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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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심권호(沈權虎, Sim Kwonho)
'''국적'''
대한민국[image]
'''출생'''
1972년 10월 12일(51세)
경기도 직할 성남출장소(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학력'''
수정초등학교
성남문원중학교
서울체육고등학교
한국체육대학교
'''종목'''
레슬링
'''체급'''
그레코로만형 -48kg → -54kg
'''신체'''
160cm, 58kg
'''별명'''
작은 거인
'''종교'''
불교
'''SNS'''

1. 개요
2. 선수 경력
3. 평가
4. 은퇴 이후
5. 수상 기록
6. 기타


1. 개요


"천재요? 저는 천재라기보다는 그냥 레슬링을 놀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미있었거든요. 놀다 보니까 어느 한순간 푹 빠져서 계속 놀았던 거예요."

레슬링 경량급의 전설적인 선수이다. 그레코 로만형에서 48kg과 54kg 두체급 올림픽 금메달을 비롯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다. 선수 이후에는 코치를 잠시 역임하다 해설가로 나름대로 명성을 날렸으며, 현재는 선수시절 오랫동안 소속이던 한국토지주택공사에 근무하며 간간이 방송에 출연하고있다.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소년체전부터 고등학교까지 전관왕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며, 서울체육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체육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자유형 선수였지만, 자유형이 자기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 그레코로만형으로 전향했다.

2.2. 1992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자신의 체급인 -48kg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국제대회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1991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권덕용에게 밀려 바르셀로나행이 좌절되었다.

2.3. 1993년~1995년


하지만 권덕용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여 예선에서 탈락한 후, 그의 자리를 밀어내고 1993년부터 국가대표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1993년 세계선수권 동메달로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린 후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5 세계 선수권 금메달, 1995년과 1996 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며 일찌감치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거론되었다.

2.4. 1996 애틀랜타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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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금메달 확정 순간'''
그러나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심권호는 대진이 최악으로 걸린다. 2회전에서 라이벌인 러시아 선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연장 접전 끝에 2:1로 승리한 후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위기 없이 결승까지 순항했고, 결승전에서 연장 접전 끝에 4:0으로 승리하면서 마침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따낸 100번째 메달의 주인공이자, 애틀랜타 올림픽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워낙 압도적인 기술과 경기 운영을 보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순항할 줄 알았는데,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48kg급이 애틀랜타 올림픽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다만 알아둬야 될 것이 이것이 결코 심권호 때문에 사라진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체급을 줄여가는 과정에 심권호가 걸린 것일 뿐이다.'''[1]

2.5. 1997년~1999년


졸지에 레슬링 최경량급이 -54kg이 되면서 체중을 한 번에 6kg을 불려야 했고, 그 결과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2] 그러나 체급에 적응한 후 다시 이 체급의 절대 강자로 부상하게 된다. 후배인 하태연과의[3][4]치열한 승부를 거치면서 국가대표팀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한 심권호는 -48kg에서 그랬듯이 또 다시 -54kg에서도 같은 코스를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1998 세계선수권 우승,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9 아시아선수권 우승, 그리고 치열한 대표 선발전 끝에 2000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2.6. 2000 시드니 올림픽


4년 전에 비해 원숙해졌으며, 8강전에서 한 번 고비를 맞아 독일 선수와의 경기에서 5:4 역전승을 따냈다. 4강전에서 북한의 강영균을 10-0 테크니컬 폴로 눌러버렸고 결승에서는 당시 -54kg 세계 최강으로 여겨지던 쿠바의 리바스를 맞아 초반 상대의 방심을 틈타 8-0을 만들고 남은 4분 동안 끈질기게 버티며 우승을 차지했다.[5] 훗날 IOC 인터뷰에서 이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를 10:0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8:0이라서 남은 4분을 필사적으로 버텼다고 한다. 이로써 '''서로 다른 2개의 경량급 체급에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위업'''을 이뤘다.
그리고 재미난 사실은 심권호가 '''1996년 LF급 금메달-00년 F급 금메달'''을 목에 걸 때 불가리아 출신의 아르만 나자라얀이란 선수가 '''1996년도 F급 금메달-2000년도 B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사실.[6] (나자라얀은 올림픽 2연패는 맞지만 두체급 그랜드 슬래머는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이뤘다면서 현역에서 잠시 은퇴해서 코치로 생활하다가,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컴백했다. 대표선발전 1차 대회에서는 후배에게 졌지만, 2차 대회에서는 결승까지 오르면서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과시했으나 협회가 이미 대표를 결정하는 바람에 올림픽 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심권호 자신은 3연패라는 대업[7]을 이루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다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퇴하게 되었다. 사실 심권호가 실력으로는 한 번 해볼 만했지만, 협회도 그렇고 레슬링계 내부에서 "그 정도 했으면 이제 후배에게 좀 양보하지?"라는 심리가 없지 않았다고 한다.[8][9]

