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카르바할
1. 개요
멕시코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84년부터 1985년까지 클루브 아틀레티코 모렐리아 감독을 맡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난 카르바할은 10대 시절부터 골키퍼에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 공부 대신 처음 프로 계약을 맺을 때 카르바할은 당장에 계약을 맺고 싶어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4] 도 있고 해서 19세가 되던 1948년에야 레알 클럽 에스파냐와 계약할 수 있었다.
2.2. 선수 생활
원래 카르바할이 뛰고 싶어하던 클럽은 클럽 아메리카였지만 아메리카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5] 대신 에스파냐와 계약을 했다.[6] 처음부터 싹이 보였던 터라 1948년 올림픽에도 대표팀에 차출되었다.
그런데... 카르바할의 기나긴 그리고 불운의 국제 대회 커리어의 전주곡은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 비록 카르바할이 골문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멕시코는 웬 신생국에게 5대 3으로 패배하고 한 경기 만에 짐을 싸게 되었다.[7]
이후에 클럽 에스파냐에 돌아온 카르바할은 다시금 기량을 끌어올려서 북중미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떨쳤고 소속팀 클럽 에스파냐를 리그 4위에 올려놓는 공헌을 했다. 그리고 1950년 월드컵에 출전하여 첫 월드컵에 출전하는 동시에 A매치 데뷔전도 치르게 된다.
A매치 데뷔전의 상대는 호스트 브라질.[8] 카르바할은 분전했지만 아데미르에게만 2골을 허용하면서 팀은 4대 0으로 셧아웃당하고 말았다. 나머지 2경기도 다를 바 없어서 유고슬라비아에게는 4대 1, 스위스에게는 2대 1로 패하면서 3패의 성적표만 받고 쓸쓸히 멕시코로 돌아와야 했다.
멕시코에 돌아와서는 더욱 황당한 일을 당했는데 소속팀 클럽 에스파냐가 멕시코 축구협회와의 견해 차이로 인해 리그에서 축출당하고 뒤이어 공중분해 된 것. 카르바할은 이로 인해 소속팀을 레온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레온으로 이적하고 나서 카르바할은 첫 리그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다. 1951-52 시즌에 과달라하라를 승점 1점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한 것. 그리고 이듬해에는 코파 멕시코 결승전까지 진출하는 등 클럽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갔다.[9] 그 여세를 몰아 스위스에서 열린 두 번째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개막전의 상대가 또 브라질이었고 이번에는 전보다 더 크게 5대 0으로 떡실신 당하고 말았다. 뒤이은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는 3대 2로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다. 후반 막판에 레몽 코파에게 페널티 킥 득점을 허용한 것이 아쉬웠다. 결국 멕시코는 이번에도 2패만을 안고 멕시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레온에서는 1956년에 다시 멕시코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인 1956-57시즌의 코파 멕시코에서는 준우승, 1957-58시즌에서는 결승에서 다시 자카테페크를 만나 5대 2로 복수에 성공[10] , 코파 멕시코 우승을 차지하는 등 이 때가 카르바할 클럽 커리어의 최고 전성기였다.
다시금 나간 월드컵. 이 때부터 카르바할은 주장으로 출전했다. 첫 경기에서는 호스트 스웨덴을 만나 3대 0으로 패배했다. 뒤이은 웨일스와의 경기에서는 후반 44분에 터진 벨몬테의 동점골에 힘입어 카르바할의 월드컵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승점을 따는데 성공했다. 마지막 상대는 헝가리. 비록 헝가리가 4년 전의 포스를 내뿜던 팀은 아니었지만 멕시코에게는 버거운 상대였고 4대 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의 카르바할의 클럽 커리어는 콩라인의 연속. 우승은 못 맛보고 계속 2위 언저리에서만 놀았다. 그러다 참가한 4번째 월드컵. 이번에는 칠레였다. 칠레에서의 첫 상대도 다시 한 번 브라질(...)이었고, 이번에는 펠레에게 1골 1어시를 허용하며 2대 0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뒤이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에 결승골을 허용하여 1대 0으로 아깝게 패배하고 말았다. 마지막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였는데 이 경기에서 멕시코는 경기 시작 15초 만에 마세크에게 골을 허용했지만[11] 3골을 넣으며 결국 32년 만에 월드컵에서 첫 승리를 따내었다.[12] . 멕시코는 조 3위로 스페인을 제치고 월드컵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로 대회를 마감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65년부터는 노쇠화로 인해 조금씩 기량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점차 레온에서 카르바할의 존재는 희미해져갔다. 