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넨베르크 전투

 

1. 개요
2.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
3.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
3.1. 배경
3.2. 전개
3.3. 결과
4. 1944년 타넨베르크 전투


1. 개요


폴란드 그룬발트(타넨베르크)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를 지칭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3개의 전투가 있었다.

2.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



독일에서는 1차 타넨베르크 전투라고 부르는 반면, 폴란드 역사학계와 영미권 기준으로는 '그룬발트 전투'로 표기하는게 더 일반적이다. 타넨베르크가 2차 대전후 폴란드로 넘어가고 폴란드 중심의 역사관이 서양 역사학계에서 인정 받으면서 그룬발트 전투란 이름으로 명칭이 많이 변경되었다

3.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


[image]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 8월 26일부터 31일까지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벌어진 독일 제국군러시아 제국군의 전투.
1410년도 전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실제 전투가 일어난 곳은 타넨베르크로부터 동쪽으로 30km 떨어져 있다.[1]

3.1. 배경


1차대전 초기 독일 제국군 육군프랑스 등 서부전선을 먼저 이긴 뒤, 전쟁동원능력이 떨어지는 러시아 동부전선은 다음에 공격한다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대부분의 육군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고, 반대로 동프로이센 지역은 육군 11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으로 구성한 적은 수의 육군 제8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은 미흡한 병력동원 및 군수장비 생산능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신속하게 동프로이센 지역에 공세를 취하게 된다. 공세에 투입된 러시아군은 자연장애물인 마주리안 호수 북방으로 진격한 제1군, 남방의 제2군으로 병력은 30개 보병사단, 8개 기병사단에 달했다.
독일 제8군은 러시아 제1군과 초전에서 전술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는데, 이에 압도당한 제8군 지휘관 프리트비츠 장군은 동프로이센을 포기하고 후퇴를 생각하게 된다. 동프로이센은 근대 독일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므로 이 곳의 중요도는 막중했다. 따라서 당시 서부전선에서의 전쟁 수행을 위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프로이센을 사수해야만 했던 독일군 수뇌부는 프리트비츠 장군을 해임하고 지휘관에 퇴역장군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참모장에 개전 초 리에주 공략전에서 활약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임명한다.
제8군내에서도 전 사령관을 제외하고는 지휘부가 딱히 패배했다는 분위기에 지배당하지는 않았고, 신임 사령관 착임 전의 공백기를 활용해 제8군 작전참모 막스 호프만 장군참모 중령은 후속 작전계획을 짜놓게 된다. 언뜻 보면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작전계획으로, '''1개 사단'''으로 북부의 러시아 제1군을 막는 동안 나머지 병력으로 남방의 제2군을 때려잡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제1군은 초전의 승리 이후 굼비넨 지역에서 진격을 정지하고 있었고, 너무 이른 동원으로 제대로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러시아 제2군은 호수 남방의 소택지에서 진격에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약점을 궤뚫어 보았기 때문에 과감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작전계획은 러시아군의 명령문[2]을 입수했기에 전장에서 떨어져 있던 독일 제8군 사령부에서도 비슷하게 짜고 있었다. 명령문은 힌덴부르크에게 전달되었고 힌덴부르크는 지체없이 작전을 승인했다. 루덴도르프는 전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작전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도착하고 나니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작전이 이미 실행준비까지 완료되어 있었다. 그만큼 당시 러시아군의 통신보안은 매우 열악하고 안이한 수준이었다(참고: 존키건 1차 세계대전사).
[image]

3.2. 전개


독일군은 계획대로 호수 남방에서 러시아 제2군을 때려부수기 시작한다. 병력에서 아무리 앞서 있더라도 통신장비의 부실로 평문통신을 마구 날려대던 러시아군이 철저하게 준비한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은 원래부터 없었을 것이다. 진격하는 러시아군을 그 지역 출신의 예비군들로 구성된 독일 제20군단이 저지하는 동안 양 측면을 포위 후 섬멸한, 이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전에서 참패한 러시아군은 병력손실 12만 5천명, 야포 손실 500문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 제2군 사령관인 알렉산드르 삼소노프는 휘하 참모들과 함께 말도 타지 못한 채 도보로 전장을 탈출하다가 상황을 비관하여 자살했다.
전투 진행 도중 러시아 제1군이 언제 개입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루덴도르프는 주력부대였던 기병사단의 이동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마침 정찰기에서 제1군이 움직였다는 보고가 수신되자(사실 이건 오보였다) 기병사단의 기동을 취소하려 한다. 그러나 기병사단 지휘관은 상콤하게 그 지시를 씹어버리고 제2군의 포위 섬멸전에 그대로 참여하고, 루덴도르프도 사후에 이 조치를 인정하게 된다. 호프만 중령의 작전계획 수립도 그렇고, 독일군의 특징인 임무형 지휘체계가 긍정적으로 나타난 예이다.