3. 평가


레슬링 선수로서의 심권호는 한 마디로 굉장히 영리하고 기술에 능한 선수였다. 잠시 방심한 척 틈을 보이다가 상대가 미끼를 물면 바로 공세에 돌입해서 가볍게 상대를 제압하는 힘을 가진 선수. 워낙 기술이 다양해서 상황에 맞춰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10] 다른 선수들이 하나의 주무기를 가졌다면 심권호의 레파토리는 5~6가지 정도 되었다. 여기에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체급의 정상에 군림한 보기 드문 자기 관리까지 겹치면서 전 세계 레슬링 최경량급의 레전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4. 은퇴 이후




2004 아테네 올림픽 중계
2008 베이징 올림픽 중계
은퇴 이후 2004 아테네 올림픽부터 해설자로 데뷔했다. 경기를 분석하고 전달하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같이 흥분하며 코치마냥 선수에게 지시를 내리는 듯한 해설을 하면서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는데[11], 그나마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재미있는 해설이라는 의견도 많았고 정지현이 금메달을 따면서 분위기가 좋았던 것도 있었기에 그럭저럭 무난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그의 해설 방식은 결국 다시 한 번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야이씨 바보야!"를 비롯한 정제되지 않은 멘트들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이로 인해 공개적으로 사과방송도 해야 했다. 그 때만 생각하면 말도 못할 정도로 창피하다고 밝혔다. 사실, 그럭저럭 입담도 좋고 예능감도 있는데다 해설도 잘하는 편이지만 흥분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멘트를 사용해서 망가진 케이스로 봐야 한다.
그래도 말주변도 좋고 레슬링계의 전설이기 때문에 자주 해설 외에도 예능 프로그램에도 반 고정으로 나왔다. 특히 몸을 쓰는 예능에서는 거의 100% 단골. 한 번은 어느 예능 프로그램 몸 쓰는 코너에서 쇠봉으로 만든 훌라후프를 출연자 중에 유일하게 돌리기도 했다. 코치로도 활동했지만 코치보다는 예능인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출발 드림팀에 많이 나왔고 2012년에는 채널A불멸의 국가대표에 출연하기도 했다.

불멸의 국가대표 출연 당시
주택공사 소속으로 오래도록 뛰었다가 LH의 코치를 잠시 역임했다. 2012년 현재는 코치 대신에 일반 직장인이 되었다. 보직은 신도시 보상팀 팀장이었다. 유명한 레슬러가 보상을 담당해서 그런지 험한 보상팀 임무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마찰은 없다고 한다. 보상 논의를 위해 험악하게 기다리고 있던 입주자들도 심권호가 나타나면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술한잔 하며 좋게 마무리가 된다고. 2017년 현재는 인천본부 사회공헌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사회공헌 업무로 타기관에 협의가거나 임대주택 단지에 나타나면 바로 아이돌 수준의 환호가 돌아온다고 한다.