결국 1965-66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카르바할은 마지막으로 1966년 월드컵 대회에 참가함으로서 최초로 월드컵에 5회 참가한 선수라는 기록을 세웠다.[13] 이전과는 다르게 처음 두 경기에서 카르바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인 우루과이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하였다. 이 경기에서 이기면 멕시코는 사상 최초의 2라운드 진출을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경기는 0대 0 무승부로 끝났고, 카르바할의 월드컵 도전기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경기는 우루과이의 골키퍼 라디슬라오 마주르키에비츠와의 세이브 대결이 돋보였고 우루과이의 공격수 페드로 로차의 근거리 다이빙 헤딩을 세이브해내는 장면은 카르바할이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2.3. 이후
1970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 카르바할은 골키퍼 코치로 나섰다. 나중에 회고하기를 그래도 한 번 월드컵에서 필드를 밟아보고 싶었다고... 감독으로 일선에 나선적은 없지만 친정팀 레온 등에서 골키퍼 코치로 활약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볼 핸들링과 반사신경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위상은 당시 월드컵 동네북 멕시코의 거의 유일한 세계구급 선수. 비록 25골로 역대 월드컵 최다 실점 기록[14] 이란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가진 카르바할이지만 실점에 관해 항변하자면 적어도 카르바할이 잘못해서 먹힌 실점은 아니었다. 이렇게 워낙 멕시코의 당시 전력이 안습인탓에 멕시코는 카르바할이라는 골키퍼가 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1회전을 통과하지 못할 정도였다.
4. 수상
4.1. 클럽
- 프리메라 디비시온 데 멕시코 우승 2회: 1951–52, 1955–56(이상 클럽 레온)
- 코파 멕시코 우승 1회: 1957–58(클럽 레온)
- 캄페온 데 캄페오네스 우승 1회: 1955/1956(클럽 레온)
[1] Tota는 카탈루냐어로 전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The whole[2]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인물 소개란에 출생지가 두랑고로 나와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헌에 출생지를 멕시코시티로 적고 있고 정작 본문 안에도 멕시코시티로 적고 있는 관계로 두랑고는 오류가 아닐까 추측한다.[3] 대표팀에서 16년이나 뛴 선수치고 A매치 경기의 수가 너무 적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멕시코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은 국제 대회를 포함하면 친선 경기를 그다지 많이 치르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멕시코 선수들 중에서는 40경기 이상 A매치를 치른 선수들이 드물 정도이고, 참고로 카르바할이 활동했던 시대에 멕시코 대표팀의 모든 경기를 합하면 83경기가 나온다[4] 이 때문에 아버지와 몇 년간 대화를 안했다한다[5] 당시에 뛰던 선수 중 클럽 아메리카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골키퍼가 없다. 즉 당시 골키퍼 중에는 카르바할의 적수가 될 만한 골키퍼가 없었다는 이야기[6] 클럽 에스파냐 역시 1944-45 시즌에는 멕시코 리그에서 우승할 정도로 나름 잘 나갔던 클럽이고, 호세 마누엘 모레노가 1944년부터 2차 대전 종전시기까지 잠시 뛰기도 했던 클럽이다. 이 시기에 그는 멕시코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그의 유명한 별명인 기병-el charro을 얻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7] 이 승리가 대한민국의 첫 국제 대회에서의 승리였다. 흔히들 정부 수립 이후 첫 승리로 알고 있지만, 런던 올림픽이 페막되고 다음 날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되었다.[8] 공교롭게도 이 대회는 2차 대전 이후의 첫 월드컵 경기, 즉 개막전이었다[9] 결과는 푸에블라에게 4대 1로 대패했다[10] 이전 코파 멕시코에서는 자카테페크에게 2대 1로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했었다[11] 이것이 2002년 월드컵 3·4위 전에서 11초 만에 골을 허용하기 이전의 월드컵에서 기록된 가장 빠른 골 기록이었다[12] 그리고 이 날은 카르바할의 33번째 생일이었다. [13] 현재까지 월드컵에 5회 출전한 선수는 독일의 로타어 마테우스와 이탈리아의 잔루이지 부폰, 멕시코의 라파엘 마르케스 이렇게 4명이 있다. 물론 카르바할의 기록이 역사상 최초이다.[14]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알 다예아와 타이기록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