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Werner Eduard Fritz von Blomberg
베르너 에두아르트 프리츠 폰 블롬베르크[2]
1878.9.2 ~ 1946.3.22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육군 참모장교로 활약한 독일의 장성.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부에서 일했으며 1925년에 보병대령을 단 뒤로 2년에 1번꼴로 초고속 승진을 계속하였고, 작전부의 요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던 1929년, 동프로이센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하던 블롬베르크 대령은 나치당을 소개받았는데 나치가 강력한 정권을 바탕으로 독일을 군사강국으로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판단, 나치당에 지원하게 된다. 아돌프 히틀러가 파울 폰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겨받을 즈음인 1933년 그의 계급은 육군 보병대장이었으나,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되자 국방장관에 임명된다. 이듬해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그는 육군을 이끌고 히틀러에게 충성 서약을 맺었는데, 그 대가로 블롬베르크는 전쟁장관의 직책과 1917년 이후 독일 제3제국 '''최초'''의 육군원수 계급을 얻었으나 33살연하인 에르나 그룬과의 스캔들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8년 군에서 물러나 정작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은 인물.
2. 젊은 시절
1878년에 독일 제국령 프로이센 왕국의 슈탈가르트에서 육군중령이던 에밀 폰블롬베르크의 아들로 태어난 베르너 폰블롬베르크는 부친의 선조가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군대에 속했던 귀족이었다고 하지만 블롬베르크의 선조가 확실히 귀족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블롬베르크의 백부인 헤르만 폰블롬베르크 보병대장이 용맹한 군인으로 인정받아 귀족 칭호인 "폰"을 사용하는 것에 왕립 문장 사무소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계가 슐레지엔의 귀족 가문이라 블롬베르크 가문은 자연스럽게 귀족가문의 반열에 오를 수가 있었다. 1894년부터 1897년에 걸쳐 블롬베르크는 베를린의 명문인 프로이센 고급사관학교를 다닌 후, 1897년에 프로이센 제 73 경보병 연대의 소위로 임관하여 제2대 대장의 부관이 되었다. 1904년에는 소령의 딸인 샬롯테 헤르미히와 처음 결혼을 했다. 1904년부터 1907년에 걸쳐 베를린의 프로이센 육군대학을 다닌 후 1910년부터 참모본부에서 일한 그는 1911년에 대위로 승진했고, 1914년 1월에 제 130 보병연대 예하의 중대장이 되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 19 예비사단의 참모로 종군하여 1916년 3월에 소령으로 승진했고, 1916년 7월부터 제18 예비군단의 참모가 되었다. 1917년 2월에 서부전선의 제7군 참모로 재직한 블롬베르크는 공적을 인정받았고 1918년 6월 3일에 블루 메리트 훈장을 수상했다. 전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육군 10만명으로 제한되고 장교는 4,000명으로 제한되었지만 그는 군대에서 방출되지 않고 바이마르 공화국군의 장교로 남았고, 1919년 10월부터는 국군성에서 근무했다.
3. 제1차 세계대전 후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슈투트가르트 군관구와 제5 사단의 참모장을 지낸 그는 1923년에 대령으로 승진해 1925년에 국군성으로 돌아와 육군훈련부 부장으로 일했다. 1927년 4월부터 1929년 10월에는 사실상의 참모본부인 병무국 국장으로 취임했다.
블롬베르크는 병무국장 시절 소련을 긴밀히 방문했다. 그곳에서 독재체제와 전체주의 체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력으로 전차와 독가스의 개발, 공군 재건에 관여했다. 허나 병무국장으로서 프랑스와 폴란드의 대처 계획을 짤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는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29년 10월에 중장으로 승진 후 동프로이센 제1 사단장으로 취임했다.
