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 계획

 

'''Z-Plan '''
나치 독일크릭스마리네가 추진한 대양 함대 증강 계획.
1. 배경
2. Z계획 실행
3. Z계획 함대 구성
4. 한계
5. 관련 문서


1.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패전국이 된 독일은 협상국에 함대를 인양하던 중 대규모 함대를 스캐퍼플로 만에서 자침시켜 독일 제국 해군(Kaiserliche Marine)은 카이저급 전함, 쾨니히급 전함, 바이에른급 전함을 포함해서 '''전함만 16척을 잃었다.''' 그 외 구축함이나 순양함 등이 바다에 침수되는 바람에 독일 전체 함대 80%가 고철덩어리가 되었다. 그나마 건진 함선도 노후함이었고 향후 20년간 극심한 주력함 부족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 인해 보호해야 할 영해나 영토가 주변국에게 굉장한 취약한 상태였고 가뜩이나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 군사력 제한 등은 독일 해군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1920년 9월 새롭게 조직된 독일 국가해군[1]에선 향후 어떤 방식으로 잃어버린 전력을 재건해야 할지를 두고 해군 수뇌부의 장성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현존함대전략으로 적이 무시하지 못할 연안해군 전력만 갖추고 잠수함이나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전으로 적 해군을 무력화시키기를 주장한 '''연안해군파'''와 다수의 전함과 순양전함을 건조해 엄청난 화력으로 결전을 통해 적 해군을 박살내고 해상봉쇄제해권을 잡을 것을 주장한 보수적인 '''대양해군파'''가 있었다. 전자는 차후 전쟁해군 원수가 되는 카를 되니츠의 주장이었고, 후자는 에리히 레더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독일의 연안해군을 강조한 연안해군파의 빌헬름 미하엘 소장은 해안(연안) 방어에 치중할 것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차후 독일이 주변국 중 가장 호전적인 폴란드[2]와 전쟁이 일어난다면 국가해군은 육군을 지원해줄 수 밖에 없고, 폴란드와의 충돌과정에서 프랑스가 반드시 폴란드를 지원할 것이며, 그래서 주 상대는 프랑스 해군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영국의 참전 가능성에 대해서는 낙관적으로 보았는데, 전통적인 유럽의 균형을 추구하는 영국 입장으로 2대 1로 싸우는 독일을 지원하기보다는 중립을 지킬 것으로 보았다.[3] 실제로 1930년대 중반까지 군함의 구조는 대 프랑스전에 맞춘 함대를 편성했었다.
이에 따라 독일 국가해군은 베르사유 조약을 준수하면서도 노후함들은 1922년에는 신규 전함으로 대체가 가능했기에 1925년에도 구식 순양함의 대체 목적으로, 경순양함 엠덴이 1차 대전 이후 최초의 신규 대형 함정으로서 건조되었다. 또한 이 시점에서 독일 국가해군은 기존 구형 전함을 대체할 함을 중장갑, 고화력의 저속, 소형의 모니터형 전함으로 건조할 것인가, 혹은 고속에 빠른 순양함 형식으로 건조할 것인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무래도, 1만 톤의 제한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함재 톤수 제한은 독일해군의 함선 개발에 지대하게 악영향을 미쳤다. 함선건조에 대한 톤수 제한은 독일해군에 엄청난 족쇄였고, 추후에 완성될 함선들은 시대와 비교해서 전반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함선을 건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35년이 되어서야 영국-독일 해군조약이 체결되어 톤수 제한이 풀렸으나 근 20년간 대형함 건조 경험이 없던 독일 해군은 1차대전 건조기술로 함선을 만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긴 하였으나, 당시 해군 사령관 한스 첸커(Hans Zenker) 제독의 지시 하에 설계 작업은 지속되었으며, 1925년 3개 시안들이 제시되기에 이르렀고, 이미 1923년에 계획된 2개 시안을 합쳐 총 5가지 시안이 등장하게 되었다. 1923년의 "I/10" 시안의 경우, 32노트에 8.1인치 주포를 장착했고, "II/10" 시안은 22노트로 4문의 15인치 주포를 갖춘 중장갑 함선을 염두에 두었다. 여기에, 1925년 들어 제안된 "II/30", "IV/30", "V/30" 시안들은 공통적으로 6문의 12인치 주포를 탑재한 가운데, 장갑 수준에 차등을 두었다. 최종적으로, 독일 해군은 11인치 주포 안을 채택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나온 함이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이다.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및 동급 함들은 빠른 기동성에 무시 못할 화력을 갖취 스펙상으로는 순양전함과 대등하다고 여겨 당시 세계의 해군들에게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이론상으론 그들은 어느 순양함이라도 격침시킬 수 있고, 어떠한 전함이라도 속도로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단지, 손에 꼽을 정도의 영국 순양전함들만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고, 이들 신조함들이 야기한 위협으로 인해 프랑스 해군은 서둘러서 2척의 신규 고속전함 됭케르크급 전함을 내놓게 된다.
1928년 한스 첸커의 후임으로 에리히 레더(Erich Raeder)가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적국 함대에 대항하여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에 빠지기 시작할때 레더는 장거리 수상 통상파괴 (long-range surface raiders) 전략을 채택하였다. 1938년 히틀러의 공격적인 외교에 점점 영국과의 전쟁 가능성이 보이자. 영국의 실질적인 함대에 대항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급 전함H급 전함을 신속히 건조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1948년 전까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레더에게 약속하였고, 레더는 전쟁 전까지 새롭게 탄생할 전쟁해군(KriegsMarine) 전력증강 계획을 새우게 된다. 향후 영국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선호한 수상 통상파괴 전략(surface raider strategy)을 통해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의 계획에 따라 신형 구축함, 장거리 순양함 등 수상함대를 중심으로 U보트를 통한 통상파괴를 통해 영국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전함과 수상함대를 통해 각개격파한다는 독일식 점감요격작전[4] 세우게 된다. 이 계획을 X라 하며 조금씩 함대 수의 개정을 거쳐 Y에 이르러 최종버전 Z 계획에 도달하게 되었다.

