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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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모습.[1] 가우디 생전에 지어진 남서쪽의 나시미엔토 부분이 보인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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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의 모습
'''기본 정보'''
위치
스페인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종교
가톨릭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지위
대성전(Minor Basilica)
'''건축 정보'''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양식
모데르니스메[3]
착공
1882년 3월 19일[4]
완공
'''공사 진행 중'''(미정[5])
축성
2010년 11월 7일, 교황 베네딕토 16세[6]
'''건축 내역'''
전체 길이
90m
전체 너비
60m
신랑 너비
45m
첨탑
총 18개(현재 8개 완성)
첨탑 높이
172.5m(예정)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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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
영어
Works of Antoni Gaudí
스페인어
Obras de Antoni Gaudí
프랑스어
Œuvres d’Antoni Gaudí
국가·위치
스페인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4년[7]
등재기준
(i)[8], (ii)[9], (iv)[10]
지정번호
320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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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2년에 맞추어''' 완공되었을 때의 예상도
대성당의 모형.
갈색 부분은 2019년 현재 건설이 완료된 부분이다.
'''언어별 명칭'''
한국어
속죄의 성가정 대성전
스페인어
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lia
카탈루냐어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
라틴어
Basilica Sanctae Familiae
영어
Basilica and Expiatory Temple of the Holy Family
프랑스어
Temple Expiatoire de la Sainte Famille
독일어
Sühnekirche der Heiligen Familie
포르투갈어
Templo Expiatório da Sagrada Família
이탈리아어
Tempio Espiatorio della Sacra Famiglia
에스페란토
Pentofera Templo de la Sankta Familio
중국어
聖家堂/ 聖家宗座聖殿暨贖罪殿
일본어
サグラダ・ファミリア/ 聖家族贖罪教会
1. 개요
2. 명칭
3. 역사
4. 건축
4.1. 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
4.2. 형태와 배치
5. 세계 최장기 불법 건축물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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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가톨릭대성전[11].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이자 그가 심혈을 기울인 야심작으로, 고딕 성당의 전통을 잘 계승하면서도 가우디의 독창적인 형태와 구조를 갖춘 건물이다. 1882년부터 착공에 들어간 이래 '''142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건축 중이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에 완공이 예정이었으나 2020년에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완공연도가 연기되었고 미정이 되었다.
성당이 완공된다면, 예수를 상징하는 첨탑이 성당의 가운데에 가장 높게 위치하게 된다. 설계된 첨탑의 높이가 172.5 m로, 완성된다면 울름 대성당의 161.5 m를 넘겨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 될 것이다. 172.5 m인 이유는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언덕이 173m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하느님이 만든 것을 넘봐서는 안 된다는 가우디의 겸손한 의도다.

2. 명칭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성당명이 일본측 번역에서 유래한 '성가족'으로 불리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12] 한국 천주교의 공식 용어를 따라 '''성가정'''으로 번역함이 맞는다. '성가정(聖家庭, Holy Family)'이란 가톨릭에서 모든 가정의 모범이 되는 예수, 성모 마리아, 나자렛의 성 요셉의 가정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서 이 성당의 정식 한국어 이름은 '''속죄의 성가정 대성전'''이다.

