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독살설
1. 개요
조선의 20대 왕 경종이 1724년 이복동생이자 당시 세제 신분이었던 영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설. 이 사안은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조선을 50년 동안 뒤집은 초대형 사건이었다.
2. 배경
이 독살설이 등장한 배경은 경종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데서 비롯된다. 원래 몸이 허약하던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일부터 건강이 위독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병상에 누워있다가 2주 정도가 지난 20일에 저녁식사로 게장과 생감을 식사로 먹었는데, 이 게장과 생감은 전통적으로 한의학에서 매우 나쁘게 보는 음식 조합이다.[1] 결국 식사 직후부터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자 의관들은 경종이 한의학적으로 꺼리는 게장과 감을 먹은 사실을 알고 곽향정기산과 두시탕, 인삼차를 계속 처방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고, 24일 오전에 경종은 아예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24일 의관 이공윤은 "삼다(蔘茶: 인삼차)를 쓰면 안 된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할 것 같으면 설사는 금방 멎게 할 수 있다."라면서 경종에게 계지마황탕을 처방했지만 저녁에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 이에 영조와 도제조였던 우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신하들이 급히 경종을 찾아가고 영조는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 하는 지시를 내렸다. 난데없는 지시에 이공윤은 처음엔 반대했지만 영조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 이에 인삼차를 2번 복용했다. 그러자 경종의 안시(眼視)가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온기를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되자 다들 안도했으나 얼마 뒤 경종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고, 이때 영조와 이광좌는 종묘에서 기도를 올리려 하는데 그 기도가 시작하기도 전에 경종이 결국 사망했다.
3. 실제로 게장을 올렸는가?
실록에는 영조가 게장을 올렸다고는 직접 기록한 부분이 '''없다.''' 하지만 전후 맥락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8월 20일 게장과 생감이 올라간 다음날 의원들이 기겁을 하고 우르르 몰려가 이 식사를 두고 태클을 건다. 그런데도 영조 즉위 이후 이 사태의 책임자는 처벌을 받기는커녕 그 흔한 탄핵론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연잉군, 즉 미래의 영조 외에 누구겠는가?
당대 사람들 또한 영조가 게장을 진어했다는 데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결정타이다. 영조 시절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게장 소문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물론 노론/소론을 포함한 대소신료들 모두 영조가 게장을 올렸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심지어 역적에게 게장 독살설을 지적하는 역적의 말을 듣고 영조는 반박조차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실제로 게장을 올리지 않았다면 어째서 수십 년간 반박 한 마디 하지 못했겠는가?
이에 대하여, 영조 31년(1755) 10월 9일, 영조는 신치운을 처벌하면서 하교를 내려 '자신이 경종에게 게장이 진상된 것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신치운이 게장을 먹지 않았다고 얘기했을 때 바로 의미를 알아듣고 분노한 것을 보면 이미 그 이전부터 게장 독살설을 잘 알았을 터이므로, 신치운에게 처음 들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시 경종의 병세는 그야말로 초미의 관심사였고 특히 영조에게는 더 그랬을 것이다. 수랏간에서 멋대로 진어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왕의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 어의들이 식사에 무엇이 올라가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을까? 어의의 사전검열을 통과했음부터가 매우 수상하다. 여기에 의원들이 태클을 건 것을 당시 조정, 그리고 올라가는 약재 하나하나까지 따져보던 영조가 몰랐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30년이 넘게 지나서 '나는 몰랐다.' 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4. 논쟁
4.1. 독살이 아니다
죽기 직전에도 독살 시도가 있었다고도 한다. 경종은 말엽에 병으로 기운을 잃고 식사를 잘 하지 못했는데 게장과 생감을 올리자 웬일로 입맛이 돈다며 잘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게 되고 그 후부터 다시 건강 상태가 악화된다.
