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밸푸어

 


'''영국 제50대 총리
The Right Honourable[1]
The Earl of Balfour
KG OM PC FRS FBA DL
'''
'''본명'''
Arthur James Balfour
아서 제임스 밸푸어
'''국적'''
영국 [image]
'''출생'''
1848년 7월 25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이스트로디언
'''사망'''
1930년 3월 19일
영국 서리 주 워킹
'''작위'''
'''1대 밸푸어 백작[2]'''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
'''신장'''
185cm
'''학력'''
이튼 칼리지 (졸업) (1861-186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철학 / B.A.) (1866-1869년)
'''직업'''
정치인
'''주요직위'''
스코틀랜드 국무장관
아일랜드 국무대신
옥새상서
보수당 당수
해군성 제독
외무부 장관
추밀원 의장
'''정당'''

'''재임 기간'''
1902년 7월 12일1905년 12월 4일
'''종교'''
성공회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총리 재임 시기
2.3. 이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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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제50대 총리'''
한국에서는 총리 재임 당시의 업적보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민족의 민족 국가 수립유대인들에게 약속한 밸푸어 선언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영국식 발음으로는 밸퍼에 가깝다.

2. 생애



2.1. 초기


영국 스코틀랜드의 최고의 명문 가문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국회의원(MP)을 역임하였으며, 외삼촌은 훗날 영국의 총리가 되는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이었다. 그리고 워털루 전투에서 그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명장 아서 웰즐리가 그의 대부였다. 집안 배경에 걸맞게 최고급 교육을 받은 밸푸어는, 이튼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1874년 26살의 젊은 나이에 하원 의원에 출마하여 어렵지 않게 당선된다. 든든한 가문 배경은 정계에서도 큰 도움이 되어, 외삼촌이자 당시 디즈레일리 내각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경은 밸푸어를 비서로 채용한다. 1870년대 중후반 당시 격동의 유럽에서 베를린 회의와 같은 역사적인 외교 현장에 참여했던 경험은 훗날 밸푸어가 1차대전 시기에 외무장관으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후 1885년 게스코인세실 경이 자유당글래드스턴을 꺾고 총리직에 오르자, 밸푸어 역시 내각에 입각하여 스코틀랜드 국무장관, 재무부 장관, 외교부 장관 등의 자리를 역임한다. 재임 후반기로 갈수록 게스코인세실 경은 지병이 심해졌기 때문에 밸푸어가 정부의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강해졌고[3], 마침내 1902년 게스코인세실 경이 수상 자리에서 사의를 표명하자[4] 밸푸어는 다수의 보수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영제국의 총리 자리에 오른다.

2.2. 총리 재임 시기


밸푸어가 총리에 오름과 동시에 보어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도 개최되었기 때문에 밸푸어 내각을 향한 대중들의 지지는 뜨거웠다.[5] 게다가 야당 자유당은 심지어 보어 전쟁의 정당성 문제를 놓고 둘로 분열되어있었기 때문에 밸푸어 내각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하지만 밸푸어 내각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경제였다. 자유방임주의의 본고장이었던 영국은, 다른 여타 국가들이 모두 보호무역을 내세울 때에도 자유무역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미국과 독일의 급속한 경제 발전 앞에 자유무역 노선을 유지할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게 되고, 결국 밸푸어 총리 취임 이전이었던 19세기 후반에 영국 정부는 수입 상품에 부분적인 관세를 부입할 것을 결정한다. 바로 이 관세 문제를 놓고 내각 안에서 분규가 일어났다. 밸푸어 내각은 보수당과 자유 통일당[6]간의 연립 내각이었는데, 자유 통일당 내에서 이 관세 문제를 놓고 일부 세력은 부분적으로 관세를 감소하는 한에서 관세 제도를 유지할 것을 주장한 반면, 또다른 세력은 완전한 자유 무역을 주장하면서 논란이 벌어졌던 것. 밸푸어는 '영국산 제품에 관세를 매긴 국가의 제품에 한하여서 보복성 관세를 부여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하지만 자유 무역을 옹호하는 세력은 이조차 거부한다. 자유 무역을 지지하는 내각 구성원들이 대거 사퇴하면서 국정 동력을 잃은 밸푸어는 결국 1905년 12월 총리직에서 사임해야만 했다. 그 직후인 1906년의 1월의 총선에서 밸푸어는 다시 총리직에 도전하였지만, 선거 결과는 보수당의 참패였고 결국 밸푸어는 다시는 총리직에 오르지 못한다.[7]
한편 외교적으로 밸푸어 내각은 대영제국의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 대영제국의 지위에 도전한 국가는 러시아독일이었다.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일본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일전쟁을 뒤에서 지원해주었으며, 독일을 견제하고자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도 기존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영불협상을 체결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영국이 소위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부르짖으면서 유럽 대륙 내의 일에 불개입할 것을 천명한 고립주의를 핵심적인 외교 노선으로 내세운 점을 고려할 때,[8] 밸푸어 내각의 외교 노선 전환은 전세계 외교가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2.3. 이후


