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신궁

 

'''(((じん(ぐう'''
'''이세 신궁 | Ise Grand Shrine'''


<colbgcolor=#504c4b>'''명칭'''
'''신궁 (神宮; 진구)'''
'''소재지'''
<colbgcolor=#504c4b>'''내궁'''
미에현 이세시 우지타치초 1
(三重県伊勢市宇治館町1番地)
'''외궁'''
미에현 이세시 토요카와초 279
(三重県伊勢市豊川町279番地)
'''제신
(祭神)'''

'''내궁'''
아마테라시마스스메오오미카미
(天照坐皇大御神)
'''외궁'''
도요우케노오오미카미
(豊受大御神)
'''사격
(社格)'''

식내사(式内社)
이십이사(二十二社) 중 상칠사(上七社)
신궁(神宮)[1]
'''창건'''
'''내궁'''
스이닌 덴노 26년(서력기원 불명)
'''외궁'''
유랴쿠 덴노 22년(서력기원 불명)
'''링크'''
http://www.isejingu.or.jp/
1. 개요
2. 참배와 행사
3. 기원
4. 식년천궁
4.1. 소개
4.2. 역대 식년천궁
5. 관광
6. 창작물


[clearfix]

1. 개요


2013년의 내궁(고타이진구)
2015년의 외궁(도요우케다이진구)
일본 미에현 이세시에 있는 신사 125개소를 가리킨다. 정식 명칭은 그냥 '신궁(神宮, 진구)'이지만, 다른 '신궁'들과 구분하고자 흔히 '이세신궁'이라고들 부른다. 일본 22사 중 상7사의 으뜸이고, 오늘날에도 일본 전국의 약 8만여 곳에 달하는 신사를 통괄하는 신사본청의 총본산에 해당하는 중요한 신사이다.[2]

2. 참배와 행사


이세신궁에 속하는 신사가 1백여 곳이 넘지만, 이 모두를 대표할 만한 곳은 내궁(內宮) '고타이진구(皇大神宮)'와 외궁(外宮) '도요우케다이진구(豊受大神宮)', 2곳이다. 이중 내궁 코타이진구는 천황가의 우지카미(氏神; 씨족신)이자 태양신인 아마테라스(天照大御神)를 받든다.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일본 황실 및 조정과 관계가 밀접했다. 지금도 이세신궁에 참배하고자 오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 역시 바로 이 내궁. 외궁 토요우케다이진구는 '식량의 신'인 토요우케(豊受大御神)를 모시는데, 5세기 무렵에 처음 조성되었다. 내궁으로부터 도보로 약 50분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에도 시대에는 사람들이 토요우케를 모시는 이세 '''외궁'''에 참배하는 '오이세마이리(お伊勢参り)'[3]가 유행했다. 특히 부모나 집 주인의 허락 없이 집을 빠져 나와 이세신궁을 참배(누케마이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적당히 묵인해줌이 관례였다. 사실 이 시기에는 지역 간 이동이 매우 제한되어서, 이세 참배를 목적으로 겸사 겸사 여행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에도 막부의 강력한 정책으로 왕정 복고 초기 사람들이 천황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메이지 정부는 이세 외궁에 내한 경배를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내궁, 즉 천황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신)에 대한 경배로 교묘하게 전환시켜 버린다. 그리고 이세신궁을 모독하는 행위를 불경죄로 취급하여 코로 와사비를 먹였다.
옛날에는 내친왕, 여왕#s-4[4] 등 미혼의 황녀들이 무녀로서 봉직하였는데 이를 사이구(斎宮, 재궁)라고 하였다. 사이구는 보통 새로운 천황이 즉위할 즈음에 퇴임하였는데, 퇴임 이후에 결혼은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미혼으로 평생을 살았다.
근현대에 들어서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5], 쇼와 덴노고준 황후의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의 4녀 이케다 아츠코 등이 제관을 맡았다. 2012년부터는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의 장녀 구로다 사야코가 보조 제관이 되어 쇠약해진 고모 아츠코를 도왔다. 2017년 6월, 아츠코가 퇴임하고 사야코가 제관으로 취임했다. 근현대에 들어 제관이 된 후사코, 카즈코, 아츠코, 사야코 등 공주들은 모두 기혼.
이 사이구(斎宮)로부터 일본의 성씨 사이토가 유래했다. 교토의 가모 신사(賀茂神社)에는 마찬가지로 황실 가문의 미혼 무녀로서 사이인(斎院, 재원) 제도도 있었다. 사이구와 사이인을 합쳐 사이오(斎王)라고 칭한다.
단순해 보이는 건물의 외관은 이 건물의 역사를 나타내주는 것. 역사도 역사지만 20년마다 건물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식년천궁(式年遷宮)'''으로 유명하다.
이세신궁 내궁은 삼종신기야타노카가미를 신체(神体)[6]로 삼는다. 또한 내궁의 정전을 식년천궁(아래 항목에서 설명) 할 때마다 지표 위로 정전의 중앙 기둥 일부를 약간 남기는데, 이를 신노미하시라(心御柱)라고 부른다. 다음 번에 정전을 세울 위치가 바로 여기라고 미리 표시하는 역할을 하는데, 목재를 보호하고자 작은 감실을 만들어 기둥 위에 덧씌운다.