2. Z계획 실행


1935년 6월 18일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독일은 톤수 기준 영국 해군의 35%의 주력함, 45%의 잠수함을 장비한 해군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잠수함의 경우, 곧 타 함종과의 교환에 의해서는 사실상 100%까지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결과는 베르사유 조약의 제한에서 숨통이 트이게 된 독일은 물론, 독일 해군을 자기네 해군의 35%로 억제시키는 데 성공한 영국 입장에서도 만족할 만 했다. 단 프랑스의 경우 이 조치에 불만이 컸는데, 프랑스와 전혀 상의를 거치지 않고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같은 '쾌거"는 독일의 자부심을 크게 드높였으며,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해군 'Reichsmarine'라는 이름을 '''전쟁해군 'Kriegsmarine''''으로 개칭하기에 이른다.
1938년, 크릭스마리네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Z계획이 논의되는데, 당시 열강 해군과 겨룰 만한 수상함대의 건설을 선호하는 보수파와 적국의 통상로를 파괴할 대규모 유보트 함대를 선호하는 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전자의 대표 주자라면, 당시 독일 해군의 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이 있고, 후자의 대표주자라면 카를 되니츠 제독이 있다. 궁극적으로, 1939년 1월 29일 결정된 Z 계획의 상세는 보수파들의 견해가 더 우세하게 되었다. 계획은 당시 건조 중이던 2척의 전함(비스마르크급 전함) 및 3척의 중순양함(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을 완성할 것으로 보였다. 추후의 주력함들 또한 건조될 터였는데, 대부분은 1945년까지 완성될 것이었다. 그러나 Z계획도 조기에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도중 건조를 포기한 함선도 발생하였으며, 대표적으로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이 있다. 이외에도 H급 전함, O급 순양전함을 포함해서, 다른 여러 함정들의 설계와 건조 등이 기획되어져 있었으나, 대부분 페이퍼 플랜으로 끝났다.

3. Z계획 함대 구성


최종 Z계획의 함대 구성 예정은
실제로 전쟁내 전력화 된 함정들
  • 전함 4척 (비스마르크급 2척, 샤른호르스트급 2척)
  • 포켓전함 3척 (도이칠란트급)
  • 중순양함 3척 (아트미랄 히퍼급)
  • 경순양함 2척 (라이프치히급)
  • 경순양함 3척 (K급)
  • 경순양함 1척 (엠덴급)
  • 구축함 36척 (Z 시리즈)
  • 잠수함 530척 (유보트)