그러나 독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왜냐면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소화불량이 일어나서, 당시에도 나쁜 음식 궁합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고 무엇보다 게장과 감은 영조가 올린 음식이 아니라 사옹원에서 올린 음식이다. 그리고 영조가 올렸던 인삼차와 어의가 처방한 약이 상극이기는 했지만, 어의가 실력 있는 인물이 못 되었다. 툭하면 이 약 처방하다가 다른 약 처방하는 어의를 어느 누가 믿을 수 있단 말인가.[2]
하지만 영조 역시 어느 정도 문제가 있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어의가 내린 처방을 무시하고 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한 점이다. 심지어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기운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경종은 사망하였다. 그렇지만 독살설을 제기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3]
더군다나 영조의 정치적 입장에서도 경종이 죽어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기반세력이 탄탄하다면 모를까, 소론이 득세하는 와중에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준 경종을 스스로 죽이면서까지 왕이 될 이유는 없으니까. 게다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와중에 어의가 한 처방을 뒤집으면서까지 인삼차를 처방한 것은, 그만큼 영조가 경종의 죽음를 바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경종은 이미 가망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지라, 상식적으로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사람을 일부러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독살할 정도로 영조가 어리석지는 않았다.[4] 영조가 처방한 약을 먹고서도 임금이 끝내 절명했다면 영조에 의한 독살설이라는 낭설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도 영조는 이 음모론 때문에 평생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 굳이 독살을 하고 싶었다면 병세의 차도를 보고 회복될 기미가 보일 때 드러나지 않게 함이 합리적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옹호해줄 세력이 미미하다면 자칫 이를 빌미로 쿠데타 같은 반정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데,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인삼차를 권한 것은 그만큼 경종이 살아나길 원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조 입장에서는 독살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저지르면서까지 적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왕 노릇을 할 바에야 경종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기반을 제대로 만들고[5]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영조 개인의 입장에서도 더욱 편했던 것이다.[6]
여기에 계유정난과 비교해서, "어차피 왕이 되면 끝나는 건데 영조가 도박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세조와 영조는 처한 상황이 180도 달랐다. 세조는 단종이라는 제대로 정통성을 갖춘 왕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건달들을 불러모아서 정적들을 제거하는 쿠데타를 벌여서 결국 왕위를 받아냈다. 반면 영조는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경종에 의해 후계자로 세워진 상황이라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정적이 아닌 보호자였다.[7]
4.2. 독살이다
독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내용에선 인삼과 음식을 제공해서 죽인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런 건 음식을 잘못 먹어서 죽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지 독살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독살설이 사실이 맞느냐는 주장과는 별개로, 위의 주장을 근거로 독살설을 부정하는 건 무리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지지 기반이 탄탄하기는커녕 정적들이 바글대는 위태로운 정국에서 저런 도박은 실행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계유정난은 일어날 수 없고, 세조의 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8]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조 역시 왕자 시절에 문종이 동생이란 이유로 잘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세조가 그걸 계유정난으로 갚은 게 아이러니.
세제 시절의 영조는 정말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걸핏하면 역적 모의에 자기 명단이 있는데, 당시 임금이 경종이어서 망정이지 다른 왕이었으면 금방이라도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비록 경종이 본인 생각이야 어쨌든 간에 죽을 당시까지 영조를 보호해준 덕에 죽는 일까지는 면했지만 당시의 영조로서는 참으로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가시방석 위에 않아있는 상태였으며, 경종이 조금이라도 오래 살았다면 주변 소론 대신들의 부추김에 따라 마음을 바꿀 가능성 또한 상당하고 혹시나 경종이 자식을 갖게 된다면 (불분명한 성기능 장애 문제를 빼고 나이만 보면, 경종이 자식을 가질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 역사적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자기는 진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비록 경종의 보호로 목숨과 세제 자리는 지키고 있었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경종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연잉군을 제거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세제 책봉부터 노론들의 반쯤 협박과 강압으로 한 데다가 신임옥사로 연잉군을 제거할 명분은 쌓이고 쌓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래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영조가 인간으로서 느낄 감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인간은 매사에 계산적일 수는 없으며, 저렇게까지 수세에 몰리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존재다.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한 아케치 미쓰히데나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가 좋은 예시가 된다. 사건이 터진 직후에 보기에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한 일은 역사 속에서 이미 몇 차례 일어난 적이 있다.
그리고 당시 영조의 상황은 그저 몸 사리며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기보단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인데 이판사판으로 질러도 충분한 상황이었다.[9] 동기가 충분하냐고 묻는다면 꽤나 충분한 셈이다. 게다가 경종을 살해하면서 영조에게 갈 이득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 최소한 영조가 즉위하지 못할 때에나 먹힐 주장이지, 영조가 즉위를 성공한 마당에 먹힐 주장은 아니다.