3.3. 결과


이 타넨베르크 전투를 통해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압력이 해소되면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독일군부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개전 초기에 서전에서 패배하자 동프로이센 지역 상실을 과도하게 우려한 독일군 지휘부는 서부전선에서 1개 군단을 차출해서 동부전선으로 보낸다. 정작 동부전선에 부임한 힌덴부르크는 지원군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거부했으나 동프로이센 상실의 공포에 질린 지휘부는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한달 가까이 걸려서 기차를 타고 독일 본토를 열심히 횡단해 동부전선에 도착해보니, 이미 이 전투로 전세가 뒤집혀 병력의 추가투입이 필요없었던 상태여서 결국 그들은 다시금 한달 가까이 기차를 타고 독일 본토를 열심히 횡단해 서부전선으로 돌아갔다. 힌덴부르크의 예상이 정확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독일군부가 동프로이센 방어에 과도하게 집착해서 서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는 악수를 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독일군 장성들과 정재계의 핵심 인사들은 대부분 토지귀족(융커) 출신들로 동프로이센은 그들의 정치적 기반이었다. 따라서 동프로이센의 일부라도 러시아군에 내준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뻘짓으로 인해 서부전선에는 2달간의 병력 공백이 발생했고, 서부전선에서의 조속한 승리를 목적으로 한 슐리펜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5] 그 결과 서부전선의 양군은 참호전의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이 전투를 계기로 독일 제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루덴도르프는 대전 말 독일군 참모총장에 오르게 되고, 힌덴부르크는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까지 선출되었다.[6] 한편 막스 호프만은 작전의 주역이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에게 포커스를 빼앗겨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7] 호프만은 종전 후 전투 지역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에게 힌덴부르크가 묵었던 숙소를 안내하며 '여기는 전투 전, 여기는 전투 중에 그리고 여기는 전투 후에 주무시던 침대입니다.'라고 말하며 디스를 하기도 했다.[8]
일설에는 일본군이 단기 결전에 대한 집착, 보급에 대한 무관심, 정신력에 대한 광신 등 현대전에 적합하지 않은 요소들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 이 전투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이 있다. 요약을 하자면 일본군은 일단 현대전의 요소가 군수 보급의 물량과 화력, 과학 기술에 달려 있다는 것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일본이란 국가 자체는 이를 감당할 만한 역량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 타넨베르크 전투를 통해 일본군은 양적 열세를 포위 섬멸을 통한 단기 결전으로 해소할 수 있고, 양적 열세를 '정신적 우세로 물질적 위력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더 이상의 자세한 반자이 돌격은 생략한다.
사실 타넨베르크 전투는 단순히 포위 섬멸로 이긴건 아니었다. 러시아군은 숫자는 많았지만 병사들의 훈련도 및 사기가 그리 높지 않았으며, 당시 지휘관들 간의 불화도 있었을 뿐더러, 통신보안도 제대로 이루어지 않는 등 허점이 많았으므로 독일군에게 포위 섬멸을 당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 관련된 일화로 흔히 '러시아 1군 사령관 파벨 폰 렌넨캄프[9]와 2군 사령관 삼소노프가 러일전쟁 당시 봉천 전투의 패전 책임을 두고 주먹다짐을 벌였는데, 이를 관전무관으로 파견되었던 독일군 호프만 중령이 목격하여 렌넨캄프가 삼소노프를 도우러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두 장군의 찌질한 모습들과, 이를 정확히 짚은 호프만의 능력이 대비되는 점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먼저 두 장군이 봉천에서 주먹다짐을 했다는 가능성 자체가 낮다. 봉천 전투 직후 렌넨캄프는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호프만 중령이 관전무관으로 파견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러시아가 아닌 일본군 측의 관전무관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 진영에는 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출처는 바로 호프만 본인의 자서전이라서 호프만이 자신의 전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창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열세에 놓인 2군을 1군이 지원하지 않은 것도, 당시 러시아군의 통신 연락망의 수준이 매우 열악해 서로의 위치조차 잘 모를 정도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벌어진 것.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상급 지휘부에서 렌넨캄프에게 지원 명령을 내렸고 렌넨캄프도 이를 수행하려 했지만, 그때까지도 1군에선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아 병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동하는 등 시간을 잡아먹고 결국 모든게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자 후퇴를 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건데, 이 전투는 사실 탄넨베르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전장 대부분은 탄넨베르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독일이 패배했던 1번 항목의 탄넨베르크 전투와 대조하기 위해서 이런 이름을 끌어다가 붙였다고...
그런데 이 타넨베르크 전투에 고려인, 즉 조선인 의병들이 대거 참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KBS 취재진이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가족들을 취재하던 도중, 대한제국의 참령이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인 김인수[10]를 비롯하여 구한말 일본군에 맞서 두만강 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 나라가 망하자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사단에 몸을 의탁했던 조선인 의병들의 행적을 밝혀내어 보도하기도 했다.러시아군 대령이 된 조선인 의병, 김인수

