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시/역사
1. 고대
본디 한강 북쪽 땅 일대는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한성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후 한산군을 두었는데, 이때 지금의 양주, 의정부 지역에는 매성군(買省郡), 혹은 창화군(昌化郡)을 두었다.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 때 매성군을 내소군(來蘇郡)으로 개편했다. 지금의 동두천 지역은 삼국시대 내을매현, 사천현이었다. 지금의 구리, 남양주 일대(특히 진접읍)는 골의노현(骨衣奴縣), 지금의 고양시 일대는 달을성현, 개백현(皆伯縣)이었다.
한편 지금의 서울 강북 일대는 북한산군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 한양군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골의노현(구리, 남양주)은 같은 시기에 황양현으로 개편되었다.
2. 고려
태조 때 내소군은 견주군(見州郡)으로 바뀌었다. 견주는 경주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983년(성종(고려) 2년)에 처음으로 12목을 두었는데, 이 때 양주목(楊州牧)을 두었다. 지금의 양주, 남양주, 고양 일대가 한양군을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인 양주목이란 이름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경기 북부권(지금의 서울 강북지역 포함) 고을들이 이렇게 통폐합되면서 '''양주'''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1018년(현종(고려) 9년) 12목이 8목으로 개편되고 도(道)제가 실시되었다. 교통로가 개경 중심으로 바뀌면서 점차 쇠퇴하게 된 탓에 양주목은 양주군으로 격하되며 양광도에 소속되었다. 양광도의 ''''양''''이 바로 양주군이다. ''''광''''은 광주목.
1067년(문종(고려) 21년) 양주의 중심지에 부수도인 남경이 설치되었다.
고려 시대까지 양주의 중심지는 쭉 현 서울특별시 광진구 일대였다.[1] 고려 초기만 해도 현 '''서울특별시 강북 전역'''('''사대문안'''과 옛 성저십리 지역 포함)과 '''고양시 일대'''까지도 '''양주''' 영토였다. 단, 이때의 양주는 한양군, 견주군, 풍양현, 행주현 등과 같은 경기 북부권 고을들이 '양주목'이라는 이름으로 '''느슨하게 통합'''된 것으로 봐야 한다.
다만 지금의 용산구 일대는 당시에는 과주(지금의 과천시) 소속이었다가 부원현으로 분리되었다가 남경으로 편입되었다. 현 고양시 일대였던 고봉현과 행주현(별명 덕양현)은 양주군의 속현이었고, 지금의 서울 강북 일부(사대문안과 용산, 신촌 일대)[2] 가 남경으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남경이 양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까지는 아니고, 남경을 제외한 양주 지역의 현에 별도로 '감무'[3] 란 관리를 파견하는 형식으로 구분하는 형태가 된 수준이었다. 하지만 숙종 시기에는 남경 근처의 풍양현(남양주 진접), 견주(양주, 의정부), 사천현(동두천)까지 직할로 두어 남경의 범위가 더 넓혀지기도 했다.
3. 조선
조선이 건국하여 1395년에 한성부의 경계가 획정되자 오늘날의 서울 강북 나머지 지역(노원, 도봉, 광진, 중랑 제외)[4] 이 한성부 성저십리로 편입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되었고, 1397년 읍치 이전과 함께 양주를 군에서 부로 승격시켰다. 본디 지금의 서울 광장동 지역에 있던 양주 읍치가 옛 견주 자리로 이전되면서 이웃 행정구역이 분리되기 전까지 존재하던 옛 양주목의 면모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세조 시기인 1466년 양주부를 다시 목으로 승격시킴에 따라 이후 4백여 년간 양주는 정3품 목사가 다스리는 큰 고을이 되었다.
양주 읍치의 이동 과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통설은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따라 한양부(고려) → 아차산성(태조 3년) → 양주시 고읍동(태조 6년) → 옛 견주 자리 = 현재 양주관아지(중종)로 보고 있으나, 문제는 중종 대에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양주 읍치를 옮겼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 대에 읍치를 옮겼다는 기록은 김정호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즉 이것은 김정호의 독자적인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디 아차산성에 양주의 읍치가 있었으나 남경이 생기면서 지금의 서울 광장동 지역으로 읍치가 이동했고, 태조 3년에 한양 천도로 인해 양주시 고읍동으로 읍치가 이전되었다가 태조 6년에 옮긴 것이 현재의 양주관아(양주시 유양동 소재)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의 양주목은 지금의 양주시 지역 대부분을 비롯하여 서울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5] 와 구리시와 남양주시, 의정부시, 동두천시를 모두 관할하는 거대한 행정구역이었다.