이 때 1931년 처음으로 나치당의 당수인 아돌프 히틀러와 만난 블롬베르크는 히틀러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블롬베르크 자신은 국가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히틀러 개인에게 강력한 인상을 받았고 히틀러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히틀러의 독재정치를 탄생시키는 것만이 독일의 미래가 있다고 믿은 블롬베르크는 여러 기회를 이용하여 히틀러를 지지하는 운동을 했다. 심지어 블롬베르크는 미국을 공식방문했을 때에도 "나치당 정권의 탄생은 불가피한 일이며, 그것은 희망적인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반 나치파인 수상, 하인리히 브뤼닝은 블롬베르크가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를 퇴역시키도록 노력했지만, 오히려 블롬베르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고 오히려 역으로 브뤼닝이 군사작전에 간섭한다는 보고서를 올려 그를 실각시켰다. 물론 정치 똥별 슐라이허의 개입도 한몫했다.
1932년에 제네바 협정에서 독일군사대표단장을 맡은 블롬베르크는 당시 그레너 국방장관의 방침에 반대하여 독일의 군비강화와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주장했기 때문에 의회 및 국제연맹의 탈퇴도 불사하는 자세를 보였다. 1932년에 부인이던 샬롯테가 5명의 자식을 남겨둔채 54세로 사망하자 블롬베르크는 홀아비 신세가 되었다.
4. 나치 집권 이후
아돌프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 일을 결의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1월 29일에 제네바에 있던 블롬베르크를 베를린으로 소환하여 1월 30일에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기 몇 시간전인 오전 9시에 그를 새로운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내각 성립 전에 각료를 임명하는 것이 바이마르 헌법에서는 위법이었음에도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블롬베르크가 국방장관에 임명된 바로 날 오전 11시 15분에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보수파는 블롬베르크가 히틀러를 고립하고 압박하는 상황을 기대했지만 이런 속내와 달리 그는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 충실히 근무했다. 반 히틀러 사상의 전 국방장관인 쿠르트 폰슐라이허의 똘마니들을 국방성에서 쫓아내는 일도 맡았고 블롬베르크는 군수상인 페르디난트 폰브레도우를 파면하고 나치에 열렬하게 찬성하는 발터 폰라이헤나우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병무국장을 빌헬름 아담에서 루트비히 벡으로 교체했고 독일 국방군 국장인 오이겐 오토를 일본으로 좌천시키고 대신 프리드리히 프롬을 국장으로 임명했다. 육군 총사령관인 쿠르트 폰함머슈타인도 6월에는 군내에서 고립되어 1934년 1월엔 사직을 종용받아 결국 베르너 폰프리치(Werner von Fritsch)에게 자리를 내 주고 말았다. 히틀러는 블롬베르크의 이러한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군의 권위와 권환의 확대를 약속했다. 1933년 4월 4일엔 비밀리에 재군비 추진을 위하여 국방회의를 창설했고 7월 20일엔 국방군법을 제정하여 군에 대해서는 일반재판소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한다는 규정을 세워 국방장관이 군의 사법권을 담당하게 했다.
그렇지만 나치당의 돌격대(SA)는 정권획득 이후에 400만명의 대원[3] 을 보유하며 제2의 군대라 불릴 정도로 커버렸고 이들은 국방군을 통채로 집어삼킬 계획이며 에른스트 룀이 자신들을 집어삼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로 인해 돌격대와 국방군의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국방군의 반발에 의해 블롬베르크는 히틀러에게 돌격대 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그리하여 1934년 2월에 히틀러의 중재로 국방성에 들어선 블롬베르크와 돌격대 지도자인 에른스트 렘은 돌격대의 준동방지협정에 서명했지만 돌격대가 협정을 지키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에 돌격대가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흐르자 블롬베르크는 히틀러한테 돌격대와 국방군 간의 갈등이 지속될 경우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가 정권을 이끌게 될 수도 있다는 최후통첩을 한다. 히틀러는 한낱 아첨꾼에 불과해 보이던 블롬베르크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하며, 힌덴부르크 대통령 또한 이 경고를 확실히 밝히자 히틀러는 결국 룀의 처단을 결심하게 된다. 히틀러는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에 걸쳐 장검의 밤이라고 불리는 돌격대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고 이로 인해 돌격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런데 이 때 퇴역장군 중 2명인 쿠르트 폰슐라이허와 페르디난트 폰브레도우가 살해되었는데 그러나 블롬베르크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으며 국방군 인사들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장례식에 참가하거나 조문을 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4] 그리고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이 사망하자 블롬베르크는 이 날 육군 총사령관인 프리치와 해군 총사령관인 에리히 레더와 함께 군을 대표하여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에 의거해서 모든 독일의 군인들은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실시하게 되었다.[5]