3. 기원


일본 신화에 따르면 이세신궁이 창건된 계기는 이러하다. (이하의 내용은 일본서기 본문의 기록을 요약한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부연한 일서의 기록은 생략한다.)
10대 스진 덴노 재위 5년(기원전 93년?)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듬해(기원전 92년?)에도 그 여파로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다스리기 어려웠다. 스진 덴노는 아마테라스와 야마토노오쿠니타마, 두 신을 궁궐에 모시면서 죄를 고백하고 제사를 지냈으나, 두 신을 두려워하여 궁궐 안에서 함께 지내기를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장녀 토요스키이리비메(豊鍬入姬命)로 하여금 궁궐 밖에서 아마테라스를 모시며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7]
11대 스이닌 덴노 재위 25년(기원전 5년?)에 스이닌 덴노는 아마테라스를 모시며 제사 지내는 직무를 누이 토요스키이리비메 대신 딸 야마토히메노미코토가 맡도록 하였다. 야마토히메가 아마테라스를 모시기 좋은 터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세국(伊勢國)에 닿았을 때 아마테라스가 신탁을 내려 알려주었다.

신풍(神風)이 부는 이세국(伊勢國)은 도코요(常世)[8]

의 파도가 계속 밀려드는 나라로 주변 나라들이 부러워한다.[9] 여기에 머무르도록 하라.

야마토히메는 신탁을 받은 뒤에 이세에 신궁[10]을 지었는데, 그 자리가 아마테라스가 하늘에서 처음으로 내려온 곳이라고 일본서기는 말한다.
참고로 일본 각지에는 모토이세(元伊勢) 신궁이라고 불리는 곳들이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이세신궁 자리에 정착하기 전, 토요스키이리비메나 야마토히메가 각지를 떠돌며 임시로 신령을 모셨는데, 모토이세라 불리는 곳들이 잠시나마 아마테라스를 모셨던 터라고 한다.
외궁의 기원에 대해서는 별개의 기록으로 전한다. 지유기궁의식장(止由気宮儀式帳)에 따르면, 21대 유랴쿠 덴노 22년(477년)에 천황의 꿈에 아마테라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 혼자서는 안심하고 식사도 할 수 없어 매우 불편하다. 단바(丹波)[11]에 있는 토요우케(豊受大神)[12] 신을 내 가까이에 불러 날 시중 들도록 하라." 하고 명령하였으므로 그대로 하였다고 한다.[13]
그러나 일본서기나 지유기궁의식장 등은 모두 실제 신궁이 건립된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 기록되었으므로 곧이 믿기는 어렵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세신궁이 원래는 이세 지방의 토착신을 모신 성지였으리라 추정한다. 특히 이세 지방에 있던 이소베씨(磯部氏) 집안의 씨족신인 토요우케 신을 모신 곳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14] 이소베 씨는 성을 와타라이(度会)로 바꾸어 지금도 외궁의 신관직을 세습한다.
학계에서는 일본신화의 형태가 41대 지토 덴노(재위 690~697) 때 창작, 완성되었다고 본다.[15] 이세신궁이 지금의 형태로 건축된 때도 지토 덴노 시절이다. 지토 덴노 시절에 아마테라스를 제사지내는 직무를 맡던 오쿠(大来) 황녀가 이세신궁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16]
신화대로라면 아마테라스의 부속신으로 경내에서 조그만 건물 하나를 받았어야 할 토요우케 신이 '외궁'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아마테라스와 동격의 건물을 받게 된 것도 본디 이세의 토착가문인 이소베씨의 성지를 아마테라스의 성지로 재편성하면서 나온 지토 덴노 시절의 정치적/종교적 타협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최초의 식년천궁이 지토 덴노 때 시작함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4. 식년천궁



