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해군병학교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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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부터 1945년까지 운영되었던 일본 제국의 해군사관학교. 한자(일본어)로는 海軍兵學校 / 海軍兵学校 (かいぐんへいがっこう). 약칭은 해병(海兵)으로, 기수를 나타낼 때도 해병XX기 같은 식으로 불렀다.
이름의 의미는 '일본 해군'에서 '병과사관'을 교육하는 '학교'였기에 '해군 / 병학 / 교'다. 여기서 '병과사관'이란 오늘날 한국 해군의 의미로는 '항해 병과'를 의미한다. 당시 일본 해군은 '병과'와 반대말인 비(非)병과를 구분했다. 병과사관들은 세부 특기로 항해, 포술, 수뢰 등의 특기를 받아 관련 전술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육전대 전투부대도 이들이 배치됐다. 일본 해군에서 전투병과는 '항공과'가 추가되기 전에는 '병과' 단 하나뿐이었으며, 그나마 항공과의 하늘색 병과색이 들어간 계급장은 사병 출신들 중에서 선발하는 특무사관들만 썼다. 이마저도 소수의 소좌 진급자들부턴 병과로 자동 편입되었다. 그래서 해군병학교 졸업자는 전원 병과사관이다. 그 외 비병과 장교를 위한 학교로, 기관과 사관을 양성하는 해군기관학교, 일본 해군에서 주계과 사관을 양성하는 해군경리학교 등이 따로 있었으며, 그 외 군의과 등은 민간에서 전공한 자들을 임관시키는 과정을 도입해 영입했다.
히로시마현 구레시 에타지마(江田島)에 위치하며 1945년 이전에 에타지마는 해군사관학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78기수를 배출했으며 총 인원은 12,433명이다. 가는 방법은 히로시마 항에서 에타지마 코요항 페리를 타고 코요항에 가서 코요항 바로 앞에 있는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코요항에서 해군병학교 안내소가 있는데 주말에만 운영한다. 평일 주말 매일 정해진 시간에만 민간인이 식당을 이용이 가능하거나 학교 견학 투어를 신청할 수 있으며 건물 외부 사진 촬영은 어디든 가능하지만 건물 내부는 허가된 지역 외에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 심지어 건물 내부도 화장실 같은 곳은 아예 전파 차단막을 해놔서 스마트폰 데이터 통신도 안 된다. 투어 내용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문제는 한국인이라면 상당히 거슬리는 구간이 해군병역사 박물관인데 이곳에 카미카제 혹은 카이텐 자살특공대원의 유서를 모셔두고 신성한 곳이라며 미화하는 문제가 있으며 더욱이 카메라 플래시로 인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카메라 촬영도 불가능하다.
해군병학교는 일본육군사관학교보다 규모가 작고 인원 풀이 좁았던 탓에, 일본 내에서도 귀족적이고 배타적이란 평가를 많이 받았다. 해군 사관들 내에선 일본 육군 장교들조차도 국제정세나 예의범절에 무지한 촌무지렁이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육군은 해군을 필요 이상으로 국가예산을 훔치는 거만한 엘리트주의자 집단이라 욕했다. 해군 내 친목질도 만만치 않아서, 같은 해군병학교 출신끼리도 특기가 다르면 계급이랑 별로 상관없이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민간에서도 해군 장교들을 육군 장교들보다 좀 더 교육받고 품위있는 신사들로 보는 경향이 컸다.