3. 역사


이 성당의 건축주는 교회나 정부가 아닌, 일개 종교 서적 출판사의 사장이었던 주제프 마리아 보카베야(Josep Maria Bocabella)이다. 그는 신앙이 부족한 도시인 바르셀로나에 '속죄하는 의미'로 신자들의 힘을 모아 성당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건설 초반에는 신자들이 보낸 기부금으로만 지었다. 당시 카탈루냐의 시대적인 측면에서 보자.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카탈루냐 지방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굉장히 변화가 많았고, 독실한 종교인의 시각으로는 눈 뜨고 못 볼 꼴들이 많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특히 사회주의적인 사상도 팽배했고 종교시설 다수가 파괴되는 사건들도 종종 일어났다.[13]
성당의 첫 수석건축가는 가우디가 아니라 교구 건축가였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델 빌라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였는데, 그가 설계한 것은 전통적인 고딕 성당의 양식을 본딴 네오 고딕 양식이었다. 그래서 빌라르가 시작하고 가우디가 마무리한 이 성당의 지하는 네오 고딕 양식이라, 이 성당의 전체 양식과 맞지 않는다. 1882년에 착공했지만 1883년 빌라르가 기술고문과 불화하던 끝에 사임하자, 감독으로 참여하던 가우디가 성당의 수석건축가가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14]였던 가우디는 성당을 설계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기쁘고 빠르게 잡았다.
가우디는 설계변명을 몇 차례 하던 끝에 지금의 안을 내놓았다. 가우디는 공중부벽(flying buttress) 등으로 지탱되던 기존의 고딕 양식 건물을 '목발'에 의지하는 딱한 인체로 여겨서 고딕 양식을 보완,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양식으로 성당을 설계하였다.
가우디는 카탈루냐 지방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성당 공사에 몰입했고, 친구나 가족들마저 사라진 이후에 자신의 집을 버리고 성당 지하의 작은 방에서 거주하며 설계를 이어갔다. 가우디 사후에도 건축을 진행할 성당 건축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가우디는 세밀한 성당 모형을 만들어야 했다.
1926년에 사고로 전차에 치여 가우디가 사망하였는데, 이 당시에는 성당의 남동쪽과 북동쪽 일부만 완성된 상황이었다. 이후로도 계속 다른 건축가들이 가우디의 설계를 해석하며 공사를 계속 진행했지만,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하층민들의 폭동으로 성당 지하에 있던 가우디의 사무소가 불타고 모형을 비롯한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다. 가우디의 묘지도 파해쳐졌다. 그 동안 만들어져 있던 성당의 첨탑 4개도 폭파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지만 카탈루냐 민병대가 보호하여 성당은 무사할 수 있었다. 1950년대에 와서야 건축을 다시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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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가 사망했던 1926년의 성당 모습
현재도 이 건축물의 공사를 이어가는 건축가들은 카탈루냐 지방 사람으로만 구성하는데, 그들의 모습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에서 유리벽을 통하여 볼 수 있다.

4. 건축



4.1. 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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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전경
대성당 지하에 있는 가우디의 무덤
사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로 "동시대에 비견될 다른 건물 이상으로 복잡해서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단 가우디가 1926년 사망한 이후 공사는 계속되었지만,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건축이 중단'''되어 1950년대에 와서야 건축을 다시 진행했다. 또한 건축가가 사망한 상태에서 남은 '''불완전한 설계도'''를 해석[15]하여 건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성당 건축의 완성도를 위해 꼼꼼한 과정을 거치는 것[16]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적은 인원으로 공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충분히 자본과 인력을 조달받는다면 현대의 기술로 성당 건축이 이렇게 오래 걸릴 이유는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관광 세일즈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성당 건축비는 상당부분 관람비에 의존하기 때문에 관광객의 유치는 건축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17] 다만 스페인 정부에서는 가우디 100주기가 되는 2026년까지는 완공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발표하고, 장비와 인원을 늘려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완공까지 22세기는커녕 200년이 더 걸린다는 말이 나오는 시점에서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치밀한 완성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 인원과[18] 작은 부분을 조각하는 것에 있어서도 충분히 검토한 후에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금과 건설 인력은 충분하지만, 상대적으로 시간디자인 인력이 부족[19]하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까지 손대지 못하고 계속 공사를 진행한다는 우려가 있다.
원통형 첨탑 8개는 마치 거대한 옥수수들이 하늘로 치솟은 듯 보인다.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없어서 원래 높이보다도 더 높게 보인다. 이 옥수수 같은 구조는 사실 안에서 밖으로 뚫린 구멍들로, 완성된 첨탑 내부에 이 설치되었을 때를 상정해서 종소리가 온 바르셀로나에 퍼지도록 꼭대기의 종에서 땅바닥을 향하는 각도로 뚫렸다. 스피커의 전면에 송송 뚫린 구멍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될 듯.

