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제철소 학살 사건
1. 개요
고난의 행군이 거의 끝나갈 무렵, 1998년 8월[1] 황해북도 송림시의 현재의 황해제철소(사건 당시 송림제철소)에서 인민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 이 제철소는 북한에서 두 번째로 큰 제철소다.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
2. 상세
2.1. 배경
1994년경 김일성의 사망 이후 송림제철소의 가동률이 떨어지고, 96∼97년부터는 완전히 멎어버린다. 이에 따라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실업자와 같은 처지가 된다. 황해도에 위치한 철광인 은률광산(은율광산), 재령광산에서 철광석을 캐기 어렵게 되었고,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며 콕스탄(코크스탄)을 값 싼 대치물자[2] 로 주지 않아 제련도 어려워졌다. 석탄 생산량 자체도 감소하여 화력발전도 어려워지고, 수력 발전도 힘들어지자 전기 공급도 어려워져 다시 제철소의 가동을 어렵게 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경제 불황이 찾아와 배급이 끊어졌다. 그나마 송림에서는 먹을거리가 남아 있어 더 많은 사람들이 송림지역에 몰려들었다. 이렇게 주민들과 노동자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다 못한 송림제철소의 지배인, 책임비서, 후방담당[3] 부지배인, 업무담당 부지배인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 8명은 지배인과 책임비서가 주동이 되어 긴급 토의에 들어갔다.
그들은 제철소가 만든, 압연 철판으로 가공된 선철을 배에 싣고 중국 대련(다롄)으로 건너가 옥수수와 교환해 오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들이 굶주리지 않아야 당의 목표를 완수할 수 있고 이들에게 먹거리를 전하는 것이 곧 당과 수령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밖에도 노동자들이 이런 자재와 기계를 중국에 옥수수나 밀가루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편 송림항에는 외부에서 지원한 것으로 보이는 쌀이 있었고, 이것이 쌓여있기만 한 것을 본 송림항의 노동자들이 송림제철소 노동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 노동자들이 무기고를 털 계획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2.2. 시작
제철소 후방 부지배인, 판매과장을 비롯한 간부 8명이 제철소 전용 어선으로 남포항에 나가 있는 배를 이용해서 압연 철판을 싣고 중국에 가서 옥수수로 바꾸었다. 옥수수를 싣고온 배가 남포항 부두에 정박하는 순간에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가 나타나서 배에 타고 있던 일행을 전원 체포하여 포승줄로 묶어서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들은 고문을 당한 후유증 때문에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에 의해 송림시 공설운동장의 공개처형장으로 이송되었다. 명목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위반하고 국가물자를 외국에 팔아먹는 국가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총살까지 시키는 건 너무합니다."라는 주민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공개처형은 진행되었다. 평양 봉화진료소에서 김일성의 담당 간호사였던 여자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총살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철소 간부들이 위대한 장군님께 생산을 많이 하여 기쁨을 드리자는 일념으로 강냉이[4] 를 바꾸려 했는데, 방법이 틀렸으면 처벌을 주어야지 총살까지 하는 건 너무합니다. 총살당한 간부들이 노동자들을 먹여 일을 시켜보자고 했지, 제가 먹자고 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사형까지 하는 건 너무 무지막지 합…" 라고 말을 하자, 평양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은 이를 무시하고 즉시 그 여자를 처형했다.
2.3. 농성
첫번째 공개 총살 다음날, 송림시 제철소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간부들을 숙청하지 말라" "우리를 먹여 살리고 제철소를 위한 간부들의 행동은 잘못이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며 공장 구내 길에서 몇 천 명이 모여 앉아 밤을 세워가면서 농성을 하였다.
2.4. 학살
군에서는 이를 탱크로 밀어 붙이자고 하여,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 국무총리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의 '2006 연차보고서'에서는 이 과정에 김정일이 연루되었다고 보고 있다.
농성 시작 다음 날 새벽 4시쯤 열댓 대 정도 되는 탱크와 트럭에 탄 수백 명의 인민군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해산하라는 군대의 명령에도 시위대가 앉아서 버티자, 인민군은 '''총을 쏘고 탱크로 깔아뭉개 전부 죽였다.''' 깔아 버렸다는 증언은 이춘구 씨, 국방부 안보강사로 활동했던 박승학 씨가 공통적으로 증언한다.