그 후에도 유대인을 독일인의 국방군에서 추방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장교단의 저항을 억누르면서 히틀러의 45세 생일을 기념해 국방군 리스트 연대 뮌헨막사를 "아돌프 히틀러 막사"로 명명하는 등 히틀러에게 아부했다. 그래서 블롬베르크의 별명은 아첨하는 사자, 고무사자가 되었다. 1935년 3월 16일 아돌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군 군비제한조항의 파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군의 전통을 본격적으로 부활시켜 국방성도 군무성으로 개명했으며 히틀러는 국방 3권의 지휘권을 얻게 되었고 1936년에는 육군원수 칭호를, 1937년 1월 30일에는 황금 나치당원 배지를 국방군으로부터 선물받았다. 블롬베르크는 재무장 시에 기병보다 전차의 역할을 중요시하게 생각했고, 전술 면에서는 동프로이센 시절의 연습경험을 바탕으로 방어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공격의 보조수단으로 활용하게 했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함머슈타인의 공격형 원리에 수정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37년 11월 5일에 블롬베르크는 히틀러가 주최하는 비밀회담에 참여했는데, 3군의 총사령관들인 베르너 폰프리치, 에리히 레더, 헤르만 괴링, 외무장관 콘스탄틴 폰노이라트가 출석한 자리에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전쟁문제를 논의했다. 블롬베르크는 계획자체엔 찬성했지만 국방군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의 개전은 반대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이 없다고 예측했지만 블롬베르크와 프리치는 회의적이었고 에리히 레더도 한참동안 발언하지 않아 회의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결국 그의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 괴링은 군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했고, 마침 블롬베르크가 히틀러의 호전적인 정책에 반대하며 1942년이전에는 개전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게 되자 히틀러에게 찍혔고 히틀러와 나치당은 자신들의 뜻에 따르지 않는 육군을 장악하기 위해 블롬베르크와 프리치의 축출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와 특히 게슈타포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블롬베르크의 약점을 잡기 위해 애를 썼고, 그 결과물이 아래에서 설명할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즉 '''에르나 그룬 스캔들'''이다.
4.1.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1938년 1월, 59살의 블롬베르크는 26살의 에르나 그룬(Erna Gruhn)[6] 과 재혼을 한다. 이에 결혼식에는 블롬베르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히틀러와 괴링을 비롯한 나치의 고위급 인사들도 대거 참여했다. 그리고 결혼식에서 히틀러는 에르나 그룬에게 잘 살라며 손에 키스까지 해 주었다고.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에르나 그룬에게는 '''매춘'''경력이 있던 것이었다.
게슈타포는 그녀의 포르노 사진을 입수했고, 이 사실은 블롬베르크와 막역한 사이였던 빌헬름 카이텔에게도 전해졌고 곧 이 사실은 히틀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후 사건은 제법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명예로운 독일 국방군 원수의 부인이 '''창녀 출신'''인 꼴이 되어버린 것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나치당에서는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고 나치당과 군에서도 이를 빨리 해결하려고 했다. 이에 히틀러는 블롬베르크에게 이혼을 명령했으나 '''거부'''하였다. 이에 황당함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낀 히틀러와 괴링이 이 사건을 대중에 폭로하겠다고 하자, 그는 끝내 히틀러의 뜻에 따르지 않고 군에서 물러났고 국방군 최고사령관 자리는 히틀러에게 넘어갔다.
후에 이 사건은 육군 사령관인 베르너 폰프리치가 동성애자라는 사건과 묶여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이라 불린다.[7][8]
4.1.1. 히틀러의 자작극인가?