4.2. 형태와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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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 상상도
바르셀로나의 도로 구획이 사선이기 때문에, 이 성당의 정면 방향은 전통적인 서쪽이 아닌 남서쪽을 바라본다. 가우디가 직접 만든 부분은 남동을 보는 부분이고, 성당의 정면이 아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하느님이 만든 선이다."

- 안토니오 가우디

이 성당을 구성하는 외벽 선은 거의 모두가 곡선 형태다. 이는 그 당시의 서구 건축역사에서 보기 드문 개념이었다. 그러나 가우디가 미적인 감수성에만 의존하여 성당의 형태를 곡선으로 설계한 것은 아니다. 고딕 양식 특유의 공중 부벽(flying buttress)을 "보기 딱한 목발"이라고 불렀던 가우디는 부벽을 덧붙이지 않으면서도 건물의 안전성을 높이고자곡선 형상에 적합한 구조 역학까지 배려해 건축을 진행했다. 그는 성당의 구조를 결정하기 위해 실을 천장에 매달고 모래주머니 또는 납추를 중간에 매달아 휘어지는 형태를 측정했는데, 이러한 현수선(catenary)은 구조적으로 안정되어 이를 설계에 반영했다.사진
완성된 도면에 따르면 높이 100 m 남짓한 탑이 12개가 들어서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12사도를 상징한다.[20] 이외에 중앙에 세워지는 170 m짜리 가장 큰 탑은 예수를, 탑과 탑을 이어주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또 별도의 돔 4개는 복음사가 4명(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가정'을 보여준다.
가우디가 남긴 남동쪽의 '나시미엔토/나샤멘트(예수탄생)'라는 건축 주제는 완성된 상태이고, 북서쪽의 '파시온(예수의 수난)'도 대략적으로 완성된 상태다. 가장 중요한 남서쪽 정면의 '글로리아(영광)'는 2002년부터 건축을 시작했는데, 이 성당 건축의 정점을 장식하는 170 m 높이 예수 그리스도 탑은 그 뒤에 지을 예정이다.
동쪽 나시미엔토 면의 조각들은 가우디 시절에 조각했는데, 여기 인물상들은 모두 가우디가 살던 동네 사람들을 일일이 석고로 본을 뜬 후 그걸 보고 크게 돌로 조각했다. 조각 중 아기의 석상도 있는데, 조산원에 가서 일찍 죽은 아기의 시체에 석고 본을 떠서 조각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우디의 나시미엔토 부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았다. 반대쪽에는 가우디가 죽고 30년 후 호세 마리다 수비라츠라는 모더니즘 조각가가 맡았다. 그래서 가우디가 설계한 파트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수비라츠의 인물상들은 가우디와 완전 반대 성향으로 각진 정형화 및 일부 추상화가 가미되며 얼굴 부분이 음각되어 있어서 어떤 방향에서 바라봐도 감상자를 쳐다보는 듯한 착시를 안긴다.) 가우디가 실제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 묘사했다면 수비라츠는 간결하고 직선을 주로 사용하여 묘사했다. 이 때문에 널리 알려진 면의 반대쪽을 보고 실망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수비라츠는 시대에 맞는 예술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던 모양이다.
성당 내부는 가우디가 숲속을 걷는 듣한 느낌을 주도록 설계하여 상당히 이색적이다. 나무와 꽃을 닮은 기둥과 천장의 형태가 인상적이다. 각 기둥에는 가톨릭 성인의 상징 문양 등이 있다. 내부의 색은 흰색인데, 이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햇빛에 비치면 그 색을 그대로 벽면에 새겨지도록 설계한 것이다. 동쪽에서 동이 트면 파랑과 연두, 초록 등의 색상으로 구성된 스테인드글라스에 빛이 비추어 탄생을 비유하고, 서쪽으로 해가 지면 빨강, 주홍, 노랑으로 사망을 나타낸다. 특이하게도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림이나 인물 모양 없이 검은색으로 인명만이 적었는데 모두 성인들의 이름이다. 여타 성당에 비해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이 선명해 태양의 위치에 따라 다른 색이 성당 안을 가득 메운다.
설계상 높이가 170 m, 현재 높이 120 m(동쪽 첨탑 기준)의 이 거대한 건물은 바르셀로나의 '스카이라인(산이나 건물이 하늘에 그리는 윤곽)'을 바꿨다는 평을 받는다. 가우디 건축의 특징은 '건축물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기능은 반드시 유지하되 그 외형과 내부공간을 어떻게 구성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시킬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흔히 건축물이라고 하면 고정되고 딱딱하고 위치가 바뀌지 않을 듯한 느낌을 주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마치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움직일 듯한 모양새다.