4.1. 소개


새로 지은 건물(사진의 아래-서쪽)과 곧 헐릴 낡은 건물(사진의 위-동쪽)
식년천궁(式年遷宮)[17]이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건물을 다시 짓고 신을 옮기는 의식이다. 이세신궁은 20년 주기로 천궁을 하는데, 2013년 10월에 62번째 천궁이 있었다. 이를 위해 2백 년, 3백 년 뒤에 사용할 나무를 미리 심어둔다. 홀수 번째 천궁 때는 동쪽 부지로, 짝수 번째 천궁 때는 서쪽 부지로 옮겨 짓는다.
식년천궁 제도가 시작된 유래는 불명확하다. 과거 선대 기술자들이 후세들에게 기술을 완전 전수하는 데 20년이 걸려서라는 설도 있고, 정기적인 재건축이 신의 영위를 재탄생시킨다는 설이나, 그냥 과거의 건축 기술 부족으로 건물이 낡으면 위험해지니 정기적으로 때려 부수고 다시 짓는 게 관습화되었다는 설, 손과 발을 사용해서 셀 수 있는 가장 큰 숫자가 20이기 때문이라는 설 등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이걸 가지고 우리나라가 경복궁을 복원할 때 거대한 목재가 부족해서 외국에서 수입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을 빗대서 일본은 나름의 선견지명과 일관성을 가지고 일을 추진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맞지 않다. 20년마다 한 번씩 건물을 새로 짓는다는 관습이 있으니 이에 맞추어 미리 준비했을 뿐이다. 경복궁은 이처럼 정기적으로 새로 짓는 건물이 아니다. 외려 예상치 못한 훼손과 고의적인 파괴로 인해 수리와 복원이 필요해진 것이라, 거대 목재의 수요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미리 심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18]
이세신궁처럼 우리가 '현대 일본신사' 하면 떠오르는 신사 건축의 형태는 의외로 역사가 짧다. 에도 시대 신사건축 양식 중 '고대의 건축은 이렇게 짓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하면서 짓던 복고양식 건축이 유행하다가 고착화된 것이다.[19]

4.2. 역대 식년천궁


'''횟수'''
'''내궁(內宮)'''
'''외궁(外宮)'''
'''서기'''
'''연호'''
'''천황'''
'''서기'''
'''연호'''
'''천황'''
1회
690.

지토
692.