이러한 특유의 엘리트 의식은 실용적인 방향으로 작용되기도 했다. 일례로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느라 영어가 적성어로 교육이 금지됐지만 해군병학교는 그냥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교장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이 "아무리 적성국의 언어라지만 이 세상 천지에 국제 공용어를 못 하는 해군 장교가 어딨느냐?"[1] 며 강행했고, 우익들이 교장 탄핵 운동을 벌였지만 교장은 되려 그들을 무식한 놈들이라고 씹었다. 전후 GHQ 통치기를 거친 뒤 영어 구사력이 높은 경쟁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되자, 영어 한 마디 못 하던 육사 출신들보다 더 출세한 해군병학교 졸업자들이 이노우에 제독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이노우에 제독 본인도 전후 영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또한 조선인, 대만인 등 외지의 일반인에게도 해군병학교의 문호를 개방하자는 주장도 의외로 일찍부터 나왔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고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펴자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그 결과 일본 해군에서는 일본육군사관학교보다도 한참 앞선 1921년 1월에, 3.1 운동 이후 격변한 "조선의 실정" 및 "사위(四圍)의 정세"에 따라 조선인을 해군병학교 생도로 받아들이라는 결정을 공식적으로 내린 바 있다.[2] 문제는 이러한 지침이 실제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군병학교에서는 지원자들이 수준이 떨어진다는 핑계로 종전까지도 입교를 거부했고, 조선인이나 대만인 해군병학교 졸업생은 사실상 전무하다. 일본인 가정에 입양되는 등 서류상으로는 일본인(내지인)인 경우로 입교한 사례만이 극소수 있을 뿐이다.[3] 이 때문에 광복 후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할 당시 일본 해군에서 함선 및 항해 관련 교육을 받은 인재가 없어서[4] 손원일, 박옥규, 정긍모 등 상선사관 출신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다.
2. 역사
1869년 해군조련소(海軍操練所)가 설치됐으며 도쿠가와 막부 소속의 해군의 인원을 각 번마다 운영한 해군과 합쳐 일본 해군으로 전환한다. 그 후 이름을 해군병학료[5] (海軍兵學寮)로 개편하였고, 메이지 시대 당시 해군성이 설치되어 있던 도쿄 츠키지[6] 에 위치했다. 1888년에 에타지마로 옮겼다.
딱히 중요한 항구도 아닌 에타지마에 소재하냐를 두고 말도 많았다. 요코스카나 요코하마에 위치해야 했다는 주장인데, 이는 도시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의 얘기이지 일본 해군이 생길 때만 해도 도쿄의 권역은 지금과는 달랐다.
패전 후 해군병학교의 건물은 해상자위대의 해상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로 쓰이고 있다.
현재 간부후보생학교로 쓰이면서 해군병학교 시절의 관례를 일부분 바꿨다. 옛날 해군병학교 시절에는 입학 및 졸업이 열리는 건물에 레드카펫은 성적 상위권 1위에서 5위까지만 밟고 자리배치도 성적 순으로 하는 관습으로 하다가 간부후보생학교로 쓰이기 시작해서는 임관식 당시 성적 상위권 1위에서 5위만 레드 카펫을 밟되 나머지 자리배치는 랜덤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연병장 입장인 경우에는 무조건 성적순이라는 관습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고 한다.
3. 생도 선발과 운영
16세부터 19세 사이에서 선발했다. 초기에 모집 인원이 적어 일본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육군유년학교와 마찬가지로 예비과정이 존재했는데 해군예비교라고 불렀다. 교육기간은 초기에는 3년이었고 1927년부턴 3년 8개월이었다. 영국 해군의 영향을 받았고 주말마다 카레를 먹는 관습[7] 도 생겼다. 전쟁이 터지면서부터는 교육기간이 줄어들어 1941년에 입교한 73기의 경우엔 2년 4개월이었다. 사관생도들은 일등병조(해군 상사)와 병조장(해군 준위) 사이에 해당[8] 하는 대우를 받았다.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이 일병에서 상병 수준인 걸 생각하면 굉장히 높은 편으로, 이는 비 해병 출신 생도들에게도 적용되었기에 고학력자들이 육군보다 자신들을 우대해주는 해군에 보다 많이 몰리는 현상을 불러왔다.
