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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愼重穆
1902년 7월 1일 ~ 1982년 12월 31일
1. 개요
2. 생애
3. 그외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소강(素岡), 본관은 거창(居昌)[1].

2. 생애


1902년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아버지 신석재(愼奭縡)와 어머니 남평 문씨 문한권(文漢權)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의 교외생으로서 독학으로 수료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말기 경상남도 거창군수, 창원군수를 역임하였다.
8.15 광복 이후 남조선 과도입법의회 의원직을 역임하였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거창군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남도 거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같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였던 표현태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국민회 표현태 후보에 설욕하였다. 1951년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진상을 밝히다가 육군 특무대(현 국군기무사령부)의 협박을 받기도 하였다. 1952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8월부터 1953년 9월까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역임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국민당 신도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하였으나 자유당 서한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7월 농협중앙회 회장에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63년 국민의당에 몸담았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거창군-함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민병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0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서범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1년 민주농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과 충무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3. 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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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거창사건 추모 공원에는 신중목의 공적비가 존재한다. 건립식을 기념한 추도회 기사. 사진 좌측 직사각형 비석이 '신중목 국회의원 공적비'이다. 우측은 문병현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회장의 공로비.

[1] 통례공파 34세손 중(重)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