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홍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야구 감독이자 일선에서[2] 활동하는 '''한국 야구 최고 원로.'''[3]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고교야구계를 풍미한 일세의 투수였다. 당시 동래중[4] 의 에이스로 경남중의 에이스 장태영과 자웅을 겨루던 투수였다. 다만, 장태영의 경남중이 좀 더 전력이 강했기 때문에 우승 자체를 차지한 적은 많지 않았다. 1949년 황금사자기 준우승이 그가 졸업반일 때 거둔 성적이다. 당시 최우수선수였으니 대단하기는 했지만. 본인의 말에 따르면 역회전 볼과 컨트롤이 좋은 투수였다고 한다. 그의 5형제 중 3명이 야구 선수로 활약했을 정도로 야구 가족으로 이름도 날렸다.
그 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한국전력 야구팀 등 실업팀에서 활약하면서 경력을 이어가다가 은퇴 후에는 아마 야구 팀과 실업 야구 팀 감독을 맡으면서 후배 양성에 주력했다.[5] 이 당시에는 실업팀 생활을 하면서 감독직을 병행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도 했지만. 부산상고와 경남고, 한국전력, 동아대 감독을 두루 역임했다.
1981년 대륙간컵 감독으로 취임해서 이듬해인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에서 한국의 우승[6][7] 을 이끌며, 일약 명장으로 추앙받았다. 그 해 세계야구연맹이 선정한 올해의 감독상에 이름을 올렸으니, 명성이 대단했을터. 이 당시의 에피소드로 입술을 털려고 손을 올린 것이 스퀴즈 싸인으로 잘못 받아들여져서, 김재박이 개구리번트로 득점에 성공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듬해인 198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MBC 청룡의 끈질긴 제의를 수락, 1984년에 감독에 부임한다.
그러나 프로 감독으로서는 썩 성공한 편이 아니다. MBC 청룡 감독 첫 해였던 1984년은 중위권에 머물렀고 1985년 전기리그는 하위권을 맴돌아[8] 결국 취임 후 1시즌 반 만에 해임되었다. 1988년 새롭게 부임한 고향팀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팀 전력의 핵심인 최동원이 선수협 결성과 연봉 문제(최동원 90만원 사건) 때문에 프런트와 갈등을 빚으며 합류가 늦어지면서 시즌을 망치게 된다.[9] 그리고 1989년에 바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윤학길, 김민호 같은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세대교체를 시도했지만, 롯데의 흐트러진 분위기를 추스리는데는 실패한다. 결과적으로 2년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뒤, 야구 원로 모임인 일구회를 창립, 초대 회장에 오르고, KBO 보좌역과 야구 해설[10] 등을 하다가 현재는 은퇴한 상황이다. 아직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고, 야구 원로로 대접받고 있다. 야구자문원로위원회에 이름을 올려놓은 상황.
영동고등학교 재단인 해청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2014년 최동원 상 선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2018년 한국시리즈 1차전의 시구자로 선정되었다. 2014년 삼성 대 넥센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시구한지 4년만이다.
2. 이야기 거리
- 허구연 해설위원 경우, 1980년대 MBC 청룡의 감독 제안을 받았을 때, 은사의 자리를 뺏어 감독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허구연 해설위원은 어우홍 감독에게 고마운 선배이자 스승이라고 언급한다. 야구 기술뿐만 아니고 야구 외적으로 조언을 많이 준 덕분에 지금도 감사하다고 한다. 영상클립
- 동생 어지홍도 야구선수로 뛰었으나 병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조카 손녀딸인 제인어(Jane Uh)도 야구선수로 고양 원더스 트라이 아웃에 지원하기도 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다. 연천 미라클에 선수로 속해 있기는 하지만 선수 명단에 들어갔다 빠졌다를 반복하고 있으며 독립리그 대회에 공식적으로 출전한 적은 없다.
- 영동고등학교의 개교일 기념행사에도 매년 참석한다. 이름이 워낙에 특이하기에 처음 듣는 학생들은 웃음 죽이기 바쁘다고(...).
[1] ▲ 2012년 7월 9일 제 10구단 창단을 위한 역대 프로야구감독 기자회견 에서(바로 뒤의 인물은 강태정 전 태평양 돌핀스 감독)[2] 신용철(1925-) 이용일(1931-) 등의 원로들이 생존해 있지만 어우홍 감독처럼 일선에서는 잘 활동하지 않는다.[3] 윌리 메이스와 동갑이다.[4] 당시에는 중학교가 5학년 까지 있었다. 현재의 교육 과정과는 조금 다른셈. 최용수가 나온 축구부로 유명하지만, 박정태, 문동환, 박지철의 모교다. 1998년을 끝으로 야구부는 해체되었다.[5] 그의 제자 중에는 김응룡도 있다.[6] 이는 지금까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가 기록한 이 대회 유일한 우승이다.[7] 한국 야구 대표팀의 첫 국제대회 우승은 최동원, 김재박이 주축으로 활약했던 1977년 니카라과 대륙간 컵.[8] 2020년 한화 이글스와 함께 유이하게 18연패를 기록하며 부동의 꼴찌가 된 삼미 슈퍼스타즈가 있었던 덕분에 꼴찌를 면했을 뿐이다. 그 18연패를 깨준 팀도 자신이 이끌던 MBC였다. MBC의 당시 전기리그 성적은 24승 31패로 6개 팀 중에 5위였다.[9] 이 당시 최동원과 프런트의 갈등에는 프런트에서 상이군인인 최동원의 아버지를 비하했다는 것이 전해지면서 비롯된 감정싸움이 컸다. 여기에 최동원도 당시 프런트의 책임자였던 박종환 전무를 그 사람이라 호칭했는데, 박종환 전무가 최동원의 경남고 선배라는 점에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 수습방안으로 나온 것이 소위 박종환 전무의 반성문. 아이러니한 것이 이 아이디어는 어우홍이 최동원의 아버지에게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이종남의 이중노출 中 : 고인이 된 이종남 기자의 증언인데, 실제 여부는 알 수 없다. 이종남이 훗날 박동희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은근히 자기 과시가 심한 인물이기도 하고.) 그러나 이게 더 감정싸움을 부추기면서 최동원은 결국 시즌이 다 지나서야 합류한다. 결국 화해하기는 하지만, 이로서 최동원과 롯데 구단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10] 1998년 선동열, 이종범이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을 때 OSB(국내 일본방송 전문 위성 채널)에서 일본프로야구 해설을 맡았다. 그 이후로도 일본프로야구나 고교야구 등에서 해설위원으로 간간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