이 사건은 히틀러의 군 장악을 위한 초석이었다는 분석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사건을 조작하거나 지시한 적이 전혀 없으며 이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은 이 사건을 히틀러가 일으켰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히틀러는 블롬베르크에게 전혀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블롬베르크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였다. 블롬베르크가 히틀러의 의사에 반대를 하긴 했지만 히틀러는 블롬베르크를 상당히 신뢰했기 때문에 그를 설득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찬성으로 돌려 놓을 생각이였다. 게다가 블롬베르크는 심각한 나치빠돌이었는데, 이언 커쇼 책에 의하면 블롬베르크는 '''히틀러가 따뜻한 말을 해주거나 히틀러나 연설하는 도중 감동적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히틀러에 열광적인 인물이였다.''' 심지어 히틀러는 이 사건 이후에도 비록 블롬베르크에게 실망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블롬베르크와 프리츠에게 어떠한 탄압이나 심각한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다. 또한 히틀러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히틀러는 굉장히 엄격한 성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충직한 사람인 블롬베르크의 아내가 창녀인 것을 히틀러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9]
또한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히틀러는 이 사건이 터진 이후 자신이 블롬베르크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을 매우 당황해 했으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만약 국방군의 원수가 창녀와 결혼할 수 있다면 세상에 무슨 일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이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상황이였다. 즉, 이 사건은 '''히틀러의 자작극이 아니라''' 군 총사령관이라는 자리를 얻고자 했던 헤르만 괴링과 무장친위대를 키우고자 했지만 블롬베르크의 반대로 갈등을 빚고 있던 하인리히 힘러가 서로 담합하여 블롬베르크의 아내인 에르나 그룬을 매춘부로 조작하여 블롬베르크의 퇴진을 유도하기 위한 술책이었다.[10] 여담으로 도화선에 불을 붙인 에르나 그룬의 포르노 사진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매춘부였다는 건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게슈타포의 계획임이 밝혀졌고 특히, 프리치의 사건은 완전히 날조된 스캔들로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4.1.2. 여파
이 사건은 히틀러를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보았던 국방군이 점차 그와 나치당에게 잠식되어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다만 이렇게 추잡한 사건을 조작해야 겨우 국방군 견제가 가능했다는 건 그만큼 당시 독일 군부의 힘이 막강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이후 히틀러가 독일 육군의 원수를 해임할 때도 허울좋은 자리를 주거나 은사금 명목으로 거액을 주어야 했다. 최종적으로 나치당이 국방군을 장악한 계기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이다.
히틀러는 믿었던 블롬베르크가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자 큰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 자신에게 배신하지 않을 사람들로 군부를 채우기로 결정했다. 헤르만 괴링이 원했던 군 총사령관 자리를 자신이 겸직하고 군 지도부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전쟁부를 해체하고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 설립의 초석이 되며 다들 알다시피 OKW의 사령관은 '''빌헬름 카이텔'''이다. 프리츠가 물러난 육군 총사령관 자리에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임명되었고, 뒤이어 장군 16명을 퇴역시키고 대규모 보직이동을 단행했다.
히틀러는 나치에 협력을 거부하거나 조건부적으로 협력하던 일부 인사들을 물갈이했고, 독일 국방군 지도부는 빌헬름 카이텔과 같은 아첨꾼들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나치당이 군권을 장악하고 히틀러의 침략 계획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5. 이후
현역에서 퇴역한 블롬베르크는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으로 떠난다. 그러나 1년간 신혼여행을 떠났지만 로마에서 국방장관 부관인 방겐하임 중령에게 자결을 권고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아내와의 관계도 나아지지 않아 2주 후에는 이혼을 전제로 복직을 요청하는 서한을 히틀러에게 보냈지만 거부당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블롬베르크는 현역 복귀를 희망했지만 히틀러의 거부로 뜻을 이루진 못했다고 한다. 이후 다 포기한 블롬베르크는 그곳에서 군부와 접촉하지 않고 안락한(...)은퇴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다만 블롬베르크는 이후 궁핍하게 살았으며 부인의 남자관계 소문이 나빠서 친구들도 이혼을 권유했지만 "아내는 명예스런 독일육군대장의 자리를 박차게 만든 여성이어서 감히 그녀를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며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가 폭망하고 1945년 그곳에서 연합군에게 체포된다. 이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유력한 증인, 참고인으로 증언을 대기하다가 1946년 3월 22일 뉘른베르크에서 암으로 사망한다.
