다. 이 시절의 '형'이라는 말은 지금처럼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친분 있는 성인끼리 붙여주는 일종의 예의를 지킨 호칭에 가까웠다.[3] 천관우 또한 고대사와 관련해 일본서기의 주요 기사를 그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바꿔 해석하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식민사학이 만들어 놓은 고대사 구도의 틀을 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4] 유일한 외국인 수상자이다.[5] 2018년 현재 강원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