4.3. 교황 베네딕토 16세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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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GLORIAM ET LAUDEM DEI
BENEDICTUS PP. XVI, PONTIFEX MAXIMUS,
HANC BASILICAM RITE DEO DICAVIT
ECCLESIAM BARCINONENSEM PASCENTE
CARDINALE DOMINO ALOISIO MARTINEZ SISTACH
BARCINONE, VII, XI, ANNO DOMINI MMX
(하느님의 영광과 찬미로
베네딕토 16세 교황
하느님께 성전을 봉헌하는 의식을 거행해
바르셀로나에 교회를 지었다.
알로이시오 마르티네즈 시스타치 추기경
천주 강생 2010년 11월 7일, 바르셀로나)
2010년 11월 7일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바르셀로나를 방문해 이 성당에 대한 준대성전(Minor Basilica) 승격 겸 축성 미사를 봉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축성 미사 전문(영어). 성당 건물이 완공되거나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축성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언제 완공될지 아직 장담할 수도 없는 성당이 축성받는 일도 드물거니와 준대성전으로 승격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교계에서도 이 성당에 관심이 각별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축성 이전까지는 내부공사가 덜 되었는데, 교황이 격려차 방문해 직접 미사를 집전하겠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부랴부랴 미사를 집전할 수 있을 만큼 내부공사를 진행했다는 설이 있다.

5. 세계 최장기 불법 건축물


지구상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불법 건축물'''이었다고''' 뒤늦게 드러났다.(...) 그것도 무려 '''137년''' 동안이나 그 상태가 지속되었고, 이 부문에서 현존하는 건축물들 중에서는 단연 세계 최장기 기록을 세웠다.
2015년, 아다 콜라우 (Ada Colau) 시장이 취임하면서 바르셀로나시 행정을 대대적으로 점검했다. 이때 시청 도시계획과에서 성당이 주변 도로와 시설에 상당히 근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당의 토지등기부를 찾아보려고 했다. 도시계획과 공무원들은 주변시설이 성당 토지를 침범했다고 여겨서 성당의 토지등기부를 보고 확실하게 경계를 정해 시설을 이전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성당의 토지등기부가 보이지 않았다. 도시계획과는 성당의 토지등기부가 어딘가 처박혀 있으리라 생각하고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렇게 1년여간 수색하던 끝에 설마설마하던 결론에 도달했다.
'''그 누구도 대성당에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1882년 성당 공사의 첫 삽을 뜨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축을 시작하던 때에 성당 터의 행정구역은 바르셀로나시가 아닌 산 마르티(Sant Marti)시였다. 건축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나 1885년, 가우디는 성당의 수석건축가로서 산 마르티시청에 건축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21] 하지만 산 마르티시청에선 무슨 이유인지 가우디가 신청한 건축 허가를 승인도 거부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신청서만 받고 어영부영 넘겼다. 그러다가 1897년 산 마르티가 바르셀로나에 합병되자 관리감독의 권한은 당연히 바르셀로나시청에 넘어갔지만, 이런 와중에 아무도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허가 없이 건축 중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로 130여 년이 흐른 것이다.
2016년 바르셀로나시청에서 공식적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무허가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발표하고 성당 건축위원회와 협의에 들어갔다. 본래 스페인의 건축규정은 무허가 건축물이면 파괴하고 원복하는 게 규정이나 일정기간 해당 건축물이 이의제기 없이 존재했을 경우 존속이 가능하다. 참고로 카탈루냐는 이 기간이 6년인데, 바르셀로나시가 문제를 인지한 시점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이미 공사를 시작한 지 130년이 넘었으므로 법률상으로도 성당의 존속을 인정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이를 '권리행사의 태만에 의한 권리의 소멸'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어떠한 권리(이 경우에는 정당한 토지사용권자의 토지사용권)가 상당한 기간 동안 침해된 상태였는데도,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나 단체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원래의 권리자가 해당 권리를 포기했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존속과 벌금은 별개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역시 무허가 건축물이기 때문에 어쨌거나 벌금을 내야 했다. 130여 년 동안 누적된 벌금을 계산, 합의한 결과 3600만 유로(약 4천만 달러 또는 466억 원)를 차후 10년간에 걸쳐 시청에 지급하기로 하였다.
2019년 6월 7일, 공사를 시작한 지 137년 만에 이행강제금을 납부하고 정식으로 착공 허가를 받아 합법건축물이 되었다.기사