6. 평가
제1차 세계 대전때는 참모장교로써 '''푸르 르 메리트'''를 수여받을 정도로 유능한 장교였고 1925년에 대령을 단 뒤로는 2년에 한 번 꼴로 승진을 하는 등 승진운도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항간에는 히틀러의 전쟁의사에 반대를 표한 인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킨 정의로운 장군으로 알려진 모양이지만, 사실 그의 별명은 '''아첨하는 사자''' 또는 '''고무사자'''였다. 그는 라이헤나우 원수[11] 뺨치는 열성적인 나치였다. 서술했듯이, 그는 1929년에 어느 장군보다 먼저 나치를 접했고, 당시 사회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그는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하기도 했을 정도.
그렇지만 불롬베르크를 포함한 육군 장교단들이 히틀러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다기 보다는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고 프로이센 출신 장교단의 입맛에 맞는 모험적인 성향을 가진 히틀러를 이용해 전쟁을 다시 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였다.[12] 하지만 블롬베르크 스캔들을 시작으로 히틀러와 나치당의 군부 장악이 시작되었고. 이후 전시 상황에서도 대규모 파면을 이용해 군부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놨으니 자업자득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7. 여담
키가 188cm다. 다른 장군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키가 확실히 커보인다.
8. 진급 내역
1897.3.13 : 소위(Leutnant)
1907.5.18 : 중위(Oberleutnant)
1911.3.20 : 대위(Hauptmann)
1916.12.20 : 소령(Major)
1920.12.20 : 중령(Oberstleutnant)
1925.4.1 : 대령(Oberst)
1928.4.1 : 소장(Generalmajor)
1929.10.1 : 중장(Generalleutnant)
1933.1.30 : 보병대장(General der Infantrie)
1933.8.31 : 상급대장(Generaloberst)
1936.4.20 : 원수(Generalfeldmarschall)
[1] 원수봉은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유럽의 원수들은 원수봉을 들었다 내리는 것으로 거수경례를 대신했다.[2] 외래어 표기법대로는 '폰블롬베르크'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상 로망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고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3] 그 중에서 무장병사만 해도 무려 50만명에 달했다[4] 뭐 이 말을 어기고 참가한 몇몇 장군들이 있었으나 수가 적었기 때문에 그냥 눈감아 줬다고 한다.[5] "Ich schwöre bei Gott diesen heiligen Eid, daß ich dem Führer des Deutschen Reiches und Volkes Adolf Hitler, dem Oberbefehlshaber der Wehrmacht, unbedingten Gehorsam leisten und als tapferer Soldat bereit sein will, jederzeit für diesen Eid mein Leben einzusetzen." - 나는 하느님께 엄숙히 맹세하오니, 독일 제국과 국민의 지도자이며 독일 국방군의 최고통수권자이신 아돌프 히틀러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바치며, 언제든지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될 군인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 독일 국방군 복무신조[6] 에바(Eva)혹은 마가렛(Magarete)라고도 불리는 모양이나 영문 위키피디아의 표기를 따르도록 한다.[7] 물론 이 사건도 마찬가지로 후에 누명임이 밝혀진다.[8] 참고로 천수를 누리고 끝마무리도 좋았던 블롬베르크와 달리 '''프리치는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폴란드 침공 당시 바르샤바에서 독일군을 몸소 이끌다가 총에 맞아, '''개전 이래 독일군 장성 중 요단강 티켓을 두 번째로 발급받은 인물'''이 되었다(...) 죽은 장소에는 기념비를 세워주긴 했지만, 나중에 나치가 독소전쟁으로 X망하고 당연히 새로 들어선 폴란드 공산정권에서 갈아버렸다.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1년만에 저세상으로 지못미(...)[9] 다만 프리치가 동성애자인 것은 룀의 영향 때문인지 그렇게까지 심하게 부정적이지는 않았다고.[10] 출처 : 이언 커쇼 "히틀러"[11] 독일 국방군의 장군 중에서도 손꼽히는 나치. 무장친위대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12] 물론 루트비히 베크같은 지지를 안하는 별종들이 있지만. 베크조차도 평화주의라기 보다는 왕당파라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지지를 안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