2.5. 마무리
새벽 5시 경 송림시는 군 부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한국 특전사와 유사한 경보여단 등이 송림 인근 황주군, 평양 강남군, 평양 오류동으로 통하는 찻길, 뱃길을 모조리 막아버렸다. 날이 새자 송림시민들은 계엄령이 내려진 것을 느꼈다.
그 뒤 아침 10시가 지나자 폭동 진압군은 철산광장에 사람을 모아서는 "송림시민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제철소에서 석탄 한 배낭, 못 한 개라도 훔쳐 간 사람은 모두 자수하라. 1주일간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자수하지 않으면 그 대상이 누구든 관계없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가두방송을 하였다.
새벽에 제철소에서 학살이 있은 다음날,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시위 주모자를 심판한다는 포고문이 사회안전부(현 사회안전성)[5] 명의로 나 붙었다. 이날 송림시 당 선전부장 같은 송림시의 고위 관료들이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틀 후 송림시의 공설운동장에서는 폭동 주모자라고 하는 3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또 한 명의 중학교 선생과 어린 처녀를 총살했다. 중학교 선생과 처녀의 죄명은 한 재일교포의 집에 들어가 녹음기를 훔쳤다는 것이다.
죄과라는 것을 읽고 총살에 처한다는 판결과 함께 두 명의 보위사령부 검열대들이 처녀에게 다가가서 턱을 주먹으로 올려 쳐 턱뼈가 빠지게 한 뒤, 손바닥 안에 쥔 자그마한 용수철을 그 처녀의 입에 넣었다. 순간 그 처녀의 입에 들어간 자그마한 동그란 용수철이 쫙 퍼지더니 그의 입이 고통스럽게 불어나 처녀는 몸부림쳤다. 이어 말뚝에 묶여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체포 당한 송림의 고위 관료들도 총살당했다. 남조선 간첩이 끼어 들어 제철소가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설비들을 훼손시키도록 의식적으로 조장하여, 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거기 놀아났다는 혐의가 씌워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하루 평균 5~7명이 총살당하고, 제철소의 가동 중단도 남조선의 간첩 때문이라는 주장이 송림시민 사이에 유포되었다. 고문을 당하다 죽은 사람만도 십 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쩌다가 점 한 번 봐준 사람, 신수 한번 봐준 사람 등 관상쟁이들까지 조사대상으로 끌려가 무참하게 죽어 나왔다.
이후 북한은 아예 송림제철소라는 이름을 황해제철소로 바꿔버렸다.
3. 여담
-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을 목격한 탈북자 이춘구 씨가 쓴 수기. 이 문서의 주된 내용이 된 가장 널리 퍼진 수기로, 노동자들의 항의를 진압하는 과정을 언급한다. 원본[6]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의 증언(NK조선)
- 이 사건 당시 송림에 거주했다는 정철민 씨의 수기. 송림시에서, 제철소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다. #
- 배나TV 박승학 씨의 증언. 진압 병력의 정체에 대한 언급도 있고, 송림제철소 뿐만 아니라 송림항 노동자들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증언을 한다. #
- 기타 탈북자의 증언 #
- 통일연구원의 '2006 연차보고서'에서 언급된 2명의 탈북인사 증언도 참조하였다.
- 이 사건은 북한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증명하는 사건들 중 하나가 되었다. 김일성 담당 경력이 있는 간호사조차 끔찍하게 처형할 정도로 말이 안 통하는 나라이다.
-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 항목에도 있지만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북한이 정작 사회주의의 입장에서도 얼마나 황당한 국가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노동당'이 노동자를 탄압하고 '인민군'이 인민을 학살하고 '공화국'에서 세습통치가 이뤄지고 있으니...
4. 사실 여부
검증이 되지 않은 주장이라는 주장이 있다. 여기서 이춘구의 수기를 보면 사건의 과정이 자세히 나오는데 정작 처형당했다는 제철소의 간부들 누구하나 이름이 나와있지 않다며 의구심을 갖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춘구씨는 당시 송림에서 이 사건을 직접 겪기는 했지만, 제철소 간부와 알고 지냈거나 제철소 노동자는 아니었고[7] 그냥 송림에 살던 주민 입장에서 당시 사건을 보고 들은 기억에 의존하여 작성한 수기라 제철소 간부들 이름을 모르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도 송림에 '황해제철소'가 있으며, 압연설비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론상으로는 일어날 수는 있다는 것이다. # 게다가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의 연차보고서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을 '김정일이 집권 초기 경제난으로 인하여 당의 지도와 통제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당의 영도체계 질서 회복과 사회적 혼란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 북한 군대를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사실'과 연관된 증언이라고 보고 있다.