4. 1944년 타넨베르크 전투


정확히 말하자면 타넨베르크 선 전투다. 독소전쟁 후반기인 1944년 7월 25일부터 8월 10일까지 에스토니아의 타넨베르크 방어선 일대에서 벌어진 독일 국방군방어전이다.
독일군은 1944년 1월 14일 에스토니아 나르바에 소련군을 막을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 방어선을 방어하던 독일 병력의 대부분은 무장 SS 소속 외국인 의용부대였다. 특히 에스토니아, 헝가리 의용병을 주축으로 하는 독일군이 약 6개월간 소련군의 공격을 저지하며 격렬한 전투를 치른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반고르도(Ivangorod) 강을 통해 공격하여 독일군을 두 개로 분리시키자 독일군은 타넨베르크 선으로 방어선을 옮긴다. 나르바 16km 서쪽에 위치한 타넨베르크 선(Sinimäed Hills)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69.9 고지, 그레나디어 고지(Grenadier Hill), 오퍼나게 고지(Orphanage Hill) 3개의 전략적 고지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무장친위대 제3기갑군(III SS Panzer Corps) 예하 제20 무장친위대 제1 에스토니아 척탄병사단(20th Waffen Grenadier Division of the SS)은 1944년 7월 27일부터 오퍼나게 고지(Orphanage Hill)에서 7월 29일까지 3일 동안 소련군 전차 113대를 격파하며 지켜낸다. 그들과 전투를 벌인 소련군 중에는 1940년 6월 에스토니아를 침략 합병한 이후 강제 징집한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제 8 에스토니아 소총군단(8th Estonian Rifle Corps)'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9월 19일 독일군은 에스토니아에서 철수하였고, 소련군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겠다는 에스토니아 의용부대원들을 해산한다. 해산된 에스토니아 의용부대원들은 소련군에 대항하여 게릴라 활동을 벌인다.
에스토니아 영화인 1944에서 이 전투를 다룬다. 에스토니아인 병사들이 후퇴하면서 다른 친위대사단 소속 패잔병들(제11 무장친위대 노르트란트 소속이었다)과 마주치고 함께 후퇴한다. 후퇴 도중 전차를 몰고 오는 소련군들과 마주치고 교전하지만 알고보니 그 소련군들도 에스토니아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려 서로 사격을 멈추고 말 없이 서로 갈 길을 가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1] 크리스토퍼 클라크(2006/번역 2020), 강철왕국 프로이센, 811쪽.[2] 러시아 제1군이 쾨니히스베르크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다가 얼마간 떨어져 있는 지점에서 대기한다는 평어.[3] 갈리폴리 전투에서 혼자 협상국을 두들겨팼고, 1916년까지는 협상국 상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4]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의 전국토를 유린했고 발칸 반도에 파견된 영국군과 프랑스군까지 때려눕혔다.[5] 하지만 애초에 슐리펜 계획 자체가 비현실적인 전략이기도 했고, 빌헬름 2세 집권 이후 독일의 팽창 정책과 군사력 강화 정책은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를 자극하여 협상국 또한 군사력 강화 정책 및 독일의 선제 공격을 가정한 방어전술안 작성을 실시했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국이 세르비아를 공격할 동안 독일이 러시아를 막아주기 원했고, 독일은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할 동안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막아주기 원했다. 이처럼 이해 관계가 서로 달랐기에 슐리펜 계획은 더더욱 실현 가능성이 떨어졌다. 참고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한테 털리고 이탈리아한테 털리고 심지어 세르비아 상대로도 털리며 '삽질전설 1차대전판'을 찍었다. 그래도 오스만 제국[3]불가리아 왕국[4] 같은 나름 유능한 동맹국들을 끌어들여서 수많은 연합군 병력의 발을 묶어둘수 있었다.[6] 다만 두사람 다 참모총장, 대통령으로서 업적은 최악으로 특히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좌파/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는 희대의 인사를 단행한다.[7] 큰 공을 세웠는데도 승진이 늦었다. 1915년 8월에야 대령으로 진급했고, 2년 뒤인 1917년 10월에서야 별을 달고 소장이 되었다. 참고로 이 당시의 독일군 소장은 지금의 준장과 계급이 같다.[8] 물론 나중에 호프만이 퇴역한 후 힌덴부르크와 개인적으로 만나 화해를 하긴 했다.[9] 참고로 독일계 러시아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에스토니아 태생 발트 독일인.[10] 조선에서 고종 황제의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중 러일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로 탈출하였고, 러시아군 대령이 되어 러시아 황제로부터 최고 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김인수의 후손들은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김인수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 숨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