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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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조조 휘하의 장수. 자는 문겸(文謙). 양평군 위국현 사람. 악침의 아버지.
2. 정사
2.1. 초기 생애
용모와 체구는 작으나 담력이 뛰어나, 조조를 따라 다니며 장하리(帳下吏)가 되었다.[1] 고향 군으로 돌려보내져 병사를 모집하게 했는데, 천여 명을 모아 돌아오니, 군가사마 함진도위로 삼았다.
조조를 수행해 복양에서 여포, 연주 진류군 옹구현에서 장초, 예주 진국 고현에서 교유를 공격하는데, 모든 싸움에서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워 광창정후에 봉해졌다.
조조를 수행해 형주 남양군 안중현에서 장수를 치고,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할 때는 별장(別將)을 격파하고, 사견에서 수고를 치고 예주 패국 패현에서 유비를 공격해 이들을 모두 격파하고 토구교위에 임명되었다.
2.2. 관도대전
우금전에 따르면 유비가 서주를 들어 모반하자 조조가 동으로 원정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는데 우금이 굳게 지켜 함락시킬 수 없었다. 또한 악진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원소의 따로 설치한 군영을 들이치고, 연진 남서쪽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하내군 급현, 하내군 획가현의 2현에 이르기까지 보취(保聚) 30여 둔을 불사르고 적군을 참수하고 사로잡은 것이 각각 수 천에 이르렀고, 원소의 장수 하무, 왕마 등 2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돌아와 조조를 수행해 관도에서 원소를 쳤는데 힘을 다해 싸워 원소의 장수인 순우경을 베었다.
2.3. 하북 평정
조조를 수행해 원담, 원상을 여양에서 공격해 그 대장인 엄경(嚴敬)을 베고 행(行) 유격장군에 임명되었다. 별도로 황건적을 쳐서 깨뜨리고 청주 낙안군을 평정했다.
장료전에 따르면 조조는 허도로 돌아갔는데, 장료를 보내 악진과 함께 기주 위군 음안현을 함락케 하고 그 백성들을 황하 이남으로 이주시켰다.
조조를 수행해 업을 포위해 평정했다. 조조를 수행해 남피의 원담을 쳤는데, 선두에 서서 원담의 동문에 진입했다. 원담이 패한 후 별도로 유주 어양군 옹노현를 공격하여 쳐부쉈다.
206년, 조조가 한나라 황제에 표를 올려 악진과 우금, 장료를 칭찬했다. 이에 우금을 호위장군, 악진을 절충장군, 장료를 탕구장군으로 임명했다.
원담, 원상전에 따르면 고간이 반란을 일으켜 상당태수를 붙잡고 병사를 일으켜 호구관을 지켰다. 악진과 이전을 보내 격퇴케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악진은 별도로 고간을 정벌했는데, 북쪽 길을 통해 병주 상당군으로 들어가 우회해서 배후를 쳤다. 고간 등이 되돌아가 호관을 지키자 악진은 연달아 싸워 적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이 굳게 지켜 공략하지 못했는데 조조가 친히 정벌하여 호관을 함락했다.
조조는 관승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 북해국 순우현에 주둔하고, 악진을 이전과 함께 보내 공격하게 했다. 관승이 패주해 바다의 섬으로 달아났고 해안지대가 평정되었다.
2.4. 형주 정벌
형주가 아직 복속하지 않았으므로 악진을 예주 영천군 양적현에 주둔시켰다.
조엄전에 따르면 당시 우금은 영음에 주둔하고 있었고, 악진은 양적에 주둔하였으며, 장료는 장사에 주둔하였는데, 그 장수들은 기질에 따라 행동하고 대부분 서로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조엄에게 세 군대의 사무를 동시에 담당하도록 했다. 조엄은 매번 규분이 있을 때마다 훈계하여 깨우쳤으므로 결국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 뒤 조조를 수행해 형주를 평정했다. 악진을 남겨 양양에 주둔시켰다.
2.5. 남군 공방전
문빙전에 따르면 문빙은 악진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를 격퇴하고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 그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악진은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 두보, 정양장 양대를 모두 대파했다. 삼국지집해에서는 청니대치 때 관우 VS 악진+문빙의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했지만 중국어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남군 공방전 때 벌어졌다고 다르게 나오는데, 시기가 언제였는지 구체적 언급없이 그냥 싸움만 벌어졌다고 기록이 됐기에 벌어진 일이다. 대다수에서는 남군 공방전 때 벌어진 싸움이라고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청니 대치에서 3년 후에 합비 공방전이 벌어진 점을 감안하면 정말 청니 대치 때 악진과 문빙이 이길 정도의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유비는 유장에게 원군 달라며 언플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곧바로 도우러 갔어야 한다. 또한 청니 대치 무렵이면 전성기만큼은 아니어도 군세를 많이 회복한 조조가 악진과 문빙의 승기에 호응하여 재남진을 했을 텐데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는 점 등이 남군 공방전 때 일이라는 주된 주장의 내용이다.