이 사건은 이춘구 씨뿐만 아니라, 탈북자 출신인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도 있었던 사건은 맞다고 보고 있다. 북한 내에서도 쉬쉬하면서 소문은 돌았다고 한다. 주성하 기자는 6군단 반란사건은 김정일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여기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송림시에서 일이 터져서 보위사령부가 군대를 투입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총소리를 울리고 싹 쓸어버리고 왔다”는 말은 보위사령부 간부를 장인으로 둔 사람에게 들은 바 있다고 하였다. 자기가 직접 본 일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에 대해 말하다가 보위부 귀에 들어가면 사회를 어지럽히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불순분자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기 때문에 생존자들도 입을 다물기 때문에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거나, 세부적인 사항에 차이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
국민의힘 국회의원 태영호도 “공장 노동자들이 황해제철소 기계와 철판 바닥을 다 뜯어 가자 북한군이 총살을 예고하는 계엄령을 내렸다”고 언급하고, “당시 노동자들은 무서워서 기계를 다시 갖다 놓았는데, 지금(2017년)은 당국의 정책에 반발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언급한 적 있다. 기계에 관한 언급은 이춘구 씨와 조금 다르나, 이춘구 씨의 증언에서 빠진 부분이거나 현장에서 멀리 있던 사람으로 이춘구 씨가 약간 더 정확할 수 있다. #
이춘구 씨 말고 다른 탈북자도 이에 대해 들은바 있다고 증언한다. 다만 이춘구 씨의 증언보다는 자세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송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정보는 퍼져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
노동자들이 무장까지 시도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러 증언에서 "'''제철소 간부들이 위대한 장군님께 생산을 많이 하여 기쁨을 드리자는 일념으로 강냉이를 바꾸려 했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 '당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옥수수를 구한다'는 증언이 있어, 북한이 남한처럼 민주화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꾸며내었을 가능성은 낮다. 이에 따르면 '''송림제철소의 사람들은 북한 독재정권의 수괴인 조선노동당을 뒤엎을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8]
5. 관련 문서
[1] 2월이라는 증언도 있는데, 8월에 일어났다는 주장이 사건 당시와 더 가까운 때의 증언에서 나오고, 여름에 일어났다는 증언도 있어 8월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2] 대금의 성격으로 주는 물자. #[3] 북한에서는 물자보급업무를 "후방사업"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북한 군인들의 피복과 식료품, 생필품 공급은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관할. 기업소 후방담당 부지배인이면 소속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식량과 생필품을 책임지는 위치다.[4] 옥수수. 남한에선 영호남 지방의 방언에서 옥수수를 강냉이라고 하지만, 북에선 강냉이가 표준이다.[5] 한국의 경찰청과 유사한 기능을 갖는다고 알려진 기관이다.[6] 댓글에는 직접 보았다는 사람, 소문으로는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7] 본래는 다른 지역에서 살다 고난의 행군 당시 친척집 장사를 도우러 송림에 온 외부인이었다. 이춘구씨의 친척도 장마당 상인이지 제철소 노동자는 아니었다.[8] 사실 북한뿐 아니라 정부 시책을 비판하는 웬만한 강경 극성 집회에서도 그 사용하는 구호에 정부 기관 자체에 대한 부정이 나오는 법은 거의 없다. 정부 기관 자체에 대한 부정은 정부에게 "국가 전복을 꾀하는 내란 모의자들"이라는 혐의를 덧씌울 명분을 줄 수 있지만, 일단 정부의 현행 지배 체제 자체는 인정하고 들어가면 자신들의 주장에 정당성을 내세우기에 보다 유리한 면이 있는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민중봉기만 보더라도 국왕 자체를 끌어내려 목을 쳐야 한다는 직설보다는 "'''훌륭하신 우리 임금의 눈과 귀를 사악한 간신들이 가리고 있어 탐관오리가 설치게 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저 간신들을 내몰고 우리 임금께 백성의 현실을 호소해야 한다!'''"는 명분을 세웠지, 오히려 왕조 체제 자체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정치 체제로 전환시키겠다고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동학농민혁명도 그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