남남북녀#s-3 출연 당시
이미 알코올 의존증 수준이고 뇌와 간이 많이 망가졌다는 충격적인 모습이 나왔다.
2019년 뭉쳐야 찬다에 '작은 거인'이라는 닉네임으로 잠시 출연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돼서 하차했다. LH 직장과의 병행이 어려워서 잠정 하차라고 한다.
2020년 E채널사랑의 재개발에 출연하였으며 언급된 바로는 직장에서 퇴사한 것으로 보인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96 애틀랜타
-48kg
금메달
2000 시드니
-54kg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5 프라하
-48kg
금메달
1998 예블레
-54kg
동메달
1993 스톡홀름
-48kg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4 히로시마
-48kg
금메달
1998 방콕
-54kg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995 마닐라
-48kg
금메달
1996 샤오산
-48kg
금메달
1999 타슈켄트
-54kg
은메달
1993 히로시마
-48kg

6. 기타


  • 아직 미혼이다. 여담이지만 여자친구를 한 번도 못 사귀어 봤다는 소문이 있다. 위에서 서술한 흥분 해설도 성격이 지나치게 순수하고 멋없다 보니 발생한 것이라 한다. 그의 혼자 사는 싱글라이프가 화제가 되었는데, 그의 무심한 듯 시크한 태도에 감탄 및 웃픈 감정을 표하고 그를 구출할 처자가 어디 없냐는 네티즌이 대부분이다.