6. 기타


  • 특히 해가 질 무렵 붉은 노을을 받았을 때 성당의 모습은 황홀경 그 자체다. 가우디는 40년 동안 이 성당 건축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1926년 전차에 치여 사망할 당시에도 성당 앞에서 상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사후 그가 안장된 곳 역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지하. 유네스코는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인 구엘 공원과 카사밀라 등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인간의 창조적 천재성이 과연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극찬했다.
  • 반면 1984, 동물농장 등으로 유명한 언론인 조지 오웰스페인 내전바르셀로나에서 의용군으로 복무하면서 공화군 민병대들이 "다른 건물은 잘만 폭파하는데도 흉측하게 커다란 성당은 또 예술 작품이라면서 내버려뒀다"라면서 수기집인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깠다. 오웰의 이념 성향을 생각해 보면 당시 프랑코의 쿠데타 세력과 결탁한 가톨릭 교회에 대해 적개심을 표출하는 게 당연하지만, 당시 카탈루냐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전국 노동 연맹 소속의 아나키스트 민병대원들은 다른 성당들은 잘만 부수면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경우 특유한 매력에 감화되어 일부로 건드리지 않기로 카탈루냐 자치 정부인 제네랄리타트와 합의하여 그대로 둔 것이다.
  • 또한 역설적인 건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가우디가 이 건물을 계획한 이유 자체가 상술한 아나키스트 같은 급진 좌파 세력들을 보고 "쯧쯧, 바르셀로나가 이런 빨갱이 천지가 되면 하느님한테 밉보이겠다. 멋진 성당을 새로 지어 도시 전체 스케일로 참회해야지."라는 발상, 즉 아나키스트 본인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죄인 취급했던 별로 달갑지 않았을 법한 동기에서 착수했다는 것이다.
  • 가우디의 건축은 사실 카탈루냐 지방의 건축적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다. 많은 작품에서 카탈루냐 지방에서 볼 수 있는 타일 공예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이 유명하며, 시공도 지역 장인들에게 의존했다. 이 성당의 몬세라트의 검은 성녀를 포함한 많은 외부 장식, 구조적 요소도 카탈루냐 전통적인 고딕 건축 양식에서 따온 것이다. 바르셀로나 구 시가지에 있는 바다의 성모 마리아 성당 (Santa María del Mar), 바르셀로나 대성당 등에 가보면 격자형 기둥 장식 등을 비롯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도 보이는 많은 전통적 건축 요소를 볼 수 있다.
  • 가우디는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을 많이 배려했다. 성당 북서쪽 근처에는 작은 집이 있는데, 바로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다. 노동자들이 성당을 짓는데 신경을 쓰느라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수 있는 부분을 섬세하게 잡아낸 부분이다.
  • 흔히 성당이라고 하면 당연히 석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완전한 석조 성당이 아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정석대로 로 짓기 시작했지만, 1950년 경에 근처 채석장의 돌이 바닥난 뒤로는 철거된 석조 건축물의 자재를 재이용하다가 그것마저도 바닥난 지금은 이란이나 영국 등지에서 채취한 돌을 가공해서 이를 근처에서 한데 합친 다음 그 사이에다가 철근 콘크리트를 집어넣은 '패널'을 만들고 그걸 현장에 있는 또 다른 철골구조물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만든다.