이후 1895년 갑오개혁에서 부, 목, 군, 현을 부, 군으로 간략화하는 행정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양주목 역시 양주군으로 재편되었다. 또한 현재의 중곡동 등 고양주면 일부가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되었다. 1906년 현재의 조안면 지역에 해당되는 초부면(다산 정약용의 고향)을 광주군으로부터 편입하였고 대신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과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해당되는 신혈면이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4. 일제강점기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뜯어 고치는 과정에서 고양주면이 고양군 뚝도면으로 편입되었고, 영근면(현 전곡읍)이 연천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시북면과 둔야면이 시둔면으로,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전신인 해등촌면과 노원구의 전신인 노원면(갈매리 제외)이 노해면으로, 구지면(현 구리시)과 노원면 갈매리와 망우리면(현 중랑구)이 구리면으로, 미음면과 금촌면이 미금면으로, 와공면과 초부면이 와부면으로 통합되었다. 이와 함께 고주내면이 주내면으로 바뀐 것 역시 1914년의 일이다.
1922년 주내면 유양리(현재의 유양동)에 있던 군청사가 시둔면(현 의정부시)으로 이전하였다. 1938년 시둔면이 양주면으로 개칭되고[6] , 1942년 양주면이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5. 대한민국
1946년 2월 파주군 남면[7] 을 편입하여 1읍 16개 면이 되어 관할 구역이 더 넓어졌다.
1963년 1월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고 화도면의 3개 리, 진접면의 1개 리와 가평군 외서면의 3개 리를 합쳐 수동면이 신설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의 중심부였던 의정부읍이 의정부시로 승격하여 분리되고 노해면과 구리면(舊 망우리면 지역)의 5개 리를 서울에 넘겨주었다. 이렇게 되어 양주군은 의정부시를 사이에 두고 북부와 남부로 관할구역이 분리되었다. 1973년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었고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가 동두천읍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 미금면이 미금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0년 4월 남부에 해당되는 구리·미금읍, 별내[8] ·진접·수동·화도·진건·와부면의 2읍 6면을 통째로 남양주군으로 신설하여 분리시켰다. 1981년 7월에는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승격, 분리되면서 현재의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 1983년 2월 은현면 상패리가 동두천시로, 백석면 기산리와 영장리가 파주군 광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5년 10월 회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1월 파주군 광탄면 기산리 일부(기산저수지 일대)가 다시 백석면으로 환원되었다. 2000년 10월 양주군청사가 의정부 시내[9] 에서 주내면 남방리 1-1로 옮김에 따라, 주내면이 양주읍으로 승격하였다. 2001년 10월에는 백석면이 백석읍으로 승격하였다.
2003년 10월 19일 포천시와 함께 시로 승격, 양주읍과 회천읍은 폐지되어 행정동으로 분동되고, 그 아래의 리는 법정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006년 12월 15일에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주내역(현양주역), 덕정역까지 개통되었으며 2007년 12월 28일에 덕계역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2016년 12월 15일에는 의정부-소요산 구간의 개통이 10주년을 맞는다.
2013년 10월 19일에 시 승격 10주년을 맞았다. 또한 서울 지하철 7호선 도봉산포천선 양주 구간이 2016년 2월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여 7호선을 유치할 수 있게 되었다.
6. 관련 문서
[1]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세운 아차산성이 내소군의 중심지였고, 한강을 마주보며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과 마주보며 대치하는 구도였다. 이것이 고려 때 양주 소속이었던 현재 서울 구도심 일대에 남경을 세웠고, 남경이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떨어져 나간 이후에도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에 양주의 치소가 지금의 양주시 쪽으로 이동한 뒤부터 광진구 일대(+중랑구 면목동), 성동구 일부(중랑천 동부), 당시에는 섬이었던 잠실 일대를 '고양주면(古楊州面)'이란 행정구역으로 불러왔다.[2] 남경의 관할구역이 지금의 구리시, 남양주시 삼패동까지였다는 설도 있다.[3] 후에 조선의 지방관인 현감으로 이어지는데 똑같이 현에 파견되던 수령인 현령보다 격이 낮았다.[4] 광진구 서부와 중랑구 면목동이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된 것은 구한말의 일이다.[5] 당시 양주군 고양주면 지역으로, 놀랍게도 지금의 '''송파구 잠실동, 신천동'''도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 잠실지역은 여의도처럼 한강 한가운데 섬이였고 과거에는 섬의 북쪽을 흐르는 강보다 남쪽을 흐르는 강이 더 넓었기 때문에 잠실이 양주군에 속하는 것이 지리적으로도 맞다. 잠실이 지금처럼 된 것은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물줄기가 바뀌어 섬의 북쪽이 더 넓은 강으로 되었고, 결정적으로 1970년대 잠실개발 당시 남쪽의 지류는 매립해서 (석촌호수라는 흔적만 남기고) 없어졌기 때문. 1895년 고양주면 일부가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되었다.[6] 양주목의 역사적 중심지였던 주내면(훗날의 양주읍→양주동) 대신, 의정부 지역에 '양주'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양주군청을 의정부로 이전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했던 것으로 보인다.[7] 원래 적성군 소속이었다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연천군에 합쳐졌고 1945년 해방 직후 파주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년만에 다시 양주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면명을 바꾸지 않아 양주 '''최북단'''임에도 '''남면'''이라는 요상한 상황이 된 것(...).[8] 고산리와 산곡리 제외, 두 리는 의정부시에 편입되었다.[9] 의정부시 의정부동 220-110번지(현 의정부경전철 의정부중앙역 앞 한라비발디루트 아파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