  • 레슬링 종목에 남긴 업적에 비해 은퇴 이후 삶이 너무도 조용하고 소박한 편이다. 이건 본인이 한참 운동할 때는 계체량이다 뭐다 하도 빡세게 살다보니, 좀 백수처럼 놀고 먹고 사는 게 소원이라서 지금 이렇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 IQ가 145다.
  • 2013년, IOC에서 2020년 올림픽부터 레슬링을 잠정 퇴출하겠다고 발표하자 아쉬움을 토로했다. 다행히도 레슬링이 올림픽 종목으로 잔류하면서 한숨 돌렸을 듯하다.
  • 2014년, 드디어 국제레슬링연맹에서 발표하는 레슬링 명예의 전당에 한국인 최초로 입회하는 영광을 안았다.
  • 엄청난 실적을 쌓은 레전드인 건 사실이지만, 실제 업적 이상으로 부풀려진 정보가 떠돌기도 한다. 2체급 그랜드슬램이란 엄청난 실적을 쌓았지만, 국제대회 패배도 가끔 있었고, [12]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국내 선수에게 패배한 경우도 있었다.[13] 그런데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국제대회 무패의 흠잡을 데 없는 무패의 챔프로 잘못된 소문이 돌고 있다. 심권호 선수의 독주로 48kg이 폐지됐다는 어처구니 없는 낭설도 돌고 있는데, 실은 여자 레슬링의 창설과 올림픽 규모 축소화가 맞물려 체급을 줄이는 과정에서 없어진 것에 불과했다. IOC는 국가별 종목 쿼터제를 줄 정도로 올림픽 비대화를 막느라 대단히 골몰하고 있다. 실례로 태권도는 8체급이 벌어지지만, 국가별로 4개 체급, 역도도 8체급 중 국가별로 5체급까지 출전가능하다.
  • 2016년 우리동네 예체능 리우 올림픽 출전기원 레슬링 특집에서 정지현과 박은철[14]과 같이 출연했다. 여기에서 정지현과 스폐셜 매치를 벌여서 패배했다. 왜 졌냐고 할 수도있는데 아무리 전설이던 그도 나이가 벌써 불혹이 넘었다.
  • 2017년 방송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알코올 의존증 + 알코올성 간염 진단을 받았다. 일주일에 3~4회씩 3병 정도를 마셨다고 한다. 연애 문제와 함께 선수 생활 당시부터 도전자들 사이에서 느낀 외로움이 알코올 중독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건강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 신태용 감독이 K리그 첫 승을 거둘 때 세리머니로 맥콜을 뿌렸다. 마침 신태용 감독은 레슬링 유니폼을 입고 나와 심권호와 함께 파테르 퍼포먼스를 했다.
  • 2019년 6월 13일에 첫 방송을 한 JTBC 뭉쳐야 찬다 - 전설들의 조기축구의 '어쩌다FC' 멤버로 출연 중이었지만, 2019년 9월 19일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잠정하차했다. 위의 건강문제와 관련하여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지만, 심권호 측근의 말로는 개인사정 때문에 잠시 쉬게 된 것을 기자들이 부풀린 것이라고 한다.[15]
  • 매미킴TV에 출연하여 자신보다 40kg이나 더 무거운 김동현에게 옆굴리기를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 게다가 해당 체급의 체중 또한 지속적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권호의 체급이던 그레코로만 최경량급 라이트플라이급뿐만이 아닌 라이트헤비급과 프리스타일 라이트플라이급-라이트헤비급도 1996년 이후 폐지되었다. 사실 라이트플라이급은 1976년에 개설되어서 단 7번밖에 안 한 짧은 역사를 가진 체급이다.[2] 레슬링이나 유도처럼 힘7기술3이라 불리는 투기 종목에서 1체급 차이는 엄청난 차이다. 더군다나 최경량급인만큼 같은 6kg 차이라고 해도 상위 체급보다 힘의 차이가 크다. 100kg와 106kg의 차이와 44kg와 50kg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3] 하태연은 레슬링을 접고 무속인이 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4] 97, 99 세계선수권대회는 하태연이 승리해 출전했고 98 세계선수권대회와 2000 올림픽은 심권호가 출전했다. 하태연은 99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냈다.[5] 리바스가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넘겨뜨리는 게 능했던 선수인데 심권호는 애초에 리바스에 여지를 주지 않고 겨드랑이 방어에 신경을 썼고 기술이 안 들어가자 리바스는 경기 내내 평정심을 잃고 짜증을 보이기도 할 정도로 리바스라는 최강자를 상대로 엄청난 방어를 선보였다.[6] 시드니 결승전에서 김인섭을 이기고 금메달을 딴 선수다. 아테네 올림픽에도 출전했는데, 4강에서 아래 나오는 정지현과 붙어 졌다. 이 때 심권호는 '나자라얀... 너는 이제 은퇴죠...'라며 지상파 해설방송에서 대놓고 갈구는 위엄...을 과시했다.[7] 이게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냐면 1회 대회부터 있었던 레슬링 종목에서 올림픽 3회 우승을 이룬 남자 선수는 역사상 딱 5명이다. 그 중에 위키러들에게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시 알렉산드르 카렐린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다섯 명 중 중량급이 2명, 최중량급이 3명일 뿐, 경량급 선수는 없다.[8] 후배양보는 국내스포츠 폐해중에 하나이다. 심권호가 레슬링계에서 그랜드슬램 2번의 업적을 거둔 마당에 협회랑 척을 지는게 싫어서 참은거지, 빅토르 안 사태보다 10여년 먼저 발생할수도 있었다.[9] 사실 올림픽 3연패 도전 못하게 한 협회에 섭섭함도 있었겠지만, 이미 은퇴 후 소속팀인 공기업 주택공사(현 LH공사)에서 자리를 보장받았고 부장까지 승진했다. 팀 해체 후 갈 데가 없던 안현수와는 입장이 많이 달랐다.[10] 대표적 케이스가 위에 언급된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인데, 옆굴리기로 2점을 선취하고 상대 선수가 옆굴리기 방어자세를 취하자 목감아돌리기로 전환해서 6점을 연이어 따낸다.[11] 심지어 한국 방송사 중계진들의 자리가 붙어있었고 심권호의 목소리가 워낙 컸다보니, 듣기 싫어서 다른 채널로 돌려도 심권호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레슬링 선수들도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말하길 경기 중에 중계석에서 외치는 심권호의 지시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12] 커리어 전성기 직전인 93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 93 아시아선수권 은메달[13] 97,99 세계선수권대회 국대선발전에서 하태연에게 패배했다[14] 2008 베이징올림픽 그레코로만형 55kg급 동메달[15] 네티즌들은 이만기를 탓했는데, 네티즌들의 주장은 자기도 제대로 못하면서 계속 뭐라고 해 결국 영향을 준 거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심권호는 직장인이다. 원래 나오던 것도 주말에 찍어서 나온 거지 뭉쳐야 찬다가 원래 4주 기획에서 장기로 바뀌면서 찍는 날짜가 평일로 바뀐 탓에 참여가 어려워진 것이다. 또한 인터뷰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고 불화설은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