2.6. 청니 대치
선주전에 따르면 212년, 유비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관우와의 싸움이 남군 공방전 때 벌어졌음이 맞다고 끼워맞춘다면 청니 대치는 서로 눈치만 보다가 악진이 합비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끝났을 것이다.조조가 오를 정벌하니 오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진이 청니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2.7. 2차 합비 공방전
그 뒤 조조를 수행해 손권을 정벌했고 악진에게 절(節)을 내렸다. 조조가 돌아갈 때 악진과 장료, 이전을 남겨 합비에 주둔시켰다.
장료전에 따르면 조조는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온 뒤, 장료를 보내 악진, 이전 등과 함께 7천 여 명을 이끌고 합비에 주둔케 했다. 조조가 장로를 정벌할 때 호군 설제에 교서를 주었는데 서신의 겉봉에는 적이 도착하면 뜯어보라고 적혀 있었다.
갑작스럽게 손권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합비를 포위하자 함께 뜯어보았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장들이 모두 의심스러워 하자 장료가 말했다.만약 손권이 오면 장료, 이전 장군은 출전하고 악진 장군은 수비하고 호군(설제)은 싸움에 참여하지 마시오.
이전 또한 장료와 의견이 같았다.공께서는 원정하느라 바깥에 계시므로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린다면 적군이 우리를 깨뜨릴 것이 분명하오. 이 교서의 뜻은, 적이 미처 집결하기 전에 요격해 그들의 예기를 꺾어 군심을 안정시켜야 지켜 낼 수 있다는 것이오.
이전전에 따르면 악진, 이전, 장료는 평소에 화목하지 않았는데, 장료는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자, 이전이 분개하여 말했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인솔하여 장료와 함께 손권을 무찔러 내쫓았다.[2]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 당신의 계책이 옳은지 틀린지를 볼 뿐이지, 내가 어떻게 사사로운 원한으로 공의를 돌아보지 않겠소!
오주전 주석 헌제춘추에 따르면 장료가 항복한 오나라 장수들에게 물었다.
항복한 장수가 말했다.아까 보니깐 자줏빛 수염을 가진 장군이 있었어.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짧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던데, 그게 누구요?
장료와 악진은 서로 쳐다보며, 말할 시간도 없이, 뛰어나가 추격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야 해서, 군(軍) 전체가 잃어버린 기회를 안타까워했다.그것은 손회계(손권)입니다.
2.8. 죽음
식읍 5백 호를 더 늘려주어 예전과 합쳐 모두 1,200호가 되었다. 악진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므로 악진의 식읍 중 5백 호를 떼어내어 아들 한 명을 열후에 봉했다. 악진은 우장군으로 관위가 올랐다.
218년 죽었다. 시호를 내려 위후(威侯)라 했다. 아들 악침이 후사를 이었다.
제왕기에 따르면 조방은 조서를 내려 고인이 된 공신들을 조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제사지내도록 했다. 그 중에는 악진도 포함되어 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활을 잘 다루는 무장으로 나온다. 복양에서 여포군과 싸울 때 성렴을 사살하고, 남피에서 원담군과 싸울 때 곽도를 사살한다.
그러다가 유수구 전투에서 능통과 일기토를 벌이던 도중 감녕의 화살에 맞아 얼굴에 상처를 입고 후퇴한다. 죽었다는 서술은 없지만 이후 출연이 없다. 활을 잘 다룬다고 묘사했는데 화살맞고 리타이어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특이하게도 연의의 수혜자, 피해자 어디에도 안 나온 인물이다. 연의에서도 정사처럼 용맹하게 싸워서 활약하는 모습이 몇 차례 나오고, 나관중이 군공까지 창작해 붙여줬다. 굳이 넣자면 수혜자로 넣어주면 될 것 같다.
4. 미디어 믹스
[1] 장하리는 군중의 보좌관으로 악진은 처음에는 무장이 아니라 기록계 관리였던 것이다. 대놓고 체구가 작다는 언급이 있었으니 처음 임관했을 때는 도저히 장수로서 믿을만하게 보이지 않아 기록관으로 써먹은 모양이다.(현대보다 평균 체격이 훨씬 작은 당시에 대놓고 체격이 작았다고 할 정도면 땅꼬마를 겨우 면할 수준으로 작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마저도 조조 눈에는 탐탁치 않았던지 바로 뒷문장에서도 나오듯 얼마 안 있어서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말이 좋아 병사를 모집한다는 명분이 붙은 거지 사실상 잘려버린 셈. 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많은 병사들을 모으기도 했고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그제서야 그를 저평가했다는 걸 깨달은 조조가 신임을 하게 됐을 것이다.[2] 이전의 숙부 이건은 여포군과 싸우다가 전사했기에 여포의 측근 출신인 장료와 사이가 서먹했을 테니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추측 가능하나 악진이 왜 장료와 사이가 안 좋았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이쪽도 추측을 한다면 악진은 조조군 초창기부터 저평가를 받았던 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출세했는데 한때의 적이던 장료가 투항하여 편입돼서는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서자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장료도 자신에게 저 둘이 묘하게 텃세를 부린다고 여겨 못마땅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본다면 손권의 공격이 이 셋의 결속력을 만들어주는 나비효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