4. 한계


하지만 이 계획이 제대로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바로 그해에 전쟁이 일어났으니까.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나서 Z 계획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남은 전력도 연합군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웠다. 독일 수상함대는 연합군을 상대하기에는 터무니 없는 전력이였고 그마저도 연이은 전투와 각종 악재로 전쟁 동안 함선 다수를 잃었다. 수상함대가 생각보다 전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곱게 못본 히틀러는 전과가 훨씬 많은 유보트에 눈을 돌리게 됐고 바렌츠 해 해전을 기점으로 수상함대의 건조를 중지시켰다. 이것으로 Z 계획이 전면 중지됨으로써 크릭스마리네는 더 이상 전력을 증강시킬 수 없었다.
그외에도 Z 계획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가 육군과 공군에 필요한 자원들을 너무 많이 요구한다고 결론났다. 그 결과, 이들 함들의 건조작업은 중단되었고, 자재들은 유보트 건조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과정은 없지만 Z 계획대로 함대가 다 건조되었어도 연료의 압박으로 운용이 상당히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저 계획된 함대를 움직이긴 위해선 200만톤의 디젤연료가 필요한데, 1938년 기준으로 독일 전체의 1년간 소비연료가 240만 톤이었다. 물론 독일도 그에 대응해서 석탄 액화나 합성석유기술 개발과 그것의 대량생산으로 버틸 수 있으며 우방국인 루마니아와 소련의 석유로 할려면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은 1차대전과 대공황의 직격타를 먹은 국가였으며 대륙에서의 전쟁에 목숨을 건 국가이므로 지상전력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당시 지상에서 주로 쓰는 기갑장비나 차량, 항공기들은 소수의 디젤을 제외하면 아무래도 연비가 떨어지는 가솔린이므로. 이 점은 좀 애매한게 독일 해군은 연료부족으로 고생한 적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석유 정제를 해서 가솔린이 디젤보다 적게 나오기 때문. 다르게 말하면 거의 가솔린만 쓰는 육군은 항상 기름이 넉넉하지 못한데 반면 디젤이나 중유와 같은 기름을 쓰는 해군은 생각보다 기름이 넉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Z 계획이 제대로 돌아가 저 정도의 함대를 편성하는 데 성공했다면 제1차 세계 대전때처럼 연료걱정을 제법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Z 계획의 실현을 위해 전쟁을 늦추는 선택을 해도 문제인 것이, 독일 이외의 다른 나라들도 해군건설에 신경을 안 쓰고 놀고 있지 않았다. 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지 않음에 따라 연합국들은 주력함을 새로이 건조하기 시작했고 공업화를 이룬 소련도 해군 건설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만약 전쟁을 늦추었다면 연합국은 몬타나급 전함, 라이온급 전함, 알자스급 전함,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과 같이, 계획은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던 괴물들을 실제로 건조해냈을 것이다. 이래서는 Z 계획을 실현한다 해도 연합국을 상대로 해상전력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절대 무리였을 것이다.

5. 관련 문서



[1] Reichsmarine,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이후 신설된 독일 해군. 이후 크릭스마리네에게 흡수당했다.[2] 단치히 회랑 등 동부 영토 재수복이 가장 절실했기 때문에 독일의 전쟁목표 제1순위였다.[3] 하지만 정작 2차대전이 터질 때는 1차대전과 똑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히틀러의 외교적 삽질과 강경노선이 영국마저 등을 돌리게 했기 때문이다.[4] 일본과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일부 함대를 미끼로 줘서 상대전력을 약화시키고 그렇게 어느정도 깎아먹고 결전, 한타를 하지만, 독일은 적 본함대의 접촉은 피하고 유보트를 이용해 적 함대를 분산시켜 적의 소규모 함대를 궤멸시켜나가는 뮤탈짤짤이전술로 지속적인 전력 감소를 통해 궁극적으로 적 해군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같은 작전인데도 전술적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일본과 독일의 해전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독일은 1차대전 당시의 유틀란트 해전을 통해 단 한번의 함대결전 만으로는 적 해군력을 무력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통상파괴전과 현존함대전략을 이어나간 방면에 일본 제국러일전쟁쓰시마 해전에서 단 한번의 함대결전으로 큰 승리를 이끌어 정전협상에서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어 전쟁에 승리하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함대결전에 더 목매는 전술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은 큰 실책을 저질렀는데, 그것은 국가의 위치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쓰시마에서 일본 해군이 승리하고 그로 인해 러일전쟁의 승기가 일본에 기운 것은 맞으나, 그것은 쓰시마에서 상대한 러시아 제국의 함대가 유럽에서부터 엄청난 장거리 항해를 하며 도착했기에 피로도가 쌓여 있었다는 것과 이후 추가적인 함대를 보내기엔 너무 멀어 더이상 함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튼 그래서 일본은 이후에 맞닿게 될 상대에게 이 '''한 번의 결전'''을 걸어 승리한다는 전략을 세운 것인데... 상대는 태평양 건너 코앞에 바로 있는 '''미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