[22] 누군가는 순수한 석조 건물이 아니라고 실망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가우디는 이 성당의 재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지정한 적이 없고, 콘크리트를 사용한다고 해서 건축물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걸작 건축물들은 거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 성당 지하에는 현대식 박물관이나 화장실이 있고, 첨탑 내부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등 현대 건축물로서의 요소도 있다. 북서쪽의 첨탑은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계단으로 내려올 수 있다. 단, 원형 계단에 난간이 없으니 심약자는 주의. 지하의 박물관에는 가우디의 스케치, 모형, 사진 등이 있다. 성당은 지금도 공사 중이기 때문에 내부에는 시멘트 포대와 공구가 여전히 흩어져 있다.
  • 가우디는 이 성당의 건설기간을 200년으로 잡았다. 한마디로 예상 완공년도를 2082년으로 잡은 것.[23] 그런데 유럽의 건축물들을 보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처럼 건설기간이 170년 남짓 되는 건축물부터 밀라노 대성당처럼 건설기간이 400년을 훌쩍 넘어가는 건축물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경우 약 140년의 무척이나 길 것 같은 공사기간이 다른 건축물보다 비교적 짧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래도 수백 년씩 걸려 짓는 근대 이전의 건축 방식을 21세기인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건물이라는 점이 눈여겨 볼 부분인 듯하다. 가우디가 사고로 사망한 후 다른 건축가들이 일을 이어받아 대신 건설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바르셀로나 내에서도 2026년에 완공시키겠다는 스페인 정부의 입장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2026년에 완공을 안 시킬 거 같다는 예측도 많다. 이 성당은 100년이 넘게 건축 중이라는 것이 가장 큰 메리트고, 완공되면 그냥 유럽에 흔히 있는 성당의 하나처럼 여겨질 것 같다는 이유 때문. 거기다가 2026년에 완공한다고 했는데, 그럴려면 초광속 공사를 해내야 하지만, 지금 속도로는 2026년으로는 어림없고 최소 205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완공을 기대할 수 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스페인 중앙 정부와 카탈루냐의 지역 감정도 한 몫 하고 있고, 2020년 들어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영향으로 2026년 완공 목표는 물건너가버렸다.
  • 고딕 양식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이 성당은 워낙 높이나 경사, 모양, 색조 때문에 밤에 조명이 거의 꺼진 상태로 보면 은근 무섭다.[24]
  • 세계문화유산이며 현재 공사 중인 관계로 홈페이지에서 예매를 받아 하루 입장 인원수를 제한한다(가우디 투어는 예외). 성수기에 방문한다면 방문 최소 일주일 전에는 미리 홈페이지에서 예약하자. 만약 예약을 놓쳤다면 가우디 투어에 합류하거나 홈페이지에서 취소표를 기다려보자. 취소표가 10분에 하나씩은 난다.
  • 이 성당을 주제로 한 보드게임이 있다. 링크 주사위로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들어 나가는 게임인데, 게임의 디자인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서브컬처에선 보물찾기 시리즈 중 스페인 편에서 등장한다. 일본의 만화 트리니티 블러드에서는 완공은 되었지만, 작중 악의 비밀결사 로젠크로이츠 올덴이 저주파 병기 사일런트 노이즈를 개발하여 대성당의 종에 설치, 작동시키자 바르셀로나의 대다수의 건물들이 붕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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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사이트로 들어가서 확인한 결과 위 사진이 포함된 게시물이 2016년에 올라왔다.[2] 색이 어두울수록 지어진 지 오래된 부분이다.[3] 모데르니스메(Modernisme)는 카탈루냐 지방의 특정한 근대 양식을 말한다. 모더니즘 양식과 단어는 비슷하지만 의미는 다르다.