지토
2회
709.
와도(和銅) 2
겐메이
711.
와도 4
겐메이
3회
729.
텐표(天平) 1
쇼무
732.
텐표 4
쇼무
4회
747.09.
텐표 19
748.
텐표쇼호(天平勝宝) 1
코겐
5회
766.
텐표진고(天平神護) 2
쇼토쿠
768.
진고케이운(神護景雲) 2
쇼토쿠
6회
785.09.18.
엔랴쿠(延暦) 4
간무
787.
엔랴쿠 6
간무
[A]
792.
엔랴쿠 11
7회
810.09.
코닌(弘仁) 1
사가
812.09.
코닌 3
사가
8회
829.09.
텐초(天長) 6
준나
831.09.
텐초 8
준나
9회
849.09.
카쇼(嘉祥) 2
닌묘
851.09.
닌주(仁寿) 1
몬토쿠
10회
868.09.
조간(貞観) 10
세이와
870.09.
조간 12
세이와
11회
886.09.
닌나(仁和) 2
고코
889.10.
칸표(寛平) 1
우다
12회
905.09.
엔기(延喜) 5
다이고
907.
엔기 7
다이고
13회
924.09.
엔초(延長) 2
926.09.
엔초 4
14회
943.09.
텐교(天慶) 6
스자쿠
945.12.
텐교 8
스자쿠
15회
962.09.
오와(応和) 2
무라카미
964.09.
코호(康保) 1
무라카미
16회
981.09.17.
텐겐(天元) 4
엔유
983.09.
에이간(永観) 1
엔유
17회
1000.09.16.
초호(長保) 2
이치조
1002.09.
초호 4
이치조
18회
1019.09.17.
칸닌(寛仁) 3
고이치조
1021.09.16.
지안(治安) 1
고이치조
19회
1038.09.16.
초랴쿠(長暦) 2
고스자쿠
1040.09.15.
초큐(長久) 1
고스자쿠
20회
1057.09.
텐기(天喜) 5
고레이제이
1059.09.
코헤이(康平) 2
고레이제이
21회
1076.
조호(承保) 3
시라카와
1078.
조랴쿠(承暦) 2
시라카와
22회
1095.09.
카호(嘉保) 2
호리카와
1097.09.
조토쿠(承徳) 1
호리카와
23회
1114.09.16.
에이큐(永久) 2
도바
1116.09.
에이큐 4
도바
24회
1133.09.16.
초쇼(長承) 2
스토쿠
1135.09.
호엔(保延) 1
스토쿠
25회
1152.09.
닌페이(仁平) 2
코노에
1154.09.
큐주(久寿) 1
코노에
[A]
1169.
카오(嘉応) 1
다카쿠라
26회
1171.
조안(承安) 1
1173.
조안 3
다카쿠라
27회
1190.09.16.
켄큐(建久) 1
고토바
1192.09.
켄큐 3
고토바
28회
1209.09.16.
조겐(承元) 3
츠치미카도
1211.09.
켄랴쿠(建暦) 1
준토쿠
29회
1228.09.16.
안테이(安貞) 2
고호리카와
1230.
칸키(寛喜) 2
고호리카와
30회
1247.09.16.
호지(宝治) 1
고후카쿠사
1249.09.26.
켄초(建長) 1
고후카쿠사
31회
1266.09.16.
분에이(文永) 3
가메야마
1268.09.15.
분에이 5
가메야마
32회
1285.09.16.
코안(弘安) 8
고우다
1287.09.18.
코안 10
고우다
33회
1304.12.22.
카겐(嘉元) 2
고니조
1306.12.20.
토쿠지(徳治) 1
고니조
34회
1323.09.16.
겐코(元亨) 3
고다이고
1325.09.16.
쇼추(正中) 2