인원은 기수에 따라서 차이가 크다. 입학 시에 장래 좌관급(영관급) 장교 필요 인원을 예측하고 그에 맞춰 정원을 정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입학한 36기의 경우 191명이 졸업했던 반면,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이 입학한 41기의 경우 120명이 입학했고 118명이 졸업했다 (기무라 마사토미). 기무라 제독의 예를 보듯 한 번 입학하면 유급이나 퇴출이 거의 없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 해군의 진급은 소위 '해먹 넘버'라고 해서 해군병학교 졸업성적으로 결정되었다. 정말 사관학교 안에 해먹이 설치 되어 있는건 아니지만 대략 사관학교 내의 석차라는 느낌으로 불러줬다. 즉 해먹 넘버 1이라면 수석 졸업이라는 뜻이다.
성적순으로 잘 하는 사람부터 포술, 수뢰, 항해 쪽의 병과로 갔다. 졸업성적이 좋은 사람은 포술, 수뢰 같은 병과를 택한 뒤 해군성이나 연합함대에서 요직을 맡았다. 하지만 졸업성적이 나쁜 사람은 항해 병과를 택할 수밖에 없고 수뢰정, 소해정, 구축함 등의 정장/함장 등의 한직을 주로 맡아야 했다 [9] . 이 졸업성적에 따른 진급은 전시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졸업 성적이 나빴던 졸업생들은 대개는 소좌~중좌 정도로 구축함 함장 등 중요도가 떨어지는 함의 함장이나 육상 한직을 하다가 예편, 전시에 군공을 여럿 세우더라도 대개는 순양함 함장 정도에 대좌 정도가 한계였다.
다만, 성적에서 일본 황족은 예외였다. 당시 일본 황족 남자들은 관례적으로 육군사관학교나 해군병학교를 가야 했다. 보통 이 두 학교에 황족이 입학하면 관례상 수석이나 차석 등 최상위 성적을 이들에게 주었다. 때문에 황족이 입학한 기수는 이들을 제외한 일반 생도들 중 졸업 성적이 가장 좋은 생도를 실질적인 수석으로 여겼다.
졸업 성적이 좋은 사람은 아주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대좌까지 복무할 수 있었고, 나쁘더라도 소좌나 중좌까진 무리없이 근무했다. 애초 해병 신입 생도의 숫자를 향후 좌관급 장교 숫자에 맞춰 뽑는지라, 중간에 나가면 인력 수급 문제가 생겼다.
75기는 원래 1945년 10월 1일 임관할 예정이었지만, 패전 후 해군이 해체되면서 졸업 증명서만 나눠주었다. 그 이하 기수는 그마저도 없이 그냥 학교가 폐교되며 졸지에 대학 중퇴자가 됐다.
4. 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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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기관학교(海軍機關學校) : 해군의 기관과 사관을 양성하기 위한 곳이다.
1874년 해군병 분교로 요코스카에 위치했으며 1881년에 해군기관학교가 된다. 관동대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교토로 이전한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진 이전 작업으로 에타지마의 해군병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는다. 1945년 3월 1일에 해군병학교에 통폐합되었고, 그 이름은 해군의 사관, 기관병조, 기관병 등의 후반기교육을 시키기 위해 있던 해군공기학교(海軍工機學校)에 넘겨주어 공기학교가 이후 폐교될 때까지 해군기관학교란 이름을 쓴다.
- 해군경리학교(海軍經理學校): 주계(主計)과 사관을 양성하던 곳이다. 문서 참조.
5. 주요 동문
5.1. 일본군 해군
- 나구모 주이치(36기)
- 사이토 마코토(6기)
- 스즈키 간타로(14기)
- 야마모토 이소로쿠(32기)[10]
- 기무라 마사토미(41기)
- 츠다 카즈마(61기)
- 쿠사카 타쿠미(58기)
- 후쿠시마 시게오(福島 重雄, 1930-)(78기)
사관생도로 있다가 임관하지 못한 채 패전을 맞이했고 교토대학에 입학하여 판사로 임용, 삿포로 지방재판소에서 재직하던 중 나가누마 나이키 재판[11] 당시에 자위대가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삿포로 고등재판소는 1심을 파기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으며 최고재판소도 기각했다. 후속 재판으로 자위대는 위헌을 피했다. 후쿠시마는 계속 보복성 인사로 한직만을 떠돌았다고 한다.