비록 총리직에 다시 오르지는 못했지만, 이후로도 밸푸어는 보수당의 요인으로 남으면서 활발한 정계 활동을 펼쳤다.[9] 이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거국내각이 수립되자 밸푸어는 1916년 로이드 조지에 의하여 외무부 장관으로 재발탁된다.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건국을 약속한 밸푸어 선언이 이 시기의 일.[10] 종전 이후에도 로이드 조지 내각에 남아 파리 강화 회의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협상장에도 참가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1922년 로이드 조지 내각의 붕괴 이후에도 정계의 원로로 왕성히 활동하다가[11] 1930년 사망한다.

3. 여담


  • 평생 독신이었다. 그래서 1922년 서임된 밸푸어 백작 작위는 특별칙허로 동생 제럴드 밸푸어와 그의 후손들로 이어진다.

[1] 백작 본인에 대한 경칭[2] 1st Earl of Balfour[3] 특히나 보어전쟁 당시 전쟁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것은 밸푸어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4] 다만 게스코인세실 내각이 17년 동안 쭉 지속된 것은 아니다.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항목과 글래드스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19세기 후반 20년 동안 영국의 총리 자리는 딱 한 번 로즈베리 백작 아치볼드 프림로즈이 총리직에 취임한 것을 제외하면 이 둘이 계속 주거니 받거니 했다. [5] 왕의 대관식과 정권 지지도가 무슨 상관이냐고 여기기 쉽지만, 일반적으로 대관식과 같은 전국가적인 행사가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 시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새빠지게 대중들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심어주었는데, 대관식 한 방에 리셋되었다.'라는 식의 한탄이 많이 보인다(...) 한국의 경우에는 한일 월드컵 이후 김대중 정부의 지지도가 일시적으로 폭등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된다.[6] Liberal Unionist. 1886년 글래드스턴 내각이 발의한 아일랜드 자치법에 반대하여 자유당을 탈당한 세력이 결성한 정당.[7] 심지어 밸푸어 본인 조차도 자신의 지역구에서 패배해서 의석을 잃었다.[8] 물론 그 와중에도 러시아의 남진을 방해하려고 일시적으로 프랑스와 동맹 맺고 크림 전쟁을 벌이긴 했다.[9] 귀족 가문이었던만큼 주로 상원에서 활동했는데, 어찌나 밸푸어가 자유당 정권을 집요하게 비판했던지 로이드 조지는 "상원은 헌법의 감시인이 아니라, 밸푸어의 푸들이다.(the House of Lords is not the watchdog of the Constitution, but Mr. Balfour's poodle.)"는 비아냥을 남기기도 했다(...) [10] 한가지 아이러니라면, 밸푸어는 수상 재임 당시 동유럽 유대인들의 영국 이주를 제한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었다.[11] 노년에도 기력이 왕성했는지, 죽기 2년전인 1928년에 80살의 나이에도 테니스를 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