고다이고
35회
1343.12.28.
코코쿠(興国) 4
고무라카미
1345.12.27.
코코쿠 6
고무라카미
36회
1364.02.16.
쇼헤이(天平) 19
1380.09.08.
텐주(天授) 6
고카메야마
37회
1391.12.20.
겐추(元中) 8
고카메야마
1400.02.28.
오에이(応永) 7
고코마츠
38회
1411.12.
오에이 18
고코마츠
1419.12.21.
오에이 26
쇼코
39회
1431.12.20.
에이쿄(永享) 3
고하나조노
1434.09.23.
에이쿄 6
고하나조노
40회
1462.12.27.
칸쇼(寛正) 3
1563.09.23.
에이로쿠(永禄) 6
오오기마치
41회
1585.10.13.
텐쇼(天正) 13
오오기마치
1585.10.15.
텐쇼 13
42회
1600.09.21.
케이초(慶長) 14
고요제이
1600.09.27.
케이초 14
고요제이
43회
1629.09.21.
칸에이(寛永) 6
고미즈노오
1629.09.23.
칸에이 6
고미즈노오
44회
1649.09.25.
케이안(慶安) 2
고코묘
1649.09.27.
케이안 2
고코묘
[A]
1659.11.25.
만지(万治) 2
고사이
45회
1669.09.26.
칸분(寛文) 9
레이겐
1669.09.28.
칸분 9
레이겐
[A]
1683.03.10.
텐나(天和) 3
46회
1689.09.10.
겐로쿠(元禄) 2
히가시야마
1689.09.13.
겐로쿠 2
히가시야마
47회
1709.09.02.
호에이(宝永) 6
나카미카도
1709.09.05.
호에이 6
나카미카도
48회
1729.09.03.
쿄호(享保) 14
1709.9.6
쿄호 14
49회
1749.09.01.
칸엔(寛延) 2
모모조노
1749.09.04.
칸엔 2
모모조노
50회
1769.09.03.
메이와(明和) 6
고사쿠라마치
1769.09.06.
메이와 6
고사쿠라마치
51회
1789.09.01.
칸세이(寛政) 1
고카쿠
1789.09.01.
칸세이 1
고카쿠
52회
1809.10.16.
분카(文化) 6
1809.10.16.
분카 6
53회
1829.09.02.
분세이(文政) 12
닌코
1829.10.16.
분세이 12
닌코
54회
1849.09.02.
카에이(嘉永) 2
고메이
1849.09.05.
카에이 2
고메이
55회
1869.09.04.
메이지(明治) 2
메이지
1869.09.07.
메이지 2
메이지
56회
1889.10.02.
메이지 22
1889.10.05.
메이지 22
[A]
1900.10.02.
메이지 33
57회
1909.10.02.
메이지 42
1909.10.05.
메이지 42
58회
1929.10.02.
쇼와(昭和) 4
쇼와
1929.10.05.
쇼와 4
쇼와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59회 식년천궁 연기
59회
1953.10.02.
쇼와 28
쇼와
1953.10.05.
쇼와 28
쇼와
60회
1973.10.02.
쇼와 48
1973.10.05.
쇼와 48
61회
1993.10.02.
헤이세이(平成) 5
아키히토
1993.10.05.
헤이세이 5
아키히토
62회
2013.10.02.
헤이세이 25
2013.10.05.
헤이세이 25