경종의 죽음에 이어 즉위한 영조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노론과 더불어 조정을 장악하였다. 전세가 하루 아침에 역전된 것이다. 하다못해 경종이 생각을 바꿔서 말년의 선조처럼 후계 문제를 두고 폐세제까진 아니어도 밀풍군이든,[10] 양자든 뭐라도 끼고 다른 말을 했다면 광해군이 당한 것처럼 영조도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냥 멀리 갈 것도 없이 경종 본인이 바로 이런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다 당했다.[11] 그런데 그런 말을 할 틈도 없이 경종이 덜컥 사망하였으니 사실 영조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데 경종이 죽음으로써 정말 영조에게 이익이 없다고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즉위하고 얼마 안 가 영조는 그 정적인 소론, 특히 준론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하였다. 물론 이인좌의 난을 비롯한 불미스러운 사건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괄의 난처럼 파천을 한다든가 하는 일도 없이 모두 무난히 극복하였고, 괘서 사건이라든가 과거 시험장에서 당한 일 같은 건 확실히 영조의 기분을 망치는 데에는 충분할지언정 영조의 조정까지 망치는 것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영조는 조선 왕조 500년 중 무려 10분의 1인 52년을 집권한 왕이다. 정통성 문제로 어느 정도 시달린 건 사실이지만, 강한 왕권으로 장기간 통치한 영조인 만큼 '심각한 후폭풍을 각오하고' 했다고 하기에는 큰 문제가 아니였다는 것이다.
당시 소론이 비록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준소와 이광좌로 대표되는 완소로 분열되었다고 하지만 진정한 완소는 당시 세제시강원 조현명과 조문명 형제, 송인명, 박문수 등 극소수였다. 준소나 완소이나 경종이 죽으면 같이 몰락하고 노론이 득세할 거란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었다. 더욱이 영조는 경종이 승하 당일까지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점도 후에 큰 논란이 되었다.
경종이 병석에 오래 누워 있을수록 이에 위협을 느낀 준소가 세제를 폐하는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병권을 쥔 훈련대장 윤취상, 총융사 김중기, 어영대장 이삼은 모두 준소의 영수 김일경의 사람이었다. 세제가 왕위에 오르면 이들이 죽는다는 건 명약관하였다. 더구나 경종 임종시 김일경은 공교롭게도 왕세제 보호론을 주창한 이광덕의 논박을 받아 부신을 바치고 성 밖에서 대죄하고 있었다. 게장과 땡감의 진어는 경종의 죽음을 재촉했고 소론, 특히 준소 측에게 반격의 틈을 주지 않는데 성공했다.
5. 결과
독살설이 사실인지는 거짓인지와는 무관하게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 때문에 매우 고생했다. 일단 경종이 위중한 상태에서 영조가 어의 이공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를 처방하게 했기 때문. 이미 신임옥사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점과, 그 주모자들이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정황 때문에 소론을 중심으로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시작은 김일경이었다. 영조 즉위년(1724) 12월 8일, 영조가 즉위하고 얼마 뒤에 소론이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국문했는데 이때 김일경은 이상한 행보를 보였다. 김일경은 자신을 경종의 충신이라고 자처하고 영조에게는 자신을 지칭할 때 의신(矣身)이라는 존대말 대신 '''나'''를 뜻하는 오(吾)라는 반말을 쓰는 등, 흡사 육신전에서 세조를 부정하던 사육신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더 노골적이다. 호해와 이세민이 형제를 살해하고 비정상적으로 왕위를 승계했던 사건들을 들어가며 영조를 비판했고, 여기에 내옥척련(內屋戚聯)이라는 궁인과 영조가 내통했다는 단어를 써가며 경종의 독살되었단 생각을 노골적으로 담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김일경이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을 숙청한 인물이었고, 국문으로 고문받던 상황이니 어느 정도 설명이 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일경을 숙청한 뒤 한 달이 겨우 지난 이듬해 1월 16일, 영조가 의릉(경종의 릉)에 알릉(참배)하러 가는 행찻길에서 군사(軍士) 이천해(李天海)가 경종 독살을 운운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12] 다음날 이천해를 국문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천해는 16일에 "국가가 무상(無狀)하다(질서가 없다)."