5.2. 해상자위대
자위관을 보면 해상자위대 해상막료장을 해군병학교 출신들이 독점했다는 걸 알 수 있다.
5.3. 항공자위대
일본 해군 항공대 출신 등이 일부 공자대로 들어가기도 했다.
5.4. 민간
6. 기타
해군병학교라는 이름은 한국어에서는 해병이나 수병을 교육하는 학교가 아닌지 혼란을 만들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해군사관학교도 처음 몇 달은 해군병학교란 이름을 썼다.[12] 대한민국 해군은 처음엔 병조#s-3(兵曹)라는 일본군 해군의 계급 호칭을 쓰기도 했는데 1962년에 육해공 계급 명칭이 통합되면서 오늘날의 부사관/병 호칭을 썼다.
해군사관학교가 귀족적, 배타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은 영국같은 섬나라나 미국, 스페인처럼 섬나라는 아니지만 해군의 권력이 큰 나라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특히 당시 일본에서 해군은 지원병 제도를 실시했기 때문에 병사들 사이에서도 '징집병인 육군과는 수준이 다르다'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칸코레 애니화 등 미디어 믹스화로 성공하자 칸코레의 성지순례 장소로 알려지자 많은 오타쿠들이 에타지마에 많이 방문한 것을 눈여겨 본 에타지마 지자체는 이를 응용하여 兵器ストライク라는 해당 관광지에 가서 QR코드를 읽어서 수집하는 코레류 스탬프 게임을 출시하였다. 처음엔 지자체 높으신 분들도 효과에 대해 상당히 의구심이 깊었지만 정말 궁금증에 오는 관광객이 늘었다는 통계를 보고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일본의 러일전쟁과 일본제국의 부흥기를 담은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드라마 장소로도 유명하다.
[1] 현재 전세계의 모든 관제탑에서 영어를 사용하듯 당시 선원들은 전세계 항구에서 영어를 사용했다. 해군도 선원의 일종인 만큼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임은 물론이고, 배우지 않으면 작전 수행에 차질이 생길 정도였다.[2] 「朝鮮人ヲ生徒ニ採用ノ件」, 海軍大臣官房 編, 『海軍制度沿革 12』, 海軍大臣官房, 1940, 476쪽. [3] 해양전략연구소에서 발간한 손원일 제독 전기에 해군 창설 멤버 중 이같이 일본인의 양자로 입적해 법률상 내지인이 되어 입학, 소좌까지 진급한 조선인 해군 장교 출신 인물이 합류했음이 언급되어 있다.[4] 일본 해군 출신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순혈 의식 때문에 거의 대부분 해군 항공대나 해군 육전대 출신이었다.[5] 료(寮)는 일본어로 기숙사를 말한다.[6] 세계 최대의 수산시장인 츠키지시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7] 현재 해상자위대도 이를 계승했으나, 주5일제 시행으로 카레는 금요일에 나오는 것으로 바뀌었다.[8] 일본군의 하사관 계급은 3개로, 우리의 원사에 해당하는 계급은 없었다.[9] 기무라 제독의 경우 118명 중 84등이라 항해밖에 갈 수 없었다. 해군대학 입시를 칠 기회는 주어졌으나 2번 떨어져서 입학하지 못 했다. 그는 일본 해군에서 해군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유일한 제독이었다.[10] 이 기수는 임관일을 당겨 러일전쟁에 참전했다.[11] 1970년 미사일 기지 건설을 위해 농림부에서 국유림을 해제하고 자위대에 사용을 허가하였는데 주민들이 자위대는 위헌이며 국유림을 해제하는 건 불법이라고 소송을 건 사건.[12] 대한민국 공군도 공군기본군사훈련단의 전신을 공군병학교(空軍兵學校)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