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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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
El Greco
본명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Doménikos Theotokópoulos)
출생
1541년, 베네치아 공화국 크레타 섬 칸디아
사망
1614년 4월 7일
국적
에스파냐
직업
화가
스승
베첼리오 티치아노
1. 개요
2. 생애
3. 대표 작품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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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세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2]
그리스 태생의 에스파냐 화가17세기 르네상스 말기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궁중 화가였고 당시 매너리즘으로 분류된 그의 화풍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화풍은 20세기독일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는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그리스 크레타 섬 칸디아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는 그리스 사람으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인데,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3]로 불렸다. 베네치아에서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지도를 받고, 틴토레토(자코포 로부스티)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엘 그레코의 초기 화풍은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하였고 베네치아풍의 색채법을 사용하였다.
베네치아에서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엘 그레코는 그가 원하였던 에스파냐 펠리페 2세의 궁중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화풍이 펠리페 2세의 마음에 들지 않아 궁중 화가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이 종교화와 초상화였고 회색빛 명암색채,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고 뒤틀린 인체묘사로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매너리즘 미술로 평가절하되었다. 사후 오랫동안 그의 진가가 묻혀져 있었으나 19세기 이후 재평가되어 폴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가 등장하면서 그는 미술사에서 신기원으로 이룬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궁중 화가로서 톨레도에 정착한 후 평생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고 에스파냐 왕궁이 떠난 뒤에도 톨레도에서 계속 살았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3. 대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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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1614년, 캔버스에 유화)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어두운 단색으로 배경을 표현하여 인물을 강조하고 그 인물들을 10등신에 가깝게 길게 그려서 눈에 띄도록 한 독특하고 파격적인 화풍의 소유자이다. 그 당시에는 실제 사람과 사물을 똑같이 표현하는 고전주의 사조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시각장애가 있는 것 아니냐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풍은 16세기 말에 매너리즘[4]이라는 사조로 발전한다. 후일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추상주의에 영향을 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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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8년, 캔버스에 유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작품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파노가 오르가스 백작시신을 매장하고 있고 그의 영혼천사천국으로 끌어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묘사였다. 특히 동시대 인물이 아닌 사람들[6]을 동시에 묘사한 것, 영혼을 실체있는 형상[7]으로 표현한 것 때문에 당시 백작의 유해를 모셨던 산토 토메 성당에서는 이 그림을 묘지 위에 걸기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그 그림을 보기 위해서 산토 토메를 찾는 관광객이 매우 많아진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8]

4. 기타


  • 마드리드프라도 미술관, 에스코리알궁, 톨레도의 미술관과 여러 성당에 그의 작품이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한 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 NPC로 등장한다. 단, 해당 게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도시들이 항구도시인만큼, 게임 속 에스파냐의 본거지가 당시 수도였던 톨레도가 아닌 세비야로 설정이 되어 있어, 엘그레코 또한 세비야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1] 자화상으로 추정. 제목은 노인의 초상화다.[2] 디에고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중 한 명.[3] 사실 엘 그레코라는 표현 자체는 약간 비하적인 표현이 섞여있어서 스페인 사람들이 불렀던 의미는 그리스인보다는 '그리스놈'이라는 표현에 더 가깝다. 이사벨 1세 여왕의 레콩키스타 성공과 통일 스페인 왕국 출범 이후 이방인들에게 까칠했던 스페인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한 단면인 셈. 또한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공표했으니 그의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들어있기도 하다.[4] 16세기 말 이미 소묘 실력이 정점에 달하면서 미술의 발전은 끝난 것이 아니냐는 생각과 함께 조화와 균형 대신 신체의 특정부분을 과장 왜곡하면서 부자연스러움을 추구하게 되었다.[5]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데 집중하는 것 대신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종교적 열망과 희열-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내었단 것을 생각한다면 표현주의, 추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400년 정도 앞서갔던 화풍이었던 셈.[6]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스테파노와 오르가스 백작, 동네 주민들, 심지어 왼쪽에는 엘 그레코 자신의 모습과 아들을 묘사해놓았다. 왼쪽에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아이가 엘 그레코의 아들이고, 군중들 중에 오른손을 들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엘 그레코 본인이다. 참고로 수많은 인물들이 그려져있지만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이 두 명 뿐이다.[7] 흰색 물결, 천의 형상으로 표현.[8]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오로지 눈으로만 볼 수 있다.