5. 관광


가기는 쉽지 않다. 이세신궁이 위치한 곳은 미에현에서도 동쪽 끝자락이라서 오사카나고야에서 간격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세신궁은 '''일본인들이 평생 한번은 가보고 싶어하는 곳'''으로 꼽는다. 그만큼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 일본 역사, 문화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들더라도 가볼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나고야와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서 접근성이 꽤나 좋고, 시간상으로 대략 1시간 30분~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라서 여행 일정을 짜다 보면 꽤 시간이 드는 편이기 때문에 보통은 킨테츠 레일패스를 끊고 토바와 묶어서 여행하거나 더 넓혀서 미에현을 여행하기도 한다.
단, 칸사이(즉, 오사카, 교토, 나라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여행)나 나고야권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는 여행을 가면서 이곳만 들르는 것은 추천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빨리 이동한다고 해도 적게는 왕복 3시간 길게는 왕복 5시간은 잡아야 하고, 스룻토 간사이 패스 같은 각종 칸사이나 나고야권에서 쓰는 패스의 통용 구간을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려면 얄짤없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킨테츠에서 발행하는 패스라면 추가요금 없이 올 수 있지만, 간사이나 나고야권 여행이라면 다른 패스에 비해 메리트가 없는 경우가 많다.
JR 투어리스트 패스 중 이세 - 쿠마노 - 와카야마 지역 패스를 사용하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미에 교통의 버스 노선까지 추가금 없이 이용할 수 있어서 좋지만, 도카이도 본선(JR 교토선)과 나라선이 이용 범위에 없기 때문에 교토 관광은 포기하다시피 해야 한다.
이세시 역 남쪽 출구로 나와서 미에교통 51, 55 외궁내궁선(外宮内宮線) 버스를 타면 된다. 이세시역전(伊勢市駅前) 정류장에서 타고 우치미야마에(内宮前)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내궁행이다. 요금은 2017년 3월 기준 430엔.
내궁 입구에는 이스즈천 목재 도리이가 서 있으며 바로 강을 건너는 다리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 토리이 앞에서 인사하고 들어간다. 나갈 때도 마찬가지. 여기서부터 내궁 본전까지 걸어서 가는데, 시간이 좀 걸리니 주변 숲을 둘러보면서 천천히 가자. 본전 앞은 사진 촬영 금지이므로 참배하는 모습을 찍을 수는 없다.[20]
일본인들은 관례적으로 먼저 외궁부터 참배한 뒤 내궁에 가는데, 외궁에서는 좌측보행, 내궁에서는 우측보행을 요구한다. 그러니 신정 등 명절 때에는 워낙 사람이 넘치기 때문에, 일본인들조차도 외궁을 생략하고 내궁만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외궁을 다니다 보면 길 옆에 네모나게 금줄을 친 공간이 있다. 가운데에 조그만 돌 세 개를 모아 놓았기에 흔히 '미츠이시(三ツ石)'라고 부르는데, 정식 명칭은 '카와라노하라이쇼(川原祓所)'라고 한다. 원래는 그 옆으로 물길이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강변(카와라노)'에 있다고 '카와라노하라이쇼'라고 하는데, 1498년에 큰 지진과 쓰나미가 닥친 이후 물길이 달라져서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외궁이 식년천궁을 할 때마다 그 자리에서 의례를 거행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표시해둔 것이다. 본래는 신성한 곳이라 하며 만지지 않음이 예의지만, 일본인들 중에도 미츠이시에 신령한 힘이 깃들었다는 이유로 만지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 듯. 만지면 따뜻한 것이 느껴지는 파워 스팟이라느니 하는 말이 일본 인터넷에 나온다. 미츠이시 가까운 곳에 짧은 다리가 있는데, 다리 상판을 이루는 돌이 꼭 거북 모양이라고 카메이시(亀石, 귀석)라고 부른다. 위나 앞에서 보면 '이게 어딜 봐서 거북이야?' 싶은데, 돌 가까이 대각선으로 보면 왜 거북 돌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간다. 돌의 서쪽 면이 거북 머리처럼 보이는데,[21] 원래는 근처에 있는 고인돌의 입구를 이루는 바위였다고 한다.
내궁 입구는 우지교(宇治橋)라는 목조 다리로부터 시작한다. 우지교 밑에는 이스즈천(五十鈴川)이 흐르는데, 우지교를 건너야 비로소 신사의 경내가 시작된다. 우지교 양쪽 끝에는 나무 도리이가 있는데, 참배객들이 사진을 찍는 주요 지점이다. 우지교를 지나면 주요 참배로는 ㄴ자 형태를 이룬다. 자갈이 깔린 길을 따라 3백 미터쯤 걸어가면 (ㄴ의 꺾임점 부분에서) 이스즈 냇가에 다가갈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이곳을 미타라시바(御手洗場)라고 부르는데, 일반 신사의 데미즈야(水手舍)[22]에 해당한다. 신령과 만나기 전에 이스즈 냇물로 손과 입을 씻으라는 것. 이스즈천 근처에 '동전을 던지지 마시오.' 하는 경고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이들 던지는 모양. 여기서 남동쪽으로 길이 꺾이는데, 쭉 따라 370 미터쯤 들어가면 아마테라스의 신체(야타노카가미)를 봉안한 본전과, 참배객들이 참배하는 배전이 나온다. 일반인들은 배전까지만 들어갈 수 있는데, 배전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이세신궁 앞에는 오카게요코초(おかげ横丁)라는 거리가 있다. 에도 시대 말기 몬젠마치를 재현한 곳으로 이곳에 60여 곳이 넘는 음식점 등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큰 관광지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국민인 일본인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없다.''' 서양인은 물론이고 그 흔한 중국인 관광객도 여기에서는 거의 없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대일감정이 좋지 않은데다 야스쿠니 신사와 동급으로 단정하는 경향까지 있어 더욱 없다. 하기야 일본의 기원 신을 기리는 곳인만큼,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나 애착, 혹은 대자연에서 맑은 공기를 마실 생각이 없는 이상, 게다가 후자의 사유가 있어도 교통이 그다지 편리하지 않으니 외국인들이 많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곳이다.[23]

6. 창작물


많은 일본 대중매체에서 간간히 이름을 언급하거나 배경으로 빌리고 있다.
  • 애니메이션 로비하치에서 주인공들의 최종목적지인 이세칸달은 미에현 이세시 이세신전은 이세신궁이 모티브이다.