[4] (142년째) 및 52142일째.[5] 가우디 사망 100주년을 기념해 2026년까지 완공예정이었으나 2020년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완공연도가 또다시 미정이 되었다. 원래 가우디가 상정했던 준공년도는 2082년이었다.[6] 통상 성당은 완공 후에 축성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완공되지도 않은 성당을 교황이 직접 방문하여 축성부터 하였다는 것은 교황청이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보여주는 증거이다.[7] 2005년 등록확장[8]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9]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10]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11] 그 전에는 '대성당'이라고 불렀으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완공되기도 전에 대성전(정확히는 준대성전)으로 축성하여 그 위상이 격상되었다(하단 참조). 대성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틀린 호칭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천주교 성당의 지위 구분에 따르면 대성당(cathedral)은 엄밀하게는 주교좌 성당(명동대성당이 대표적이다)을 뜻하는 말로 쓰이므로, 대성전(basilica)이 한층 더 정확한 명칭이기는 하다.[12] 일본 천주교회에서는 Holy Family를 '聖家族(성가족)'으로 번역한다.[13] 마르크스가 했던 "정신은 물질의 생물학적 부산물이다."라는 말처럼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교회들을 파괴하였다. 이 무렵 스페인의 가톨릭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봉변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14] 얼마나 독실했는지 건축학교 시절 과제로 요한묵시록을 하든가, 설계하던 도중 수도원으로 은둔한다든지, 40일 동안 금식을 하거나…[15] 원래 가우디의 집안은 주물 장인이라, 그가 만든 건축물 중 대부분은 주물로 모형을 만든 후 내부를 채우는 형식이었으니 후배 건축가들이 난감하게 여겼음은 당연하다. 내전 때 가우디의 작업실에 화재가 나서 가우디가 남겼던 설계와 모형이 많이 소실된 탓도 있다. 성당 지하의 박물관에서 파괴된 모형과 그것을 복원해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16] 세부 장식물을 디자인하여 모형제작 후 검토하여 실제 시공.[17] 사실 현재 필요한 건설 비용은 다 모았고, 공사만 남았을 뿐이다.[18] 앞서 말했듯이 건축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카탈루냐인들로만 구성한다. 게다가 가우디가 내건 제약도 적어서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건축을 진행할 수 있다.[19] 그나마도 설계에 없는 부분은 상상력으로 메꾸어야 하니 골 때리는 일이다.[20] 요한과 마태오가 다른 기둥으로 가면서 대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들어와서 12개다.[21] 스페인 건축 규정에 따라 건축허가를 받으려면 일단 지자체에 토지 사용 허가부터 받아야 한다. 사용을 허가받은 해당 구역을 urban area라 부른다. 허가가 떨어지면 이런저런 관련서류를 넘기고 이를 검토하는 과정이 최대 10년이 걸리는데, 10년까지 서류에 대한 답변이 없으면 서류가 허가받았다고 친다. 허가하지 않는다면 지자체가 서류를 추가로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방식이다. 근데 여기선 urban area 허가부터 받지 않았다.[22] 이는 이런 조치가 없이는 수백 미터가 넘는 높이를 자랑하는 첨탑 부분이 강풍이나 지진을 제대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23] 생전에 가우디는 "내 의뢰인(하느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신다"고 말하며 완공 속도보다 완벽한 건물을 짓는 것을 강조했다.[24] 이는 가우디의 의도된 설계라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