를 시작으로 "환국(換局)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따졌는데, 한 달 전 소론 강경파 숙청을 언급한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천해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죄인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을 독살범 영조를 고발하는 고발자라고 자칭했다. 영조는 이전해가 독살을 암시하여 "(영조가) 대궐 안을 왕래했다."라고 한 발언에 극도로 분노해서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史官)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며 사관들을 압박했다. 결국 이천해가 영조에게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 발언은 이날 기사에는 쓰이지 못했다. 다만 사관들이 나중에 신치운의 발언을 기록하며 이떄 일을 은근슬쩍 인용함으로써 후세에 알려졌다.#
또한 조사 결과 이유익의 입을 통해 이천해의 흉언을 퍼트린 주범이 경종의 첫번째 왕후 단의왕후의 동생 심유현이라는 얘기가 나와 심유현이 조사를 받았다. 심유현은 경종이 승하할 때 입시하여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종이 목욕할 때도 입시하였는데, 멀쩡하던 임금이 갑자기 사망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 얘기를 퍼트렸다. 그후 이유익, 심유현은 이인좌의 난에 동참했고 이유익은 국문을 받으면서 심유현의 증언이 민심을 선동하여 역모에까지 이르렀다고 한 바 있다. 이천해의 국문 당시 심유현은 외척이여서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고 관직도 제수받았지만, 훗날 이인좌와 결탁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끝내 주살되었다. 그나마 집안이 좋아 심유현만 처리되는 선에서 끝냈지만 이것도 당시 심유현의 모친, 즉 경종비 단의왕후 심씨의 어머니가 생존해 있었기에 대역죄인임에도 관례대로 노적, 즉 처자를 보니로 삼는 형벌을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 독살설 관련 사건으로는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있다. 일단 영조실록 안에는 이인좌가 경종의 독살설을 주장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우선 해당 반란의 주범 중 박필현, 이유익, 이일좌는 경종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이고,[13] 더불어 반란 당시 한양에 뿌려전 반란군의 격문에는 영조가 삭제를 지시해서 개략적인 기록만 남았지만 납일초주(臘日椒酒)[14] , 사왕·숙대(叔帶)[15] 를 운운했으며[16] 이런 선전문을 담당했던 이익관을 심문할 때 위에서 독살설을 운운한 이천해를 언급한 일로 보아(출처: 영조실록 1728년 3월 28일(음력) 기사) 이인좌의 난 때도 경종 독살설이 주요 원인이었고 반란군도 이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영조 31년(1755)에 터진 나주 괘서 사건에서도 경종 독살설이 기록되었다. 심지어 주범인 신치운은 영조 앞에서 대놓고 게장을 언급하며 그를 경종의 암살범이라고 타격하고 있다.[17] 이 시기에 소론 준론과 남인들에겐 그냥 경종의 게장 독살설이 정설이었다는 반증. 영조 밑에서 승지를 지내기도 한 신치훈은 저 극언 때문에 선대의 이괄, 후대의 김옥균에 맞먹는 대역죄인으로 일가가 모조리 극형을 받았다.신치운이 말하기를, "'''신은 갑진년(1724, 경종 사망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致雲曰: "'''臣自甲辰後, 不喫蟹醬, 此乃臣之逆心,''' 鼎衍凶書, 亦臣所爲也。" 上憤痛流涕, 侍衛將士莫不崩心痛骨, 直欲手臠其肉。
-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 5월 20일자 기사
[1] 게는 식중독을 일으키기 쉬운 음식인데, 여기다 감의 탄닌 성분까지 더해지면 소화불량이 일어난다. 이런 점 때문에 경종 시대에도 나쁜 조합으로 보았다. 소화기관이 약하던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은 치명타였을 것이다.[2] 당시 어의였던 이공윤은 강한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명성을 얻은 의원이었다. 당시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려 하자 "그러면 전하께서 기를 능히 돌리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는데, 기를 능히 돌리지 못한다는 건 그러다 죽는다는 걸 돌려서 지적한 것이다.