[1] 근대 사격제도에 속하지 않는, '''모든 신사의 위에 있고, 사격이 없는 특별한 존재'''로 취급[2] 다만 신사본청의 종교법인으로서의 사무실은 도쿄 시부야에 위치하고 있다.[3] 오카게마이리(お蔭参り)라고도 부른다.[4]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內親王), 증손녀부터는 여왕(女王)이라 한다(남자는 친왕/왕). 1947년에 오늘날의 일본 황실전범이 정해지기 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 5대손부터 여왕이라고 했다.[5] 후사코의 손녀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1939년에 출생한 직후부터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는데,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하고 고준 황후(나가코)의 외가인 시마즈(島津) 가문으로 시집갔다. 때문에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결혼식 전 이세신궁을 참배하러 왔을 때, 후사코는 쇼다 미치코를 홀대하였다고.[6] 신토에서 신령이 깃들었다고 보고 신사에 안치하여 사람들이 숭경하도록 하는 물건. 보통은 거울을 신체로 삼지만, 그 외에도 다양하다.[7] 야마토노오쿠니타마는 다른 곳에 따로 모시도록 하였다. 이를 모신 곳이 나라현 텐리시의 오야마토 신사라고 한다.[8] 일본 신화나 고대 민속에서 말하는, 바다 건너편에 있다는 낙원, 이상향을 가리킨다. 신화에서 흔히 보이는 타계(他界)의 한 종류다. 일본의 민속에서는 타계를 흔히 산 속이나, 혹은 바다 너머에 있다고 상상한 반면, 궁중에서는 천상계에 타계가 있다고 믿었다. 타카마가하라야말로 야마토 조정의 궁중에서 믿었던 천상계 타계이다.[9] 이세를 현세와 타계의 중간쯤에 위치한 곳, 타계에 가까운 곳으로 보는 것이다. 이 문맥에서는 이세를 도코요라는 '해상 타계'와 가까운 곳이라고 하는데, 아마테라스는 천상 타계인 타카마가하라의 군주다. 이 부분은 야마토 조정의 포섭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간 신앙의 성소를 야마토 조정이 포섭하려 한 역사가 신화에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야마토 조정의 포섭 이전에는 바다 건너편에서 이세로 신이 건너왔으므로, 그곳에 종교시설을 세웠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10] 정확히는 지금의 내궁[11] 지금의 교토 북부[12] 곡령신(穀靈神), 즉 곡식의 신으로 그 중에서도 벼의 신이다. 따라서 벼농사 하는 농민에게 특히 숭배받았다. 기록에 따라 남신인지 여신인지 서로 말이 다르다.[13]아마테라스는 곡식의 신 보고 내 밥순이가 되라고 명령한 것이다.[14] 다른 학설에서는 원래 이세의 토착 태양신을 모신 곳이었는데, 야마토 조정의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와 습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15] 물론 아예 무에서 창작됐다는 소리가 아니다. 오래된 신화소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신화소를 끼워 맞추고 정치 신화로 구성, 완성했다는 소리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지토 덴노 본인은 물론 후지와라 가문의 고위층이 협력했으리라는 정황이 있다. 지토 덴노는 여자 천황으로, 선왕인 40대 덴무 덴노의 아내였다.[16] 물론 오쿠 황녀의 행동은 자기 오빠를 죽인 지토 덴노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 신궁이 지토 덴노 이전까지만 해도 아마테라스의 전통적인 성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통이 아님을 핑계로 오쿠 황녀는 이세신궁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정말 최소한의 경우에만 마지못해 이세신궁에 들어가 제례를 거행하곤 되돌아가기를 반복하였다.[17] 시키넨센구 (しきねんせんぐう)[18] 참고로 이세신궁의 재건축을 위해서 목재를 미리 준비하는 게 부럽다고 평가한 건 무슨 친일적인 학자나 언론사 기자도 아니고 현장에서 경복궁과 같은 한국의 건축물들을 복원하고 있는 목수들, 대목장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한국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반세기가 한참 전에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주요 궁궐과 건축물에 대한 복원이 완료되지 않았고 민주화되기 이전에는 체계적인 계획도 없었다. 심지어는 식민지 지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이전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근정전 앞에 놔두자는 주장도 있을 지경이었으니 이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다.[19] 고토 오사무(도쿄대학 공학원대학 교수) 저, <일본건축사> 참조.[A] A B C D E 내궁 정전이 소실되어 임시로 천궁함.[20] 사실 신사들 대부분은 배전 안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21] 미츠이시가 있는 쪽에서는 다리의 오른쪽에 서서 대각선으로 보면 된다.[22] 흔히 일본 신사에 들어가면 배전 앞에 물이 고인 네모난 석통이 있는데, 위에는 나무 국자를 올렸다. 석통이 있는 자리를 데미즈야/초즈야 등으로 부르는데, 신령을 만나기 전에 몸을 정결히 하고자 손과 입을 씻으라는 것이다. 간이 목욕재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는 이런 관습이 없기 때문에 한국인 관광객들이 흔히 '약수'인 줄 알고 물을 떠 마시지만 이는 잘못이다. 손과 입을 씻을 생각이 없다면 그냥 지나가면 된다.[23] 이 경우엔 차라리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는 다른 신사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