[3] 이 때문인지 노론이 기록한 저술에는 어의 이공윤이 인삼차를 먹이면 안 된다고 반대한 내용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하지만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데다 경종실록은 물론 사망 당시에 기록된 승정원 일기에도 동궁이 그렇게 처방했다는 내용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만 더욱 증폭시키고 말았다.[4] 영조가 초조한 나머지 충동적으로 저질렀다고 볼 수도 있겠다. 허나 왕이 쓰러진 상황에서 적법한 후계자인 영조를 적들이 공격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후대에 군주의 안위를 등한시하고 자기들의 권력 싸움에만 몰두한 간신이라고 공격받을 수도 있다.[5] 영조는 노론 신하들이 야밤에 경종을 찾아가 협박하여 세제로 책봉되었다. 사실상 후계자라고 할 사람이 영조 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냥 기다려도 되는데 굳이 이 행태를 벌인 것. 세제로 책봉된 후에 삼수의 옥 때 역모에 얽혔기 때문에 독살설이 없어도 왕위 계승에 시비가 붙을 상황이었다. 그러니 세제로 좀 더 지내면서 경종에 대한 충성과 우애를 증명하여 이미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6] 그러나 이것은 너무 단편적인 생각이다. 결론 부분 참조[7] 경종이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영조는 삼수의 옥 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괜히 영조가 '황형께서 날 살려준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말한 게 아니다. 경종이 생전에 영조를 낀 노론에게 받은 수모와 모욕을 보면 이때 영조를 죽여버리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8] 당시의 세조는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가장 약소한 파벌을 이끌며 수세에 몰려있었고, 주변에 변변한 인물조차 없어 동네 건달을 부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세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이 잘 나서가 아닌 김종서를 비롯한 고명대신들이 바로 수세에 몰린 세조의 상황을 근거로 낙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 하다 못해 세조도 역모와 관련해서 이름이 오른 적은 없었고 계유정난 전까지는 최대한 몸을 사리며 지냈는데, 영조는 주변의 잘못에 더해 본인도 처신을 잘 못해서 잊을 만하면 이름이 등장하며, 경종이 사망할 당시에는 정말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상태였다.[10] 이게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건 후에 이인좌의 난을 통해서 드러난다. 경종이 좀 더 오래 살면서 소론의 부추김을 받거나 경종 본인이 신임옥사 때처럼 분노하거나, 아니면 영조 측에서 뭔가 또 꼬투리가 잡히는 식으로 일이 틀어진다면 밀풍군을 옹립하는 일도 아주 불가능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말 그대로 죽을 위기에 놓인 채 가시밭길을 걷고 있던 영조로서는 이 또한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11] 숙종이 죽기 전에 후계 문제를 흔들어버린 바람에 경종은 노론으로부터 왕으로 취급받지도 못했으며, 그 적수는 바로 세제인 영조였다.[12] 한편 인조실록에는 '형조가 조사해보니 이천해가 광병(狂病)을 앓는 것으로 보인다'는 언급도 나와있는데, 혼자 귀신에 홀렸다며 자해한 적이 있다던지, 조사 중에는 '아내와 그 가족이 작당하여 자신을 죽이려 해서 그것을 상언하려고 그랬다'며 횡설수설 했다던지 하는 묘사가 꽤 들어맞기는 한다.[13] 앞에서 언급한 이천해 사건의 배후도 이 3명이고, 반란 진압 후 이일좌와 다른 주범인 이익관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14] 왕망이 납일(臘日,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미일)에 독을 넣은 초주(椒酒, 후추를 넣은 술)로 평제를 독살한 것을 말한다.[15] 둘 다 '''왕위를 노리고 제 형을 위해한''' 인물들이다.[16] 종합하자면 각각 영조를 두고(이인좌 측 주장에 따르면) 목호룡의 고변 때 형 경종의 아량으로 살려줬는데 '형의 왕위'가 탐이 나 '독을 썼다'고 직설적으로 공격하는 말이다.[17] 엄밀히 따지자면 신치운의 발언은 나주 괘서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의 발언은 나주 괘서 사건 직후 이에 고무된 신치운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의 자제들이 과거장에서 국왕을 비방하는 글을 쓴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을 일으키면서 추포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는 자리에서 행한 진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